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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觀政要集論(3)

정관정요집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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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집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貞觀十八年 太宗 以高麗莫離支賊殺其主하고 殘虐其下 議將討之한대
諫議大夫褚遂良進曰 陛下兵機神筭 人莫能知니이다
昔隋末亂離 克平寇難注+① 難:去聲.하며 及北狄侵邊하고 西蕃失禮 陛下欲命將擊之注+② 陛下欲命將擊之:將, 去聲.어늘 群臣莫不苦諫하되 唯陛下明略獨斷으로 卒竝誅夷注+③ 卒竝誅夷:卒, 子聿切.러니
今聞陛下將伐高麗하니 意皆熒惑이라 然陛下神武英聲 不比周隋之主
兵若渡遼 事須剋捷이어니와 萬一不獲하여 無以威示遠方이면 必更發怒하여 再動兵衆하리니 若至於此 安危難測하리이다하니 太宗然之注+④ 貞觀十八年……太宗然之:按通鑑 “李勣又曰 ‘間者薛延陀入寇, 陛下欲發兵窮討, 魏徵諫而止, 使至今爲患. 曏用陛下之策, 北鄙安矣.’ 上曰 ‘然, 此誠徵之失. 朕尋悔之, 而不欲言, 恐塞良謀故也.’ 上欲自征高麗, 褚遂良上疏, 以爲 ‘但命二三猛將, 四五萬衆, 仗陛下威靈, 取之如反掌耳. 今太子新立, 年尙幼穉, 自餘藩屛, 陛下所知. 一旦棄金湯之全, 踰遼海之險, 以天下之君, 輕行遠擧, 皆愚臣之所甚憂也.’ 時群臣多諫者, 上皆不聽.”하다
【集論】范氏祖禹曰 高麗臣屬於唐하여 而其主爲賊臣所弑하니 爲大國者不可不討
然高麗之大 未如突厥하고 其險遠不過於高昌吐谷渾하니 此三國者 皆命將帥以偏師取之하여 遂墟其國이어늘 何獨至於高麗而欲自征之乎
太宗若從遂良之言이면 雖伐而不克이라도 亦未失也
朱氏黼曰 自昔人主親睹亂敗者 不勸而自懲하고 深知禍咎者 不戒而自戢이라
煬帝伐遼之禍 至於家夷國破하고 身死而宗族屠하니 蓋太宗目睹어늘 曾莫之懲하고 而反疾趍以襲其蹟 何哉
蓋其心自謂吾之戰勝攻取 國富民衆 非隋敢望也
乘平定四夷之餘力하고 用諸將蕩平之餘威하여 臨城一鼓 可以勦除
意定志決 雖傾朝盡諫이나 不可復止矣
唐氏仲友曰 王魏旣歿 諫臣惟遂良爾어늘 而其識量不及魏徵하고 李勣一折하여 而遂良之諫不行이라
勣武臣爾 所見惟邊功이니 奈天下計何 魏徵在 勣此言必不發이요 就使有此言이런들 徵肯但已邪
遂良以克爲善하니 則其言已不能無過矣
胡不明夷夏之分하고 申知足之戒하여 以告帝曰 高麗小醜 不犯邊吏어늘 今而討之 勝之不武 不勝爲笑라하면 不亦善乎
勣之指魏徵하여 乃以杜遂良之再諫하니 惜乎 不抗疏而力陳之
太宗之欲用兵也 指魏徵之失하고 하니 諫臣繫國之輕重如此하니 論諫必若魏徵하면 可也
愚按 貞觀十七年 廷臣請增戍兵以逼高麗라한대 太宗曰 未聞戍兵能威絶域者也라하니
斯言也 帝王柔遠之道 何以尙玆리오
不數月而有討遼之議하고 越明年而有親征之行 不過爲遼主雪怨하고 爲新羅報仇어늘
乃欲襲漢武隋煬之所爲하여 所存者小하고 而所棄者大하니 何言行之相反邪
當時諫者多矣한대 若玄齡之言 以漢武隋煬爲鑑戒하니 誠保國之深規也 無忌之言 欲待其縱肆而後討 亦保國之長策也
遂良於下議之初 固沮其意하고 而親征之際 復尼其行하여 亦足少儆矣어늘 惜乎 太宗意定志決하여 而皆莫之從也
若李勣沮遂良之諫하여 以魏徵爲非 明致其君於不善之地 此孟子所謂 其罪不亦大乎


정관貞觀 18년(644)에 태종太宗고구려高句麗 막리지莫離支가 그 군주를 시해하고 아랫사람들을 잔학하게 대했다는 것을 구실로 토벌할 것을 논의하자,
간의대부諫議大夫 저수량褚遂良이 나아가 아뢰었다. “폐하의 신통한 용병술과 뛰어난 지략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과거 혼란했던 나라 말기에 혼란을 평정하셨고注+(혼란)은〉 거성去聲이다., 북적北狄이 변방을 침략하고 서번西蕃이 무례하게 굴었을 때에 폐하께서는 장수에게 명을 내려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셨는데注+(장수)은 거성去聲이다., 여러 신하들 중에 간곡하게 간언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직 폐하께서 명철한 지략과 독자적인 판단력으로 결국 모두 토벌하였습니다.