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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4)

정관정요집론(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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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新唐書
신당서新唐書위징魏徵 열전列傳
魏徵 字玄成이고 魏州曲城人이라
위징魏徵현성玄成이고 위주魏州 곡성曲城 사람이다.
위징魏徵(《고선군신도상古先君臣圖像》)위징魏徵(《고선군신도상古先君臣圖像》)
少孤하여 落魄하여 棄貲産不營이로되 有大志하여 通貫書術하니라
어려서 고아가 되자 실의에 빠져 재산을 내팽개치고 경영하지 않았으나, 큰 뜻이 있어 서사書史술수術數에 통하였다.
隋亂 詭爲道士하다.
나라 말기 전란에는 도사道士로 위장하였다.
武陽郡丞元寶藏舉兵應李密하고 以徵典書檄하다.
무양군승武陽郡丞 원보장元寶藏이 병사를 일으켜 이밀李密과 호응하고 위징에게 편지와 격문을 담당하게 하였다.
密得寶藏書하고 輒稱善하고 旣聞徵所爲하고 促召之하다.
이밀이 원보장의 편지를 보고는 매번 잘 쓴다고 칭찬하였고, 위징이 썼다는 것을 듣고는 재촉하여 위징을 불렀다.
徵進十策說密이어늘 不能用이라
위징이 열 가지 계책을 올려 이밀을 설득하였는데 이밀이 쓰지 못하였다.
王世充攻洛口한대 徵見長史鄭頲曰
왕세충王世充낙구洛口를 공격하자 위징이 이밀의 장사長史 정정鄭頲을 만나보고 말하였다.
魏公雖驟勝이나 而驍將銳士死傷略盡하고 又府無見財하여 戰勝不賞이니
위공魏公(이밀李密의 자칭)이 비록 누차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맹장猛將정병精兵이 죽고 다쳐 거의 없어지고 또 부고府庫에 현재 남아 있는 재물이 없어서 전쟁에 승리하였지만 상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此二者不可以戰이라
이 두 가지 때문에 전쟁을 할 수 없습니다.
若浚池峭壘하고 曠日持久하여 賊糧盡且去 我追擊之하면 取勝之道也라하니
만약 해자를 깊이 파며 영첩營疊을 높이 쌓고 시일을 끌며 지구전持久戰을 하여 적군의 양식이 다 떨어져 장차 철수하려고 할 때에 우리들이 적군을 추격하면 승리를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頲曰 老儒常語耳라한대 徵不謝去하다.
정정이 말하기를 “노쇠한 선비의 평범한 말일 뿐이오.”라고 하자, 위징이 인사하지 않고 떠났다.
後從密來京師한대 久之未知名하니라
후에 위징魏徵이밀李密을 따라 서울에 왔는데 오랫동안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自請安輯山東하니 乃擢秘書丞하여 馳馹至黎陽하다.
자신이 산동山東안무按撫하겠다고 청하자 이에 비서승秘書丞에 발탁되어 역마를 달려 여양黎陽에 도착하였다.
時李勣尙爲密守어늘 徵與書曰
이때에 이적李勣이 여전히 이밀을 대신해 산동을 지키고 있었는데 위징이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始魏公起叛徒하고 振臂大呼하니 衆數十萬이요 威之所被半天下
“처음에 위공魏公이 반란 군사를 일으켜 팔을 휘두르며 크게 소리치니 병사들이 수십만에 이르고 위엄이 행해진 곳이 천하의 반이나 되었습니다.
然而一敗不振하고 卒歸唐者 固知天命有所歸也
그러나 한 번 패배하자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마침내 나라에 귀부한 것은 진실로 천명天命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今君處必爭之地하여 不早自圖하니 則大事去矣라하다.
지금 그대는 반드시 다툴 땅에 처하고서 일찌감치 스스로 도모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대의 대사大事가 틀어질 것입니다.”
勣得書하고 遂定計歸하고 而大發粟饋淮安王之軍하다.
이적이 편지를 받고 마침내 나라에 귀순할 계획을 정하고 곡식을 크게 풀어서 회안왕淮安王(이신통李神通, 고조髙祖 이연李淵종부제從父弟)의 군대에 보냈다.
會竇建德陷黎陽하고 獲徵하여 僞拜起居舍人하다
마침 두건덕竇建德여양黎陽을 함락하고 위징魏徵을 잡아 자신이 세운 조정에서 기거사인起居舍人으로 임명하였다.
建德敗 與裴矩走入關하니 隱太子引爲洗馬하니라
두건덕이 패배하자 위징은 배구裴矩동관潼關으로 달려 들어갔는데, 은태자隱太子(이건성李建成)가 불러들여 세마洗馬로 삼았다.
徵見秦王功高하고 陰勸太子早爲計하다
위징은 진왕秦王(이세민李世民)이 공이 높은 것을 보고 은밀히 은태자에게 일찍 처치할 계획을 세우라고 권하였다.
太子敗 王責謂曰 爾鬩吾兄弟 奈何오하니
은태자가 실패하자 진왕이 위징을 꾸짖기를 “네가 우리 형제들을 다투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答曰 太子蚤從徵言이면 不死今日之禍하리라하다
위징이 대답하기를 “태자께서 일찍 저의 말을 따랐다면 오늘의 재앙에 죽지 않았을 것이오.” 하였다.
王器其直하여 無恨意
진왕은 위징의 강직함을 훌륭하게 여겨 원망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卽位하여 拜諫議大夫하고 封鉅鹿하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위징魏徵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하고 거록현남鉅鹿縣男에 봉하였다.
當是時 河北州縣素事隱巢者不自安하고 往往曹伏思亂하다
이때 하북河北 주현州縣의 원래 은태자隱太子소랄왕巢剌王(소랄왕,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의 시호)을 섬기던 자들은 스스로 편안해하지 못하고 이따금 무리 지어 몰래 난리를 일으킬 생각을 하였다.
徵白太宗曰 不示至公이면 禍不可解라하니
위징이 태종에게 아뢰었다. “지극히 공정함을 보이지 않으면 재앙을 해결하지 못할 것입니다.”
帝曰 爾行安喻河北하라하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대가 가서 하북河北 사람들을 안정시키고 타이르도록 하시오.”
道遇太子千牛李志安齊王護軍李思行傳送京師어늘 徵與其副謀曰
위징이 도중에 은태자의 천우千牛 이지안李志安과 제왕의 호군護軍 이사행李思行을 잡아 서울로 전송하는 일행을 만났는데 위징이 그의 부사副使와 상의하였다.
屬有詔 宮府舊人普原之라한대 今復執送志安等하면 誰不自疑者리오
“위촉받은 조서에 동궁東宮제왕부齊王府의 옛사람들을 모두 사면하라고 하였는데, 지금 다시 이지안李志安 등을 잡아서 보내면 누가 스스로 의심하지 않겠소?
吾屬雖往이라도 人不信이라하고 卽貸而後聞하다
우리들이 비록 가더라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오.”즉시 그들을 사면한 뒤에 조정에 보고하였다.
使還하니 帝悅하고 日益親하여 或引至臥內하여 訪天下事하다
사신이 돌아오자 태종이 기뻐하고 나날이 더욱 친밀히 대하여, 혹은 침실까지 끌어들여 천하의 정사를 물었다.
徵亦自以不世遇하여 乃展盡底蘊無所隱하여 凡二百餘奏하니 無不剴切當帝心者
위징 또한 자신이 세상에 만나지 못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숨김없이 다 펼쳐서 모두 2백여 건을 아뢰었으니, 태종의 마음에 적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由是拜尙書右丞하고 兼諫議大夫하다
이 때문에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고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겸하였다.
左右有毀徵阿黨親戚者라하니 帝使溫彥博按訊한대 非是
위징魏徵이 친척들을 비호하며 편애한다고 비방하는 측근이 있자 태종太宗온언박溫彥博에게 조사하게 하였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彥博曰 徵爲人臣하여 不能著形迹하고 遠嫌疑하여 而被飛謗하니 是宜責也라하니
온언박이 말하였다. “위징이 신하가 되어 행적을 드러내지 않고 혐의를 멀리 피하지 않아 비방을 받았으니 이는 질책해야 합니다.”
帝謂彥博行讓徵하라하다
태종이 온언박에게 위징을 꾸짖으라고 하였다.
徵見帝하고 謝曰 臣聞君臣同心 是謂一體라하니
위징이 태종을 뵙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신은 들으니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함께하는 것을 한 몸이라 한다.’고 하니
豈有置至公하고 事形迹이리오 若上下共由玆路하면 邦之興喪未可知也니이다
어찌 지극히 공정한 국사를 버려두고 일의 행적을 드러내는 것을 일삼겠습니까. 만일 위와 아래가 함께 이러한 길을 따른다면 국가의 흥망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帝矍然曰 吾悟之矣라하니
태종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내가 잘못을 깨달았소.”
徵頓首曰 願陛下俾臣爲良臣이요 毋俾臣爲忠臣하소서
위징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을 양신良臣이 되게 하시고 신을 충신忠臣이 되게 하지 마소서.”
帝曰 忠良異乎아하다
태종이 말하였다. “충신과 양신에 차이가 있소?”
曰 良臣 稷契咎陶也 忠臣 龍逢比干也
위징이 말하였다. “양신은 고요咎陶(고요皐陶)이고 충신忠臣관룡방關龍逢(관룡방)‧비간比干입니다.
良臣 身荷美名하고 君都顯號하여 子孫傳承하여 流祚無疆이요
양신은 자신도 미명美名을 얻고 임금도 훌륭한 이름을 듣게 되어 자손이 전승하여 복록이 끝없이 전해지는 것이고,
忠臣 己嬰禍誅하고 君陷昏惡하여 喪國夷家하여 祗取空名이니 此其異也니이다
충신은 자신이 재화와 죽음을 받게 되고 임금이 어두우며 악한 데에 빠져 집안과 나라를 망치면서 다만 헛된 이름만 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帝曰 善하다
태종이 말하였다. “좋은 말씀이오.”
因問호대 爲君者 何道而明하고 何失而暗
이어서 위징에게 물었다. “임금 된 자는 무슨 방도로 명철해지고 무엇을 잘못하여 어두워지는 것이오?”
徵曰 君所以明 兼聽也 所以暗 偏信也니이다
위징이 말하였다. “임금이 명철해지는 것은 널리 듣기 때문이고, 어두워지는 것은 한쪽만 신임하기 때문입니다.
은 사방의 문을 열어두며, 사방 사람의 눈으로 밝게 보며, 사방 사람의 귀로 들었습니다.
雖有共鯀이라도 不能塞也 不能惑也니이다
비록 공공共工의 무리가 있어도 총명을 가리지 못하였고, 조용할 때는 말을 잘하나 등용되어서는 그와 어긋나는 행동이 총명을 미혹시킬 수 없었습니다.
秦二世隱藏其身하고 以信趙高라가 天下潰叛而不得聞하고
그러나 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는 자신을 숨기고 조고趙高만 신임하다가 천하가 무너지고 반란이 일어나도 그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梁武帝信朱异라가 侯景向關而不得聞하고
나라 무제武帝주이朱异만 신임하다가 후경侯景이 〈군대를 일으켜〉 도성 관문으로 향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隋煬帝信虞世基라가 賊遍天下而不得聞이니라
나라 양제煬帝우세기虞世基만 신임하다가 역적들이 천하에 가득해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故曰 君能兼聽하면 則姦人不得壅蔽하여 而下情通矣라하다
그러므로 ‘임금이 널리 들으면 간사한 사람들이 임금을 막아 가리지 못하여 아랫사람의 실정이 임금께 통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鄭仁基息女美而才하여 皇后建請爲充華하고 典冊具한대 或言許聘矣라하다
정인기鄭仁基의 딸이 아름답고 재주가 있어서, 장손황후長孫皇后가 건의하여 충화充華(여관女官 명칭)로 삼기를 청하고 책봉하는 글을 갖추게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길, 정인기가 다른 사람과 혼인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徵諫曰 陛下處臺榭 則欲民有棟宇하고 食膏粱 則欲民有飽適하고 顧嬪御 則欲民有室家하신대
위징魏徵이 간언하였다. “폐하陛下께서 대사臺榭에 머무를 때는 백성들에게 주택이 있기를 바랐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는 백성들이 배부르기를 바랐고, 빈어嬪御를 가까이할 때는 백성들에게 아내가 있기를 바랐습니다.
今鄭已約昏이어늘 陛下取之하시면 豈爲人父母意리오
지금 정씨가 이미 혼인의 약속을 하였는데 폐하께서 그를 취하신다면 어찌 백성의 부모가 되는 뜻이겠습니까.”
帝痛自咎하고 卽詔停冊하다
태종太宗은 통렬하게 자신을 허물하고 즉시 조서를 내려 책봉을 정지하였다.
貞觀三年 以秘書監參豫朝政하다
정관貞觀 3년(629)에 비서감秘書監으로 조정朝政에 참여하였다.
高昌王麴文泰將入朝어늘 西域諸國欲因文泰悉遣使者奉獻이러라
고창왕高昌王 국문태麴文泰나라에 조회하러 들어오려고 하자,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국문태를 통해서 모두 사신을 보내 진헌하려고 하였다.
帝詔文泰使人厭怛紇干迎之하니
태종은 조서를 내려 국문태의 사신 염달흘간厭怛紇干에게 그들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徵曰 異時文泰入朝 所過供擬不能具어늘 今又加諸國焉하면 則瀕塞州縣以乏致罪者衆하리이다
위징이 말하였다. “왕년에 국문태가 조회하러 들어올 때 지나가는 곳에서 공의供擬(필요한 물품 제공)를 갖출 수 없었는데, 지금 또 여러 나라를 더하게 된다면 주변 변방의 주현州縣들에 공의供擬 부족으로 죄를 받을 자가 많을 것입니다.
彼以商賈來하면 則邊人爲之利하고 若賓客之하면 中國蕭然耗矣리이다
저들이 상인의 신분으로 오면 변방 사람들이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만약 그들을 빈객으로 대우한다면 중국에는 쓸데없이 소모되는 비용이 생길 것입니다.
漢建武時 西域請置都護送侍子하되 光武不許하니 不以蠻夷敝中國也일새니이다
나라 건무建武(광무제光武帝의 연호, 25~55) 때에 서역西域에서 도호都護(서역西域 제국諸國을 통치하는 관명官名)를 설치해달라고 하면서 시자侍子를 보내겠다고 요청하였으나 광무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니 만이蠻夷가 중국을 어지럽히기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帝曰 善타하고 하다
태종이 말하기를 “좋소.” 하고, 〈염달흘간을〉 뒤따라가서 그 조서의 시행을 정지시키게 하였다.
於是帝卽位四年 歲斷死二十九하여 幾至刑措하고 米斗三錢이라
이에 태종太宗이 즉위한 지 4년 만에 한 해에 사형 판결을 받은 자가 29인뿐이어서 거의 형벌을 버리고 쓰지 않을 지경이 되었고 쌀 한 말 값이 3이었다.
先是 帝嘗嘆曰 今大亂之後 其難治乎인저하니
이보다 앞서 태종이 일찍이 탄식하며 말하였다. “지금 큰 난리를 겪은 뒤이니 다스리기가 어려울 것이오!”
