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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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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元年 拜幷州都督注+幷州, 卽太原. 唐制, 武德七年, 改總管曰都督, 立府置佐.하여 令行禁止하니 號爲稱職注+稱, 去聲.하고
정관貞觀 원년(627)에 병주도독幷州都督에 임명되어注+병주幷州는 바로 태원太原이다. 나라 제도에 의하면 무덕武德 7년(624)에 총관을 도독으로 개칭하였으며, 를 세우고 부관副官을 두었다. 명령하면 시행되고 금지하면 멈추니, 직책에 걸맞다고 일컬어졌다.注+(걸맞다)은 거성去聲이다.
突厥甚加畏憚이라
돌궐突厥이 매우 두려워하고 꺼렸다.
太宗謂侍臣曰
태종太宗이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隋煬帝 不解精選賢良注+解, 音懈.하여 鎭撫邊境하고 惟遠築長城하고 廣屯將士注+將, 去聲.하여 以備突厥注+隋大業三年, 詔發丁男百餘萬築長城, 西距楡林, 東至紫河, 旬而畢工.하니 而情識之惑 一至於此
나라 양제煬帝는 어진 인재를 가려 뽑아 변방을 안정시킬 방안을 강구하지 못하고注+(게으르다)는 음이 이다. 오직 멀리까지 장성을 쌓고 많은 병사들을 널리 주둔시켜注+(장수)은 거성去聲이다. 돌궐을 방비하려 했으니,注+나라 대업大業 3년(607)에 조서를 내려 장정 백여만 명을 징발해 장성을 축조하게 했는데 서쪽으로 유림楡林에서부터 동쪽으로 자하紫河까지였으며, 10일 만에 공사를 마쳤다. 그 감각과 식견의 혼미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단 말이오.
朕今委任李勣於幷州한대 遂得突厥畏威遠遁하여 塞垣安靜하니 豈不勝數千里長城耶아하다
짐이 지금 병주幷州이적李勣에게 위임하자, 결국 그 위세를 두려워한 돌궐이 멀리 달아나 변방이 안정되었으니, 어찌 수천 리 장성보다 나은 것이 아니겠소.”
其後 幷州改置大都督府하고 又以勣爲長史注+長, 音掌.하고 累封英國公이라
그 뒤 병주에 새로 대도독부大都督府를 설치하고 이적을 장사長史로 임명하였으며,注+(우두머리)은 음이 이다. 여러 번 승진시켜 영국공英國公에 책봉하였다.
在幷州凡十六年이요 召拜兵部尙書하여 兼知政事
병주에 재임한 기간이 총 16년이었으며, 그 뒤 조정에 불러들여 병부상서兵部尙書 겸지정사兼知政事에 임명하였다.
時遇暴疾하여 驗方云 鬚灰可以療之라하니
이적李勣이 이때 갑자기 병이 났는데, 의원의 처방전에 수염을 태운 재가 있어야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太宗 自剪鬚爲其和藥注+爲‧和, 竝去聲, 後同.이어늘 頓首見血하고 泣以陳謝한대
태종太宗이 직접 수염을 잘라 그를 위해 약에 섞으니,注+(위하다)와 (섞다)는 모두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이적이 피가 나도록 머리를 바닥에 부딪고 울면서 사례를 하였다.
太宗曰
태종이 말하였다.
吾爲社稷計耳 不煩深謝라하다
“나는 사직을 위한 계책을 따른 것일 뿐이니 번거롭게 깊이 사례할 것 없소.”
十七年 高宗居春宮할새 轉太子詹事注+唐制, 東宮官, 掌統三寺‧十率府之政.하고 加特進하여 仍知政事
정관貞觀 17년(643)에 고종高宗춘궁春宮(태자)에 있을 때 태자첨사太子詹事로 전임되었고,注+나라 제도에 의하면 〈태자첨사太子詹事는〉東宮의 관원이니, 삼사三寺십솔부十率府의 정무를 총괄하는 일을 관장한다.특진特進이 더해져서 그대로 정사를 담당하였다.
太宗又嘗宴 顧勣曰
태종이 또 일찍이 연회에서 이적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朕將屬以孤幼注+屬, 音囑.하노니 思之 無越卿者
“짐이 어린 태자를 부탁할 사람을 찾는데注+(맡기다)은 음이 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만 한 사람이 없소.
