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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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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二年 詔停周公爲先聖하고 始立孔子廟堂於國學하여 稽式舊典하여 以仲尼爲先聖하고 顔子爲先師하여 兩邊之容 始備于玆矣
是歲 大收天下儒士하여 賜帛給傳注+① 賜帛給傳:去聲, 驛傳也.하여 令詣京師注+② 令詣京師:令, 平聲, 後同.하여 擢以하여 布在廊廟者 甚衆이요 學生通一大經已上 咸得署吏注+③ 咸得署吏:署, 吏職入仕也.
國學 增築學舍四百餘間하여 國子太學四門廣文 亦增置生員하고 其書算에도 各置博士學生하여 以備衆藝注+④ 國子太學四門廣文……以備衆藝:唐制, 國子‧太學‧廣文‧四門‧律‧書‧算, 凡七學, 皆置博士. 國子, 掌敎三品以上及子孫‧從二品以上曾孫爲生者. 太學, 掌敎五品以上及郡縣公子孫從三品曾孫爲生者. 廣文館, 掌領國子學生業進士者. 四門館, 掌敎七品以上侯伯子男爲生及庶人子爲俊士生者. 律學書學算學, 掌敎八品以下及庶人子爲者. 又有五經博士, 掌以其經敎國子.
太宗 又數幸國學注+⑤ 又數幸國學:數, 音朔.하여 令祭酒司業注+⑥ 令祭(좨)酒司業:凡會同饗醼, 必尊長先, 以酒祭先, 故曰祭酒, 長者之稱也. 唐制, 國子監祭酒, 掌邦國儒學訓導之政, 兼領諸學. 凡釋奠, 則爲初獻. 司業, 其貳職也.博士講論하고이어든 各賜以束帛하니 四方儒士負書而至者 蓋以千數
俄而吐蕃及高昌高麗新羅等諸夷酋長注+⑦ 諸夷酋長:音掌. 亦遣子弟하여 請入于學이라 於是 國學之內 升講筵者注+⑧ 鼓篋升講筵者:篋, 方竹器, 所以盛書籍者. 幾至萬人注+⑨ 幾至萬人:幾, 平聲.하니 儒學之興 古昔未有也注+⑩ 貞觀二年……古昔未有也:按儒林傳 “貞觀十四年, 召天下惇師老德, 以爲學官, 數臨幸觀. 廣學舍千二百區, 益生員至三千二百. 自屯營, 皆給博士受經. 能通經者, 聴入, 四方秀艾, 坌集京師. 於是新羅‧高昌‧百濟‧吐蕃‧高麗等群酋長, 竝遣子弟入學. 鼓笥踵堂者, 凡八千餘人, 雖三代之盛, 所未聞也.”러라
【集論】范氏祖禹曰 하여 士修之於家而後升於鄕하고 升於鄕而後升於國하고 升於國而後達於天子하나니 其敎之有素하고 其養之有漸이라
故成人有德하고 小子有造하니 賢才不可勝用 由此道也
後世鄕里之學廢하여 人君能敎者 不過聚天下之士하여 而烏合於京師 學者衆多 眩耀於一時而已 非有敎養之實也
唐之儒學 惟貞觀開元爲盛이요 其人才之所成就者 亦可睹矣
孟子曰 라하니 無學이면 則人倫不明이라 故有國者以爲先하나니 如不復三代之制 未知其可也
愚按昌黎韓子原道曰 堯以是傳之舜하고 舜以是傳之禹하고 禹以是傳之湯하고 湯以是傳之文武周公孔子라하니
然周公而上 得位與時者也 孔子不得位與時者也 得位與時者 其道見之於事하고 不得位與時者 其道託之於言이로되
夫堯舜而至周公 去夫子之時邈矣 正道日以榛蕪하니 非得夫子 則堯舜之道 何由而明於後世哉리오
之訓 如日行天 夫子之功也
先儒周子謂 하여 報德報功之無盡焉이라하니 夫周公 固爲先聖이나 而立孔子廟堂於國學하여 以夫子爲先聖 實始於太宗이라
遂爲萬代之定制하여 廟祀徧天下하여 人知尊夫子之道하고 卽知尊堯舜禹湯文武周公之道矣
太宗 聰明英睿之君이라 眞特見也 王封起於開元 亦太宗有以致之


정관貞觀 2년(628)에 조칙에 의해 주공周公선성先聖으로 삼는 것을 멈추고, 국자학國子學공자孔子의 사당을 처음 건립하여 옛 의전을 참고해 규정을 만들어 중니仲尼(공자의 )를 선성先聖으로 삼고 안자顔子선사先師로 삼아 사당의 양쪽에 조두俎豆간척干戚을 진설하는 형식이 비로소 구비되었다.