徵曰 大亂之易治하니 譬飢人之易食也니이다
위징魏徵이 말하였다. “큰 난리를 겪은 뒤에는 다스리기가 쉬우니 비유하면 굶주린 사람을 먹이기 쉬운 것과 같습니다.”
태종이 말하였다. “옛날에 ‘선인善人이 나라를 백 년 동안 다스린 연후에 잔악한 이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소?”
答曰 此不爲聖哲論也 聖哲之治 其應如響하여 期月而可하니 蓋不其難하니이다
위징이 대답하였다. “이는 성철聖哲한 제왕에게 해당되는 논의가 아닙니다. 성철의 다스림은 그 호응이 메아리처럼 빨라서 일 년이면 할 수 있는 것이니, 이는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封德彜曰 不然하니이다 三代之後 澆詭日滋
봉덕이封德彜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삼대三代 이후에 경박하고 속이는 것이 날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秦任法律하고 漢雜霸道하니 皆欲治不能이요 非能治不欲이니이다
나라는 법률에 의지하고 나라는 패도霸道를 섞어 썼으니, 모두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이지 잘 다스릴 수 있는데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書生이라 好虛論하여 徒亂國家하니 不可聽이니이다
위징은 서생書生이라, 공담空談을 좋아하여 다만 국가를 어지럽힐 뿐이니, 그의 말을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徵曰 五帝三王不易民以教 行帝道而帝하고 行王道而王하니 顧所行何如爾니이다
위징이 말하였다. “오제五帝삼왕三王은 백성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백성을 교화하였습니다. 오제의 를 시행하면 가 되고 삼왕의 를 시행하면 이 되니 시행한 것이 어떠했는지를 돌아볼 뿐입니다.
黃帝逐蚩尤하여 七十戰而勝其亂하여 因致無爲하고
황제黃帝치우蚩尤를 내몰아 70번 전투를 하여 그 혼란 속에 승리하여 이로 인해 무위無爲의 치적을 이루었고,
九黎害德이어늘 顓頊征之하여 已克而治하고
구려九黎가 도덕에 해를 끼치자 전욱顓頊이 그들을 정벌하여 이기고 나서 치세를 이루었고,
桀爲亂이어늘 湯放之하고 紂無道어늘 武王伐之하여 湯武身及太平하니이다
이 혼란한 짓을 일삼자 탕왕湯王이 그를 내쫓았고, 가 무도함을 일삼자 무왕武王이 그를 정벌하여 탕왕과 무왕이 몸소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若人漸澆詭하여 不復返朴하면 今當爲鬼爲魅리니 尙安得而化哉리잇가
만약 사람들이 점점 경박하고 속여 다시 순박함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면 지금 응당 모두 귀신과 도깨비의 세상이 되었을 것이니, 오히려 어찌 교화할 수 있겠습니까.”
德彜不能對 然心以爲不可러니 帝納之不疑하다
봉덕이는 대답하지 못하였으나 마음으로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는데, 태종은 그 말을 받아들여 의심하지 않았다.
至是하여 天下大治하니 蠻夷君長 襲衣冠하고 帶刀宿衛하니라
이에 이르러 천하가 크게 다스려졌으니 만이蠻夷군장君長들이 의관을 입고 칼을 차고 숙위하였다.
東薄海하고 南踰嶺하며 戶闔不閉하고 行旅不齎糧하여 取給於道하다
국토가 동으로는 바닷가에 이르고 남으로는 오령五嶺을 넘었으며, 문을 닫지 않고 여행자들이 양식을 싸서 다니지 않아 길에서 조달하였다.
帝謂群臣曰 此徵勸我行仁義하여 旣效矣 惜不令封德彜見之라하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이는 위징이 나에게 인의仁義를 행하라고 권하여 효험이 드러난 것이요. 봉덕이가 죽어서 이것을 보게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오.”
俄檢校侍中하고 進爵하다 帝幸九成宮이어늘 宮御舍圍川宮下하다
얼마 후에 위징魏徵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고 군공郡公으로 작위가 올랐다. 태종太宗구성궁九成宮에 행차하였는데 궁녀들이 위천궁圍川宮에서 묵었다.
僕射李靖侍中王珪繼至러니 吏改館宮御以舍靖珪하니라
복야僕射 이정李靖시중侍中 왕규王珪가 이어서 이르렀는데, 관리가 궁녀들의 처소를 옮기게 하고 이정과 왕규를 묵게 하였다.
帝聞하고 怒曰 威福由是等邪 何輕我宮人가하고
태종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였다. “위복威福이 이들로부터 나오는가! 어찌 나의 궁녀들을 경시하는가!”
詔幷按之하니 徵曰 靖珪皆陛下腹心大臣이요 宮人止後宮掃除隸耳
그리고 조서를 내려 모두 조사하게 하니 위징이 말하였다. “이정과 왕규는 모두 폐하의 심복 대신이고 궁녀는 다만 후궁에 있으면서 소제하는 하인일 뿐입니다.
方大臣出하면 官吏諮朝廷法式하고 歸來하면 陛下問人間疾苦
대신이 지방으로 나가면 그곳의 관리는 조정의 법도를 여쭈어보고, 돌아오면 폐하께서는 민간의 고통을 묻습니다.
夫官舍 固靖等見官吏之所이니 吏不可不謁也
관사官舍는 본래 이정 등이 이곳의 관리를 만나보던 곳이니 관리가 알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至宮人則不然하여 供饋之餘 無所參承이니이다
궁녀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서 음식을 바칠 때 이외에는 모시면서 받드는 것이 없습니다.
以此按吏하면 且駭天下耳目이라하다 帝悟하고 寢不問하다
이 사건으로 관리를 조사하면 또 천하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태종이 깨닫고는 명을 정지하여 묻지 않았다.
後宴丹霄樓 酒中謂長孫無忌曰
뒤에 태종이 단소루丹霄樓에서 연회를 할 때에 술을 마시다가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말하였다.
魏徵王珪事隱太子巢刺王時 誠可惡어늘 我能棄怨用才하니 無羞古人이라
위징魏徵왕규王珪은태자隱太子(이건성李建成)‧소랄왕巢刺王(이원길李元吉)을 섬길 때는 진실로 미워할 만하였는데 나는 원망을 버리고 인재를 등용하였으니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소.
然徵每諫我不從이면 我發言輒不卽應하니 何哉
그러나 위징은 매번 간언을 하여 내가 따르지 않는 경우에는, 내가 말을 하면 바로 순응하지 않으니 어찌 된 것이오.”
徵曰 臣以事有不可 故諫이어늘 若不從輒應이면 恐遂行之니이다
위징이 말하였다. “은 일에 옳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간언을 한 것인데 만약 따르지 않으시는데도 바로 순응하면 마침내 그러한 일을 행하실까 두렵습니다.”
帝曰 第卽應하고 須別陳論하면 顧不得
태종이 말하였다. “다만 바로 응낙하고 잠시 뒤에 따로 진술하여 논의하면 어찌 되지 않겠소.”
徵曰 昔舜戒群臣이어늘 하라하니
위징이 말하였다. “옛날 임금이 여러 신하들을 경계하기를 ‘내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다가 물러나서는 뒷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若面從可하고 方別陳論 此乃後言이니 非稷卨所以事堯舜也니이다
만약 폐하 앞에서는 순종하여 옳다고 하고 곧바로 따로 진술하여 의논함은 이것이 바로 뒷말을 하는 것이니, 후직后稷()이 을 섬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帝大笑曰 人言徵舉動疏慢이어늘 我但見其嫵媚耳로다
태종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사람들이 위징의 거동이 소루하며 오만하다고 말하는데 나는 다만 그 몸가짐의 아름다움을 볼 뿐이오.”
徵再拜曰 陛下導臣使言하시니 所以敢然이요 若不受하시면 臣敢數批리오
위징이 재배하고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신을 인도하여 말을 하게 하시니 감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말을 받아주지 않으신다면 신이 감히 자주 역린逆鱗을 저촉하겠습니까.”
七年 爲侍中하고 尙書省滯訟不決者 詔徵平治하다
정관貞觀 7년(633)에 위징魏徵시중侍中이 되었다. 상서성尙書省재결裁決하지 못하고 쌓여 있는 송사를 태종은 위징에게 조서를 내려 공평히 다스리게 하였다.
徵不素習法하고 但存大體하여 處事以情하니 人人悅服하니
위징은 평소에 법률에 익숙하지 못하고 다만 대체를 보존하였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기를 실정에 맞게 하니, 사람들이 기뻐하여 승복하였다.
進左光祿大夫鄭國公하다 多病하여 辭職하니 帝曰
위징은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정국공鄭國公으로 승진하였다. 위징이 병이 심하여 관직을 사퇴하니,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公獨不見金在鑛 何足貴邪리오 善冶鍛而爲器라야 人乃寶之
“공은 어찌 광석 속의 금을 보지 못하였소? 그것이 뭐가 귀할 것이 있겠소. 뛰어난 대장장이가 제련하여 기물로 만들어야만 사람들이 보물로 여기게 되오.
朕方自比於金하고 以卿爲良匠而加礪焉이라 卿雖疾이라도 未及衰하니 庸得便爾아하니
짐은 나 자신을 금에 비유하고 경을 뛰어난 대장장이로 여겨서 연마를 하겠소. 경이 비록 질병이 있더라도 아직 노쇠하지 않았으니, 어찌 갑자기 이렇게 그만둘 수 있소.”
徵懇請이어늘 數却愈牢하니라 乃拜特進하고 知門下省事하고
위징이 간절하게 청하자 태종이 누차 물리쳤고 위징은 견고히 사퇴하였다. 이에 특진特進(산관散官)으로 임명하고 문하성門下省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詔朝章國典하고 參議得失하고 祿賜國官竝同職事하다
조서를 내려 조정과 국가의 전장典章을 알리고 득실을 의론하는 데 참여하게 하고, 그의 봉록俸祿상사賞賜봉국관리封國官吏방합防閤을 모두 직사관職事官(실직實職 관리官吏)과 같게 하였다.
文德皇后旣葬 帝卽苑中作層觀하여 以望昭陵할새 引徵同升하니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장사 지내고 나서 태종太宗이 곧바로 후원後苑 안에 고층 누각을 지어 소릉昭陵(문덕황후 능)을 바라볼 적에 위징을 이끌고 함께 올라가니
徵孰視曰 臣眊昬이라 不能見하니이다
위징이 자세히 보며 말하였다. “신은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겠습니다.”
帝指示之커늘 徵曰 此昭陵邪잇가
태종이 가리켜 보게 하거늘 위징이 말하였다. “이 소릉 말입니까?”
帝曰 然하다
태종이 말하였다. “그렇소.”
徵曰 臣以爲陛下望獻陵이요 若昭陵 臣固見之니이다
위징이 말하였다.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고조 능)을 바라본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릉은 이 진실로 보았습니다.”
帝泣하고 爲毀觀하다 尋以定五禮하고 當封一子縣男한대 徵請封孤兄子叔慈하다
태종은 눈물을 흘리고 고층 누각을 헐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오례五禮를 정하고 한 명 아들에게 현남縣男을 봉해주게 되어 있었는데, 위징이 고아인 형의 아들 위숙자魏叔慈를 봉해주기 청하였다.
帝愴然曰 此可以勵俗이라하고 卽許之하다
태종이 애처로워하며 말하기를 “이는 풍속을 권장할 만하오.” 하고, 바로 허락하였다.
능陵을 바라보며 고층 누각을 허물게 하다(《제감도설帝鑑圖說》)능陵을 바라보며 고층 누각을 허물게 하다(《제감도설帝鑑圖說》)
後幸洛陽하여 次昭仁宮 多所譴責하다
후에 태종太宗낙양洛陽에 행차하여 소인궁昭仁宫에 머무를 때 꾸짖는 일이 많았다.
徵曰 隋惟責不獻食 或供奉不精한대 爲此無限하여 而至於亡하니이다
위징魏徵이 말하였다. “나라는 음식을 바치지 않거나 공양한 것이 정갈하지 못함을 꾸짖었는데, 이러기를 한없이 하여 멸망에 이르렀습니다.
故天命陛下代之하니 正當兢懼戒約이어늘 奈何令人悔爲不奢
그래서 하늘이 폐하에게 명하여 대신하게 하신 것이니 의당 조심하고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검약하셔야 하는데,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사치스럽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도록 하신단 말입니까.
若以爲足하면 今不啻足矣 以爲不足하면 萬此寧有足邪
만일 만족한다고 여긴다면 금일에만 만족하지 않을 것이고 만족하지 못하다고 여긴다면 이것보다 만 배 많아도 어찌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帝驚曰 非公이면 不聞此言이라하다
태종이 깜짝 놀라며 말하였다. “이 아니면 이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오.”
退又上疏曰 書稱이라하고 이라하며
위징魏徵은 물러나서 또 상소를 올렸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덕을 밝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하셨다.’라고 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셨다.’라고 하며,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윗사람이 일을 쉽게 하고 아랫사람이 알기를 쉽게 하면 형벌이 번거롭지 않다.’라고 하고, ‘임금이 의심이 많으면 백성이 의혹에 빠지고, 아랫사람이 알기 어렵게 하면 임금이 힘들다.’라고 했습니다.
夫上易事하고 下易知하면 君長不勞하고 百姓不惑이라 故君有一德하고 臣無二心이라
무릇 윗사람이 일을 쉽게 하고 아랫사람이 알기를 쉽게 하면, 임금이 힘들지 않고 백성은 의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한결같은 덕이 있고 신하는 두 가지 마음이 없습니다.
夫刑賞之本 在乎勸善而懲惡이니 帝王所與天下畫一 不以親疏貴賤而輕重者也니이다
무릇 형벌과 포상의 근본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데 있으니, 제왕이 천하 사람들과 하나로 하는 것은 친소親疎귀천貴賤을 가지고 경중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
今之刑賞 或由喜怒하며 或出好惡하니 喜則矜刑於法中하고 怒則求罪於律外하며
지금 형벌과 포상이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데에서 연유하며 혹은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에서 연유하니, 기쁜 사람을 만나면 법의 범위 안에서도 형벌을 주는 것을 가엾게 여기고 노여운 사람을 만나면 법률 밖에서까지 죄를 묻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가죽을 뚫어 깃이라도 찾아내듯 치켜세우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때를 씻어내 상처 흔적이라도 찾아내듯 헐뜯습니다.
형벌이 넘치면 소인의 도가 자라나고 포상이 그르치면 군자의 도가 소멸됩니다.
小人之惡不懲하고 君子之善不勸하고 而望治安刑措 非所聞也니이다
소인의 악이 징계되지 않고 군자의 선이 권장되지 않고서 정치의 안정과 형벌의 폐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且暇豫而言 皆敦尙孔老하되 至於威怒 則專法申韓하니이다
그리하여 한가하고 편안히 지내며 말할 때는 모두 공자孔子노자老子를 돈독히 숭상하지만 위엄과 노여움에 미칠 땐 오로지 신불해申不害한비자韓非子만을 본받습니다.
故道德之旨未弘하고 而鍥薄之風先搖
그러므로 도덕의 종지가 크게 펼쳐지지 않고 각박한 풍조가 먼저 일어납니다.
