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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1)

정관정요집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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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後 頡利可汗 大懼하여 四年 退保鐵山注+西北之地.하여 遣使入朝謝罪注+使, 去聲, 後同.하고 請擧國內附
又以靖爲定襄道行軍總管하여 往迎頡利하니 頡利雖外請降이나 而心懷疑貳
詔遣鴻臚卿注+秦官, 典客, 漢武時, 更名大鴻臚. 郊廟行禮, 讃道九賓, 鴻聲臚傳之也. 唐制, 掌賓客及凶儀之事.唐儉注+字, 茂系, 幷州人. 聞隋政日亂, 說秦王建大計, 爲天策長史. 攝戶部尙書注+唐制, 戶部掌天下土地人民錢穀之政, 貢賦之差, 尙書, 其長也. 詔除而非正命謂之攝.將軍安修仁注+安姓, 修仁名.하여 慰諭之한대
靖謂副將注+去聲.張公謹注+字弘愼, 魏州人. 仕王世充, 爲洧州長史. 挈城歸高祖, 授檢校鄒州别駕. 李勣等啓秦王, 引入府. 貞觀初, 爲代州都督, 謀破頡利有功, 封鄒國公, 改封州都督, 以惠政聞, 七年卒.
詔使到彼하면 虜必自寬하리니 乃選精騎하여 賚二十日糧하여 引兵自白道襲之하라
公謹曰
旣許其降하고 詔使在彼하니 未宜討擊이니이다
靖曰
兵機也 時不可失이라하고
遂督軍疾進이라
行至陰山注+在西北之極, 綿亘數百里.하여 遇其斥候千餘帳하여 皆俘以隨軍이라
頡利見使者하고 甚悅하여 不虞官兵至也
靖前鋒乘霧而行하여 去其牙帳七里하니 頡利始覺하여 列兵未及成陣하여 單馬輕走하니 虜衆因而潰散이라
斬萬餘級하고 殺其妻隋義成公主하고 俘男女十餘萬이라
斥土界自陰山으로 至于大漠注+北邊廣漠之地.하고 遂滅其國이라
尋獲頡利可汗於別部落하니 餘衆悉降이라
太宗大悅하여 顧謂侍臣曰
朕聞主憂 臣辱하고 主辱이면 臣死라하니
往者國家草創 突厥强梁하여 太上皇以百姓之故 稱臣於頡利하니 朕未嘗不痛心疾首하여
志滅匈奴하여 坐不安席하고 食不甘味
今者 暫動하여 無往不捷하여 單于稽顙注+單, 音蟬. 漢時蕃王之號, 猶可汗也.하니 恥其雪乎인저하니
群臣 皆稱萬歲注+漢武帝禮祭中嶽太室, 從官在山下, 聞若有言萬歲者三, 後世臣下稱萬歲者本此.


