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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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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初 嶺南諸州注+① 嶺南諸州:今廣海之地.奏言호대 高州注+② 高州:今仍舊隸海北.酋帥馮盎談殿注+③ 酋帥馮盎談殿:盎, 字明達, 高州人. 隋亡, 據嶺表. 唐興, 以其地降, 高祖封爲越國公. 談殿, 人姓名, 亦據嶺表. 阻兵反叛이라하니 詔將軍藺謩注+④ 藺謩(모):藺, 音吝, 姓也, 名謩.하여 發江嶺數十州兵討之注+⑤ 發江嶺數十州兵討之:發江南道‧嶺南道諸州兵也.하니
秘書監魏徵諫曰 中國初定 瘡痍未復이라 嶺南瘴癘하고 山川阻深하여 兵遠難繼 疾疫或起하니 若不如意 悔不可追니이다
且馮盎若反인댄 卽須及中國未寧하여 交結遠人하여 分兵斷險하고 破掠州縣하여 署置官司리니 何因告來數年 兵不出境
此則反形未成이라 無容動衆이라
陛下旣未遣使人注+⑥ 陛下旣未遣使人:使, 去聲, 後同.하여 就彼觀察하니 卽來朝謁이라도 恐不見明이라
今若遣使하여 分明曉諭하면 必不勞師旅하여 自致闕庭하리이다 太宗從之하니 嶺表悉定이어늘
侍臣奏言호대 馮盎談殿往年恒相征伐이러니 陛下發一單使 嶺外恬然이라한대
太宗曰 初 嶺南諸州盛言盎反이어늘 朕必欲討之러니 魏徵頻諫하여 以爲但懷之以德하면 必不討自來라하여늘
旣從其計하여 遂得嶺表無事하니 不勞而定 勝於十萬之師라하고 乃賜徵絹五百匹注+⑦ 貞觀初……乃賜徵絹五百匹:按通鑑 “貞觀元年九月, 馮盎談殿等迭相攻擊, 久未入朝, 諸奏盎反者以十數, 上命將討之, 魏徵諫曰 ‘云云’, 上乃罷兵. 十月, 遣員外散騎侍郞李公掩持節慰諭之, 盎遣其子智戴隨使者入朝. 上曰 ‘魏徵令我發一介之使, 而嶺表遂安, 勝十萬之師, 不可不賞.’ 賜絹五百段.”하다
【集論】唐氏仲友曰 甚哉 讒人之可畏也 盎不爲於武德之初하니 而肯反於貞觀耶
譛言無端하여 幾害忠良하니 非魏徵이면 何以明之 不足勞偏師剪除어늘 盎之區區 何足當唐之興運이리오
然直壯曲老하니 藺謩可擊之狀 未可必也어늘 太宗罷之하니 明哉로다 以尉佗之驕倨 文帝猶以德懷어늘 而況盎乎
全知命之臣하고 止無名之師하여 江淮以南 所全活者 不勝數矣 仁人之言 其利博哉인저 賢於十萬衆 特以兵勢較之耳
兵隙一開 하니 干戈轉餉 瘴癘之鬼 可以十萬筭哉
愚按 昔欲反이라하여늘 下廷尉捕治之한대
薄太后曰 絳侯 始誅諸呂 綰皇帝璽하여 將兵於北軍이어늘 不以此時反하고 今居一小縣하여 顧欲反耶아하니
帝乃赦之하고 復爵邑이라
此與魏徵論馮盎談殿之事 頗同이라 蓋周勃異於馮盎談殿之事勢 而薄太后之言 誠類於魏徵之諫也하니 其察人之情 亦明矣哉로다


정관貞觀 초기에 영남嶺南의 여러 에서注+지금의 광해廣海 지역이다.고주高州注+고주高州는〉 지금도 여전히 해북海北에 속한다. 추수酋帥 풍앙馮盎담전談殿注+풍앙馮盎명달明達로, 고주高州 사람이다. 나라가 멸망하자 영남嶺南 지역을 점거하였다. 나라가 일어서자 그 지역을 가지고 투항하였는데, 고조高祖월국공越國公에 봉하였다. 담전談殿은 사람의 성명姓名으로, 역시 영남嶺南 지역을 점거하였다. 병력을 믿고 반란하였습니다.” 라고 아뢰자, 장군 인모藺謩에게 조서를 내려注+이니, 이고, 이름은 이다. 강남도江南道영남도嶺南道에 있는 수십 의 병력을 출동시켜 토벌하도록 하였다.注+강남도江南道영남도嶺南道에 있는 여러 의 병사를 출동시킨 것이다.
비서감秘書監 위징魏徵이 간언하였다. “중원이 처음 평정되어 전쟁으로 인한 참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영남 지역은 풍토병이 심하고 산천이 험하고 깊어 병력을 멀리서 계속 지원하기가 어렵고 역병이 일어나기도 하니,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 풍앙이 만일 모반했다면 반드시 중원이 평정되지 않았을 때에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과 결탁하여 병력을 나누어 험준한 요새로 통하는 길을 끊고, 주현州縣을 파괴 약탈하여 자신들의 관사官司를 두었을 것이니, 무엇 때문에 모반의 고변이 있던 몇 년 동안 병력이 국경을 넘어오지 않았겠습니까.
이는 모반의 형세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니, 병력을 동원할 것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그곳으로 사신을 파견하여注+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정찰한 적이 없으니, 만약 그들이 조회 와서 알현을 한다고 해도 진상을 분명히 알 수는 없을 듯합니다.