注+(마침내)은 의 반절이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하신다는 소문을 들으니 마음이 모두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탁월한 무용武勇명성名聲북주北周나 수나라의 군주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군대가 만일 요하遼河를 건너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지만, 만에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황제의 위엄을 먼 지역에 보이지 못하면 반드시 다시 노여움을 드러내어 다시 많은 군대를 출동시키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지경에 이른다면 나라의 안위는 예측하기 힘듭니다.” 태종이 그 말을 수긍하였다.注+살펴보건대, 《자치통감資治通鑑정관貞觀 18년에 “이적李勣이 또 말하기를 ‘지난번에 설연타薛延陀가 침입해 왔을 때, 폐하께서 군사를 일으켜 끝까지 토벌하고자 하다가 위징魏徵이 간언하여 그만두는 바람에 지금까지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 폐하의 계책대로 했더라면 북쪽 변방이 안정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말하기를 ‘그렇소. 그 일은 참으로 위징이 잘못한 것이오. 짐이 곧바로 후회하였으나 말하려 하지 않았던 것은 좋은 계책이 진달되는 것을 막게 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오.’라고 하였다. 태종이 직접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저수량褚遂良이 상소하기를 ‘다만 두서너 명의 맹장猛將에게 명을 내려 4, 5만의 군사로 폐하의 위령威靈을 떨치게 하시면 고구려를 취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지금 태자太子께서 새로 책봉되어 나이가 아직 어리시고, 다른 변방 수비는 폐하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하루아침에 온전한 금성탕지金城湯池를 내버려두고서 험한 요해遼海(요동遼東)를 넘고, 천하의 군주로서 경솔하게 먼 원정길을 떠나려 하시는 것은 모두 어리석은 신이 심히 걱정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여러 신하들 중에 간언하는 자가 많았으나 태종은 따르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범조우范祖禹가 말하였다. “고구려高句麗나라에 속해 있으면서 그 군주가 적신賊臣에게 시해되었으니, 대국으로서 토벌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구려의 영토가 돌궐보다 작고, 험하고 멀기로는 고창국高昌國토욕혼吐谷渾에 지나지 않는데, 이 세 나라는 모두 장수에게 명하여 편사偏師(일부 군사)로 토벌하게 하여 마침내 그 나라들을 황폐하게 하였는데 어째서 유독 고구려만 직접 정벌하려고 하였는가.
태종이 만약 저수량褚遂良의 말을 따랐다면 비록 정벌하여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역시 과오가 되지 않는다.”
주보朱黼가 말하였다. “옛날부터 군주들 중에 혼란과 패망을 직접 목도한 자는 권면하지 않아도 스스로 징계하고, 재앙과 과오를 잘 아는 자는 경계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못된 행동을 멈추었다.
수 양제隋 煬帝요동遼東을 정벌했다가 그 재앙이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며 자신은 죽고 종족이 죽임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태종이 그 일을 직접 목격하였음에도 징계를 하지 않고 도리어 빠르게 따라 그 자취를 답습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마음속에 ‘내가 전투에서 승리하고 공격하여 차지한 영토, 나라의 부강한 정도와 많은 인구의 수는 나라에서 감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사이四夷를 평정하고 남은 기세를 타고 적을 소탕하여 평정한 여러 장수들의 남은 위세를 이용하여 성에 이르러 한 번 북을 울리면 적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뜻이 한 번 결정되자 온 조정에서 모두 간언하였으나, 다시 출병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당중우唐仲友가 말하였다. “왕규王珪위징魏徵이 죽은 뒤에 간신諫臣은 오직 저수량褚遂良뿐이었는데, 그의 식견과 역량은 위징에게 미치지 못했고, 이적李勣이 한 번 〈그의 뜻을〉 꺾어서 저수량의 간언이 시행되지 못했다.