옛날 백주려伯州犂가 그 손을 들어 왕자를 가리키고 손을 내려 현윤縣尹을 가리키자 나라의 법이 폐단이 생겼고, 장탕張湯한 무제漢 武帝의 마음에 따라 형벌의 경중을 두자 나라의 형법이 잘못되는데, 하물며 임금이 자기 마음대로 높이고 낮추는 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頃者 罰人할새 或以供張不贍하고 或不能從欲하나니 皆非致治之急也니이다
일전에 사람들에게 형벌을 줄 때에 혹은 공양이 넉넉하지 못한 것을 들기도 하고 혹은 욕구를 따르지 않은 것을 들기도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정치를 잘하는 데에 있어 시급한 것이 아닙니다.
귀함은 교만함과 함께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교만함이 저절로 이르고, 부유함은 사치함과 함께할 것을 기약하지 않아도 사치함이 저절로 이른다는 것이 빈말이 아닙니다.
且我之所代 實在有隋
또 우리가 대신한 것은 실제로 나라입니다.
以隋府藏으로 況今之資儲하고 以隋甲兵으로 況今之士馬하고 以隋户口 況今之百姓하여 挈長度大인댄 曾何等級焉이리잇가
수나라 창고에 저장된 물자를 가지고 지금의 저장된 물자에 비교해보고, 수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지금의 병력에 비교해보고, 수나라의 호구수户口數를 가지고 지금의 백성과 비교해볼 때 그 길이를 따지고 크기를 견주면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然隋以富彊而喪 動之也 我以貧窮而安 靜之也
하지만 수나라가 부강함에도 패망한 것은 백성을 소동케 했기 때문이고, 우리가 빈궁함에도 평안한 것은 백성을 안정시켰기 때문입니다.
靜之則安하고 動之則亂 人皆知之 非隱而難見 微而難察也니이다
안정시키면 평안하고 소동시키면 혼란한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것으로, 숨어 있어 보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미묘해서 살피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不蹈平易之塗하고 而遵覆車之轍 何哉잇가 安不思危하고 治不念亂하고 存不慮亡也니이다
하지만 평이한 길을 밟아가지 않고, 전복된 과거 전례를 따르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편안할 때 위기를 생각하지 않고 다스려질 때 혼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생존할 때 멸망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方隋未亂 自謂必無亂하고 未亡 自謂必不亡이라
수나라가 혼란스럽지 않을 때 스스로 반드시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 망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 반드시 망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所以甲兵亟動하고 徭役不息하여 以至戮辱而不悟滅亡之所由也 豈不哀哉잇가
그 때문에 병력을 자주 동원하고 요역徭役을 멈추지 않아, 죽임과 능욕을 당할 처지에 이르렀음에도 멸망의 원인을 알아채지 못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겠습니까.
夫監形之美惡인댄 必就하고 監政之安危인댄 必取亡國이니이다
무릇 모양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살필 땐 반드시 잔잔한 물에 나아가고, 정사의 안정과 위기를 살필 땐 반드시 망국에서 취해옵니다.
그래서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라의 거울삼을 것이 멀리 있지 않고, ##하후夏后 시대에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臣願當今之動靜 以隋爲鑑하면 則存亡治亂 可得而知니이다
신이 바라옵건대 지금의 소동과 안정은 반드시 나라를 떠올려 거울로 삼는다면 생존과 멸망, 치세와 난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思所以危則安矣 思所以亂則治矣 思所以亡則存矣
위태로워지는 이유를 생각해낸다면 편안할 것이고, 혼란해지는 이유를 생각해낸다면 다스려질 것이며 패망하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낸다면 생존할 것입니다.
存亡之所在 在節嗜欲하고 省游畋하고 息靡麗하고 罷不急하고 愼偏聽하고 近忠厚하고 而已니이다
생존과 멸망의 소재는 사적인 기호와 욕구를 절제하고, 유람과 사냥을 줄이고, 화려한 궁궐의 건축을 멈추고, 시급하지 않은 일을 파하고, 한쪽 말만 듣는 것을 삼가하고, 충성스러우며 후덕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멀리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夫守之則易 得之實難이니 今旣得其所難인댄 豈不能保其所易리잇가
무릇 지키는 것은 쉽지만 취하는 것은 실로 어려우니, 지금 이미 어려운 것을 얻었는데 어찌 그 쉬운 것을 보존하지 못하겠습니까.
保之不固 驕奢淫泆有以動之也
보존한 것이 견고하지 못하면 교만과 사치와 음탕한 마음이 그것을 동요시키게 될 것입니다.”
帝宴群臣積翠池라가 酣樂賦詩하니
태종太宗이 여러 신하들과 적취지積翠池에서 연회하며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시를 지었다.
徵賦西漢한대 其卒章曰 終藉叔孫禮하여 이라하다
위징魏徵이 《서한西漢》을 지었는데 졸장卒章에 말하였다. “마침내 숙손통叔孫通에 도움을 받아 비로소 황제가 높은지를 알게 되었다.”
帝曰 徵言未嘗不라하다 他日
태종이 말하였다. “위징의 말은 나를 로 요약해주지 않은 적이 없다.”
從容問曰 比政治若何오하니
뒷날 조용히 물었다. “근래의 정치政治는 어떠하오.”
徵見久承平하여 帝意有所忽하고 因對曰
위징은 오랫동안 태평하여 태종의 마음에 소홀한 것이 있다고 간파하고 이어서 대답하였다.
陛下貞觀之初 導人使諫하고 三年以後 見諫者悅而從之러니
“폐하께서 정관貞觀의 초기에는 사람들에게 간언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3년 이후에는 간언을 하는 자를 보면 기뻐하며 따르시더니
比一二年하여는 勉彊受諫하고 而終不平也니이다
근래 1, 2년에는 억지로 간언을 받아들이고는 결국엔 평안해하지 않습니다.”
帝驚曰 公何物驗之
태종이 놀라며 말하였다. “은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오?”
對曰 陛下初卽位 論元律師死어늘 孫伏伽諫以爲法不當死라하니
위징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는 원율사元律師를 사형에 판결하자 손복가孫伏伽가 간언하기를 ‘형법에는 사형에 해당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陛下賜以蘭陵公主園한대 直百萬이라
폐하께서 난릉공주蘭陵公主(태종太宗의 딸)의 전원을 하사했는데 백만 전의 가치였습니다.
或曰 賞太厚라한대 答曰 朕卽位 未有諫者 所以賞之라하시니 此導人使諫也니이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포상이 너무 큽니다.’라고 하자, 대답하시기를 ‘짐이 즉위하고 나서 간언한 자가 없었소. 그래서 포상을 한 것이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사람들을 간언하도록 인도하신 예입니다.
어늘 有司得하고 劾其僞하여 將論死한대
뒤에 유웅柳雄나라 때 받은 자급資級을 멋대로 말하고 다니자, 유사有司가 듣고 그 위조僞造를 탄핵하여 유웅을 사형으로 판결하려고 하였는데,
戴冑奏罪當徒라하고 執之四五然後赦하고
대주가 ‘법에는 다만 도형徒刑에 처하는 것이 합당합니다.’라고 아뢰고 대주가 고집하기를 4, 5차례 하고 나서야 석방하였습니다.
謂冑曰 弟守法如此하면 不畏濫罰이라하시니 此悅而從諫也니이다
대주에게 말하기를 ‘다만 이와 같이 법을 지킨다면 벌을 함부로 줄 일을 염려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은 기쁘게 간언을 따르신 예입니다.
近皇甫德參上書言호대 修洛陽宮 勞人也 收地租 厚斂也 俗尙高髻 宮中所化也라하여늘
근래에 황보덕참皇甫德參이 올린 글에 ‘낙양궁洛陽宮을 고쳐 짓게 한 것은 백성을 피로케 한 것이고, 지조地租를 거두게 한 것은 거두기를 많이 한 것이며, 세속에서 여자 머리 쪽을 높게 함을 숭상하는 것은 궁중에서 교화시킨 것입니다.’라고 하자,
陛下恚曰 是子使國家不役一人하고 不收一租하고 宮人無髮이라야 乃稱其意라커늘
폐하께서 화를 내며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국가에서 한 사람도 부리지 않고 조금의 지조地租도 걷지 않고 궁녀들이 머리카락이 없게 되어야 그의 마음에 맞게 될 것이다.’라고 하시기에,
臣奏호대 人臣上書 不激切이면 不能起人主意 激切 卽近訕謗이니이다하니
신이 상주하기를 ‘신하의 상서上書가 격렬하고 절실하지 않으면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니, 격렬하고 절실함은 비방과 유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于時 陛下雖從臣言하여 賞帛罷之 意終不平하니 此難於受諫也니이다
당시에 폐하께서 비록 신의 말을 따르시어 황보덕참에게 비단을 상으로 내리시고 〈위의 세 가지 일을〉 그만두게 하셨지만 마음으로는 결국 편안치 않아 하였으니, 이것이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하신 것입니다.
帝悟曰 非公이면 無能道此者 人苦不自覺耳로다
”태종이 깨닫고 말하였다. “공이 아니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소.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괴로워지는 것이오.”
先是 帝作飛山宮한대 徵上疏曰
이보다 앞서 태종太宗비산궁飛山宮을 지었는데 위징魏徵이 상소를 올렸다.
隋有天下三十餘年 風行萬里하고 威憺殊俗하되 一旦舉而棄之하니이다
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30여 년 만에 위풍이 만 리까지 퍼지고 위세가 외국까지 진동하였으나 하루아침에 국가를 들어다 내버리게 되었습니다.
彼煬帝者 豈惡治安喜滅亡哉리오 恃其富彊하고 不虞後患也
수 양제隋 煬帝가 어찌 천하의 치안治安을 싫어하고 국가의 멸망을 기뻐하였겠습니까. 자신의 부강함만 믿고 후환을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驅天下하고 役萬物하여 以自奉養하고 子女玉帛是求하며 宮宇臺榭是飾하며 徭役無時하고 干戈不休하니
천하 사람들을 몰아세우고 모든 백성들을 노역시켜 자신을 봉양케 하고 남녀들을 뽑아오고 구슬과 비단을 구해오며, 궁전과 누각을 꾸미며, 요역을 아무 때나 시키고, 전쟁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外示威重이나 內行險忌하여 讒邪者進하고 忠正者退하니이다
표면으로는 엄중함을 과시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음험하며 시기함을 행하여 참소하며 간사한 자는 승진하고, 충성하며 정직한 자는 물러났습니다.
하고 人不堪命하여 以致殞匹夫之手하고 爲天下笑하니 聖哲乘機하사 拯其危溺하니이다
위와 아래가 서로를 속이고 백성들은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여 〈양제는〉 필부의 손에 죽게 되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성철聖哲(성상聖上)께서 기회를 틈타시어 백성의 위난을 구제하셨습니다.
今宮觀臺榭 盡居之矣 奇珍異物 盡收之矣 姬姜淑媛 盡侍於側矣 四海九州 盡爲臣妾矣니이다
지금 궁궐과 누대를 모두 차지하셨고, 진기한 보물들을 모두 거두어들이셨으며, 미녀들을 모두 곁에서 모시게 하고, 사해四海 구주九州 사람들을 모두 신첩臣妾으로 삼았습니다.
若能鑑彼所以亡하고 念我所以得하여 焚寶衣하며 毀廣殿하며 安處卑宮인댄 德之上也니이다
만약 저 나라가 천하를 잃은 까닭을 거울삼고 우리 나라가 천하를 얻은 까닭을 생각하시어 보배로운 옷을 불태우며 넓은 전각을 헐어버리며 낮은 궁실宮室에 편안히 거처하신다면, 이는 최상의 덕입니다.
若成功不廢하여 卽仍其舊하고 除其不急인댄 德之次也니이다
만약 이미 세워진 건물들을 헐지 않고 옛것을 그대로 쓰며, 긴요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신다면, 이는 차상次上의 덕입니다.
不惟王業之艱難하여 謂天命可恃라하여 因基增舊하고 甘心侈靡하여 使人不見德而勞役是聞인댄 斯爲下矣니이다
창업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천명天命만 믿으면 된다고 하여 그 터를 따라 옛것을 늘리고 사치를 마음으로 달게 여겨서 백성들에게 임금의 덕은 보지 못하고 노역을 시킨다는 소문만 듣게 되면 이는 최하가 됩니다.
以暴易暴하고 與亂同道하면 夫作事不法하여 後無以觀하리이다
포악한 자로 포악한 자를 대신하고 어지러운 자와 도를 함께하면 일에 법도가 없어서 후손들이 볼 것이 없을 것입니다.
人怨神怒하면 則災害生하고 災害生하면 則禍亂作하고 禍亂作 而能以身名令終者鮮矣니이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이 노하면 재해가 생기고, 재해가 생기면 화란禍亂이 일어나고, 화란이 일어남에 몸과 명예를 잘 마치는 자는 적습니다.
是歲 大雨하여 穀洛溢하고 毀宮寺十九하고 漂居人六百家하다
이해에 홍수가 나서 곡수穀水낙수洛水가 범람하고, 황궁과 관서官署가 열아홉 곳이 파괴되었으며, 표류한 사람의 가옥이 600여 채였다.
徵陳事曰 臣聞호니 爲國基於德禮하고 保於誠信이라하니
위징이 이 일을 진술하였다. “이 들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를 기초로 삼아야 하고 을 보존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誠信立하면 則下無二情하며 德禮形하면 則遠者來格이니이다
이 확립되면 신하들은 두 마음을 가지지 않으며 가 형성되면 먼 지방 사람들이 와서 귀순하게 됩니다.
故德禮誠信 國之大綱이니 不可斯須廢也니이다
그러므로 은 국가의 큰 강령이니 잠시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에 말하기를,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로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으로 한다.’라고 하였고,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다 죽지만,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설 수가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같은 말을 하면서도 믿게 하는 것은 믿음이 말에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고, 같은 명령을 내리면서도 실행하게 하는 것은 성의가 명령 이전에 존재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然則言而不行 言不信也 令而不從 令無誠也
그렇다면 말을 해도 시행되지 않는 것은 말에 믿음이 없어서이며,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 것은 명령에 성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不信之言 不誠之令 君子弗爲也니이다
믿음이 없는 말과 성의가 없는 명령을 군자는 하지 않습니다.
自王道休明으로 綿十餘載하여 倉廩愈積하고 土地益廣이나
왕도王道가 아름답게 밝아진 때로부터 10여 년이 이어져 창고는 갈수록 가득 차고 국토는 갈수록 넓어졌습니다만,
然而道德不日博하고 仁義不日厚 何哉
그럼에도 도덕道德은 날마다 넓어지지 않고 인의仁義가 날마다 두터워지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由待下之情 未盡誠信이라 雖有善始之勤이라도 而無克終之美
신하를 대하는 마음이 을 다하지 않아서, 비록 시작을 잘하는 근면이 있지만 마무리를 잘하는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故便佞之徒 得肆其巧하여 謂同心爲朋黨하고 告訐爲至公하고 彊直爲擅權하고 忠讜爲誹謗이라하니이다
그러므로 말을 잘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현란한 말주변을 부려서, 마음을 같이하는 이를 붕당朋黨한다고 하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 이를 지극히 공정하다고 하고, 강직한 이를 권력을 독점한다고 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이를 비방誹謗한다고 합니다.
