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觀十一年
에 太宗
이 行至漢太尉楊震墓
注+ 太宗 行至漢太尉楊震墓:楊震, 字伯起, 弘農人也. 好學明經, 諸儒稱爲關西夫子. 漢安帝時, 爲刺史, 號淸白吏. 後徵爲太常, 遷太尉, 爲內戚讒譖, 遣歸. .하여 傷其以忠非命
하여 親爲文以祭之
하니
房玄齡
이 進曰 楊震
이 雖當年夭枉
이나 數百年後
에 方遇聖明
하여 停輿駐蹕
하사 親降神作
注+ 親降神作:神作, 一作玊趾.하시니
可謂雖死猶生이요 沒而不朽니 不覺助伯起하여 幸賴欣躍於九泉之下矣니이다
凡百君子
는 焉敢不勗勵名節
注+ 焉敢不勖勵名節:焉, 於䖍切.하여 知爲善之有效
리오
注
【集論】愚按 太宗이 經異代名臣之墓하여 親爲文以祭之하니 是可以見其惓惓於忠貞之臣矣라
異世相望이라도 且企敬如此어늘 況凡百君子가 列于庶位者乎아
정관貞觀 11년(637)에
태종太宗이
한漢나라
태위太尉 양진楊震의
注+양진楊震은 자字가 백기伯起이며, 홍농弘農 사람이다.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경전에 밝아 여러 유학자儒學者들이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불렀다. 한 안제漢 安帝 때 자사刺史가 되었는데 청백리淸白吏로 불렸다. 후에 궁내로 불려와 태상太常이 되고 태위太尉로 자리를 옮겼으나 내척內戚들의 참소와 헐뜯음에 의해 내쳐져 귀향하였다. 양진이 말하기를 “죽음이란 인간의 일정한 분수이다. 내가 은혜를 입어 상사上司(삼공三公)의 직책을 맡았으나 간신姦臣이 활개를 치는데도 주벌하지 못하고 여인들이 혼란을 야기하는데도 금지시키지 못했으니, 무슨 얼굴로 다시 해와 달을 본단 말인가?”라고 하고, 짐주酖酒를 마시고 죽었다. 묘 앞에 이르러, 〈양진이〉 충성하다 비명에 세상을 떠난 것을 슬프게 여겨 직접 제문을 지어 제례를 거행했다.
방현령房玄齡이 진언하였다. “양진이 당시에 억울하게 요절했지만 수백 년 뒤에
성명聖明(태종)을 만나, 어가를 멈추어 머무시어 직접 제문을 내리셨으니
注+신작神作은 어느 본에 숙지玊趾로도 썼다.
비록 죽어도 여전히 살아 있고,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백기伯起(양진의 자)를 부추겨 행여 이에 의해 구천九泉(저승)에서 기뻐하며 날뛰게 할 것입니다.
삼가 지으신 제문을 읽어보니 감격스럽기도 하고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군자들은 어찌 감히 훌륭한 절의를 더욱 갈고 닦아
注+언焉(어찌)은 어於와 건䖍의 반절이다. 선행을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지 않겠습니까.”
注
내가 살펴보건대, 태종太宗이 다른 시대에 살았던 명신의 무덤을 지나면서 직접 제문을 지어 제례를 거행했으니 충성하고 올곧은 신하에게 정성을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시대의 사람을 바라볼 때도 이와 같이 존경의 마음을 일으키거늘, 더구나 뭇 군자들이 각 지위에 나열되어 있는 경우야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