이해에 천하天下유사儒士들을 널리 모아 비단을 하사하고 역말의 편의를 제공하여注+은〉 거성去聲이니 역전驛傳이다. 서울로 오게 해서注+(하여금)은 평성平聲이다. 뒤에도 같다. 서열에 상관없이 발탁하여 낭묘廊廟에 나열된 이들이 매우 많았고, 학생 가운에 대경大經을 하나 이상 통달한 사람은 모두 관리에 임용되었다.注+이직吏職으로 입사入仕하는 것이다.
국자학國子學학사學舍 400여 칸을 증축하여,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관四門館광문관廣文館에도 생도를 증원하고, 서학書學산학算學에도 각자 박사博士학생學生을 배치하여 뭇 기예들을 완비했다.注+나라 제도에 의하면,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광문관廣文館사문관四門館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 등 모두 7개의 학교가 설치되었는데 모두 박사를 배치했다. 국자학은 3품 이상과 국공國公의 아들‧손자, 2 이상의 증손曾孫으로 학생이 된 자를 교육하는 것을 담당한다. 태학太學은 5품 이상과 군공郡公현공縣公의 아들‧손자, 종3품의 증손으로 학생이 된 자를 교육하는 것을 담당한다. 광문관廣文館은 국자학의 학생으로서 진사進士 수업을 받는 자를 통솔하는 것을 담당한다. 사문관四門館은 7품 이상의 으로서 학생이 된 자와 서인庶人의 아들로 준사俊士의 학생을 교육하는 것을 담당한다.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은 8품 이하와 서인庶人의 아들로 준사의 학생을 교육하는 것을 담당한다. 또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있는데 그가 전공한 경전經傳으로 국자학國子學의 학생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한다.
태종太宗이 또 자주 국자학國子學에 행차하여注+(자주, 곧잘)은 이다. 좨주祭酒사업司業박사博士로 하여금注+무릇 회동과 연회가 있을 땐 반드시 장자와 선배를 존중하는데, 술로 선인에게 제를 올리므로 좨주祭酒라 하는 것인바, 장자에 대한 호칭이다. 나라 제도에 의하면, 국자감國子監 좨주는 국가의 유학儒學에 대한 훈도訓導 정책을 관장하고 여러 학교를 겸하여 통솔한다. 석전釋奠 때는 초헌初獻이 된다. 사업司業은 그의 차관이다. 학문을 강론하게 하고 마치고 나면 각자에게 비단 1을 하사하니 책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사방의 유사儒士들이 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얼마 후 토번吐蕃고창高昌고려高麗(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 등 여러 오랑캐의 추장酋長들이注+(윗사람)은〉 이다. 또한 자제들을 파견해서 국자학國子學에 입학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국자학國子學 안에서 북을 쳐 울리고 상자에서 책을 꺼내어 강연석에 참여하는 자가注+은 대나무로 만든 모난 도구로, 책 등을 담는 용도로 쓰인다. 거의 만여 명에 이르렀으니注+(거의)는 평성平聲이다. 유학의 흥성이 예전에 없던 것이었다.注+신당서新唐書》 권198 〈유림전儒林傳〉을 살펴보면, “정관貞觀 14년(640)에 천하에 돈독하고 노숙한 스승과 원로들을 초빙하여 학관學官으로 삼고, 자주 행차하여 석채釋菜를 살펴보았다. 1,200곳의 학사를 증축하여 생도 수를 3,200명까지 늘렸다. 둔영屯營비기飛騎부터 모두 박사에게 경전 수업을 받게 했다. 경전에 능통한 자는 공거貢擧 고시考試에 참여하게 하니 사방의 준수한 자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신라新羅고창高昌백제百濟토번吐蕃고구려高句麗 등의 뭇 추장酋長들이 모두 자제들을 파견하여 입학시켰다. 북을 쳐 울리고 상자에서 책을 꺼내어 학당學堂에 연이어 온 자가 8,000여 명에 이르렀으니 비록 삼대三代의 성대한 때라도 듣지 못한 일이다.”라고 했다.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고대의 교육기관은 이 있고 이 있고 가 있고 이 있어서, 선비가 에서 닦고 나서 향학鄕學에 오르고 향학에 오르고 나서 국학國學에 오르고 국학에 오르고 나서 천자天子에게 도달하게 되니, 교육에 기본이 되는 학교들이 있고 함양에 교육의 단계가 있다.
그러므로 성인成人은 덕을 갖추고 어린 사람은 조예가 있었으니, 훌륭하고 재능 있는 자가 이루 쓸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은 이러한 제도 때문이다.
후세엔 향리鄕里에서의 배움이 폐기되어, 임금이 교육을 시킬 수 있는 것이 천하의 인사들을 서울에 옹기종기 모이게 하는 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한 시대에 빛날 뿐, 교육과 함양의 실체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유학儒學정관貞觀개원開元의 시대만 성대하였고 인재의 성취를 또한 볼만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학교)은 인륜人倫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으니, 배움이 없으면 인륜이 밝지 못하다. 그러므로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이를 우선으로 삼아야 하니, 만일 삼대三代의 제도를 복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내가 살펴보건대, 한창려韓昌黎(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제요帝堯는 이 제순帝舜에게 전수하고 제순은 이 도를 우왕禹王에게 전수하고 우왕은 이 도를 탕왕湯王에게 전수하고 탕왕은 이 도를 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孔子에게 전수했다.” 라고 했다.