謂之朋黨하면 雖忠信이나 可疑하고 謂之至公하면 雖矯僞 無咎하니
붕당이라고 인식되면 비록 충성과 신의가 있더라도 의심하고, 지극히 공정하다고 인식되면 비록 속이더라도 탓하는 일이 없으니,
彊直者 畏擅權而不得盡하고 忠讜者 慮誹謗而不敢與之爭하니이다
강직한 이는 권력을 독점한다는 비방을 두려워하여 강직한 말을 다하지 못하고, 충성스럽고 정직한 이는 비방을 한다는 평가를 염려하여 감히 상대하여 간쟁하지 못합니다.
熒惑視聽하고 鬱於大道하니 妨化損德 無斯甚者니이다
폐하의 이목耳目을 미혹시키고 대도大道를 막으니 교화敎化를 해치며 성덕聖德을 손상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今將致治인댄 則委之君子하되 得失或訪諸小人하니
지금 치적을 이루려고 하신다면 군자에게 일을 맡겨야 하는데, 일의 잘잘못은 혹은 소인에게 물으니,
是譽毀常在小人하여 而督責常加君子也
이는 헐뜯고 칭찬하는 것이 항상 소인에게 달려 있어서 책망하는 것이 항상 군자에게 더해지는 것입니다.
夫中智之人 豈無小惠리오마는 然慮不及遠이라 雖使竭力盡誠이나 猶未免傾敗어늘 況內懷姦利하여 承顔順旨乎
중간 등급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찌 작은 지혜가 없겠습니까마는 생각이 멀리 미치지 못하므로 비록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더라도 오히려 패망을 면치 못하는데, 하물며 마음속에 간사함과 이익을 품고 있으면서 윗사람의 뜻에 따라 영합하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군자君子로서 하지 못한 자는 있어도 소인小人으로서 한 자는 없다.’ 하였습니다.
然則君子不能無小惡이나 惡不積하여 無害於正하고
그렇다면 군자는 작은 악이 없을 수 없으나 악이 쌓이지 않아 정도를 해치지 않고,
小人時有小善이나 善不積하여 不足以忠이라
소인은 때로 작은 선이 있지만 선이 쌓이지 않아 충실함이 부족합니다.
今謂之善人矣라하고 復慮其不信하면 何異立直木而疑其景之曲乎
지금 선인善人이라고 말하고 다시 그가 미덥지 않을까 염려한다면 어찌 곧은 나무를 세워놓고 그 그림자가 굽을까 의심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故上不信하면 則無以使下하고 下不信하면 則無以事上하니 信之爲義大矣
그러므로 임금이 믿지 못하면 신하를 부릴 수 없고 신하가 믿지 못하면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믿음의 도리가 큰 것입니다.
옛날에 제 환공齊 桓公관중管仲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술을 잔 속에서 썩고 고기가 도마에서 썩게 하려고 하는데 이리하면 패업霸業을 이루는 데 해로움이 없겠소?’
管仲曰 此固非其善者 然無害霸也니이다
관중管仲이 말하였습니다. ‘이는 진실로 훌륭한 것은 아닙니다만 패업엔 해가 없을 것입니다.’
公曰 何如而害霸
환공이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패업에 해가 되오?’
曰 不能知人 害霸也 知而不能用 害霸也 用而不能任 害霸也 任而不能信 害霸也 旣信而又使小人參之 害霸也라하니이다
관중이 말하였습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이며, 알아보고도 등용하지 않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이며, 등용하고도 맡기지 않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이며, 맡기고도 믿지 않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이며, 믿고 나서도 또 소인에게 끼어들도록 하는 것이 패업을 해치는 것입니다.’
나라 중항목백中行穆伯고성鼓城을 공격하여 1년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자
饋間倫曰 鼓之嗇夫 間倫知之하니 請無疲士大夫하고 而鼓 可得이라하되
궤간륜饋間倫이 말하였습니다. ‘고성의 색부嗇夫(향관鄉官)를 제가 잘 아니 사대부士大夫를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고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청하였으나,
穆伯不應이어늘 左右曰 不折一戟하고 不傷一卒하여 而鼓 可得이어늘 君奚不爲아하니
중항목백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측근들이 말하였습니다. ‘창 한 자루도 부러뜨리지 않고 병졸 한 사람도 상하게 하지 않고서도 고성을 얻을 수 있는데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지 않으십니까.’
穆伯曰 間倫之爲人也 佞而不仁하니 若使間倫下之하면 吾不可以不賞이어늘
중항목백이 말하였습니다. ‘궤간륜의 사람됨이 아첨을 잘하고 어질지 않소. 만약 궤간륜이 함락시키면 내가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소.
若賞之하면 是賞佞人也 佞人得志하면 是使晉國으로 捨仁而爲佞이라
그런데 만약 상을 주게 된다면 이는 아첨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게 되는 것이오. 아첨하는 사람이 뜻을 얻게 되면 이는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을 버리고 아첨하게 하는 것이오.
雖得鼓 安用之리오하니이다
비록 고성을 얻더라도 어디에 쓰겠소.’
夫穆伯 列國大夫 管仲 霸者之佐로되 猶能愼於信任하고 遠避佞人이어늘 況陛下之上聖乎
중항목백은 열국列國대부大夫이며 관중은 패자霸者의 보좌로되 오히려 믿고 맡기는 것을 신중히 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피하였거늘 하물며 위대한 성인이신 폐하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若欲令君子小人으로 是非不雜인댄 必懷之以德하고 待之以信하고 厲之以義하고 節之以禮하여
만약 군자君子소인小人의 시시비비가 뒤섞이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덕으로 품어주고 믿음으로 대우하고 의리로 격려하고 예절로 절제한
然後善善而惡惡하고 審罰而明賞하면 無爲之化 何遠之有리오
다음에 선한 사람을 좋아하고 악한 사람을 미워하며 형벌을 잘 살피고 포상을 분명히 한다면, 무위無爲의 교화가 어찌 먼 곳에 있겠습니까.
善善而不能進하며 惡惡而不能去하고 罰不及有罪하며 賞不加有功하면 則危亡之期 或未可保니이다하니
선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등용하지 않으며 악한 사람을 미워하면서도 제거하지 못하고 벌이 죄가 있는 사람에게 미치지 않으며 포상이 공이 있는 사람에게 가해지지 않는다면 위기와 멸망의 시기가 오는 것도 혹은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帝手詔嘉答하니라 於是 廢明德宮玄圃院하여 賜遭水者하다
태종太宗은 조서를 친히 써서 내려 훌륭하다고 답하였다. 이에 명덕궁明德宮현포원玄圃院을 없애버리고 수재水災를 만난 자들에게 하사하였다.
他日 宴群臣할새 帝曰 貞觀以前 從我定天下하고 間關草昧 玄齡功也
뒷날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할 때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정관貞觀 이전에 나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고 어려움을 겪으며 국가를 창업한 것은 방현령房玄齡의 공로요,
貞觀之後 納忠諫하여 正朕違하여 爲國家長利 徵而已
정관 이후에 충간忠諫을 바쳐 짐의 과실을 바로잡고 국가를 오래도록 이롭게 한 것은 위징魏徵뿐이다.
雖古名臣인들 亦何以加리오하고
비록 옛날의 명신名臣인들 또한 어떻게 이보다 더하겠소.”
親解佩刀하여 以賜二人하다
태종이 직접 패도佩刀을 풀어서 두 사람에게 내려주었다.
帝嘗問群臣호대 徵與諸葛亮孰賢
태종이 일찍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위징과 제갈량諸葛亮 중에서 누가 더 현명하오?”
제갈량諸葛亮(《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讚》)제갈량諸葛亮(《역대고인상찬歷代古人像讚》)
岑文本曰 亮才兼將相하여 非徵可比니이다
잠문본岑文本이 대답하였다. “제갈량의 재능은 장수와 재상을 겸하여서 위징이 비견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帝曰 徵蹈履仁義하여 以弼朕躬하여 欲致之堯舜하니 雖亮無以抗이라
태종이 말하였다. “위징은 인의仁義를 시행하며 을 보필하여 짐을 요순堯舜에 이르게 하려고 하였으니 비록 제갈량이라도 견줄 수가 없소.”
時上封者衆한대 或不切事 帝厭之하고 欲加譙黜이어늘
당시에 봉사封事를 올리는 자가 많았는데 어떤 경우는 실정에 맞지 않았다. 태종이 그들을 싫어하고 질책하여 내쫓으려 하였는데,
徵曰 古者 欲聞己過 封事 其謗木之遺乎니이다
위징이 말하였다. “옛날에 비방목誹謗木을 세워둔 것은 임금 자신의 과실을 들으려 한 것이니 봉사封事는 비방목의 유풍遺風입니다.
陛下思聞得失하면 當恣其所陳이니이다
폐하께서 잘잘못을 들으려고 생각하신다면 진술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게 해야 합니다.
言而是乎 爲朝廷之益이요 非乎라도 無損於政이니이다 帝悅하고 皆勞遣之하다
말한 것이 옳으면 조정에 이익이 되고 말한 것이 잘못되어도 정사에 손해가 없습니다.”태종이 기뻐하고 모두 위로한 뒤에 보냈다.
十三年 阿史那結社率作亂하고 雲陽石然하고 自冬至五月 不雨하니 徵上疏極言曰
정관貞觀 13년(639)에 아사나결사솔阿史那結社率이 반란을 일으키고 운양雲陽에서 돌이 불타고 겨울부터 5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니, 위징魏徵이 상소를 올려 지극하게 간언을 하였다.
臣奉侍帷幄十餘年 陛下許臣以仁義之道하시고
“신이 궁중에서 폐하를 모신 지 10여 년 동안에 폐하陛下께서는 에게 인의仁義를 시행하도록 허락해주시고
守而不失하시고 儉約朴素 終始弗渝하시니 德音在耳하여 不敢忘也니이다
굳게 지켜서 잃지 않으시고 검약儉約소박素朴함을 처음부터 끝까지 바꾸지 않으시니 폐하의 덕음德音이 귓가에 남아 있어서 감히 잊지 못하겠습니다.
頃年以來 寖不克終하니 謹用條陳하여 裨萬分一하니이다
근년 이래로 점점 끝을 잘 맺지 못하게 되었으니 삼가 조목조목 진술하여 만분萬分의 일이라도 도움이 될까 합니다.
陛下在貞觀初 清淨寡欲하여 化被荒外러니
폐하께서 정관貞觀 초기에는 청정淸靜하고 욕심이 없으셔서 교화가 먼 변방까지 크게 미쳤습니다.
今萬里遣使하여 市索駿馬하고 幷訪怪珍이니이다
지금 폐하께서는 만리萬里에 사신을 보내 준마駿馬를 찾아 사오게 하고, 아울러 진기한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옛날에 한 문제漢 文帝천리마千里馬를 물리쳐 보냈고, 진 무제晉 武帝는 꿩 머리털로 만든 갖옷을 불태웠습니다.
陛下居常論議 遠輩堯舜이어늘 今所爲 更欲處漢文晉武下乎 此不克終一漸也니이다
폐하께서 평상시에 논의論議함이 멀리로는 요순堯舜과 짝하시는데, 지금 하시는 것은 다시 한 문제와 진 무제의 아래에 처하려고 하십니까.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첫 번째 조짐입니다.
자공子貢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다스림의〉 두려움이 마치 썩은 밧줄로 여섯 마리 말을 모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공子貢(《성현상찬聖賢像讚》)자공子貢(《성현상찬聖賢像讚》)
子貢曰 何畏哉잇가
자공이 ‘무엇이 그렇게 두렵습니까.’라고 묻자,
對曰 不以道導之 則吾讐也 若何不畏리오하시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도리로 인도하지 않으면 나의 원수가 되니,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陛下在貞觀初 護民之勞하며 喣之如子하여 不輕營爲러니
폐하께서 정관貞觀 초기에는 백성의 노고를 안타깝게 여기며, 백성을 따뜻이 대하기를 자식과 같이 하여 가볍게 건축 공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頃旣奢肆하여 思用人力하여 乃曰 百姓無事則易驕하고 勞役則易使라하시니
근래 이래로 사치하고 방종해져서 인력을 쓰기를 생각하여 이에 말씀하시기를, ‘백성은 일이 없으면 교만하기 쉽고 노역을 시키면 부리기가 쉽다.’라고 하십니다.
自古未有百姓逸樂而致傾敗者 何有逆畏其驕而爲勞役哉 此不克終二漸也니이다
예로부터 백성의 안락과 즐거움으로 인해서 나라가 기울고 패망에 이른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어찌 백성들이 교만해질 것을 미리 두려워하여 일부러 노역을 시키려 하십니까.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두 번째 조짐입니다.
陛下在貞觀初 役己以利物이러니 比來縱欲以勞人하니
폐하께서 정관 초기에는 자신을 수고롭게 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는 욕심을 마음대로 부려 백성을 수고롭게 하니,
雖憂人之言 不絕於口 而樂身之事 實切諸心하니
비록 백성을 걱정한다는 말은 입에서 끊이지 않으나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 실로 마음에 절실합니다.
無慮營構하고 輒曰 弗爲此 不便我身이라하시니 推之人情 誰敢復爭이리오
건축 공사의 결과를 우려하지 않고 번번이 말하기를 ‘이것을 하지 않으면, 내 몸을 편히 하지 못한다.’라고 하시니, 인정人情을 미루어 볼 적에 누가 감히 다시 간쟁할 수 있겠습니까.
此不克終三漸也니이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세 번째 조짐입니다.
在貞觀初 親君子하며 斥小人이러니 比來輕褻小人하고 禮重君子하니
정관貞觀 초기에는 군자를 친애하며 소인을 멀리하셨는데, 근래에는 소인을 가볍게 가까이하고, 군자를 예의상으로만 소중하게 여깁니다.
重君子也 恭而遠之하고 輕小人也 狎而近之하니
군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공손하되 멀리하고, 소인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친하면서 가까이합니다.
近之 莫見其非하고 遠之 莫見其是하나니
가까이하면 그 잘못을 알지 못하고, 멀리하면 그 옳음을 알지 못하니,
莫見其是하면 則不待間而疏하고 莫見其非하면 則有時而昵하니
옳음을 알지 못하면 이간시키지 않아도 멀어지고, 잘못을 알지 못하면 때때로 친밀해집니다.
昵小人疏君子而欲致治 非所聞也 此不克終四漸也니이다
소인을 친밀히 하고 군자를 멀리하면서 치세를 이루려고 한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네 번째 조짐입니다.
在貞觀初 한대
정관 초기에는 이상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고 무익無益한 일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而今難得之貨 雜然竝進하고 玩好之作 無時而息이라
그런데 지금 얻기 어려운 재화가 섞여서 모두 올라오고 노리개를 만드는 것이 쉴 때가 없습니다.
上奢靡而望下朴素하고 力役廣而冀農業興 不可得已 此不克終五漸也니이다
임금이 사치를 하면서 신하들이 소박하기를 바라고 부역을 확장하면서 농업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다섯 번째 조짐입니다.
貞觀之初 求士如渴하여 賢者所舉 卽信而任之하고 取其所長하여 常恐不及이러니
정관貞觀 초기에는 선비를 구하기를 갈증이 나는 것처럼 하여, 현인이 천거한 이는 바로 믿어 임용하였고, 그 장점을 취하면서도 항상 〈그 장점을〉 다 받아들이지 못할까 염려하셨습니다.
