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謂慶鄭曰 秦寇深矣니 奈何오 慶鄭曰 君深其怨하니 能淺其寇乎잇가
한대 慶鄭吉
이어늘 公曰 鄭也不
이라하고 以家僕徒爲右
하고 步揚御戎
하며
以君之出也
에 하고 入也
에 煩己
하고 饑食
에 其糴
하야 三施而無報
라 故來
어늘 今又擊之
하니 秦莫不慍
이요 晉莫不怠
라
一夫
도 不可狃
온 况國乎
아하고 公令韓簡挑戰
하야 曰
君若
이면 寡人之願也
어니와 君若不
이면 寡人將無所避
니이다
曰昔君之未入
에 寡人之憂也
요 君入而
에 寡人未敢忘
호라
昔에 君之不納公子重耳하고 而納晉君하니 是君之不置德하고 而置服也니이다
昔
에 吾之不納公子重耳
하고 而納晉君
은 是
不置德
하고 而置服也
니라
梁由靡御韓簡
하고 秦公
하야 將止之
러니 慶鄭曰 釋來救君
하라하야늘
逐之
면 恐構諸侯
요 以歸
면 則
이요 復之
면 則君臣合作
하야 恐爲君憂
니 不若殺之
니이다
恥大國之士於中原하고 又殺其君以重之면 子思報父之仇하고 臣思報君之讎니
晉君之無道는 莫不聞이오 公子重耳之仁은 莫不知니이다
戰勝大國은 武也요 殺無道而立有道는 仁也요 勝無後害는 知也니이다
恥一國之士하고 又曰余納有道以臨汝라하면 無乃不可乎잇가
殺其弟而立其兄하야 兄德我而忘其親이면 不可謂仁이요
復其君而質其適子하야 使子父代處秦이면 國可以無害리이다
102. 진秦나라가 진晉나라를 침범하여 진秦나라가 진혜공晉惠公을 포로로 잡았다
【大義】전쟁에서의 名分을 가진 군대와 명분을 잃은 군대의 勝負 속에 나타나는 事必歸正.
6년에 진秦나라에 풍년이 들어 백성들이 안정되었다.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진晉나라를 침략하여 한원韓原 땅에 이르렀다.
혜공惠公이 경정慶鄭에게 일러 말하기를 “진秦나라가 깊숙이 침입했으니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니, 경정이 말하기를 “임금님께서 그들의 원망을 깊게 하였으니 그 침입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임금님께서는 괵석虢射에게 물어보십시오.” 하자, 혜공惠公이 말하였다.
병거兵車의 오른쪽에 탈 사람을 점쳤는데 경정이 길吉한 것으로 점쳐지자 혜공惠公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공손하지 못하다.” 하고는, 가복도家僕徒를 병거의 오른쪽에 타는 사람으로 삼고 보양步揚에게 병거兵車를 몰게 하였다.
양유미梁由靡가 한간韓簡의 병거를 몰고 괵석虢射이 〈한간韓簡〉 병거의 오른쪽에 타는 사람이 되어 혜공惠公이 탄 병거의 뒤에 섰다.
혜공惠公이 진秦나라 군사를 방어하면서 한간韓簡에게 명령하여 〈진秦나라〉 군사를 둘러보게 하였다.
“군사의 수효는 우리보다 적었으나 싸우고자 하는 병사의 수효는 우리보다 많았습니다.”
혜공惠公이 말하기를 “무엇 때문인가?” 하니, 한간韓簡이 대답하였다.
“임금님께서 〈진晉나라에서〉 쫓겨났을 때 자신들의 나라에 의지하여 정착하였고, 입국入國할 적에 자신들 나라를 번거롭게 하였고, 〈진晉나라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들 나라가 쌀을 사들일 수 있게 하여, 세 번씩이나 은혜를 베풀었는데도 보답이 없는 까닭에 치러 왔는데 지금 또 자신들을 공격하고자 나서고 있어, 진秦나라 군사는 누구도 노여움을 품지 않는 사람이 없고 진晉나라 군사는 은혜를 입었으므로 게으른 생각을 내지 않은 군사가 없습니다.
혜공惠公이 말하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내가 공격하지 않고 돌아가면 반드시 만만히 알고서 가볍게 여기려 들 것이다.
한 사람의 필부도 만만히 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나라이겠느냐!” 하고, 혜공惠公이 한간韓簡에게 도전하게 하면서 말하였다.
“옛날에 진秦나라 임금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는 과인이 감히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과인에게는 많은 군사가 있어 능히 모을 수는 있지만 능히 해산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秦나라 군주께서 만약 바로 발길을 돌리신다면 과인寡人이 원하는 일이지만 진군秦君께서 만약 발길을 바로 돌리시지 않는다면 과인으로서도 피할 길이 없을 듯하옵니다.”
목공穆公이 무늬가 조각된 창을 비껴 들고 나와서 사자使者를 보고 말하였다.
“옛날 진晉나라 군주가 입국하지 못하였을 적에도 과인이 그것을 걱정하였고, 진晉나라의 군주가 입국하여 군주 자리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였을 적에도 과인이 그 일을 감히 잊지 못하였다.