公往不遺於李密이어든 今豈負於朕哉아하니
공이 지난날 이밀을 버리지 않았는데 지금 어찌 짐을 저버리겠소.”
雪涕致辭하고 因噬指流血이라
이적이 눈물을 닦으며 감사의 말을 올리고 이어서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俄沈醉한대 御服覆之注+覆, 音副.하니 其見委信 如此
어느덧 술에 취해 떨어지자 태종이 자기 옷을 벗어 덮어주었으니,注+(덮다)는 음이 이다. 그가 위임과 신뢰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勣每行軍 用師籌筭하고 臨敵應變하여 動合事機
이적이 군사를 운용할 때에는 정확한 계책에 맞춰 병사들을 움직였고, 적과 싸울 때에는 임기응변하여 움직일 때마다 사기事機에 부합하였다.
自貞觀以來 討擊突厥頡利及薛延陀注+北狄國名. 本延陀部與薛種雜居, 號薛延陀. 貞觀中, 拔灼立, 勣滅其國, 置爲州縣.高麗等하여 竝大破之
정관 연간 이후로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설연타薛延陀,注+설연타薛延陀는〉北狄의 국명國名이다. 본래 연타부延陀部설종薛種이 섞여 살아서 설연타薛延陀라 불렀다. 정관貞觀 연간에 발작拔灼이 즉위하자 이적李勣이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고구려高句麗 등의 정벌에 나서 모두 크게 격파했다.
太宗嘗曰
태종이 일찍이 말하였다.
李靖李勣二人 古之韓白注+漢將韓信秦將白起也.衛霍注+見前註. 豈能及也注+, 二十三年, 帝疾, 謂太子曰 “李勣才智有餘, 然汝與之無恩, 恐不能懷服. 我今黜之, 若其卽行, 俟我死, 汝用爲僕射, 親任之, 若徘徊顧望, 當殺之.” 乃授疊州都督, 受詔, 不至家而去. 高宗立, 召進僕射. 後欲立武昭儀爲后, 畏大臣異議, 未決. 帝密訪勣, 勣曰 “此陛下家事, 無須問外人.” 帝意遂定, 詔勣奉冊立武氏. 總章二年, 卒, 贈太尉, 謚曰貞武.리오하다
이정李靖이적李勣 두 사람을 옛날 한신韓信백기白起,注+한백韓白은〉漢나라 장군 한신韓信나라 장군 백기白起이다.위청衛靑곽거병霍去病注+위곽衛霍은〉앞의 에 보인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注+사전史傳을 살펴보면, 정관貞觀 23년(649)에 태종太宗이 병이 나자 태자(高宗)에게 이르기를 “이적李勣이 재주와 지혜가 충분하나 네가 그와 은혜 관계가 없으니, 내가 그를 심복시키지 못할까 우려된다. 내가 지금 그를 내칠 터이니, 그가 곧장 떠나면 내가 죽은 뒤에 네가 그를 등용하여 복야僕射(복야)로 삼아 가까이하고 신임 할 것이요, 만약 주저하고 관망하면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다.”라 하고, 첩주도독疊州都督에 임명하였는데, 조서를 받고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떠났다. 고종이 제위에 오른 뒤 그를 불러서 복야로 승진시켰다. 그 뒤(永徽 6년, 655)에 무소의武昭儀(則天武后)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대신들이 반대의 의견을 낼까 두려워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고종이 은밀히 이적에게 묻자, 이적이 말하기를 “이는 폐하의 집안일이니 외부 사람들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고종이 결국 생각을 굳히고 이적에게 조서를 내려 책서冊書를 받들어 무씨武氏를 황후로 책위冊位하였다. 총장總章 2년(669)에 세상을 떠나니, 태위太尉에 추증하고 시호를 정무貞武라 하였다.
【集論】范氏祖禹曰
【集論】范祖禹가 말하였다.
太宗 以勣爲何如人哉
태종太宗이적李勣을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했는가.
以爲愚也 則不可託幼孤而寄天下矣 以爲賢也 當任而弗疑어늘 何乃憂後嗣之不能懐服하여 先黜之而後用之
어리석다고 생각했다면 어린 태자를 부탁하고 천하를 맡겨서는 안 되며, 현명하다고 생각했다면 맡기고 의심해서는 안 되는데, 어찌하여 태자가 그를 심복시키지 못할까 염려하여 우선 내친 다음 다시 등용하게 하였는가.