比來由心好惡하여 以衆賢舉而用이라가 以一人毀而棄
근년 이래로 마음에 좋고 나쁨에 따라서, 많은 현인들의 천거로 임용했다가 한 사람의 비방으로 내쫓기도 하며,
雖積年任而信이라도 或一朝疑而斥하니
비록 여러 해 동안 맡겨 믿고 있더라도 혹은 하루아침에 의심하여 배척하기도 하셨습니다.
夫行有하고 事有成迹하니 一人之毀 未必可信이요 積年之行 不應頓虧니이다
행실은 본래 행하던 것이 있고 일은 이루어진 자취가 있으니, 한 사람의 헐뜯음은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해 동안 쌓은 행실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陛下不察其原하고 以爲臧否하시니
폐하께서는 그 근원을 살피지 않고 좋고 나쁨을 판단하십니다.
使讒佞得行하고 守道疏間이니 此不克終六漸也니이다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마음대로 행동하게 하고 도를 지키는 자들을 점점 소원하게 하시니,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여섯 번째 조짐입니다.
在貞觀初 高居深拱하사 無田獵畢弋之好러니
정관 초기에는 높은 곳에서 편안히 계시면서 사냥하고 그물질하고 주살질하는 즐거움이 없었습니다.
數年之後 志不克固하여 鷹犬之貢으로 遠及四夷하고 晨出夕返하여 馳騁爲樂하니
그러나 수년 후에는 그 뜻을 굳건히 하지 못하여 매나 개의 공물을 바치는 대상이 멀리 사방 오랑캐에게까지 미쳤고, 사냥을 하러 새벽에 나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와서 말을 달리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시니,
變起不測하면 其及救乎잇가 此不克終七漸也니이다
헤아리지 못한 변고가 일어나면 어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일곱 번째 조짐입니다.
在貞觀初 遇下有禮하며 群情上達하니
정관貞觀 초기에는 신하를 대우하시는 데 가 있었으며 신하들의 마음이 황제께 통하였습니다.
今外官奏事 顔色不接하고 間因所短하여 詰其細過하니
지금 지방관이 일을 진술할 때에 용안을 뵐 수 없고 간혹 단점으로 인하여 세세한 잘못까지 문책하시니,
雖有忠款이라도 而不得申하니 此不克終八漸也니이다
비록 충성스러운 생각이 있다고 하여도 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여덟 번째 조짐입니다.
在貞觀初 孜孜治道하여 常若不足이러니
정관 초기에는 부지런히 도리로 다스려서 항상 부족한 듯이 하셨습니다.
比恃功業之大하고 負聖智之明하여 長慠縱欲하여 無事興兵하고 問罪遠裔하니
근년에는 공적의 큰 것을 믿고 성지聖智의 밝음을 자부하시어 오만함을 키우고 욕망을 방종하게 부려서 일이 없는데 병사를 일으키고 먼 변방의 나라에 죄를 물으시니,
親狎者 阿旨不肯諫하고 疏遠者 畏威不敢言하니
친압한 자는 폐하의 뜻에 아부하여 기꺼이 간언하려 하지 않고, 소원한 자는 위엄이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합니다.
積而不已 所損非細하니 此不克終九漸也니이다
이것이 쌓여 그치지 않으면 손상되는 것이 작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아홉 번째 조짐입니다.
貞觀初 頻年霜旱하여 畿內戶口 竝就關外 攜老扶幼하여 來往數年이로되
정관貞觀 초기에 해마다 서리가 내리고 가뭄이 들어 경기京畿 안의 호구戶口가 모두 관외關外(관동關東)로 옮겨갈 적에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고서 오고 간 것이 수년數年이었지만,
卒無一戶亡去하니 此由陛下矜育撫寧이라 故死不攜貳也니이다
끝내 한 도 도망하여 떠난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폐하께서 백성을 불쌍히 여기고 길러주고 어루만져주고 편안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죽음에 이르더라도 두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比者疲於徭役한대 關中之人 勞弊尤甚하니
그러나 근년에는 요역徭役에 피로한데 그중에서도 관중의 사람들의 노고와 피폐함이 더욱 심합니다.
雜匠當下 顧而不遣이라 正兵番上 復別驅任하고 하니 遞子背望於道
각종 기술자들은 당번을 쉬는 날에도 도리어 보내주지 않습니다. 정규 군병들은 당번에 들었을 때 다시 별도로 부려지고, 〈화시和市로 인해〉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이 가게에 계속 이어지니, 물건을 운송하는 장정들이 길에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百姓之心 恐不能如前日之怗泰하리니 此不克終十漸也니이다
만약 한 톨 곡식도 거두지 못하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예전처럼 편안하지 못할까 우려됩니다. 이것이 끝을 잘 맺지 못할 열 번째 조짐입니다.
‘화복은 문이 없고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라고 하고, ‘사람에게 죄가 없으면, 요사스러움이 망령되게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今旱熯之災 遠被郡國하고 凶醜之孽 起於轂下하니
금년 가뭄의 재앙은 멀리 군국郡國까지 피해를 주었고 흉악범들의 재앙이 제도帝都에서 일어났습니다.
此上天示戒 乃陛下恐懼憂勤之日也
이는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것이니, 폐하께서 두려워하며 근심하고 근면해야 할 때입니다.
千載休期 時難再得이어늘 明主可爲而不爲하시니 臣所以鬱結長歎者也로소이다
천 년에 한 번 있는 좋은 기회는 다시 얻기 어렵거늘 명철하신 군주께서 행할 수 있는데도 행하지 않으시니, 신이 가슴이 답답하여 길게 탄식하는 이유입니다.”
疏奏 帝曰 朕今聞過矣 願改之하여 以終善道 有違此言인댄 當何施顔面與公相見哉리오
상소문이 올라가자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짐이 지금 과오를 들었으니, 원컨대 과오를 고쳐서 선한 도를 잘 끝맺도록 할 것이요, 이 말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어떤 얼굴을 하고 공을 만나겠소.
方以所上疏 列爲屏障하여 庶朝夕見之하고 兼錄付史官하여 使萬世知君臣之義라하고
올린 이 상소를 병풍으로 만들어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고, 겸하여 사관에게 기록하여 붙이게 하여 만세토록 군신君臣의 의리를 알게 하겠소.”
因賜黃金十斤 馬二匹하다
이어서 위징魏徵에게 황금 열 근과 말 두 필을 하사하였다.
高昌平하고 帝宴兩儀殿할새 歎曰 高昌若不失德하면 豈至於亡
고창高昌이 평정되고 태종太宗양의전兩儀殿에서 연회를 할 때 탄식하여 말하였다. “고창국高昌國이 만약 덕을 잃지 않았다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소.
然朕亦當自戒하여 不以小人之言而議君子하여 庶幾獲安也라하다
그러나 짐 또한 마땅히 스스로 경계하여 소인의 말을 듣고 군자를 의논하지 않아 편안함을 얻기를 바라겠소.”
위징魏徵이 말하였다. “옛날에 제 환공齊 桓公관중管仲포숙아鮑叔牙영척甯戚과 함께 네 사람이 술을 마실 적에 환공이 포숙아에게 말하였습니다. ‘어찌 일어나 과인을 위해 오래 살라고 빌지 않는가?’
포숙아가 술잔을 들고 일어나 말하였습니다. ‘원컨대 공께서는 망명하여 땅에 살던 때를 잊지 마시어, 관중으로 하여금 나라에 갇혀 묶여 있던 때를 잊지 않게 하고, 영척으로 하여금 수레 밑에서 소에게 여물을 먹이던 때를 잊지 않게 하소서.’
桓公避席而謝曰 寡人與二大夫 能無忘夫子之言이면 則社稷不危矣라하니이다
환공은 자리를 피하고 사례하여 말하였습니다. ‘과인과 두 대부가 부자夫子(포숙아)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사직이 위태롭지 않을 것이오.’”
帝曰 朕不敢忘布衣時하리니 公不得忘叔牙之爲人也하라
태종이 말하였다. “짐이 평민이었을 때의 일을 감히 잊지 않을 것이니, 공은 포숙아의 사람됨을 잊어서는 안 되오.”
帝遣使者하여 至西域하여한대 未還 又遣使賷金帛하여 諸國市馬하니
태종太宗이 사신을 보내어 서역西域에 이르러 섭호葉護가한可汗에 책립하게 했는데 채 돌아오기도 전에 또다시 사신을 보내 황금과 비단을 가져가서 각국에서 말을 사오게 하자,
徵曰 今立可汗未定 卽詣諸國市馬하시니 彼必以爲意在馬 不在立可汗이리이다
위징魏徵이 간언하였다. “지금 가한을 책립하는 일이 확정되기도 전에 바로 서역 여러 나라에 나아가 말을 사오도록 하시니, 저들은 반드시 서역에 사신을 보낸 목적이 말을 사려는 데 있지, 가한을 책립하는 데에 있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可汗得立이라도 必不懷恩이요 諸蕃聞之하면 以中國薄義重利하니 未必得馬而先失義矣라하니이다
가한이 책립된다고 하더라도 분명 은혜로 여기지 않을 것이고, 여러 이민족異民族 나라들이 이 소문을 듣게 되면 중국中國이 의리를 박하게 여기고 이익을 중시한다고 할 것입니다. 말을 얻는다고 기필할 수도 없고 먼저 의리를 잃게 될 것입니다.
위 문제魏 文帝(조비曹丕)가 서역西域대주大珠를 사오려 하자 소칙蘇則이 말하기를 ‘은혜가 천하에 미치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오겠지만 일부러 구해서 얻게 되면 귀한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陛下可不畏蘇則言乎아하니 帝遂止하다
폐하께서 소칙의 바른말을 두려워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태종이 마침내 멈추게 하였다.
是後右僕射缺하여 欲用徵한대 徵讓하니 得不拜
이후에 우복야右僕射가 공석이 되어 위징魏徵을 임용하려고 하자 위징이 사양하니 임명하지 못하였다.
皇太子承乾與魏王泰交惡이어늘 帝曰
황태자皇太子 이승건李承乾위왕魏王 이태李泰의 관계가 악화되자 태종이 말하기를
當今忠謇貴重無踰徵하니 我遣傅皇太子하여 一天下之望하여 羽翼固矣라하고
“당금에 충성스럽고 정직하면서 귀중貴重한 사람으로 위징보다 뛰어난 이는 없소. 나는 그를 황태자皇太子의 스승으로 보내 천하의 기대를 하나로 모아서 태자의 보좌를 공고하게 할 것이오.”라고 하고,
卽拜太子太師하다 徵以疾辭한대 詔答曰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임명하였다. 위징이 병으로 사양하니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漢太子以爲助하니 我賴公 其義也 公雖臥 可擁全之하라
나라 태자太子상산사호商山四皓의 도움을 받았으니, 내가 공을 의지하는 것은 그러한 뜻이오. 공이 비록 병석에 누워 있지만 태자를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을 것이오.”
十七年 疾甚하다
정관貞觀 17년(643)에 위징魏徵의 병이 심해졌다.
徵家初無正寢이러니 帝命輟小殿하고 材爲營構한대 五日畢이라
위징의 집에는 원래 정침正寢이 없었는데, 태종太宗이 명령하여 작은 전각을 짓는 것을 멈추게 하고 그 재목으로 위징의 정침을 지어주었는데 5일 만에 공사를 끝냈다.
幷賜素褥布被하여 以從其尙이라
아울러 흰 요와 베 이불을 내려주어서 그가 바라는 것을 따라주었다.
令中郎將宿其第하여 動靜輒以聞하고 藥膳賜遺無算하니 中使者綴道
중낭장中郎將에게 위징의 집에 숙직하게 하여 위징의 동정을 즉시 보고하게 하고 약과 반찬을 내려보낸 것이 셀 수 없이 많았으니, 중사中使(심부름하는 관원)가 도로에 이어졌다.
帝親問疾하여 屏左右하고 語終日乃還이라
태종이 친히 문병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대화를 종일 하고서야 돌아갔다.
後復與太子至徵第어늘 徵加朝服하고 拖帶하다
후에 다시 태자와 함께 위징의 집에 이르렀는데 위징이 조복을 몸에 덮고 그 위에 띠를 얹어놓았다.
帝悲懣하고 拊之流涕하며 問所欲한대 對曰
태종이 슬픔에 젖어 번민하여 그를 어루만지고 눈물을 흘리며 원하는 것을 묻자 위징이 대답하였다.
“과부가 베 짜는 씨실이 모자라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천자의 나라인 나라가 망할까를 걱정하는 것과 같은 심정입니다.”
帝將以衡山公主降其子叔玉하다 時主亦從이어늘
태종太宗이 장차 형산공주衡山公主위징魏徵의 아들 위숙옥魏叔玉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다. 이때 형산공주가 또한 따라와 있었는데,
帝曰 公彊視新婦하라하니 徵不能謝하다
태종이 말하였다. “공은 억지로라도 신부를 살펴보시오.” 위징은 사양하지 못하였다.
是夕 帝夢徵若平生이어늘 及旦하다
이날 저녁에 태종의 꿈에 위징이 평소와 같았는데 아침에 이르러 죽었다.
帝臨哭하고 爲之慟하며 罷朝五日하다 太子舉哀西華堂하다
태종이 문상하여 곡을 하고 그를 위해 애통해하며 5일 동안 조회를 쉬었다. 태자太子서화당西華堂에서 곡을 하였다.
詔內外百官皆赴喪하고 贈司空相州都督하고 諡曰文貞이라하고
조서를 내려 내외內外 백관百官조집사朝集使에 모두 문상하게 하고, 위징에게 사공司空 상주도독相州都督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鼓吹四十人하여 陪葬昭陵하다
우보羽葆를 든 의장대,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 반검班劍을 든 무사로 40인을 보내고 소릉昭陵배장陪葬하게 하였다.
將葬 其妻裴辭曰 徵素儉約이어늘 今假一品禮하시고 儀物褒大하니 非徵志니이다
막 장사를 지내려고 하는데 위징의 처 배씨裴氏가 사양하며 말하였다. “위징은 평소에 검소儉素하고 절약節約하였는데 지금 1품관品官장례葬禮를 주시고 의장의 물건이 크고 광대하니 위징의 뜻이 아닙니다.”
見許하여 乃用素車하고 白布幨帷하고하다
태종의 허락을 받아 이에 소거素車를 사용하고 흰 천으로 수레의 유막帷幕을 만들고 도거塗車추령芻靈을 갖추지 않았다.
帝登苑西樓하여 望哭盡哀하고 晉王奉詔致祭하다
태종이 원서루苑西樓에 올라가 바라보고 곡하며 슬픔을 지극히 하고, 진왕晉王(이치李治, 당 고종唐 高宗)이 조서를 받들어 제사를 지냈다.
帝作文于碑하여 遂書之하고 又賜家封戶九百하다
태종이 〈위징을 위하여〉 비문을 지어 마침내 글씨까지 썼고, 그의 집에 봉호封戶 900를 내려주었다.
帝後臨朝歎曰 以銅爲鑑하면 可正衣寇하고 以古爲鑑하면 可知興替하고 以人爲鑑하면 可明得失이라
태종太宗은 그 후에 조회에 임하여 탄식하여 말하였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하게 할 수 있고, 옛일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고,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잘잘못을 알 수 있소.
