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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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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岑文本爲中書令하여 宅卑濕하고 無帷帳之飾이라 有勸其營産業者한대 文本歎曰 吾本漢南一布衣耳
잠문본岑文本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지세가 낮고 습한 곳에 집을 짓고 휘장을 꾸밈이 없었다. 그에게 산업을 경영하기를 권하는 자가 있었는데 잠문본이 탄식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본래 한남漢南 지역의 일개 백성일 뿐이오.
竟無汗馬之勞하고 徒以文墨致位中書令하니 斯亦極矣 荷俸祿之重注+① 荷俸祿之重:荷, 去聲.하니 爲懼已多어늘 更得言産業乎 言者歎息而退注+② 岑文本爲中書今……言者歎息而退:舊本自此下四章, 竝在貪鄙篇, 今附入于此.하다
끝내 전쟁에서의 공로는 없고 다만 문묵文墨으로 중서령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또한 지극한 것이오. 많은 봉록을 받아서注+(메다)는 거성去聲이다. 매우 두려운데 다시 사업을 말할 수 있겠소.” 말한 자가 탄식하면서 물러갔다.注+구본舊本은 이로부터 아래 4장이 모두 〈논탐비論貪鄙에 있었는데, 지금 여기에 붙인다.
【集論】愚按 儉約者 人之所難能也 之先見으로도 而日食萬錢하고 之相業으로도 而不忘聲色하니 儉約豈可易能哉리오 雖然이나 有其道矣
내가 살펴보건대, 검약儉約은 사람이 능하기 어려운 것이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지닌 하증何曾도 날마다 만 전의 음식을 먹었고, 재상으로 뛰어난 공적을 세웠던 사안謝安성색聲色을 잊지 못하였으니, 검약을 어찌 쉽게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 방도가 있다.
이라하니 士之仕於人之國者 唯不忘其貧賤之時하면 則自無侈靡之失矣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지사志士시신屍身이 도랑에 버려질 것을 잊지 않고, 용사勇士는 자기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 라고 하였으니, 남의 나라에 벼슬하는 선비가 오직 빈천한 때를 잊지 않으면 스스로 사치하는 잘못이 없게 된다.
身爲中書令하여 而能不忘其爲漢南布衣時하니 玆所以能不營産業하여 而爲唐名相歟인저
잠문본岑文本은 몸이 중서령中書令이 되어서, 능히 한남漢南의 평민이었던 때를 잊지 않았으니, 이것이 능히 산업을 경영하지 아니하여 나라의 이름 있는 재상이 된 까닭일 것이다.
역주
역주1 何曾 : 晉나라 때의 재상으로 사치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음식의 사치는 임금보다 더하여 하루에 만 전이나 되는 많은 돈을 소비하면서도 수저를 댈 곳이 없다며 한탄하였다. 魏나라에서 벼슬할 적에 曹爽이 專權을 행사하자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가 조상이 伏誅된 뒤 다시 나간 적이 있다. 《晉書 권33 何曾列傳》
역주2 謝安 : 東晉의 명사로 나이 40에 出仕하여 三公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會稽의 東山에 은거하면서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유유자적했던 高臥東山의 고사가 전하는데, 20여 년 동안 한가로이 산수 간에 노닐 당시에 항상 가무에 능한 妓女를 대동하고서 풍류를 즐겼다. 《世說新語 排調》
역주3 孟子曰……勇士不忘喪其元 : 《孟子》 〈滕文公 下〉에 보인다.
역주4 岑文本 : 字가 景仁이며 鄧州 사람이다. 貞觀 초기에 秘書郞에 임명된 뒤 〈籍田頌〉을 상주하여 中書舍人에 발탁되었는데, 관직을 잘 수행한다는 평판이 났고, 뒤에 侍郞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관 17년(643)에 岑文本이 東宮의 관직을 겸하고 싶어 하지 않자, 조칙을 내려 5일에 한 번 東宮에 참석하라고 했다. 뒤에 中書令으로 자리를 옮긴 뒤 세상을 떠났다.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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