是以犬馬畜之也 豈堯舜親賢之道乎
이는 그를 개와 말처럼 대우한 것이니, 어찌 임금‧임금이 어진 이를 친히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利祿之士 可得而使也
이익과 녹봉만을 추구하는 선비 정도는 부릴 수 있을 것이다.”
又曰
범조우范祖禹가 또 말하였다.
高宗欲廢立이나 而猶難於하고 取決於勣之一言하니 勣若以爲不可 則武氏必不立矣
고종高宗이 황후를 폐하고 새로 세우려고 하면서 오히려 고명대신을 어렵게 여기고 이적의 말 한마디에 생각을 결정하였으니, 이적이 만약 안 된다고 했다면 무씨武氏는 분명 황후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非惟不諫이요 又勸成之하니 孽后之立 無忌遂良之死 皆勣之由 其禍豈不博哉
그런데 이적이 간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장하여 이루도록 했으니, 비빈妃嬪황후皇后에 오른 뒤 장손무기長孫無忌저수량褚遂良이 죽고 나라 황실이 중간에 끊어진 것은 모두 이적에게서 연유된 것이니, 그 재앙이 어찌 크지 않은가.
太宗 以勣爲忠이라 故託以幼孤 而其大節如此하니 信矣로다
태종太宗이 이적을 충신이라 생각하였으므로 어린 태자를 부탁하였으나 그의 큰 절개라는 것이 이러했으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요제堯帝도 어렵게 여겼다.’고 한 말이 믿을 만하다.
胡氏寅曰
호인胡寅이 말하였다.
古者 不盟하고 結言而退하니 蓋人不愛其情하여 相命而信喩矣
“옛날에는 맹약을 하지 않고 말로만 약속하고 물러났으니, 이는 사람이 그 감정을 아끼지 않아 서로 말로만 약속해도 믿은 것이다.
逮德下衰하여 疑阻猜貳하여 至于刑牲㰱血이라도 曾未旋踵하여 又已背之
덕이 후대로 갈수록 쇠퇴하여 의심과 시기와 배신이 난무하여, 희생을 잡아 피를 마시며 맹약을 하고도 발길을 채 돌리기도 전에 금세 배반을 하였다.
是故 孔子於春秋 不貴盟誓하고 而善하니欲人之惇信하여 而不食言也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춘추春秋》에서 맹세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서명胥命을 훌륭하게 여겼으니, 순식荀息이 사람들에게 신의를 독실히 지켜 말한 것을 저버리지 않게 하고자 한 점을 높이 산 것이다.
若李勣齧指出血하여 以受太宗之託 若不爲負義者 而於廢興之際이어든 則不必待如然後 爲隳大節也
그러나 예를 들어 이적李勣이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태종太宗의 부탁을 받아들인 것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듯하였지만 왕씨王氏를 폐위하고 무씨武氏를 황후로 세울 때에 말 한 마디로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굳이 이극里克과 같은 자를 기다린 뒤에야 큰 절의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은 아니다.
夫以言許人者 猶恐非其本心이어늘 勣受託而無一言하고 徒齧指出血而已 使當堯舜之智라도 豈得遁乎
말로 남에게 허락하는 사람도 오히려 그 본심이 아닐까 염려하는데, 이적은 태종太宗의 부탁을 받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피가 나도록 손가락만 깨물었을 뿐이니, 설령 임금‧임금의 지혜에 필적하더라도 어찌 피할 수 있었겠는가.”
呂氏祖謙曰
여조겸呂祖謙이 말하였다.
太宗 以勣守邊 可謂善用人矣 至其任以託孤之寄하여는 則非其所能也
태종太宗이적李勣에게 변방을 지키도록 한 것은 인물을 잘 쓴 것이라 할 수 있으나, 태자를 부탁하는 일을 맡긴 것은 이적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按吳起與田文論功할새 起曰 將三軍하여 使士卒樂死하여 敵國不敢謀 子孰與起오하니 文曰 不如라하고
살펴보건대 오기吳起전문田文과 공을 논할 때, 오기가 ‘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기꺼이 싸우게 하여 적이 감히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점에 있어서는 그대와 나 가운데 누가 더 낫소?’라고 하니, 전문이 ‘그대만 못하오.’라고 하였고,
治百官하고 親萬民하며 實府庫 子孰與起오하니 文曰不如라하다
백관百官을 다스리고 온 백성을 사랑하며 창고를 꽉 채우는 일에 있어서는 그대와 나 가운데 누가 더 낫소?’라고 하니, 전문이 ‘그대만 못하오.’라고 하였다.
