又爲西海道行軍大總管
하여 征吐谷渾
注+胡昆切. 吐谷渾, 西域國名, 本遼東鮮卑, 徒河渉歸長子之名, 其孫葉延遂以其名爲氏.하여 大破其國
하니 改封衛國公
이라
及靖
亡
하여 有詔許墳塋制度
를 依漢衛霍故事
注+衛青‧霍去病, 皆漢武時爲大將軍, 討匈奴有大功. 去病尙公主, 及亡, 詔與主合塟, 起冢象.하여 築
象突厥內燕然山
注+燕, 平聲.과 吐谷渾內磧石二山
하여 以旌殊績
注+按, 十四年, 靖妻卒, 有墳塋之詔. 及靖身亡, 四字疑誤. 十八年, 上幸其第問疾. 上將伐遼東, 靖入閣賜坐, 謂曰 “公南平吳會, 北淸沙漠, 西定慕容, 惟東有高麗未服. 公意如何.” 對曰 “臣往者憑藉天威, 薄展微效, 今殘年朽骨, 唯擬此行. 陛下若不棄, 老臣病其瘳矣.” 上愍其羸老, 不許. 二十三年, 薨, 贈司徒, 謚曰景武.이라
當隋氏
之際
하고 承唐祖騰龍之時
하여 而能依乗風雲
하여 勒功帝籍者
는 豈有他哉
아
觀其用兵컨대 善於料敵하고 速於應機라 故所嚮有功이라
南平吳
하고 北破突厥
하고 西走吐谷渾
하여 功大寵盛
이로대 乃能
하니 可謂能自全矣
라
愚按 太宗은 天資英武하고 善戰無敵하여 一時群臣이 皆不足以仰望淸光이나 帝之所推服而師問者는 獨李靖一人而已라
其論
이라하니 大意謂唐之戰勝
이 特暗合兵法耳
니 亦猶韓信謂漢高天授非人力
이 是也
라
異時에 太宗이 伐遼無功而歸하여 謂靖曰 吾以天下之力으로 屈於小夷는 何也오하니
얼마 뒤에 이정李靖을 광록대부光祿大夫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하고 실봉實封 500호를 내려주었다.
또
서해도행군대총관西海道行軍大總管으로 삼아
토욕혼吐谷渾을 정벌하여
注+〈혼渾은〉 호胡와 곤昆의 반절이다. 토욕혼吐谷渾은 서역의 나라 이름인데, 본래는 요동의 선비족鮮卑族이었다. 도하섭귀徒河渉歸의 큰 아들 이름인데, 그 손자 섭연葉延이 드디어 그 이름을 족종의 명칭으로 삼았다. 그 나라를 크게 격파하자 봉호를 고쳐
위국공衛國公에 책봉하였다.
이정의 아내가 죽자 조서를 내려 그 무덤의 제도를
한漢나라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의 고사에 의거해
注+위청衛青과 곽거병霍去病은 모두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대장군大將軍으로, 흉노匈奴를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곽거병이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죽은 뒤에 조서를 내려 합장하게 하여, 노산盧山의 모양처럼 무덤을 만들었다.궐闕을 쌓되 돌궐 내의
연연산燕然山注+연燕(하북성 북부 지역)은 평성平聲이다.과토욕혼吐谷渾 내의
적석산磧石山 두 산을 본떠 만들도록 허락하여 이정의 큰 공적을 표창하였다.
注+사전史傳을 살펴보면, 정관貞觀 14년(640)에 이정李靖의 처가 죽자 우선 무덤을 만들라는 조서를 내렸다. ‘급정신망及靖身亡(이정이 죽자)’ 4자는 오류인 듯하다. 정관 18년(644)에 태종太宗이 그의 집에 행차하여 병문안을 하였다.
태종이 요동을 정벌하려 할 때 이정이 대궐에 들어오니 자리를 내주며 이르기를 “공은 남쪽으로 오회吳會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사막을 정리하였으며, 서쪽으로 모용慕容을 평정했는데, 오직 동쪽 고구려高句麗만 아직까지 복종시키지 못했으니, 공의 생각은 어떻소?”라고 하였다.
이정이 대답하기를 “신은 이전에 성상聖上의 위엄에 의지하여 작은 공을 세웠습니다. 지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몸으로 오직 이번 정벌을 하려고 합니다. 폐하께서 만약 버리지 않으신다면 노신의 병이 아마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가 병들고 연로한 것을 가엾게 여겨 허락하지 않았다. 정관 23년(649)에 세상을 떠나자 사도司徒로 추증하였고, 시호를 경무景武라 하였다.
“수隋나라가 제위帝位를 잃을 때를 만나고 당唐나라가 일어설 시기를 당하여 풍운風雲의 기회를 타고 황제의 공신록에 공적이 기록된 것은 어찌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다만 충성과 지혜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에 공명이 이처럼 드러난 것이다.
이정李靖의 용병술을 살펴보면 적을 간파하기를 잘하고 임기응변에 신속하였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웠다.
남쪽으로 오吳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돌궐突厥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토욕혼吐谷渾에 달려가 공로가 크고 총애가 융성했는데도,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를 지켜 왕래하는 것을 사절하였으니, 스스로를 잘 보전하였다고 할 만하다.
처음에는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면하였고, 나중에는 자신의 몸을 잘 지켜냈으니, 한신韓信보다도 더 낫다고 하겠다.”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은 천부적 자질이 뛰어나고 용맹하며 전쟁을 잘하여 대적할 자가 없어서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맑은 광채를 우러러볼 수가 없었으나, 태종이 존경하여 따르고 군사에 관해 물었던 사람은 유독 이정李靖 한 사람뿐이었다.
손무孫武 이래로 법도에 맞는 군대를 거느린 사람은 제갈무후諸葛武侯(諸葛亮)와 이정뿐이다.
지금 세상에 전하는 무경武經(兵法書)이 비록 꼭 이정에 의해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요컨대 반드시 근사한 점이 있다.
곽읍霍邑의 전투를 논하면서 “이건성李建成이 거의 패배할 뻔한 것은 기병奇兵 때문이고, 태종太宗이 측면을 공격한 것은 정병正兵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대략적인 뜻은 당唐나라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다만 은연중에 병법에 부합한 점이 있었다는 것이니, 한신韓信이 한漢 고조高祖를 두고 “하늘이 주신 것이지,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뒤에 태종이 요동을 정벌했다가 성과 없이 돌아와서 이정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제패한 힘으로 작은 오랑캐에게 패배한 것은 무엇 때문이오?”라고 하니,
이정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고 딴 곳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일은 이도종李道宗이 알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주필산駐蹕山 전투에서 병력을 나누어 평양平壤을 공격하자고 했던 일을 가리킨 것이다.
아, 그의 경지에 대해 논한다면 이정은 병법을 아는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영위英衛’라 병칭하지만 요컨대 이적李勣은 이정과 같은 수준의 인물이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