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中擇其一二似近者
하야 而
면 則於交友忠而不反於背面者
가 少似近焉
이나 亦其心之所好耳
요
行之不倦이라면 則未敢自謂能爾也니 不敢當不敢當이로라
至於
於富貴
하야 以救世爲事者
는 皆聖賢之事業
이니 知其智能謀力能任者也
니라
始相識時
에 方甚貧
하야 이요 其後相見於汴徐二州
에는 僕皆爲之
하야 日月有所入
하야 比之前時
면 豐約百倍
로되
惟君子得禍爲不幸
하고 而
하며 君子得福爲恒
하고 而小人得福爲幸
하니 以
니라
賢不肖
는 存乎己
하고 貴與賤禍與福
은 存乎天
하며 名聲之善惡
은 存乎人
하니 存乎己者
는 어니와 存乎天存乎人者
는 吾將任彼而不用吾力焉
이라
足下曰 命之窮通은 自我爲之라하니 吾恐未合於道니라
足下
면 則知矣
리라 若曰 以道德爲己任
하고 窮通之來
는 不接吾心
이면 則可也
리라
공公이 외부의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自立] 탁월한 처심處心(정신, 사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대수大受 족하足下께, 주신 편지 잘 받아보니 내려주신 은혜가 매우 큽니다.
그러나 칭찬하신 말씀이 지나치게 높으니, 이 어찌 이른바 “사람을 유도하여 이런 경지에 이르게 하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칭찬하신 말씀 중에서 한두 가지 비슷한 것을 골라 취한다면, “벗을 사귐이 충성스러워 등 뒤에서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약간 비슷하기는 합니다만 이 또한 마음으로 좋아할 뿐이고,
이를 행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감히 그렇다고 말할 수 없으니, 〈이 말씀 또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부귀를 취하는 일에 마음을 써서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사업으로 삼으라.”고 하신 말씀으로 말하면 이는 모두 성현聖賢의 사업이니, 지혜와 재능과 계모計謀와 역량力量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라야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 같은 자가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 서로 만났을 때에는 매우 가난하여 남의 도움으로 생활할 때였고, 그 뒤에 변주汴州와 서주徐州에서 서로 만났을 때에는 내가 모두 종사從事로 있었기에 다달이 수입이 있어서, 전일에 비하면 백 배나 풍족하였습니다.
그러나 족하가 보시기에 나의 음식과 의복이 전과 다름이 있었던가요?
그렇다면 나는 부귀富貴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출사出仕를 잊지 못해하는 것은 나의 뜻을 조금이나마 실현해보고 싶어서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쉽게 선뜻 말할 수 없습니다.
화복禍福과 길흉吉凶이 오는 것은 나의 행위에 달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군자가 화를 당하면 불행으로 여기고 소인이 화를 당하면 정상으로 여기며, 군자가 복을 받으면 정상으로 여기고 소인이 복을 받으면 요행으로 여기니, 이는 그 사람의 행위가 그런 결과를 초래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군자는 길吉하고 소인은 흉凶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현불초賢不肖는 자기에게 달렸고, 귀천貴賤과 화복禍福은 하늘에 달렸으며, 명성名聲이 좋고 나쁨은 사람들에게 달렸으니, 내게 달린 것은 내가 힘을 써야 하겠지만, 하늘과 사람들에게 달린 것은 저들에게 맡겨두고 내가 힘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지켜야 할 일이 간약簡約하여 실행하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족하足下는 “곤궁困窮하냐 현달顯達하냐 하는 운명은 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내가 보기에 이 말씀은 도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족하께서 전대前代의 일에 의거해 말씀하신다면 〈이 말씀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이니, 만약 “도덕을 수양하는 것을 나의 임무로 삼고, 곤궁과 영달이 오는 것은 내 마음에 두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도리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초목만 무성한 황량荒涼한 곳에서 곤궁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외출을 하려 해도 타고 갈 당나귀마저 없어, 사람들과의 교유가 끊겼습니다만 그래도 방 안에서 스스로 즐길 거리가 있습니다.
족하께서 내가 다시 화란禍亂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신다면 편안히 집안에만 앉아 계시는 것은 옳지 않으니, 〈기회를 보아 한번〉 천천히 찾아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