皆出吾下로되 而位加吾上 何也오하니 文曰 主少國疑하여 大臣未附하고 百姓不信하니 方是之時하여屬之子乎
‘이 세 가지가 다 나보다 못한데 지위가 나보다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이오?’라고 하니, 전문이 말하기를 ‘군주는 어리고 나라는 혼란하여 대신들이 따르지 않고 백성들이 믿지 않는데, 이러한 때에 국정國政을 그대에게 맡기겠소?
屬之我乎아하니 起黙然良久曰 屬之子矣라하다
나에게 맡기겠소?’라고 하니, 오기가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그대에게 맡길 것이오.’라고 하였다.
蓋勣之賢於長城이나 是亦吳起之所長이어늘 而太宗以之處田文之任하니 宜其敗也로다
이적이 만리장성보다 나은 점이 있다고 해도 이 역시 오기의 장점일 뿐인데, 태종이 전문에게 맡겨야 할 임무를 그에게 맡겼으니, 실패를 한 것이 당연하다.”
葉氏適曰
섭적葉適이 말하였다.
本無甚所長이요 只是不負人이라
이적李勣은 본래 그다지 큰 장점은 없고 다만 남을 배신하지 않는 정도일 뿐이다.
夫不負人 固可任以事 至於關朝廷之重하여는 則非不負者能之
남을 배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일을 맡길 수 있지만 조정의 중요한 일과 관련된 경우에는 남을 배신하지 않는 사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如立武氏之說 彼豈有意於負太宗者 奈何利害所在리오
예컨대 무씨武氏를 황후로 세우는 설의 경우에는 이적이 어찌 태종太宗을 배반할 마음으로 그런 것이겠으며, 또 무슨 이해관계가 걸려있어 그런 것이겠는가.
彼其不學하여 誠不識此
이적이 배움이 없어 이를 전혀 몰랐던 것이다.
之少文으로 幾陷呂氏之禍하고之重厚 猶有所不免하니 皆不學無術所以致也
아, 식견이 부족했던 주발周勃여씨呂氏의 재앙에 걸려들 뻔하였고, 중후했던 곽자맹霍子孟도 화를 면치 못하였으니, 모두 배움이 없고 계책이 없어서 야기된 일들이다.
況勣以一言之失 豈知他日之禍如此哉
하물며 이적의 한 마디 말의 잘못 때문에 후일의 재앙이 이러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愚按 太宗 英武將略 優於漢高 至於知人料事하여는 不及漢高遠矣 其間章章較著者 李勣之事 是也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무예와 장수의 도량은 나라 고조高祖보다 낫지만 사람을 알아보고 일을 예측하는 것은 한 고조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니, 비교적 분명히 드러난 예 중 하나가 이적李勣에 관한 것이다.
自今觀之컨대 勣之爲人 外若純慤이나 内任術數하여 非特太宗不能知 至今人不能知하니 何也
지금 살펴보면, 이적의 인물됨이 겉으로는 순진하고 성실한 듯하지만 속으로는 술수를 부려 태종이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사람들도 알 수가 없으니 그것은 어째서인가.
始事翟讓 讓爲李密所誅어늘 勣不能死하고 後爲竇建徳所敗하여 屈伏請降하고 復不能死
이적이 처음에 적양翟讓을 섬겼을 때, 적양은 이밀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나 자신은 죽지 않았고, 나중에 두건덕에게 패하였을 때 굴복하여 항복을 청하고 또 죽지 않았다.
勣始與單雄信으로 誓同死生이로대 雄信誅어늘 又不能死하니 其名節 如此
이적이 애초에 단웅신單雄信과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약을 맺었을 때 단웅신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그는 또 죽지 않았으니, 그 명성과 절의가 이와 같았다.