이적은 일개 무신武臣일 뿐이라, 아는 것이라고는 변방 전투에서 세운 무공武功뿐이었으니, 천하를 위해 무슨 계책을 낼 수 있겠는가. 위징이 살아 있었더라면 이적은 이런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가령 이런 말을 했다고 한들 위징이 어찌 다만 내버려둘 뿐이겠는가.
저수량은 정벌에서 승리하는 것을 좋게 여겼으니, 그의 말에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어찌 오랑캐와 중화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만족할 줄 아는 경계를 거듭 말하여 태종太宗에게 고하기를 ‘고구려高句麗는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로 우리 변방의 관리를 침범하지 않았는데, 지금 토벌하면 승리한다고 해도 무공武功이 되지 못하고, 패배한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말했다면 역시 좋지 않겠는가.
이적이 위징의 잘못을 지적하여 저수량이 재차 간언하는 것을 막았으니, 극력 상소하여 힘껏 아뢰지 않은 것이 안타깝도다.
태종은 정벌하려고 할 때에는 위징의 잘못을 지적하고, 정벌을 감행한 것을 후회할 때에는 위징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간신諫臣이 나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논간論諫을 반드시 위징처럼 한다면 괜찮다.”
내가 살펴보건대, 정관貞觀 17년(643)에 조정 신하 중에 병력을 증강하여 고구려高句麗를 압박하라고 요청하는 자가 있었는데, 태종이 말하기를 “멀리 있는 나라가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귀의하게 만들어야지, 병력으로 멀리 있는 나라에게 위엄을 보인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제왕이 먼 지역에 있는 나라를 회유하는 방법이니, 어찌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요동遼東을 토벌하자는 논의가 있었고, 그 이듬해에 친히 정벌을 감행한 것은 고구려高句麗 군주를 위해 원한을 씻어주고, 신라新羅를 위해 원수를 갚아주는 일에 불과했는데,
한 무제漢 武帝수 양제隋 煬帝가 먼 지역을 정벌한 일을 답습하려고 하여 얻은 것은 작고 버린 것은 컸으니, 어찌 말과 행동이 그리도 상반된 것인가. 어찌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시에 간언을 하는 신하가 많았는데, 방현령房玄齡의 말은 한 무제와 수 양제를 거울로 삼으라는 것이었으니 진실로 나라를 보전하는 깊은 법도가 되고, 장손무기長孫無忌의 말은 고구려가 더 방자하게 행동하기를 기다린 뒤에 토벌하려는 것이었으니 역시 나라를 보전하는 장구한 계책이다.
저수량褚遂良은 논의를 하는 초기에 진실로 태종의 뜻을 저지하였고, 태종이 친히 정벌을 나설 때에 다시 그의 출정을 막아 조금이나마 경계를 드리웠는데, 정벌에 대한 태종의 뜻이 결정되어 모두 따르지 않은 것이 애석하도다.
이적李勣이 저수량의 간언을 저지하여 과거 위징魏徵의 간언을 잘못이라 한 것은 분명히 군주를 좋지 못한 곳으로 빠뜨린 행위이니, 이는 맹자孟子가 이른바 군주를 악행을 선도하는 자이니 그 죄가 역시 크지 않은가.”


역주
역주1 其悔用師也 興魏徵之思 : 太宗이 高句麗 정벌에 실패하고 회군하며 후회할 때 魏徵이 살아 있었으면 이 전쟁을 못하게 말렸을 것이라고 회상한 것을 말한다.
역주2 遠人不服 則修文德以來之 : 《論語》 〈季氏〉에 보인다.
역주3 言之非艱 而行之惟艱 : 《書經》 〈商書 說命 中〉의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非知之艱 行之惟艱]”를 변용한 것이다.
역주4 逢君之惡 : 《孟子》 〈告子 下〉에 보인다.

정관정요집론(3)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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