元和八年六月庚子에 太史尙書比部郞中護軍韓愈刻其墓碑曰 司馬氏遷江南에 有鄭豁者하니
仕慕容垂國하야 爲其太子少保하니라 其孫簡은 當拓拔魏하야 爲滎陽太守하니 後簡者는 號其族爲南祖라하니라
南祖之鄭에 入唐有爲利之景谷令者하니 曰嘉範이라 於公爲曾祖라
是生撫俗하니 爲泗之徐城令하니라 徐城生公之父하니 曰洪이라 卒官涼之戶曹參軍하니라
公諱儋이라 少依母家隴西李氏러니 擧止異凡兒하니라 其舅吏部侍郞季卿이 謂其必能再立鄭氏라하다
稍長에 能自課學하야 明左氏春秋하야 以進士選爲太原參軍事하니라
하야 拜京兆高陵尉
하니라 考府之進士
하야 能第上下
에 以實不姦
하니라
이 以襄陽兵戰淮西
에 公以參謀留府
하니 能任後事
일새니라
戶曹殯于涼
하니 하야 自景谷徐城三世
를 皆未還滎陽葬
하니라
公解官擧五喪爲三墓하야 葬索東하니라 徐城墓無表하니 公能幼長哀感하야 心求不置하야 以得舊人指告其處하니라
其後爲大理丞太常博士
라가 遷起居郞尙書司封吏部
하니 能官擧其名
하니라
德宗晩節에 儲將於其軍하야 以公爲河東軍司馬하니라 能以無心處嫌間하야 卒用有就하니라
貞元十六年에 將說死에 卽詔授司馬節하야 節度河東軍하고 除其官하야 爲工部尙書太原尹兼御史大夫北都留守하니라
公之爲司馬에 用寬廉平正으로 得吏士心이러니 及昇大帥하야도 持是道不變하니라
部將有因貴人求要職者어늘 公不用하고 用老而有功無勢而遠者하니라
削四隣之交賄하고 省姱嬉之大燕하며 校講民事하고 施罷不竢日하니라
用能以十月成政하야 氓征就寬하고 軍給以饒하니라 十七年에 疾廢朝夕터니
八月庚戌薨하니 享年六十一이라 天子爲之不能臨朝者三日이요 贈尙書右僕射하니라 卽以其年十月辛卯에 葬索上하니라
疾比薨에 醫問交道하고 比葬에 弔贈賜使者相及하고 凡河東軍之士와 與太原之氓吏와
及旁
百邑之鰥寡
와 外夷狄之統於府者
가 聞公之薨
하고 皆哭曰 吾其如何
오하니라
公與賓客朋遊에 飮酒必極醉하고 投壺博奕을 窮日夜하니 若樂而不厭者라
平居簾閣하고 據几終日하야 不知有人하고 別自號白雲翁이라 名人魁士가 鮮不與善이라
好樂後進하야 及門接引하고 皆有恩意하니라 始娶范陽盧氏女하야 生仁本仁約仁載하니 皆有文行이라
二季擧進士나 皆早死하고 仁本爲後子獨存한대 不樂擧選하야 年三十餘에 始佐河陽軍하니라
後娶趙郡李氏는 生三女라 二夫人은 凡三男五女하니라 長女嫁遼東李繁하니 繁亦名臣子로 有才學하니라
士常患勢卑하야
不能推功德及人하고
常患貧하야
無以奉所欲得이라
若鄭公者는
勤一生以得其位로되
而曾不得須臾有焉이라
雖然이나 觀其所旣立이면
其可知已로다
嗚呼哀哉라
河東節度使 贈尙書右僕射 鄭公을 滎陽 索水 가에 안장하였다.
元和 8년(813) 6월 庚子日에 太史 尙書比部郞中 護軍 韓愈가 그 墓碑에 다음과 같이 글을 새겼다. 司馬氏(晉)가 江南으로 遷都할 때에 鄭豁이란 분이 있으셨는데,
慕容垂의 나라(後燕)에 벼슬하여 太子少保가 되었다. 그분의 손자 鄭簡은 拓拔魏(北魏) 때에 滎陽太守를 지냈는데, 鄭簡의 후손들은 그 일족을 南祖 鄭氏라 부른다.
남조 정씨 중에 唐나라에 들어와서 利州의 景谷縣令을 지낸 鄭嘉範이란 분이 있었는데 이분이 공에게 曾祖가 되신다.
이분이 撫俗을 낳았는데 泗州의 徐城縣令을 지내셨다. 서성현령이 공의 부친 鄭洪을 낳으셨는데 涼州의 戶曹參軍으로 관직을 마치셨다.
鄭公은 諱가 儋이다. 少年 때에 外家인 隴西 李氏 댁에 의탁하였는데, 행동거지가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이를 본〉 그의 外叔 吏部侍郞 李季卿은 “이 아이가 반드시 鄭氏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금 성장한 뒤에는 스스로 학문을 탐구해 ≪春秋左氏傳≫을 밝게 통달하여 進士로써 뽑혀 太原參軍事가 되었다.