朕嘗保此三鑑하여 內防己過러니 今魏徵逝하여 一鑑亡矣
짐은 일찍이 이 세 종류의 거울을 보유해서 안으로 나의 과실을 예방하였는데, 지금 위징魏徵이 세상을 떠나 거울 하나를 잃었소.
朕比使人至其家하여 得書一紙하니
짐이 근래에 사람을 시켜 그의 집에 가게 하여 글 한 장을 얻었소.
始半藁어늘 其可識者曰 天下之事 有善有惡하여 任善人則國安하고 用惡人則國弊
처음 반쯤 쓴 초고草稿인데 그중에 알아볼 만한 것에 이르기를, ‘천하天下의 일은 선함이 있고 악함이 있어서 선한 자를 임용하면 나라가 편안하고 악한 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피폐해진다.
公卿之內 情有愛憎하여 憎者惟見其惡하고 愛者止見其善이라
공경公卿들 중에도 마음에 사랑하고 미워함이 있어서 미워하는 자는 오직 그의 악만을 보고 사랑하는 자는 다만 그의 선만을 본다.
愛憎之間 所宜詳愼이라
사랑과 미움의 사이에는 자세하고 신중히 해야 한다.
하여 하면 可以興矣라하니 其大略如此
만약 사랑을 하되 그의 악을 알며, 미워하되 그의 선을 알아서, 간사한 자를 물리치는 데 의심하지 않으며 어진 자를 임용하는 데 시기하지 않으면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 하였으니 그 대략이 이와 같소.
朕顧思之하니 恐不免斯過 公卿侍臣 可書之於笏하여 知而必諫也라하다
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런 과실을 면치 못할까 두렵소. 공경公卿시신侍臣들은 에 이 글을 써서 이러한 일을 알게 되면 반드시 간언해야 할 것이오.”
徵狀貌不逾中人이어늘 有志膽하여 每犯顔進諫 雖逢帝甚怒라도 神色不徙하여 而天子亦爲霽威
위징魏徵의 겉모습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았는데 담대한 뜻이 있어 항상 임금을 마주하여 간언을 할 때마다 비록 임금의 심한 노여움을 만나더라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아서 천자도 노여움을 거두었다.
議者謂不能過라하다 嘗上冢還하여
의론하는 이들은 맹분孟賁하육夏育이라도 위징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일찍이 성묘를 하고 돌아와
奏曰 向聞陛下有關南之行하여 旣辦而止 何也오하니
아뢰었다. “지난번에 들으니 폐하께서 관남關南으로 행차하려고 하여 이미 준비를 해놓고 그친 것은 무엇입니까?”
帝曰 畏卿하여 遂停耳라하다 喪亂後 典章湮散하니
태종太宗이 말하였다. “경이 두려워서 마침내 정지하였소.”초기에는 전란이 끝난 뒤라 전장典章이 흩어지고 없어졌다.
徵奏引諸儒校集秘書하여 國家圖籍粲然完整이라
위징이 상주하여 여러 선비들을 추천하여 비서秘書를 교정하고 수집하여 국가國家도적圖籍이 찬란하게 완비되었다.
嘗以小戴禮綜彙不倫으로 更作類禮二十篇하여 數年而成이라
일찍이 《소대례小戴禮》를 모아 편집한 것이 혼란했기 때문에 다시 《유례類禮》 20을 지어 몇 년 만에 완성하였다.
帝美其書하고 錄寘內府하니라
태종이 이 책을 찬미하고 내부內府에 초록하여 보존하게 하였다.
帝本以兵定天下하니 雖已治라도 不忘經略四夷也
태종은 본래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이미 치세가 되어서도 사방 오랑캐를 경략할 것을 잊지 않았다.
故徵侍宴하면 則俛首不顧하고하면 則諦玩無斁하니 舉有所諷切如此
그러므로 위징이 연회에서 태종을 모실 적에 〈파진무덕무破陣武德舞〉를 연주하면 고개를 숙여 돌아보지 않았고 〈경선악慶善樂〉이 연주되면 자세하게 감상하여 싫어함이 없었으니 대체로 풍간諷諫을 절실하게 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徵亡 帝思不已하고觀畫像하고 賦詩悼痛하니 聞者媢之하고 毀短百爲하다
위징魏徵이 죽자 태종太宗이 위징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치지 않고 능연각凌煙閣에 올라가 화상畫像을 보고 시를 지어 위징을 애도하니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이 위징을 질투하고 온갖 방법으로 헐뜯어 단점을 잡았다.
徵嘗薦杜正倫侯君集才任宰相이러니 孅人遂指爲阿黨하고
위징이 일찍이 두정륜杜正倫후군집侯君集의 재주가 재상宰相을 맡길 만하다고 추천하였는데 두정륜이 죄로 쫓겨나고 후군집은 역모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게 되자 소인들이 마침내 위징을 가리켜 아당阿黨한다고 하고,
又言徵嘗錄前後諫爭語하여 示史官褚遂良이라하니
또 말하기를 “위징이 전후로 간쟁한 말을 기록하여 사관史官 저수량褚遂良에게 보인 적이 있다.”고 하였다.
帝滋不悅이라가 乃停叔玉昏하고 而仆所爲碑하니 顧其家衰矣
태종이 더욱 기뻐하지 않다가 마침내 위숙옥魏叔玉과의 혼인을 정지하고 자신이 비문을 지어 세운 비석을 넘어뜨리니, 이에 위징의 집안이 쇠락하게 되었다.
遼東之役 高麗靺鞨犯陣하니 李勣等力戰破之하다
요동遼東의 전쟁에 고구려高句麗말갈靺鞨나라 군대를 침범하니 이적李勣 등이 힘써 싸워서 그들을 격파하였다.
軍還할새 悵然曰 魏徵若在하면 吾有此行邪아하고
군대가 돌아올 적에 태종太宗이 처량하게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있었다면 내가 이런 원정을 했겠는가.” 하고
卽召其家到行在하여 賜勞妻子하고 以少牢祠其墓하고 復立碑하고 恩禮加焉하다
즉시 그 집안 사람을 불러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여 그 처자들에게 포상하여 위로하고 소뢰少牢를 써서 그의 묘에 제사하고 다시 비석을 세우고 은혜와 예우를 더하였다.
四子 叔玉叔琬叔璘叔瑜
위징魏徵의 네 아들은 위숙옥魏叔玉위숙완魏叔琬위숙린魏叔璘위숙유魏叔瑜이다.
叔玉襲爵爲光祿少卿이라 神龍初 以其子膺紹封하다
위숙옥은 작위를 세습하여 광록소경光祿少卿이 되었다. 신룡神龍(705~707) 초기에 그의 아들 위응魏膺으로 봉작封爵을 잇게 하였다.
叔璘 禮部侍郎이니 武后時 爲酷吏所殺하다
위숙린은 예부시낭禮部侍郎이 되었는데, 무후武后 시기에 혹리酷吏에게 살해당하였다.
叔瑜 豫州刺史 善草隸하여 以筆意傳其子華及甥薛稷하다
위숙유는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었으며, 초서草書예서隷書를 잘 써서 그의 서법書法이 그의 아들 위화魏華와 외손자 설직薛稷에게 전수되었다.
世稱善書者 前有虞褚하고 後有薛魏
세상에 글씨를 잘 쓴다고 일컬어지는 이는 이전에는 우세남虞世南저수량褚遂良이 있었고, 뒤에는 설직薛稷위화魏華가 있다.
爲檢校太子左庶子武陽縣男하다
위화는 검교태자좌서자檢校太子左庶子 무양현남武陽縣男이 되었다.
開元中 寢堂火하여 子孫哭三日하니 詔百官赴弔하다
개원開元(713~741) 시기에 침당寢堂에 화재가 나서 자손들이 3일 동안 곡하자 조서를 내려 백관들을 조문을 가게 하였다.
徵五世孫謩 字申之 擢進士第하여 同州刺史楊汝士辟爲長春宮巡官이라
위징魏徵의 5세손은 위모魏謩이다. 위모는 신지申之이다.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동주자사同州刺史 양여사楊汝士벽소辟召하여 장춘궁순관長春宮巡官이 되었다.
文宗讀貞觀政要하고 思徵賢하여 詔訪其後어늘 汝士薦爲右拾遺하니라
문종文宗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고 위징의 어짊을 생각하여 조서를 내려 그 후손을 찾았는데 양여사가 추천하여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謩姿宇魁秀하니 帝異之하다
위모는 용모가 건장하고 아름다웠으므로 문종이 그를 특별하게 여겼다.
邕管經略使董昌齡誣殺參軍衡方厚하여 貶漵州司戶 俄徙峽州刺史하다
옹관경략사邕管經略使 동창령董昌齡참군參軍 형방후衡方厚를 모함해 살해하여 서주사호漵州司戶로 강등되었으나 조금 뒤에 협주자사峽州刺史로 자리를 옮겼다.
謩諫曰 王者赦有罪 唯故無赦
위모가 간언하였다. “왕자王者는 죄 있는 자를 사면하지만 고의로 지은 죄만은 사면이 없습니다.
比昌齡專殺不辜어늘 事跡暴章하여 家人銜冤하고 萬里投訴하니이다
근래에 동창령이 죄 없는 자를 마음대로 죽였는데 사건의 자취가 드러나서 형방후의 가족들이 원한을 머금고 만 리를 달려가서 고소를 하였습니다.
獄窮罪得이나 特被矜貸하니 中外以爲屈法이니이다
그를 옥사獄事궁문窮問하여 죄가 있었으나 특별히 용서를 받으니, 중외中外에서 합법하지 않다고 합니다.
今又授刺史하여 復使治人하니 紊憲章하고 乖至治하여 不見其可니이다하니
그런데 지금 또 자사刺史를 제수하여 다시 백성을 다스리게 하니 국법을 어지럽히고 지극한 치세를 어그러뜨려서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有詔改洪州別駕하다
조서를 내려서 동창령을 홍주별가洪州別駕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御史中丞李孝本 宗室子러니 하고 其二女沒入宮하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이효본李孝本종실宗室의 아들인데 이훈李訓의 일에 연좌되어 죽임을 당하고 그의 두 딸이 궁중에 하인이 되어 들어왔다.
謩上言호대 陛下卽位 不悅聲色하사 于今十年 未始采擇이러시니
위모魏謩가 진언하였다. “폐하陛下께서 즉위하셨을 적에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으시어 지금까지 10년이 되도록 미녀를 선발한 적이 없었습니다.
數月以來 稍意聲伎하여 閱選 百十未已하고 莊宅收市 亹亹有聞이어늘
몇 개월 전부터 조금씩 성기聲伎(가기歌妓)에 뜻을 두셔서 교방教坊에서 선발한 것이 수십 백 명에 그치지 않고, 장택莊宅(별장과 주택)을 사들인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립니다.
今又取孝本女하여 內之後宮하니 宗姓不育하고 寵幸爲累하여 傷治道之本하고 速塵穢之嫌이니이다
지금 또 이효본의 딸을 취하여 후궁後宮에 들이고자 하시니, 이는 종실宗室 동성同姓을 양육하지 않고 총애寵愛에 결함이 되어 치도治道의 근본을 손상하고 오점을 남기는 혐의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諺曰 止寒莫若重裘하고 止謗莫若自修라하니
속담에 말하기를 ‘추위를 막는 것은 두터운 갖옷만 한 것이 없고, 비방을 그치게 하는 것은 자신의 수련만 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惟陛下 崇千載之盛德하시고 去一旦之玩好하소서하니
오직 폐하께서는 천년의 성덕盛德을 숭상하시고 한때의 기호嗜好를 버리십시오.”
帝卽出孝本女하고 詔曰 乃祖在貞觀時 指事直言하여 無所避하니 每覽國史 朕與嘉之하노라
문종文宗은 바로 이효본의 딸을 내보내고 조서를 내렸다. “위모의 조상이 정관貞觀 시대에 일을 지적하고 직언하여 회피한 것이 없었으니 국사를 살펴볼 때마다 은 아름답게 여겼다.
謩爲拾遺하여 屢有獻納이라 夫備灑埽於內 非曰聲妓 恤宗女之幼하니 不爲漁取
위모도 습유拾遺가 되어 여러 차례 충언을 올린 적이 있다. 궁내에서 청소하는 사람으로 충원한 것이니 성기聲妓라고 할 것이 아니며 종실宗室의 어린 여자를 불쌍히 여긴 것이니 취한 것이 아니다.
然疑似之間 不可戶曉어늘 謩辭深切하니 其惜我之失 不亦至乎
그러나 이런 의혹을 집집마다 알려줄 수 없거늘 위모의 말이 심히 절실하니, 그가 짐의 과실을 애석해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지 아니한가.
謩雖居位日淺이나 朕何愛一官 增直臣之氣하니 其以謩爲右補闕하라
위모가 비록 벼슬에 있는 기간이 짧았지만 짐이 어찌 한 개의 관직을 아끼랴. 정직한 신하의 기개를 선양宣揚할 것이니 위모를 우보궐右補闕로 삼으라.”
先是 帝謂宰相曰 太宗得徵하여 參裨闕失하고 朕今得謩하여 又能極諫하니
이보다 앞서 문종文宗재상宰相에게 말하였다. “태종太宗께서 위징魏徵을 얻어 결함을 보충하였고, 은 지금 위모魏謩를 얻어 그가 또 극력하게 간언을 하니,
朕不敢仰希貞觀이나 庶幾處無過之地라하다
짐은 감히 정관貞觀의 때를 바라지는 못하지만 과실이 없는 경지에 처하기를 바라고 있소.”
教坊有工善爲新聲者한대 詔授揚州司馬하니
교방教坊에 새로운 음악 소리를 잘 내는 악공이 있자 조서를 내려 양주사마揚州司馬로 제수하였다.
議者頗言司馬品高하여 郎官刺史迭處 不可以授賤工이라하니 帝意右之하다
의논하는 자들이 “사마司馬는 품계가 높아서 낭관郎官자사刺史가 번갈아 맡는 자리이니, 미천한 악공을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문종이 악공을 옹호하였다.
宰相諭諫官勿復言이어늘 謩獨固諫不可하여 工降潤州司馬하다
재상宰相간관諫官들에게 타일러 다시 말하지 말게 하였는데, 위모가 홀로 굳이 불가함을 간언하여 악공이 윤주사마潤州司馬로 강등되었다.
荊南監軍呂令琛縱傔卒辱江陵令이어늘 觀察使韋長避不發하고言狀하다
형남감군荊南監軍 여령침呂令琛의 방종한 겸졸傔卒(위사衛士)이 강릉령江陵令을 모욕하였으나 관찰사觀察使 위장韋長이 회피하여 들추어내지 않고, 언장言狀(진술서陳述書)을 내추밀사內樞密使에게 보냈다.
謩劾長任察廉하여 知監軍侵屈官司하되 不以上聞하고 私白近臣하여 亂法度하니 請明其罰하소서하되 不報하다
위모가 탄핵하기를 “위장은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감군監軍이 관원을 침범한 것을 알고도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근신近臣에게 보고하여 법도法度를 어지럽혔으니 그의 벌을 밝히십시오.”라고 하였으나, 황제가 회답하지 않았다.
俄爲起居舍人이어늘 帝問호대 卿家書詔頗有存者乎아하니
얼마 뒤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는데 문종文宗이 물었다. “의 집에 조서詔書가 꽤 보존된 것이 있소?”