지금 만약 사신을 파견하여 분명히 깨우쳐준다면 필시 병력을 수고롭게 쓰지 않아도 스스로 우리 조정으로 올 것입니다.” 태종이 그 말을 따르자 영남 지역이 다 안정되었다.
근신近臣들이 아뢰었다. “풍앙과 담전은 과거에 항상 서로 정벌을 일삼았는데, 폐하께서 한 명의 사신을 보내자 영남 지역이 안정되었습니다.”
태종이 말하기를 “당초에 영남의 여러 에서 풍앙이 모반했다고 보고를 하여 짐이 반드시 그를 토벌하려고 했는데, 위징이 자주 간언하여 다만 덕으로 그들을 감싸주면 필시 토벌하지 않아도 스스로 귀의할 것이라고 하였소.
그래서 그 계책을 따르고 나서 마침내 영남 지역이 무사하게 되었으니, 병력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평정한 것은 10만의 군사보다 낫소.” 하고는 위징에게 비단 500필을 내렸다.注+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정관 원년(627) 9월에 풍앙馮盎담전談殿 등이 번갈아 서로 공격하여 오랫동안 당나라에 입조入朝를 하지 않았고, 풍앙이 반역을 꾀한 것이 십 수차례나 여러 번 아뢰자, 태종이 장수에게 명을 내려 토벌하게 하였는데, 위징魏徵이 간언을 하여 ‘……’라고 하자 태종이 출동하려던 병력을 거두었다. 10월에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공엄李公掩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회유하게 하였는데, 풍앙이 자신의 아들인 지대智戴를 보내어 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위징이 나에게 한 명의 사신을 보내도록 하여 영남 지역이 드디어 안정되었으니, 10만의 군사보다 나은 공로에 상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비단 500단을 내렸다.”라고 하였다.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심하구나, 남을 참소하는 것이 두려워할 만함이여. 풍앙馮盎무덕武德 연간 초기에 남월왕南越王처럼 하지 않았는데, 어찌 정관貞觀 연간에 배반을 하겠는가.
단서가 없는 참언이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에게 거의 해를 끼칠 뻔했으니, 위징魏徵이 아니면 어떻게 밝힐 수 있겠는가. 소선蕭銑보공 석輔公 祏나라의 편사偏師(일부 병력)를 수고롭게 하여 제거할 정도가 안 되거늘, 변변찮은 풍앙이 어찌 흥성하는 당나라의 국운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정당하면 사기士氣가 일어나고 부정당하면 사기가 쇠퇴하는 법이다. 인모藺謩가 공격할 만한 정황을 아직 기필하지 못하였는데, 태종이 병력 출동을 멈추었으니, 현명하도다. 교만하게 굴던 위타尉佗(조타趙佗)를 문제文帝가 덕으로 끌어 안아주었는데, 하물며 풍앙은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을 아는 신하를 보전해주고, 명분이 없는 병력의 출동을 멈추어서 강회江淮 이남 지역에 삶을 보전해준 사람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니, 어진 사람의 말이 그 이익이 크구나. 10만의 병사보다 낫다는 것은 다만 군대의 세력으로 비교한 것일 뿐이다.
전쟁에 한 번 틈이 생기면, 한 자의 길이도 짧을 수 있고 한 치의 길이도 길 수 있는 것처럼 헤아릴 수 없으니, 무기와 군량 및 역병으로 죽는 병사들을 10만의 수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내가 살펴보건대 옛날 한 문제漢 文帝가 재위하던 때에 어떤 사람이 상소하여 주발周勃이 모반을 꾀하려 한다고 하자, 정위廷尉(형옥刑獄 담당 관리)에게 맡겨 체포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박태후薄太后(문제文帝의 모친)가 말하기를 “강후絳侯(주발周勃)가 처음 여러 여씨呂氏들을 죽였을 때, 황제의 옥새를 꿰어 차고 북군北軍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때 모반을 하지 않고 지금 조그마한 을 가지고서 모반을 꾀하려고 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문제文帝가 사면하고 작위爵位봉지封地를 회복시켜 주었다.
이 일은 위징魏徵풍앙馮盎담전談殿에 대해 논한 일과 자못 동일하다. 주발의 일이 풍앙과 담전의 일과는 형세가 다르기는 하지만, 박태후薄太后의 말은 진실로 위징의 간언과 유사하니, 사람의 실정을 살핀 것이 또한 명철하다.


역주
역주1 南越王 : 前漢 文帝 때 趙佗를 말한다. 조타가 南越을 차지하고 帝號를 써서 武帝라고 칭하고 천자의 儀仗인 黃屋과 左纛을 사용하고 천자의 행차대로 出警入蹕하였다. 이에 陸賈가 사신으로 가서 설득하자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臣이라고 칭했다. 그가 秦나라 南海郡尉로 있었기 때문에 尉佗라고도 칭한다. 《史記 권97 陸賈列傳》
역주2 蕭銑輔公祏 : 모두 武德 연간(618~626)에 唐나라와 대항하다가 패망해 죽은 인물이다.
역주3 尺有所短 寸有所長 : 《楚辭》 〈卜居〉에 보이는 말로, 각각 장점과 단점이 있음을 비유한다.
역주4 漢文之時……復爵邑 : 《史記》 권57 〈絳侯周勃世家〉에 보인다.
역주5 周勃 : 漢 高祖가 천하를 평정하는 일을 도와 絳侯에 봉해졌다. 呂后(劉邦의 황후)가 죽은 뒤 呂氏들이 난을 일으키자 陳平과 함께 이를 평정했으며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代王인 柳恒을 맞이하여 황제(文帝)로 옹립하였다. 《史記 권57 絳侯周勃世家》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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