지금 진晉나라의 군주가 이미 안정되어 군주 자리가 확고하여졌으니 군주께서 군진軍陣을 정돈한다면 과인이 장차 직접 만나 볼 것이다.”
사자使者가 돌아가자 공손公孫지枝가 간언諫言을 올렸다.
“옛날에 임금님께서 공자公子중이重耳를 들여보내지 않고 지금의 진晉나라 군주를 들여보내셨는데 그것은 임금님께서 덕德 있는 공자公子를 세우지 않고 복종하는 공자를 세우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세우고서 자리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공격하였다가 이기지 못한다면 앞으로 제후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왜 난리가 일어나서 그가 스스로 쓰러지는 날을 기다리지 않으십니까?” 하니, 목공穆公이 말하였다.
옛날 내가 공자 중이重耳를 들여보내지 않고 지금의 진나라 군주를 들여보낸 것은 덕德 있는 이를 세우지 않고 복종하는 이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공자 중이가 사실상 달가워하지 않는데 내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느냐?
국내에서 그의 옹립을 주도한 자들을 죽이고 국외로는 뇌물 약속을 저버렸다.
저들이 우리의 베풂을 외면하는 것이 마치 하늘을 무시하는 듯한 말투이다.
만약 하늘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이길 것이다.”
진秦나라 군주가 대부大夫에게 읍揖하여 수레에 오르게 하고서는 직접 북을 쳐 군사를 진격시켰다.
진晉나라 군사가 무너져 〈혜공惠公의〉 병거를 끄는 말이 깊은 수렁에 빠졌다.
혜공惠公이 경정慶鄭을 소리쳐 불러서 말하기를 “나를 태우도록 하라.” 하니, 경정慶鄭이 대답하였다.
“베풀어준 선행도 잊고 은덕도 저버리고 또 길한 점괘마저 무시하셨습니다.
경정의 수레는 임금님께서 욕되게 타시고서 피란할 만하지 못합니다.”
양유미梁由靡가 한간韓簡의 병거를 몰다 진공秦公을 맞아 싸워서 곧 포획하려는데, 경정慶鄭이 말하기를 “〈진목공秦穆公〉은 놓아두고 이리로 와서 우리 임금을 구하라.” 하였다.
그러나 구하지 못해 마침내 진秦나라에 붙잡혔다.
목공穆公이 귀국하여 왕성王城 땅에 이르러 대부大夫들을 모아놓고 계책을 의논하였다.
“진晉나라 군주를 죽이는 것, 〈진나라에서〉 축출하는 것, 귀국시키는 것, 다시 왕위王位를 회복시켜 주는 것들 중 어느 것이 이롭겠느냐?”
축출시키면 제후와 결탁할까 염려되고, 귀국시킨다면 우리 국가에 간특한 일이 많을 것이고, 왕위를 회복시켜 주면 군신君臣이 합작하여 임금님의 걱정거리를 만들어낼까 염려되니 죽이는 것만 못합니다.”
대국大國의 군사를 들녘의 한가운데에서 부끄럽게 하고 또 그 임금을 죽여서 치욕을 가중시킨다면, 아들은 아버지의 원수 갚기를 생각하고 신하는 임금의 원수 갚기를 생각할 것입니다.
설사 진秦나라가 아니더라도 천하의 제후諸侯 중에 뉘라서 그런 나라를 걱정거리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장차 공자公子중이重耳로 대신하려는 생각에서입니다.
진晉나라 군주의 무도無道함에 대해서는 듣지 않은 사람이 없고, 공자公子중이重耳의 인덕仁德은 알지 못하는 이가 없습니다.
대국大國을 싸워 이긴 것은 무력武力을 과시함이고, 무도無道한 사람을 죽이고 도道가 있는 사람을 세우는 일은 인덕仁德을 밝힘이고, 이기고서 뒤탈이 없게 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한 나라의 군사들에게 치욕을 안기고서 또 내가 도덕道德을 갖춘 공자公子를 들여보내 너희를 다스리게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 일이 불가하게 된다면 반드시 제후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승전하고서 제후들의 비웃음을 산다면 무력武力을 드러낸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아우를 죽이고 그 형을 세워서 그 형이 우리를 덕스러워하고 그 아우의 죽음을 잊는다면 인덕仁德이 있다 말할 수 없을 것이고,
만약 그 아우의 죽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는 거듭 은혜를 베풀고서도 결과를 얻지 못하는 일이 될 것이니 지혜롭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秦나라 군주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니, 공손公孫지枝가 말하였다.
“돌려보내서 그것을 인연으로 진晉나라와 화평을 맺어 두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의 군주 자리를 회복시켜 주고 그의 맏아들을 볼모로 잡아서 아들과 아버지가 번갈아 진秦나라에 머물러 있게 한다면 나라에 해가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혜공惠公을 돌려보내고 아들 자어子圉를 볼모로 잡았으며, 진秦나라가 하동河東 지역의 정무를 처음으로 관장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