直言對策에 참가해 京兆府 高陵尉에 임명되었다. 京兆府의 進士들을 考査하여 上下의 등급을 매길 때에 실제에 의거하고 부정을 범함이 없었다.
右僕射 樊澤이 襄陽의 군대를 거느리고 淮西를 토벌할 때에 鄭公은 參謀로서 節度使府에 남았으니, 이는 後方의 임무를 능히 감당할 만하였기 때문이었다.
〈鄭公의 부친〉 戶曹參軍을 涼州에 殯葬하였는데, 涼州 지방이 西戎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景谷(증조부), 徐城(조부)으로부터 부친까지 3世를 모두 고향인 滎陽으로 모셔와 장사 지내지 못하였다.
공은 관직에서 解任된 뒤에 다섯 位의 靈柩를 索水 동쪽으로 모셔다가 세 개의 무덤으로 만들어 埋葬하였다. 徐城公의 墓所에 墓表가 없어 〈묘소를 잃었는데,〉 공은 어려서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슬퍼하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찾는 일을 멈추지 않아, 마침내 묘소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舊人(老人)을 만났다.
그 뒤에 大理丞 太常博士가 되었다가 起居郞 尙書司封員外郞 吏部員外郞으로 승진하니 유능한 관원으로 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德宗 만년에 군대 안에 장군감을 비축하기 위해 공을 河東軍司馬로 삼았다. 공은 혐의받는 상황에서 무심함으로 처신하여 끝내 성취함이 있었다.
貞元 16년(800)에 將軍 李說(河東節度使)이 죽자, 즉시 조서를 내려 司馬에게 節度使의 符節을 주어 河東軍을 통솔하게 하고, 관직을 제수하여 工部尙書 太原尹 兼御史大夫 北都留守로 삼았다.
鄭公이 司馬로 있을 때에 너그럽고 청렴하고 공평하고 정직함으로 관리와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는데, 大帥(절도사)로 승진한 뒤에도 이 도리를 굳게 지켜 변치 않았다.
部將 중에 貴人을 통해 요직을 구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은 그를 임용하지 않고, 늙고 공이 있거나 세력도 없고 소원한 자를 임용하였다.
사방에서 上納하는 재물을 삭감하고 사치스럽게 즐기는 큰 宴會를 줄이며, 民事(소송)를 살펴 처리하기도 하고 화해시키기도 하며, 시행할 일과 없애야 할 일에 시일을 끌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열 달 만에 정치에 성과가 있어서, 백성에게 징수하는 부세는 가벼워지고 군대에게 주는 급료는 넉넉해졌다. 貞元 17년(801)에 병으로 아침저녁의 公務를 폐지하였다.
8월 庚戌日에 薨하니 향년이 61세셨다. 天子께서 그를 위해 3일 동안 朝會를 열지 않으시고 정공을 尙書右僕射에 추증하셨다. 그해 10월 辛卯日에 索水 가에 장사 지냈다.
정공이 병으로 薨逝할 즈음에 醫生과 문병하는 사람들이 길에 널렸고, 장사 지낼 때에 弔問과 贈賜하기 위해 오는 使者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河東軍의 병사 및 太原의 백성과 관리,
주변의 九郡과 百邑의 홀아비와 홀어미, 하동부의 統率을 받는 夷狄까지 정공의 薨逝를 듣고 모두 哭하면서 “우리는 장차 어찌할꼬.”라고 하였다.
정공은 빈객이나 붕우와 교유할 때에 술을 마셨다 하면 반드시 大醉하였고, 투호나 바둑‧장기로 밤낮을 보내니, 마치 이를 즐겨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에 발을 내린 樓閣에 거처하며 종일 동안 几에 기대어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고, 별도로 ‘白雲翁’이라고 自號하였다. 저명한 사람과 큰 학자 중에 그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 이가 드물었다.
後進을 좋아하여 직접 문까지 나가 맞이하고 모두에게 은혜롭게 대하였다. 范陽 盧氏의 따님을 첫째부인으로 맞이해 仁本‧仁約‧仁載를 낳았는데, 모두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밑으로 둘은 進士試에 참가하였으나 모두 일찍 죽고, 仁本만이 長子로 홀로 생존하였는데, 科擧를 좋아하지 않아 나이 30여 세에 비로소 河陽軍을 補佐하였다.
後娶 趙郡 李氏는 딸만 셋을 낳았다. 두 부인의 몸에서 아들 셋과 딸 다섯을 보았다. 장녀는 遼東 李繁에게 출가하였는데, 李繁 또한 名臣의 아들로 재능과 학문이 있었다.
정공은 두 부인과 각각 따로 무덤을 쓰고 합장하지 말라고 遺言하였다. 系(銘)는 다음과 같다.
선비는 항상 세력이 낮아서
공덕을 미루어 사람들에게 미치게 하지 못함을 걱정하고
항상 가난해서
남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음을 걱정한다
鄭公으로 말하면
일생 동안 부지런히 노력하여 官位를 얻었으나
그 관위를 잠시 동안도 누리지 못하였다
비록 그러나 그가 이미 세운 공로를 보면
그 사람됨을 알 것이다
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