이후로 힐리가한頡利可汗이 크게 두려워하여 정관貞觀 4년(630)에 퇴각하여 철산鐵山을 지키면서注+철산鐵山은〉 서북 지역이다. 조정으로 사자를 보내어 사죄하고,注+使(사신)는 거성去聲이다. 뒤에도 같다. 나라 전체를 바쳐 속국이 되기를 청하였다.
이정李靖정양도행군총관定襄道行軍總管으로 임명하여 힐리가한을 영접하게 하였는데, 힐리가한이 겉으로는 항복을 청하였으나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태종太宗이 조서를 내려 홍려경鴻臚卿注+홍려경鴻臚卿은〉 나라 때 관직으로, 빈객賓客을 맞이하는 일을 담당하였으며, 나라 무제武帝대홍려大鴻臚로 이름을 바꾸었다. 교묘郊廟에서 예를 거행하고, 구빈九賓을 도와 인도할 때 큰 소리로 임금의 명을 전했다. 나라 제도에 의하면 빈객賓客흉사凶事와 관련한 의식에 대한 일을 관장하였다.당검唐儉注+당검唐儉은〉 무계茂系이니, 병주幷州 사람이다. 나라의 정치가 날로 혼란해진다는 소식을 듣고 진왕秦王(太宗)에게 큰 계책을 세우라고 유세하여 천책장사天策長史가 되었다.섭호부상서攝戶部尙書注+나라 제도에 의하면 호부戶部는 천하의 토지와 백성, 돈과 곡식의 행정, 조공과 부세의 차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니, 상서는 그 수장이다. 조서로 임명할 때 정식 관원이 아닌 것을 (署理)이라 한다. 장군 안수인安修仁을 보내어注+안수인安修仁은〉 이 성이며, 수인修仁이 이름이다. 힐리가한을 위로하고 타이르게 하였다.
이정이 부장副將注+(장수)은〉 거성去聲이다.장공근張公謹注+장공근張公謹은〉 홍신弘愼이니, 위주魏州 사람이다. 왕세충王世充에게 벼슬하여 유주장사洧州長史가 되었다. 을 가지고 고조高祖에게 귀의하여 검교추주별가檢校鄒州别駕에 임명되었다. 이적李勣 등이 진왕秦王에게 주청하여 진왕부秦王府로 데리고 왔다. 정관貞觀 초기에 대주도독代州都督이 되었는데,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격파하는 계책을 세우는 데 공을 세워 추국공鄒國公에 책봉되고 다시 주도독州都督에 책봉됐다. 은혜로운 정치를 베푼 것으로 소문이 났다. 정관 7년(633)에 세상을 떠났다.에게 말하였다.
“조서를 받든 사자가 저곳에 도착하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경계를 늦출 것이니, 정예 기병을 선발하여 20일 치 양식을 내주고 병사를 이끌고 백도白道에서 습격하도록 하라.”
장공근이 말하였다.
“이미 저들의 항복을 허락하였고 조서를 받든 사자가 저곳에 있으니, 토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정이 말하였다.
“이는 병사를 쓰기에 좋은 기회이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드디어 군사를 독려하여 급히 진격하게 하였다.
행군하여 음산陰山에 이르렀을 때注+음산陰山은〉 서북쪽 극단에 있는데, 수백 리에 걸쳐 뻗어 있다. 척후병 천여 을 만나 모두 포로로 잡고 군대를 따르게 하였다.
힐리가한이 사자를 보고 매우 기뻐하여 이정의 관병이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이정의 선봉 부대가 안개가 낀 틈을 타고 행군하여 아장牙帳(本營)과 거의 7리까지 접근하였을 때에야 힐리가한이 비로소 깨닫고 군사를 정렬시켰지만 진지를 구축하지 못한 채 단기單騎로 급히 도망가니, 오랑캐 군사들이 그대로 흩어져 달아났다.
적군 1만여 명을 죽이고, 그의 처 나라 의성공주義成公主를 죽였으며 사로잡은 남녀가 10여만 명이나 되었다.
변방의 경계를 넓힌 것이 음산陰山에서부터 대막大漠까지였고,注+대막大漠은〉 북쪽 변방의 황량한 땅이다. 결국 그 나라를 멸망시켰다.
마침내 힐리가한을 다른 부락에서 잡으니, 나머지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다.
태종이 크게 기뻐하여 근신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짐이 들은 바에 의하면, ‘군주가 근심하면 신하는 치욕으로 생각하고, 군주가 치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으로 씻는다.’고 하였소.
과거 국가의 초창기에 돌궐突厥이 매우 강성하여 태상황太上皇(李淵)께서 백성들 때문에 힐리가한에게 을 칭하였으니, 짐은 일찍이 속이 아프고 골치를 앓지 않은 적이 없었소.
그리하여 흉노匈奴(돌궐)를 멸망시킬 뜻을 품어 좌불안석하였고, 음식을 먹어도 맛있는 줄 몰랐소.
그런데 지금 잠시 이정이 일부의 군대를 출동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하여 선우單于(可汗)가 이마를 땅에 대고 항복하니,注+은 음이 이다. 〈선우單于는〉 나라 때 번왕蕃王의 칭호이니, 가한可汗과 같다. 이전에 당했던 수치를 씻어준 것이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注+ 무제武帝중악中嶽(嵩山)의 태실太室에서 제사를 올릴 때 따르던 관리가 산 아래에 있었는데, 만세를 세 번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후세에 신하들이 만세를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역주
역주1 偏師 : 주력군 이외의 일부의 군대를 가리킨다.

정관정요집론(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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