獨於李密之敗 生則推功하고 死則收葬이라
다만 이밀이 패망했을 때만은 절의를 지켜서 이밀이 살아 있을 때는 그에게 공을 미루고 이밀이 죽었을 때는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러주었다.
太宗 信其區區之小節하여 遂謂可以託孤라하니 過矣
태종이 그의 미미한 작은 절의를 믿고, 결국 태자를 맡길 만하다고 하였으니, 지나친 것이다.
太宗之將終也 黜勣爲疊州都督하고 謂太子曰 勣若卽行이면 汝用爲相하고 若不卽行이면 汝必殺之라하니 勣聞命不辭家而去
태종이 죽음에 임박하여 이적을 내쳐 첩주도독疊州都督으로 삼은 뒤 태자에게 이르기를 “이적이 곧장 떠나면 네가 등용하여 재상으로 삼을 것이요, 곧장 떠나지 않으면 네가 반드시 죽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적이 명령을 듣자마자 집에 작별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다.
夫太宗之術數 可謂精矣 孰知勣之術數 又高出於其上哉
태종의 술수가 뛰어나다고 할 만하나 이적의 술수가 그보다 더 뛰어났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厥後 武氏之立 竟以勣一言而定하여 而唐之子孫 幾盡於武氏之手하니 蓋太宗 以術數待勣이라 故勣 亦以術數報之 固不暇爲唐社稷計也
그 뒤에 무씨武氏가 황후에 오를 즈음 결국 이적의 한 마디 말로 결정되어 나라 황실의 자손이 무씨의 손에 거의 다 죽었으니, 이는 태종이 술수로 이적을 대했기 때문에 이적 역시 술수로 갚아준 것이요, 진실로 나라 사직을 위해 계책을 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勣之將死 告其弟曰 我見
이적이 죽음에 임박해 그 아우에게 말하기를 “나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가 고생을 하며 집안을 일으켰으나 모두 불초한 자손들에 의해 망하는 것을 보았다.
吾後子孫有交遊非類者 汝必殺之라한대 異時 擧兵覆宗이라가 至毁冢而暴骨이라
내가 죽은 뒤에 자손들 중에 옳지 않은 무리와 교유하는 자가 있으면 네가 반드시 그를 죽여라.”라고 하였는데, 후일 손자 이경업李敬業이 군사를 일으켜 종실을 무너뜨리려 하다가 이적의 무덤이 훼손되고 유골이 드러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嗚呼 勣所任之術數 至是而無所施其巧矣
아, 이적이 믿었던 술수가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그 교묘함을 펼칠 수 없었다.
是以 君子惡任智而大居正也
이 때문에 군자는 지혜만 믿는 것을 싫어하고 정상적인 법도를 준수하는 것을 크게 여긴다.
역주
역주1 史傳 : 《資治通鑑》 권199 唐紀 15 太宗 貞觀 23년에 보인다.
역주2 顧命大臣 : 임금의 유언으로 후사를 부탁받은 대신으로, 여기서는 則天武后의 황후 책봉에 반대한 長孫無忌‧褚遂良을 말한다.
역주3 唐室中絶 : 則天武后가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周로 바꾸면서 唐이라는 국호가 없어진 것을 말한다.
역주4 知人帝其難之 : 사람을 알아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書經》 〈虞書 皐陶謨〉에 “아, 모두 이와 같이 하는 것은 堯帝도 어렵게 여긴 바이니, 사람을 알아본다면 명철한 것입니다.[吁 咸若時 惟帝其難之 知人則哲]”라고 하였다.
역주5 胥命 : 諸侯들이 서로 만나 말로만 약속하고 별도로 맹서 의식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역주6 荀息 : 춘추시대 晉나라의 대부이다. 獻公이 병이 위독할 때 순식을 불러 奚齊를 임금으로 세울 수 있느냐고 묻자, 순식이 목숨을 걸고 보증하면서 임금의 명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헌공이 죽은 뒤 해제가 里克에게 살해되자 순식이 따라 죽으려 했으나, 해제의 아우인 卓子를 세워 보좌하는 것이 옳다는 말을 듣고 탁자를 임금으로 세웠다. 그러나 탁자가 다시 조정에서 이극에게 살해당하자 순식도 결국 목숨을 버렸다. 《史記 권39 晉世家》
역주7 王武 : 王은 高宗의 廢后 王氏를 가리키고, 武는 則天武后를 가리킨다.
