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貞觀政要集論(4)

정관정요집론(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정관정요집론(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疏奏 太宗謂徵曰
人臣事主 順旨甚易하고 忤情尤難이어늘 公作朕耳目股肱하여 常論思獻納하니
朕今聞過能改하면 庶幾克終善事注+㉜ 庶幾克終善事:幾, 平聲.하리니
若違此言인댄 更何顔與公相見이며 復欲何方以理天下리오
自得公疏 反覆硏尋하니 深覺詞强理直이라
遂列爲屛障하여 朝夕瞻仰하고 又錄付史司하여 冀千載之下 識君臣之義로라하고
乃賜徵黃金十斤廐馬二匹注+㉝ 廐馬二匹:按史傳 “十三年, 阿史那結社率作亂, 雲陽石然, 自冬至五月不雨, 故徵上此疏.”하다
【集論】唐氏仲友曰 人君善否之分
論太宗貞觀初之所爲컨대 皆可以爲三代之令主
至漸不克終하얀 則凡三代之辟王 其極至於亂者 不過乎此하니 可不畏哉리오
徵有憂之하여 極言至論으로 數其十漸하여
有伊傅周召戒其君하고 大禹訓其後世之意하니
非慮之至忠之盡이면 安能及此리오
使太宗聞過願改하고 以終善道하여 以保貞觀之隆하여
卒髣髴乎三代之令主 皆徵力也
史以三代遺直許徵하니 於十漸見之
葉氏適曰 太宗聞十漸之戒하고 令錄付史官하여 使萬世知有君臣之義
至徵錄前後諫爭語於史官하얀 帝都不說이라
夫十漸之戒 徵之所錄 多不過此로되 而太宗不說何也
蓋錄在徵하면 則天下惟知徵之能諫하고
若錄在太宗하면 則天下將不止知太宗之能聽諫이요
且知太宗眷眷不忘之意 凡此皆太宗好名處
愚按 魏徵十不克終之疏 正貞觀之中年이라
其間所云 貞觀之初 如此其善이어늘 近歲以來 如此其未善이라
其善也 可以爲三代之令主 其未善也 無異於後世之僻王이라
何太宗一人之身으로 始終之相遠 如此哉아하니
蓋其始之善者 天資之過人也 終之未善者 學力之不繼也
昔者 周之成王 卽位之初 惑於二叔之言하여 不能明周公之德하니
其天資之美 有不能如太宗者矣
至於死生之際 烱然不亂하니 此豈太宗之所及哉
愚然後知周公輔導之功 爲不可及하고
而魏徵格君之道 猶有所不足也
嗚呼 以太宗之聰明으로도 猶不能保其終이어늘 而況天資之未逮者 其可不孶孶而務學也哉