그런데 주공 이전의 분들은 지위와 시기를 얻은 분들이고 공자는 지위와 시기를 얻지 못한 분이다. 지위와 시기를 얻은 분들은 그 도를 정사에 실현하였지만 지위와 시기를 얻지 못한 분은 그 도를 말에 의탁할 뿐이다.
그런데도 재아宰我가 이르기를, “나의 관점에서 부자夫子(공자孔子)를 볼 때 요순堯舜보다 훨씬 훌륭하시다.” 라고 했다.
요순에서 주공에 이르는 시기까지 부자가 살던 시대와는 거리는 멀기 때문에 정도正道가 나날이 황폐해졌으니 부자가 아니었다면 요순의 도가 어떻게 후세에 밝아질 수 있겠는가.
육경六經의 가르침이 하늘을 운행하는 태양처럼 훤히 빛나는 것은 부자의 공로이다.
선유先儒 주자周子(주돈이周敦頤)가 ‘의당 후세에 무궁토록 부자를 제왕帝王으로 제사를 올려 영원히 그 공덕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주공이 실로 선성先聖이긴 하지만 국자학國子學에 공자 사당을 세워 부자를 선성先聖으로 삼은 것은 실로 태종太宗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결국 만대萬代의 정해진 법도가 되어 사당의 제사를 천하에 두루 지내서 저마다 부자의 도를 존중해야 할 줄 알게 되고 동시에 제요‧제순‧우왕‧탕왕‧문왕‧무왕‧주공의 도를 높일 줄을 알게 됐다.
태종은 총명하고 영매하고 지혜로운 임금으로 참으로 특별한 견해를 가졌으니, 개원開元 때에 공자를 으로 책봉한 것도 태종이 그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다.


역주
역주1 俎豆干戚 : 俎와 豆는 祭祀에 사용하는 祭器이고, 干과 戚은 祭祀의 樂舞에 사용하는 도구이다.
역주2 不次 : 일정한 절차에 의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특별한 진급을 가리킨다.
역주3 鼓篋 : 북을 쳐서 학생들을 소집하고 篋(책 상자)에서 책을 꺼내 수학한다는 말로, 입학 의식의 하나이다. 《禮記》 〈學記〉에 “입학하여 북을 쳐 울리고 상자에서 책을 꺼내는 것은 학업을 공손히 받기 위함이다.[入學鼓篋 孫其業也]”라고 했다.
역주4 國公 : 爵位 명칭으로 9등급(國王‧郡王‧國公‧郡公‧縣公‧侯‧伯‧子‧男)에서 세 번째이다.
역주5 俊士生 : 《新唐書》 권44 〈選擧志〉에 學館에서 나온 자를 生徒라 하고 州縣에서 나온 자를 鄕貢이라 하는데, 그 과목 중에 俊士가 있다.
역주6 釋菜 : 학교에 들어올 때 先聖과 先師에 올리는 제례 의식으로 釋采라고도 한다.
역주7 飛騎 : 貞觀 11년(637)에 北衙禁軍에 설치된 황제의 친위 기병대로 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다. 長安城의 북문인 玄武門 위로 펼쳐진 禁苑에 주둔하였다.
역주8 貢限 : 貢擧 考試로, 貢擧는 학문과 품행이 뛰어난 지방의 선비들을 천거하는 법이다.
역주9 古之敎者……國有學 : 《禮記》 〈學記〉에 보인다. 遂는 구역 이름으로 郊 밖에 있는 곳을 가리킨다.
역주10 學所以明人倫也 : 《孟子》 〈滕文公 上〉에 보인다.
역주11 以予觀於夫子 賢於堯舜遠矣 : 《孟子》 〈公孫丑 上〉에 보인다.
역주12 六經 : 儒家의 《詩經》‧《書經》‧《易經》‧《春秋》‧《禮記》‧《樂經》을 가리킨다.
역주13 宜乎後世無窮……報德報功之無盡焉 : 《性理大全》 권3 〈孔子 上 제38〉에 보인다.
역주14 王祀夫子 : 《性理群書句解》에 이 구절에 대해 “王으로 封爵하고 제사로써 높이다.[爵之以王 尊之以祀]”라 하였다.
역주15 文宣王 : 孔子는 唐 玄宗 開元 27년(739)에 文宣王이 된 이후, 宋 眞宗 大中祥符 원년(1008)에 至聖文宣王, 元 成宗 大德 10년(1306)에 大成至聖文宣王으로 추봉되었다.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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