謩對 惟故笏在라한대 詔令上送하다
위모魏謩가 대답하였다. “오직 옛날 (수판手板)만 남아 있습니다.”조서를 내려 그것을 올려 보내게 하였다.
鄭覃曰 在人不在笏이라하니
정담鄭覃이 말하였다.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있지 홀에 있지 않습니다.”
帝曰 覃不識朕意하니 此笏乃今이라하고
문종이 말하였다. “정담은 의 뜻을 알지 못하니, 이 홀은 지금의 감당甘棠이오.”
帝因勅謩曰 事有不當하면 毋嫌論奏하라하니
문종이 이어서 위모에게 조칙을 내려 말하였다. “일에 마땅하지 않음이 있으면 논하여 아뢰는 것을 꺼리지 마시오.”
謩對호대 臣頃爲諫臣이라 故得有所陳이나 今則記言動하니 不敢侵官이라하다
위모가 대답하였다. “신이 이전에 간신諫臣이었기 때문에 진술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황제의 말과 행동을 기록하고 있으니 감히 직분을 넘지 못합니다.”
帝曰 兩省屬皆可議朝廷事하니 而毋辭也
문종이 말하였다. “양성兩省(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의 소속 관원은 모두 조정의 일을 의론할 수 있으니 그대는 사양하지 마시오.”
帝索起居注하니 謩奏호대 古置左右史하여 書得失하여 以存鑑戒니이다
문종이 《기거주起居注(황제皇帝언행록言行錄)》를 보겠다고 요구하자, 위모가 상주하였다. “옛날에는 좌사左史우사右史를 두어 잘잘못을 기록하여 감계鑑戒로 삼았습니다.
陛下所爲善 無畏不書하고 不善 天下之人 亦有以記之니이다
폐하陛下께서 행하신 선은 기록하지 않을까 우려할 것이 없고, 선하지 못한 행동은 천하 사람들이 또한 그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帝曰 不然이라 我旣嘗觀之라하니
문종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소. 내가 이미 일찍이 그것을 본 적이 있소.”
謩曰 向者 取觀 史氏爲失職하니이다 陛下一見하시면 則後來所書 必有諱屈하리니
위모가 말하였다. “지난번에 취하여 보신 일은 사관史官이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한 번 보시면 후대에 기록하는 것에 반드시 꺼려서 사실대로 쓰지 않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善惡不實하면 不可以爲史 且後代何信哉리오하니 乃止하다
선악善惡이 진실하지 않으면 역사가 될 수 없으니, 또 후대에 어찌 믿겠습니까.”마침내 《기거주》를 보려던 계획을 중지하였다.
中尉仇士良 하고 治軍中하여 反狀具하니
중위中尉 구사량仇士良이 요망한 백성 하란진흥賀蘭進興 및 그 당여黨與를 붙잡고 군중軍中에서 다스려 반란의 증거를 갖추어냈다.
帝自臨問하고 詔命斬囚以徇하다
문종文宗이 친림하여 심문하고 조서를 내려 죄수를 참수하여 조리돌리게 하라고 명하였다.
御史中丞高元裕建言호대 獄當與衆共之니이다
어사중승御史中丞 고원유高元裕가 건의하였다. “옥송獄訟은 마땅히 여러 사람과 함께 심리해야 합니다.
刑部大理 法官也어늘 決大獄不與知 律令謂何리오 請歸有司하노이다하되 未報하다
형부刑部대리大理법관法官인데 대옥大獄을 판결하는 데에 참여하여 알지 못하면 율령律令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담당 관청에 귀속시키기를 청합니다.”황제는 회답하지 않았다.
謩上言호대 事繫軍하면 卽推軍中하고 如齊民이면 宜付府縣이니이다
위모가 상서하였다. “일이 군대軍隊와 관계가 있으면 바로 군중軍中에서 추문推問하시고, 평민의 일이라면 부현府縣에 맡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今獄不在有司하니 法有輕重이어늘 何從而知리오하니
지금 옥송獄訟이 담당 관청에 있지 않으니, 형법刑法의 경중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帝停決하고以官兵留仗內하고 餘付御史臺하다
문종이 판결을 정지하고 조서를 내려 신책군神策軍관부官府의 병기를 가지고 장내仗內(보위부대保衛部隊 안)에 머물게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어사대御史臺에 부쳤다.
臺憚士良하고 不敢異하여 卒皆誅死하다
어사대에서는 구사량을 두려워하고 감히 다르게 하지 않아서 마침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擢諫議大夫하여 兼起居舍人弘文館直學士하니 謩固讓不見可하여 乃拜하다
위모는 간의대부諫議大夫에 발탁되어 기거사인起居舍人 홍문관직학사弘文館直學士를 겸하게 하자 굳이 사양하였으나 황제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마침내 임명되었다.
始謩之進 李珏楊嗣復 實推引之
처음 위모魏謩를 등용할 적에 이각李珏양사복楊嗣復이 실제로 그를 추천하여 끌어주었다.
武宗立 謩坐二人黨하여 出爲汾州刺史하고 俄貶信州長史하다
무종武宗이 즉위하자 위모는 두 사람의 당인黨人으로 연좌되어 외직으로 나가 분주자사汾州刺史가 되었고, 얼마 뒤에 신주장사信州長史로 강등되었다.
宣宗嗣位 移郢商二州刺史하다 召授給事中하다
선종宣宗이 이어 즉위하자 영주자사郢州刺史상주자사商州刺史로 옮겼다. 조정으로 불러 급사중給事中에 제수하였다.
遷御史中丞하여 發駙馬都尉杜中立姦贓하니 權戚縮氣하다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승진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 두중립杜中立의 뇌물죄를 적발하니 황제의 외척들이 기세를 움츠렸다.
俄兼戶部侍郎事어늘 謩奏호대 中丞 紀綱所寄 不宜雜領錢穀하니 乞專治戶部하노이다하니
얼마 뒤에 호부시랑戶部侍郎의 일을 겸하였는데 위모가 상주하였다. “어사중승은 기강紀綱을 맡은 곳이므로 전곡錢穀을 겸하여 다스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오로지 호부戶部만 다스리도록 해주십시오.”
詔可하다 頃之 進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조서를 내려 옳다고 하였다. 조금 뒤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
建言호대 今天下粗治 惟東宮未立하니 不早以正人傅導之하면 非所以存副貳之重이라하고
위모가 건의建議하였다. “지금 천하가 조금 다스려졌으나 오직 동궁東宮을 아직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일찍 바른 사람으로 스승을 삼아 인도하지 않으면 태자의 중임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且泣下한대 帝爲感動하니라 自敬宗後 惡言儲嫡事 故公卿無敢開陳者러니
또 눈물을 흘리자 선종宣宗이 감동하였다. 경종敬宗 이후로부터 태자를 세우는 일을 말하기 싫어하였기 때문에 공경公卿들이 감히 이 일을 앞장서 말하는 이가 없었다.
時帝春秋高하고 嫡嗣未辨 謩輔政하여 白發其端하니 朝議歸重하다
당시 선종의 나이가 많고 태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을 적에 위모가 정사를 보좌하면서 그 단서를 명백하게 발언하니 조정의 의론에 추중推重을 받았다.
會詹毗國獻象한대 謩以爲非土性이라 不可畜하니 請還其獻하노이다하니 詔可하다
마침 첨비국詹毗國이 코끼리를 바쳤는데 위모가 말하였다. “본토의 습성이 아니라 기를 수 없으니 받은 코끼리를 돌려주기를 청합니다.”조서를 내려 옳다고 하였다.
河東節度使李業 殺降虜하니 邊部震擾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이업李業이 투항한 오랑캐를 죽이자 변경 지역이 소란스러워졌다.
業內恃憑藉하여 人無敢言者어늘 謩奏徙滑州하다
이업이 조정에 의지할 자를 믿고 있어서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위모가 상주하여 활주滑州로 좌천되었다.
遷中書侍郎하다 大理卿馬曙 有犀鎧數十首어늘 懼而瘞之러니
위모는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옮기자, 대리경大理卿 마서馬曙는 물소 가죽 갑옷 수십 벌이 있었는데 두려워하여 갑옷을 땅에 묻었다.
奴王慶以怨告曙藏甲有異謀한대 按之無他狀하여 投曙嶺外하고 慶免하니라
마서의 가노家奴 왕경王慶이 사사로운 원한으로 마서가 갑옷을 숨기고 역모를 꾀하였다고 고발하였는데 그것을 조사하였으나 다른 정황이 없어서 마서를 영외嶺外로 추방하고 왕경은 죄를 면하였다.
議者謂奴訴主 法不聽하다 謩引律固爭하여 卒論慶死하다
의논하는 이들은 가노가 주인을 고발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법에서 들어주지 않았다. 위모는 법률을 인용하여 굳게 쟁변하여 마침내 왕경을 죽음으로 논죄하였다.
累遷門下侍郎하고 兼戶部尙書하다
누차 자리를 옮겨 문하시랑門下侍郎이 되고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겸하였다.
大中十年 以平章事領劍南西川節度使하다
대중大中 10년(856)에 위모魏謩평장사平章事검남서천절도사劍南西川節度使를 겸직하였다.
上疾求代한대 召拜吏部尙書하고 因久疾하여 檢校尙書右僕射太子少保하다
병으로 인하여 표를 올려 교체할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으로 불러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제수하고 병이 오래되자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태자소보太子少保를 제수하였다.
年六十六이라 贈司徒하다
죽을 때 나이가 66세였다. 사도司徒를 추증하였다.
謩爲宰相하여 議事天子前 他相或委抑規諷이나 惟謩讜切無所回畏
위모가 재상宰相이 되어 천자 앞에서 일을 의논할 적에 다른 재상들은 혹은 완곡하게 권유하여 풍간諷諫하였으나 위모만은 정직하고 절실하게 하여 회피하고 두려워함이 없었다.
宣宗嘗曰 謩名臣孫이라 有祖風하여 朕心憚之라하다
선종宣宗이 일찍이 말하였다. “위모는 명신의 후손이기 때문에 조상의 풍모가 있어서 짐의 마음속에 그를 두려워한다.”
然卒以剛正爲令狐綯所忌하여 讒罷之하다
그러나 마침내 바르고 강함 때문에 영호도令狐綯에게 꺼림을 받아 참소로 파직되었다.
贊曰 君臣之際 顧不難哉 以徵之忠而太宗之睿로도 身歿未幾 猜譖遽行이라
한다. “임금과 신하의 사이가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위징魏徵의 충성과 태종太宗의 현명함으로도 위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기와 참언이 바로 행해졌다.
始徵之諫 累數十餘萬言이요 至君子小人하얀 未嘗不反復하여 爲帝言之
처음에 위징의 간언이 모두 수십여만 자였고, 군자君子소인小人에 대해서는 일찍이 태종을 위해 반복하여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以佞邪之亂忠也 久猶不免이라
그런데도 간사한 자들이 충신을 어지럽히는 것을 오랫동안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였다.
故曰 皓皓者易汚하고 嶢嶢者難全이라하니 自古所歎云이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깨끗한 자는 더럽혀지기 쉽고, 강직한 자는 보전하기 어렵다.’라고 하였으니, 예로부터 이를 탄식하는 말이다.
唐柳芳稱徵死 知不知 莫不恨惜하여 以爲三代遺直이라하니
유방柳芳이 말하기를 ‘위징이 죽자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한탄하여, 삼대三代유직遺直(강직한 유풍遺風이 있는 이)이라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諒哉로다 謩之論議挺挺하여 有祖風烈하니 詩所謂者歟
진실하구나! 유모의 논의는 바르고 곧아 조상의 풍격이 있었으니, 《시경詩經》에서 말한 ‘이 때문에 그와 같이 한다.’라고 한 것이구나!”
역주
역주1 魏徵列傳 : 中華書局 標點校勘本 《新唐書》 〈魏徵列傳〉을 번역한 것이다.
역주2 縣男 : 唐나라 封爵 중 9번째로 종5품이다. 《唐六典 尙書吏部 司封郞中 조》
역주3 闢四門……達四聰 : 《書經》 〈虞書 舜典〉에 보인다.
역주4 靖言庸違 : 《書經》 〈虞書 堯典〉에 보인다.
역주5 追止其詔 : 이 부분이 《舊唐書》 〈魏徵列傳〉에는 “太宗은 魏徵의 논의를 훌륭하게 여겼다. 이때 厭怛紇干이 이미 출발해서 급히 뒤따라가서 그 조서를 중지하게 하였다.[上善其議 時厭怛紇干已發 遽追止之]”라고 하여,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역주6 善人爲邦百年 然後勝殘去殺 : 《論語》 〈子路〉의 “善人이 나라를 백 년 동안 다스리면 또한 포악한 자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다.[善人爲邦百年 亦可以勝殘去殺]”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7 郡公 : 唐나라 封爵 중 4번째로 정2품이다.
역주8 爾無面從 退有後言 : 《書經》 〈虞書 益稷〉에 보인다.
역주9 逆鱗 : 임금의 노여움을 생각지 않고 간언하는 것을 말한다. 임금의 상징인 용의 턱 아래에 거꾸로 난 비늘[逆鱗] 하나가 있는데 이것을 건드리면 용이 화를 내어 사람을 죽인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韓非子 說難》
역주10 防閤 : 官名으로 齋閤(書房)을 방위하였다. 唐나라는 親王으로부터 京師의 文武執事官 5品 이상까지 모두 防閣이 있었고, 州縣에서는 白直이라고 일컬었다.
역주11 明德愼罰 : 《書經》 〈周書 康誥〉에 보인다.
역주12 惟刑之恤 : 《書經》 〈虞書 舜典〉에 보인다.
역주13 爲上易事……則刑不煩 : 《禮記》 〈緇衣〉에 보인다.
역주14 上多疑……則君長勞 : 《禮記》 〈緇衣〉에 보인다.
역주15 好則鑽皮出羽 惡則洗垢索瘢 : 《文選》 張衡의 〈西京賦〉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털과 깃이 돋듯이 치켜세우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상처 흔적을 만들듯 헐뜯는다.[所好生毛羽 所惡成瘡痏]”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16 小人道長……君子道消 : 《周易》 否卦 〈彖傳〉에 보인다.
