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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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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太宗 嘗謂中書令岑文本曰 夫人 雖稟定性注+① 夫人 雖稟定性:夫, 音扶.이나 必須博學하여 以成其道 亦猶蜃性含水 待月光而水垂注+② 亦猶蜃性含水 待月光而水垂:蜃, 音腎, 大蛤也. 海上月明, 蜃吐氣如樓閣之狀.하고 木性懷火 待燧動而焰發注+③ 待燧動而焰發:燧, 取火之木也, 春取榆柳之火, 夏取棗杏之火, 夏季取桑柘之火, 秋取柞楢之火, 冬取槐檀之火.이라
人性含靈이나 待學成而爲美 是以 蘇秦刺股注+④ 蘇秦刺(척)股:刺, 音漆. 蘇秦, 字季子, 雒陽人. 師鬼谷子, 得太公陰符, 伏而誦之, 讀書欲睡, 引錐自刺其股, 血流至踵, 簡練揣摩, 至期年而成. 後遊說, 佩六國相印.하고 董生垂帷注+⑤ 董生垂帷:董生, 名仲舒, 廣川人. 漢景帝時爲博士, 治春秋. 下帷講誦, 弟子以次相授, 或莫見其面, 三年不窺園, 其精如此, 學者皆師尊之. 武帝卽位, 擧賢良對策三篇, 擢爲江都王相. 不勤道藝 則其名不立이로다
文本 對曰 夫注+⑥ 夫:音扶. 性相近이나 情則遷移 必須以學飭情하여 以成其性이니이다
禮云 玉不琢이면 不成器하고 人不學이면 不知道注+⑦ 禮云玉不琢……不知道:禮學記之辭.라하니 所以古人勤於學問 謂之懿德이라하니이다
由此論之컨대 善者 吾性之所本有 非學이면 則無以復之也 猶水者 蜃性之所本有 非月이면 則無以成之也 火者 木性之所本有 非燧 則無以發之也
太宗此論 雖後世醇儒라도 不能遠過
文本 斯時 正當告之曰 陛下旣知性善之具於己하시니 則性無內外之分이라 不當愼於外而怠於內也 性無始終之異 不當謹於始而怠於終也라하여
于以攻其邪心하고 格其非心하면 庶乎疾之有瘳矣어늘 顧乃泛引學記之言하여 無所匡救하니
道之不明 有君無臣이니 豈不可歎之甚哉


태종太宗이 일찍이 중서령中書令 잠문본岑文本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비록 정해진 품성을 부여받았지만注+(대저)는 이다. 반드시 널리 배워 그 를 완성해야 하니, 이는 또한 대합의 본성이 물을 머금고 있지만 달빛에 의해서만 물을 내뿜고注+이니 대합大蛤이다. 바다에 달이 밝을 때 대합이 누각 같은 형상의 물길을 내뿜는다., 나무의 본성이 불을 품고 있지만 불을 댕기는 나무를 문지르는 것에 의해서만 불꽃을 내는 것과 같소.注+는 불을 취하는 나무인데 봄에는 누릅나무와 버드나무에서 불을 취하고, 여름에는 대추나무와 살구나무에서 불을 취하고, 늦여름에는 뽕나무와 산뽕나무에서 불을 취하고, 가을에는 떡갈나무와 졸참나무에서 불을 취하고, 겨울에는 홰나무와 박달나무에서 불을 취한다.
사람의 본성이 영험함을 갖고 있지만 학문의 완성에 의해서만 아름다워지는 것이오. 이 때문에 소진蘇秦이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고注+(찌르다)은 이다. 소진蘇秦계자季子이며 낙양雒陽 사람이다. 귀곡자鬼谷子를 스승으로 모셔 강태공姜太公의 《음부경陰符經》을 전해 받아 열중해서 외웠는데 글을 읽다가 졸음이 찾아오면 송곳을 꺼내 스스로 넓적다리를 찔러 피가 발꿈치까지 흘렀고, 단련과 연마를 하여 일 년이 되자 성취하였다. 뒤에 각국에 유세를 하여 6의 재상 관인을 허리에 꿰찼다. 동생董生(동중서董仲舒)이 휘장을 드리우고서注+동생董生은 이름이 중서仲舒이고 광천廣川 사람이다. 한 경제漢 景帝박사博士를 역임했는데, 《춘추春秋》를 전공했다. 휘장을 드리우고 강론을 하면 제자들이 차례로 가르침을 받았는데,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고, 3년 동안 밭을 돌보지 않았으니, 그가 이처럼 정진하여 학자들이 모두 스승으로 높이 받들었다. 무제武帝가 즉위하자 〈거현량대책擧賢良對策〉 3편을 올렸고 강도왕江都王으로 발탁되었다. 〈문생들을 가르쳤으니,〉 학문과 기예를 열심히 닦지 않으면 그 명성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오.”
잠문본岑文本이 대답하였다. “사람이注+(대저)는〉 이다.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은 바뀌어 가니, 반드시 배움으로 을 잘 다스려 그 본성을 완성해야 합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옥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도리를 알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注+예기禮記》 〈학기學記〉의 내용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학문에 열심히 하는 것을 아름다운 덕이라 한다.’라고 했습니다.” 라고 했다.
내가 살펴보건대, 이라는 의미는 본받음이다. 사람의 본성이 모두 하지만 깨침에는 선후가 있으니 뒤에 깨치는 사람은 반드시 앞서 깨친 사람이 한 것을 본받아야만 선을 밝혀 애초의 것을 회복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논한다면 선은 나의 본성에 본디 갖고 있는 것이지만 배움이 아니면 회복할 수 없으니, 마치 물은 대합이 본성적으로 본디 갖고 있는 것이지만 달이 아니면 물을 내뿜는 것을 이룰 수 없고, 불은 나무가 본성적으로 본디 갖고 있는 것이지만 불을 댕기는 나무가 아니면 불을 피울 수 없는 것과 같다.
태종太宗의 이 논의는 비록 후대의 순수한 유학자라도 크게 앞설 수 없다.
잠문본岑文本이 이러한 때에 의당, “폐하께서 이미 본성의 함이 자신에게 구비된 것을 아셨으니 본성은 안팎의 구분이 없으므로 바깥 것만 신중하고 내면의 것에 나태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본성은 처음과 끝의 다름이 없으므로 시작만 조심하고 끝에 나태해선 안 됩니다.” 라고 아뢰어
그 사악한 마음을 공격하고 옳지 않은 마음을 바로잡았다면 거의 병을 치유할 수 있었을 터인데, 다만 〈학기學記〉의 말만을 대충 인용하여 바르게 구제한 것이 없었다.
도가 밝아지지 않음은 훌륭한 임금이 있고 훌륭한 신하가 없는데 따른 것이니 어찌 대단히 개탄스럽지 않는가.


역주
역주1 學之爲言……而後可以明善而復其初也 : 《論語》 〈學而〉 1장 《集註》에 보인다.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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