상소문이 올라가자 태종太宗위징魏徵에게 말하였다.
“신하가 군주를 섬길 때에 뜻에 순종하기는 매우 쉽지만 마음을 거스르는 것은 매우 어렵거늘 공이 짐을 보좌하는 대신이 되어 항상 국사를 의논하고 의견을 올려주었소.
짐이 지금 과오를 듣고 고칠 수 있다면 거의 선한 일을 잘 끝맺을 수 있을 것이오.注+(거의)는 평성平聲이다.
만일 이 말을 어긴다면 다시 어떤 얼굴로 공과 서로 만날 것이며, 또한 무슨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겠소.
공의 상소를 얻고부터 반복하여 연구해보니, 말이 강직하고 이치가 올바르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소.
이에 병풍으로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고, 또한 사관에게 기록하여 붙이게 하여 천 년 뒤에도 군신君臣의 의리를 알게 하겠소.”
마침내 태종은 위징에게 황금 열 근과 궁중의 말 두 필을 하사하였다.注+살펴보니 《신당서新唐書》 〈위징열전魏徵列傳〉에 “정관貞觀 13년(639)에 아사나결사솔阿史那結社率이 반란을 일으켰고 운양雲陽 지역의 돌에서 불이 났으며, 겨울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징이 이 상소를 올렸다.”라고 하였다.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임금이 선한지 아닌지의 차이는, 그 시작은 털끝같이 작지만 그 끝은 천 리나 된다.
태종太宗정관貞觀 에 행한 것을 논해보건대 모두 삼대三代의 훌륭한 임금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점불극종漸不克終(끝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는 조짐)의 논의에 이르러서는 모두 삼대의 사벽邪辟한 군왕들이 그 끝에 가서 난리에 이른 것은 모두 여기에 벗어나지 못하니, 두렵지 않은가.
위징이 그것을 근심하여 극언極言지론至論으로 열 가지 조짐을 조목조목 들어서,
이윤伊尹부열傅說주공周公소공召公이 그 임금을 경계하고 대우大禹가 그 후세에게 훈계한 뜻이 있었으니,
생각을 지극히 하고 충성을 다한 이가 아니라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태종으로 하여금 과실을 듣고 고치기를 원하여서 선도善道를 잘 끝마쳐 정관의 융성함을 보존하게 하여
마침내 삼대의 훌륭한 임금과 비슷하게 한 것은 모두 위징의 힘이다.
역사가들이 삼대의 강직한 유풍을 지닌 사람으로 위징을 인정하였으니 열 가지 조짐에서 볼 수 있다.”
섭적葉適이 말하였다. “태종太宗이 열 가지 조짐에 대한 경계를 듣고 사관에게 기록하여 붙여서 만세萬世군신君臣의 의리가 있음을 알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후로 간쟁한 위징의 말이 사관에게 기록된 것에는 태종이 모두 이를 말한 것이 없다.
위징의 간언을 기록한 일이 대부분 열 가지 조짐에 대한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데 태종이 이를 말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기록이 위징 쪽에 있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오직 위징이 간쟁을 잘한다는 것만 알게 되지만,
만약 기록이 태종 쪽에 있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장차 태종이 간언을 잘 듣는다는 것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또 태종이 마음에 두어 잊지 않는 뜻도 알 수 있다. 이는 모두 태종이 명성을 좋아한 부분이다.”
내가 살펴보건대 위징魏徵의 ‘열 가지 끝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상소는 바로 정관貞觀중기中期 때의 것이다.
그 안에서 말한 바는 ‘정관의 에는 그 선함이 이와 같았는데 요사이 이후에는 선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
그 선함은 삼대의 현명한 임금이 될 수 있으나 그 선하지 못함은 후세의 사벽邪辟한 군왕들과 다름이 없다.
어찌 태종太宗 한 사람의 몸으로 처음과 끝이 서로 멀어진 것이 이와 같은가.’라고 한 것이다.
그 처음이 선한 것은 천품이 남보다 뛰어났기 때문이지만 끝이 선하지 못한 것은 학문에 계속 힘쓰지 않아서였다.
옛날에 나라 성왕成王이 즉위한 초기에 채숙蔡叔관숙管叔의 말에 미혹되어 주공周公의 덕을 밝히지 못하였으니
그의 천품의 아름다움이 태종과 같지 못한 점이 있다.
그러나 끝에 미쳐서는 하늘의 위엄을 공경히 모셔서 감히 어지럽히거나 어긋나지 않았다.
죽을 때에 이르러서는 밝게 빛나서 어지럽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태종이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내가 이러한 뒤에 주공이 보필하고 인도해준 공은 미칠 수 없는 것이고,
위징이 임금을 바로잡는 도리는 오히려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 태종의 총명함으로도 오히려 그 끝을 잘 보존하지 못하거늘, 더구나 천품이 미치지 못하는 자가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其始毫釐 其末千里 : 《大戴禮記》 〈保傅〉의 “털끝만큼의 차이가 천 리나 차이 나게 된다.[失之毫釐 差之千里]”에 의거한 것이다.
역주2 敬迓天威 無敢昏逾 : 《書經》 〈周書 顧命〉의 “뒤의 어리석은 나에게 있어서는 하늘의 위엄을 공경히 맞이하여 文王‧武王의 큰 교훈을 이어 지켜서 감히 어지럽히거나 어긋나지 않았다.[在後之侗 敬迓天威 嗣守文武大訓 無敢昏逾]”에서 초록한 것이다.

정관정요집론(4)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