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王使
으로 賜晉文公命
한대 上卿逆於境
하고 晉侯郊勞
하며 館諸宗廟
하고 饋
하며 設
러니
大宰涖之
에 晉侯
以入
하니 大宰以王命
으로 命
할새 內史贊之
하야 而後卽冕服
하다
敬王命
은 順之道也
오 成禮義
는 德之則也
니 則德以
諸侯
면 諸侯必歸之
하나니이다 且禮
는 所以觀忠信仁義也
니
忠은 所以分也오 仁은 所以行也오 信은 所以守也오 義는 所以節也라
忠分則均하고 仁行則報하고 信守則固하고 義節則度니
分均無怨이오 行報無匱요 守固不偸요 節度不攜니이다
若民不怨而財不匱하고 令不偸而動不攜면 其何事不濟리잇가
中能應外
는 忠也
오 는 仁也
오 守
不淫
은 信也
오 行禮不疚
는 義也
니이다
二十一年
에 以諸侯朝
於衡
하며 且獻楚捷
하야 遂爲
하니 於是乎始霸
하니라
14. 내사內史흥興이 진문공晉文公은 반드시 패자霸者가 될 것이라고 논論하다
【大義】晉文公이 命服을 받을 때 禮를 준수하고 恭敬하며 忠信仁義를 갖추었으니, 뒷날 반드시 霸業을 이룰 것이라고 예언하다.
주양왕周襄王이
태재太宰문공文公과
내사內史흥興을 통해
진문공晉文公에게
을 하사하였는데,
상경上卿이 국경에 나와 이들을 맞이하고,
진후晉侯가
교외郊外에 나와 위로하였으며,
종묘宗廟에서 묵게 하고,
구뢰九牢를 갖추어 성대히 대접하였으며,
궁정宮庭에 큰 촛불을 밝혔다.
명복命服을 받는 날이 되자 무공武公의 사당에서 왕명王命을 받을 적에 뽕나무로 만든 신주神主를 배설排設하고, 궤연几筵을 설치하였다.
태재太宰가 그 자리에 임석臨席하자 진후晉侯가 현단복玄端服과 위모관委貌冠을 쓰고 자리에 들어오니, 태재太宰가 왕명王命으로 면복冕服을 주었다. 그때 내사內史가 진후晉侯를 인도하여 세 번 왕명王命을 선포하고 진후晉侯가 세 번 사양한 뒤에 면복冕服을 받으러 나아갔다.
예禮를 다 마치고 나서 빈賓‧향饗‧증贈‧전餞의 예禮를 행하는데 마치 공公이 왕명王命을 받아 후侯와 백伯을 대하는 예禮와 같이 하였으며 연회를 베풀고 우호友好를 다짐하였다.
“진晉나라를 잘 대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임금이 반드시 제후諸侯의 패자霸者가 될 것입니다.
왕명王命을 맞이하는 태도가 공경하였고, 명복命服을 받는 의식이 예禮에 부합하였습니다.
왕명王命을 존경하는 것은 순종하는 도리요, 예의禮義에 부합하는 것은 덕德의 준칙準則이니, 덕德의 준칙準則으로 제후諸侯를 인도하면 제후諸侯들이 반드시 귀부歸附할 것입니다. 또 예禮는 그 사람의 충忠과 신信과 인仁과 의義를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충忠은 치우치지 않게 균등均等하고, 인仁은 은혜를 행하고, 신信은 전일專一하게 지키고, 의義는 절도 있게 하는 것입니다.
충忠이 치우치지 않으면 균등하게 되고, 인仁이 행해지면 반드시 보답하게 되고, 신信으로 지키면 견고하게 되고, 의義로 일을 조절하면 법도法度가 있게 됩니다.
치우치지 않고 균등均等하면 백성의 원망이 없고, 은혜를 행하여 보답하면 재용財用이 부족함이 없고, 굳게 지키면 구차해지지 않고, 절도 있게 일을 처리하면 백성이 이반離反하지 않습니다.
백성이 원망하지 않고 재용財用이 부족하지 않으며, 명령命令이 구차하지 않고 백성의 행동이 이반離反하지 않으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마음과 몸 밖의 일이 호응하는 것은 충忠이요, 세 번 사양하는 도리를 행하고 복장이 예禮에 적절한 것은 인仁이요, 예를 준수하여 과분過分하지 않은 것은 신信이요, 예禮를 행하면서 실수하지 않은 것은 의義입니다.
신臣이 진晉나라의 국경에 들어갔을 적에 충신인의忠信仁義 네 가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신臣은 이 때문에 진후晉侯는 예禮를 지킨다고 말씀드리니, 왕王께서는 진晉나라를 잘 대우하십시오.
예禮가 있는 사람에게 은혜를 심으면 틀림없이 그 사람에게 풍후豐厚한 보답을 받게 됩니다.”
왕이 내사內史흥興의 말을 따르니 진晉나라에 사신使臣 가는 자가 길에 서로 이어졌다.
혜후惠后의 난難에 왕王이 출국出國하여 정鄭나라에 있었는데, 진후晉侯가 다시 왕실王室에 들였고,
양왕襄王 16년에 진문공晉文公을 제후諸侯로 세웠다.
양왕襄王 21년에 제후諸侯를 데리고 형옹衡雝에서 왕王을 조회朝會하였고, 또 초楚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을 바치고는 마침내 천토踐土에서 회맹會盟하니, 이리하여 진후晉侯가 비로소 패자霸者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