역주8 一言喪邦 : 말 한 마디가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論語》 〈子路〉에 “孔子가 대답했다. ‘……만일 임금의 말이 善한데 아무도 어기는 자가 없다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임금의 말이 善하지 못한데도 어기는 자가 없다면 한 마디 말로 나라를 잃게 되는 것에 가깝지 않겠습니까.’[孔子對曰……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라고 하였다.
역주9 里克 : 春秋시대 晉나라의 대부이다. 자신이 모시던 公子 奚齊와 卓子를 시해하였다. 이 일로 晉 惠公 夷吾가 사신을 시켜 이극에게 “그대가 아니었으면 내가 임금이 되지 못했을 것이오. 그렇지만 그대는 두 임금과 한 대부를 죽였으니[子弑二君與一大夫] 그대의 임금이 되기에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이극이 자결하였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 10년》
역주10 此三者 : 吳起가 田文과 공을 논한 세 가지 중에 위의 본문에는 두 가지만 제시하고, 세 번째 조목인 “오기가 말하기를 ‘西河를 지키면 秦나라 군대가 감히 동쪽을 향해 오지 못하고 韓나라와 趙나라가 복종하게 함은 그대와 나 가운데 누가 더 낫소?’라고 하니, 전문이 ‘그대만 못하오.’라고 하였다.[起曰 守西河而秦兵不敢東鄉 韓趙賓從 子孰與起 文曰 不如子]”는 생략되었다. 《史記 권65 吳起列傳》
역주11 周勃 : 漢 高祖의 개국공신이다. 한 고조가 죽고 나서 呂太后가 조정을 장악하고 呂祿‧呂産 등 呂氏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右丞相 陳平과 太尉 周勃이 서로 화합하여 여씨를 견제하였다. 여태후가 죽은 뒤 여씨들이 난을 일으키려 하자, 태위 주발이 北軍을 지휘하여 여씨들을 모두 주살하였다. 《史記 권57 絳侯周勃世家》
역주12 霍子孟 : 漢나라의 명신 霍光으로, 子孟은 그의 字이다. 武帝 때 奉車都尉가 되어 20년 동안 궁궐에 출입했는데 근신하여 허물이 없었다. 昭帝가 8세의 나이에 즉위했는데 유지를 받들어 그를 잘 보필했고, 뒤에 博陵侯가 되었다. 소제가 죽자 昌邑王을 옹립했으나 음란하다는 이유로 27일 만에 폐위시키고 宣帝를 세웠다. 곽광이 20여 년 동안 정권을 잡으며 친척들을 많이 기용하였는데, 그가 죽고 선제가 친정을 하게 되었을 때 霍氏들이 모반을 꾀했다가 결국 멸족을 당했다. 《漢書 권68 霍光列傳》
역주13 房杜辛勤起家 皆爲不肖子所敗 : 房玄齡의 둘째 아들 房遺愛가 太宗의 딸 高陽公主와 결혼한 뒤 공주와 함께 모반을 일으켰다가 방유애는 주살되고 공주는 自盡하였으며 여타 아들들은 嶺表로 귀양을 갔다. 큰 아들 房遺直은 아버지의 공로로 특별히 용서받아 除名되어 庶人이 되었고 방현령의 太宗 廟庭 配享은 정지되었다. 杜如晦의 둘째 아들 杜荷가 太宗의 딸 城陽公主와 혼인하였으나 성질이 포악하여 법도를 따르지 않고 李承乾을 추종하여 모반에 가담하였다가 주살되었다. 첫째 아들 杜構는 연좌되어 嶺表로 귀양을 가 죽었다. 《舊唐書 권66 房玄齡列傳》, 《新唐書 권96 杜如晦列傳》
역주14 敬業 : 李勣의 손자이다. 則天武后가 稱制하자 그 죄를 성토하고 廬陵王(中宗)의 복위를 도모하여 군대를 일으켰다가 魏元忠에게 패하였다. 이 일로 인해 그의 할아버지 이적의 관작이 삭탈되고 무덤이 파헤쳐져 관이 쪼개지고 姓이 徐氏로 되돌려졌다. 《資治通鑑 권203 唐紀 19 則天 光宅 元年》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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