역주17 昔州犂上下其手 而楚法以敝 : 형법관이 손을 들고 내림에 따라 판결이 달라지는 폐단을 말한다. 楚나라 임금이 秦나라 사람과 吳나라를 침략하여 雩婁에까지 이르렀으나 오나라가 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가다가, 그 길로 鄭나라를 침략했다. 5월에 城麇(성균)에 이르렀는데 정나라 皇頡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황힐이 성 밖에 나가 초나라 군대와 싸우다가 패했고, 초나라 穿封戌이 황힐을 생포하였다. 公子 圍(共王 아들)가 천봉술과 같이 황힐을 생포한 공을 다투어 초나라 伯州犁(백주려)에게 판정하여 달라고 하니, 백주려가 말하기를, “잡힌 자(황힐)에게 물어 보자.”라고 하였다. 황힐을 증인으로 세운 뒤, 백주려가 묻기를, “공을 다투는 대상이 그대인데 그대가 어찌 모를 리 있겠소?”라고 하고, 백주려가 손을 들어 올리면서, “이분은 王子 圍로서 우리 임금의 고귀한 동생이시오.”라고 하고, 손을 내리면서, “이 사람은 천봉술로서 方城 밖의 縣尹이시오.”라고 한 뒤, “누가 생포했소?”라고 하자, 황힐이 말하기를, “저는 왕자를 만나 그에게 패했습니다.”라고 하니, 천봉술이 화를 내며 창을 뽑아들고 왕자 위를 쫓아갔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초나라는 황힐을 데리고 돌아갔다. 《春秋左氏傳 襄公 26년》
역주18 張湯輕重其心 而漢刑以謬 : 형법관이 임금 의향에 따라 판결함을 말한다. 漢나라 張湯이 廷尉였을 때, 皇上의 의향에 따랐다. 《漢書》 〈張湯傳〉에 “다루는 사건에 만일 황상이 죄를 가하고자 하면 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監‧掾史에게 사건을 맡기고, 만일 황상이 죄를 풀어주려고 하면 가볍고 평이하게 적용하는 監‧掾史에게 사건을 맡겼다. 다루는 사건이 만일 힘이 센 자이면 반드시 법조문을 농락하여 교묘하게 헐뜯고, 만일 가난한 집안의 나약한 자일 땐 왕왕 말하기를 ‘비록 법률에 따라 처단해야 합니다만 황상께서 심판 처결하소서.’라고 하니, 武帝가 이따금 장탕이 말한 대로 죄인을 석방하곤 했다.”라고 하였다.
역주19 貴不與驕期而驕自至 富不與奢期而奢自至 : 《書經》 〈周書 周官〉에 “지위는 교만함을 기약하지 않아도 교만해지고, 봉록은 사치함을 기약하지 않아도 사치해진다.[位不期驕 祿不期侈]”라고 하고, 孔安國의 傳에 “귀함은 교만과 함께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교만이 절로 이르고, 부유는 사치와 함께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사치가 절로 온다.[貴不與驕期而驕自至 富不與侈期而侈自來]”라고 하였다.
역주20 止水 : 고요히 있는 물이다. 《莊子》 〈德充符〉에 “사람이 흐르는 물에서는 자신을 비추어보지 못하고 고요히 있는 물에서 비추어볼 수 있다.[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라고 하였다.
역주21 殷鑑不遠 在夏后之世 : 《詩經》 〈大雅 蕩〉에 보인다.
역주22 遠便佞 : 《論語》 〈衛靈公〉의 “鄭나라 음악을 추방해야 하며 말재주 있는 사람을 멀리 할 것이니, 정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위태롭다.[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23 方知皇帝尊 : 漢 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叔孫通에게 그동안 전쟁에 시달려 무질서하던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모든 의식 절차에 관한 예절을 제정하게 하였는데, 古禮에서 가려 뽑고 秦나라의 제도와 결합시켜서 한 왕조의 제도와 典禮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長樂宮의 낙성식을 마치고 신하들이 질서 정연하게 하례하는 것을 보고 한 고조가 “나는 오늘에야 천자의 존귀함을 알았다.[吾乃今日知為天子之貴也]”라고 하였다. 《史記 叔孫通列傳》
역주24 約我以禮 : 《論語》 〈子罕〉에 보인다.
역주25 柳雄妄訴隋資 : 《貞觀政要集論》 〈直諫〉에 “徐州司戶 柳雄이 隋나라 때 받은 資級에 멋대로 계급을 첨가하였다.[徐州司戶柳 於隋資 妄加階級]’라 하였고, 《通鑑釋義》에는 “隋資는 隋나라 조정에서 벼슬한 資級이다. 이때에 선발된 자가 한꺼번에 모여들어 資蔭을 속이고 몰래 문서를 위조하여 調用된 자가 있으므로 詔命을 내려 自首하도록 허락해주고 自首하지 않은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隋資 仕於隋朝之資級也 時選者盛集 有詭資蔭冒牒取調者 詔許自首 不首者罪死]”라고 하였다.
역주26 上下相蒙 : 《春秋左氏傳》 僖公 24년에 보인다.
역주27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 《論語》 〈八佾〉에 보인다.
역주28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 《論語》 〈顔淵〉에 보인다.
역주29 同言而信……誠在令外 : 《文子》 〈精誠〉에 보인다.
역주30 君子而不仁者有矣 未有小人而仁者 : 《論語》 〈憲問〉에 보인다.
역주31 齊桓公問於管仲曰……害霸也 : 《說苑》 〈尊賢〉에 보인다.
역주32 晉中行穆伯攻鼓……安用之 : 《淮南子》 〈人間訓〉에 보인다.
역주33 謗木 : 誹謗木으로 조정의 뜰에 깎아 세운 목판이니, 舜임금 때에 사람들에게 정치의 득실을 쓰게 하였다. 《呂氏春秋 自知》
역주34 漢文帝却千里馬 : 제왕이 진기한 물건을 받지 않음을 말한다. 漢 文帝에게 어떤 사람이 천리마를 바치자, 조서를 내리기를 “鸞旗가 앞에서 선도하고 뒤 수레가 따라오면서 날마다 50리밖에 가지 못하는데, 내가 천리마를 타고 혼자 어디로 먼저 간단 말이냐.” 하고는, “나는 바친 물건을 받지 않을 것이니, 사방에서 와서 바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漢書 賈捐之列傳》
역주35 晉武帝焚雉頭裘 : 제왕이 사치한 의복을 멀리함을 말한다. 雉頭裘는 꿩의 머리 깃털로 짜서 만든 갖옷이다. 晉 武帝에게 太醫 司馬程據가 치두구를 바치자 검약을 강조하려고 궁전 앞에서 불태웠다. 《晉書 武帝本紀》
역주36 孔子曰……若何其無畏 : 《孔子家語》 〈致思篇〉에 보인다.
역주37 不貴異物 不作無益 : 《書經》 〈周書 旅獒〉에 보인다.
역주38 素履 : 본래대로 행함을 말한다. 《周易》 履卦 初九爻辭에 “본분대로 해나가면 허물이 없다.[素履往 無咎]”라고 하였다.
역주39 市物襁屬於廛 : 《貞觀政要集論》 〈論愼終〉에 “和市之物 不絶於鄕閭”라 하여 和市의 피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和市는 물가를 조절하기 위해 관청에서 민간의 물자를 사들이는 일로 실제 민간에 큰 피해를 입혔다. 본서 99쪽 참조.
역주40 脫有一穀不收 : 《貞觀政要集論》 〈論愼終〉에 “만약 水災와 旱災로 인하여 곡식을 거두지 못하게 되면[脫因水旱 榖麥不收]”이라고 하여, 곡식을 못 거두는 이유가 보충되어 있다. 본서 99쪽 참조.
역주41 禍福無門 惟人之召 : 《春秋左氏傳》 襄公 23년의 ”禍福無門 惟人所召“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42 人無釁焉 妖不妄作 : 《春秋左氏傳》 莊公 14년에 보인다.
역주43 桓公管仲鮑叔牙甯戚四人飲……社稷不危矣 : 《管子》 〈小稱〉에 보인다.
역주44 願公無忘在莒時……無忘束縛於魯時 : 春秋時代에 齊나라 襄公이 無道하니 여러 동생들이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公子 糾는 魯나라로 달아났는데 管仲이 도왔고, 小白은 莒 땅으로 달아났는데 鮑叔牙가 도왔다. 뒤에 양공이 죽임을 당하자 제나라에서 소백을 불러들여 임금으로 삼으니, 노나라에서 관중을 檻車에 가두어 제나라로 보냈다. 포숙아의 추천으로 관중이 재상에 등용되어 술자리에서 桓公에게 “원컨대 공께서는 莒 땅에서 고생하던 일을 잊지 마소서. 신은 魯나라에서 함거에 갇혔던 일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管子 少稱》
역주45 使甯戚 無忘飯牛車下時 : 甯戚이 齊 桓公을 만나보려고 하였으나, 곤궁하여 스스로 찾아갈 길이 없었다. 이때 그가 行商이 되어 짐수레를 몰고 齊나라로 가서 저녁에 성곽의 문 밖에서 잠을 잤다. 제 환공이 빈객을 맞이하기 위하여 밤에 성문을 열어놓고 짐수레를 한쪽으로 치웠는데, 횃불이 매우 치성하고 수행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영척이 짐수레 밑에서 소에게 여물을 먹이면서 제 환공을 바라보고 슬퍼하여, 소의 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제 환공이 노래를 듣고서, 그의 노복의 손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매우 특이하다. 노래하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고, 영척을 수레에 태워서 데리고 가서 上卿으로 삼았다. 《呂氏春秋 擧難》
역주46 葉護可汗 : 葉護는 고대 돌궐어인 ‘야브구’의 음사이다. 돌궐은 동서로 나뉘어 다스렸는데, 西面可汗을 야브구라 하였다. 《貞觀政要集論》 〈論納諫〉에 葉護가 射匱可汗을 계승하여 葉護可汗이라 칭하였다 하였는데, 《新唐書》에 보이는 統葉護可汗으로 西突厥 5대 可汗이다.
역주47 魏文帝欲求市西域大珠……不足貴也 : 《三國志》 〈魏志 蘇則列傳〉에 보인다.
역주48 四皓 : 商山에 은거해 살던 네 명의 노인으로, 東園公‧綺里季‧夏黄公‧甪里先生(녹리선생)이다.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어 四皓라 한다. 漢 高祖가 당시 太子로 있던 惠帝 대신에 戚夫人의 소생인 趙王 劉如意를 태자로 삼으려 하자, 사호가 張良의 권유를 받고 조정에 나와서 태자를 보필하며 고조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그 결과 혜제가 태자로 계속 있다가 등극하였다. 《史記 留侯世家》
역주49 嫠不恤緯 而憂宗周之亡 : 분수에 지나친 근심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昭公 24년에 鄭伯이 晉나라에 가서 范獻子를 만났는데, 범헌자가 왕실에 대하여 묻자, 대답하기를 “노부가 자신의 국가도 걱정하지 못하면서 감히 왕실을 걱정하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에 ‘과부가 베 짜는 씨실이 모자라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천자의 나라인 周나라가 망할까를 걱정하는 것은 그 재앙이 자기에게도 미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오.’라고 하였습니다.[老夫其國家不能恤 敢及王室 抑人亦有言曰 嫠不恤其緯 而憂宗周之隕 爲將及焉]”라고 하였다.
역주50 朝集使 : 지방 행정을 조정에 모여 보고하는 관리이다.
역주51 羽葆 : 장례하는 의장의 일종으로, 새의 깃털을 자루의 머리에 모아서 양산과 같은 모양을 한 것이다.
역주52 班劍 : 무늬로 장식한 검이다. 혹은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班은 斑(얼룩)과 통용한다.
역주53 塗車 : 泥車라고도 한다. 送葬에 쓰는 明器이다.
역주54 芻靈 : 띠풀을 사용하여 만든 사람과 말로, 送葬하는 물건이다.
역주55 愛而知其惡 憎而知其善 : 《禮記》 〈曲禮 上〉에 보인다.
역주56 去邪勿疑 任賢勿猜 : 《書經》 〈虞書 大禹謨〉의 “任賢勿貳 去邪勿疑”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57 賁育 : 전국시대의 용사 孟賁과 夏育을 말한다.
역주58 破陣武德舞 : 〈秦王破陣樂〉을 武德舞로 표현한 것이다. 〈七德舞〉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太宗이 秦王으로 있을 때 劉武周를 쳐부순 공을 기리기 위하여 軍中에서 만든 樂曲이다. 《新唐書 禮樂志》
역주59 慶善樂 : 〈功成慶善樂〉의 약칭이다. 〈九功舞〉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太宗이 慶善宮에서 태어났으므로 貞觀 6년(633)에 그곳에 행차하여 侍從臣에게 연회를 베풀고 만든 악곡이다. 文德舞이다. 《新唐書 禮樂志》
역주60 凌煙閣 : 功臣閣 이름. 太宗이 貞觀 17년(643)에 長孫無忌‧杜如晦‧魏徵‧房玄齡 등 勳臣 24명의 초상화를 그려서 여기에 걸어놓게 하였다. 《新唐書 太宗本紀》
역주61 及正倫以罪黜 君集坐逆誅 : 太子 李承乾이 발에 난 병으로 조회에 참여하지 않고 하찮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太宗이 杜正倫에게 “내 아이가 병이 든 것은 그럴 수 있소. 하지만 훌륭하다는 명성이 들리지 않고 사적으로 어울리는 무리들은 대부분 소인들이니 경이 잘 살피도록 하시오. 잘 인도하는데도 듣지 않으면 반드시 내게 보고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두정륜이 태자에게 자주 간언을 했으나 듣지 않자 태종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승건이 항의의 表文을 통해 이 사실을 上奏하자, 태종이 두정륜을 불러 “왜 내 말을 누설했소?”라고 하니, 두정륜이 “개도해도 듣지 않아 폐하의 말씀으로 겁을 주려 했습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노하여 同州刺史로 내보냈다. 이후 태자 이승건이 모반하자 侯君集은 그 반역에 참여하였다가 정상이 탄로 나서 복주되었다.
역주62 坐李訓事誅死 : 李孝本은 평소 李訓에 의지하여 벼슬이 승진하였다. 太和 9년(835)에 李訓이 재상에 임명되고 宦官들을 주살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도리어 환관들에게 반격을 받아 참수되었는데, 이효본도 그 계획에 참여하여 內官 10인을 죽였으나 거사가 성공하지 못함을 알아차리고 도주했다가 잡혀서 멸족되었다. 《舊唐書 李孝本列傳》
역주63 教坊 : 궁중 음악을 관리하는 관서로, 雅樂 이외의 음악과 춤을 관장하였다. 조선 시대 掌樂院과 비슷하다.
역주64 內樞密使 : 唐나라 후기에 두었다. 주로 환관으로 충임되었으며, 상소와 표문을 접수하고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아래의 近臣은 내추밀사를 가리킨 듯하다.
역주65 甘棠 : 《詩經》 〈召南〉의 篇名이다. 周 文王 때 召公 奭이 南國을 순시하다가 甘棠나무 밑에서 민원을 처리해주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 자르지 말고 베지 말라고 노래한 것이다.
역주66 捕妖民賀蘭進興及黨與 : ‘賀蘭進興’은 《舊唐書》 〈高元裕列傳〉에 ‘賀蘭進’으로 되어 있다. 仇士良(781~843) 唐나라 文宗 때의 환관이다. 붕당이 심한 틈을 타서 정권을 잡아 왕 둘, 왕비 하나, 재상 네 명을 죽이는 등 20년 동안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賀蘭進은 藍田縣 사람으로 마을의 50여 인과 모여 念佛을 하였는데 神策鎭將에게 모두 謀逆으로 체포되었다. 《舊唐書 仇士良列傳》
역주67 神策軍 : 唐나라 중후기 北衙禁軍의 주력이다. 원래는 哥舒翰이 吐藩을 격파할 때의 군대이다. 安祿山의 亂 때 활약하여 神策軍이라 불렸으며, 후대 장안으로 들어와서 금군의 주축이 되었다. 代宗과 德宗 시기에 환관이 통솔하여 환관이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책군은 당 후기 왕조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군사기반이 되었다.
역주68 是以似之 : 《詩經》 〈小雅 裳裳者華〉에 보인다.

정관정요집론(4)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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