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之論韓文者
는 共首稱碑誌
로되 予獨以韓公碑誌
는 多
하야 不得史漢序事法
이라 故於
處
에 或小
이라
至於歐陽公碑誌之文하야는 可謂獨得史遷之髓矣요 王荊公則又別出一調하니 當細繹之니라
序記書는 則韓公崛起門戶矣요 而論策二下는 當屬之蘇氏父子兄弟니라
四六文字
는 予初不欲錄
이나 然歐陽公之
와 蘇子瞻之
와 王荊公之深刺
가 於君臣上下之間
에 似有感動處
라 故錄而存之
하니라
予覽子厚之文
컨대 其
多
하고 其紀山水處多
하며 至於墓誌碑碣
하야는 其爲御使及禮部員外郞時所作
이라 多沿六朝之遺
일새 予不錄
하고 錄其貶永州司馬以後稍屬
者凡若干首
하야 以見其
云
이라
以其
自史遷出
하야 一切
有法
하고 而中多感慨俊逸處
니라
王之結構裁翦
은 極多
苦心處
나 往往矜而嚴
하고 潔而則
이라
至於蘇氏兄弟
하야는 大略長公者
는 文才
處多
나 以結構裁翦四字
는 非其所長
이라
諸神道碑에 多者는 八九千言이요 少者도 亦不下四五千言하니 所當詳略斂散處에 殊不得史體하니라
故其論多確而不嫌於複
하고 蘇氏兄弟
는 則本
而爲文
이라 故其論
하야 而多
之勢
하니라
歐則譬引江河之水
하야 而穿林麓灌
하고 若蘇氏兄弟
는 則譬之引江河之水
하야 以一瀉千里
하야 湍者縈
하고 逝者注
하야 杳不知其所止者已
니라
蘇明允易詩書禮樂論
은 未免雜之以曲見
이나 特其文
이라
子瞻
은 似狃於佛氏之言
이나 然亦以其見解
하고 其間又有文旨不遠
하야 稍近
者
라 故竝錄之
하니라
曾南豐之文은 大較本經術하고 祖劉向하야 其湛深之思와 嚴密之法이 自足以與古作者相雄長하니 而其光焰이 或不外爍也라
故於當時
에 稍爲蘇氏兄弟所掩
이나 獨
하고 歷數百年
하야 而近年
하야 如渴者之飮
也
하니라
以來
로 이 如長川大谷
하야 深之不窮
하고 攬之不竭
하야 하고 者
는 司馬子長之文也
요 하야 西京之中
에 獨冠儒宗者
는 劉向之文也
요 하야 上摹子長
하고 下採劉向父子
하야 者
는 班固也
요 하야 若千里之駒
가 而走赤電鞭疾風
하야 常者山立
하고 怪者霆擊
은 韓愈之文也
요 하야 若游峻壑削壁
하야 而谷風凄雨四至者
는 柳宗元之文也
요 하야 若携美人宴遊東山
하야 而
는 歐陽子之文也
요 하야 하야 赴千里之河而注之海者
는 蘇長公也
라
七君子者는 可謂聖於文矣요 其餘若賈董相如揚雄諸君子도 可謂才問炳然西京矣나 而非其至者요 曾鞏王安石蘇洵轍은 至矣니라
八大家而下
로 予於本朝獨愛
及
하노니 程朱所欲爲而不能者
ᄅ새니라
卽如
는 條次兵情
이 如指諸掌
이온 況其設伏出奇
의 先後本末
이 多合兵法
가
公固百世殊絶人物이니 區區文章之工與否는 所不暇論일새
予特附揭於此하야 以見我本朝一代之人豪하니 而後世之品文者는 當自有定議云이라
세상에 한공韓公(韓愈)의 문장文章을 논하는 자들은 모두 비문碑文과 지문誌文을 으뜸으로 치지만, 나(茅坤)는 홀로 한공의 비문과 지문은 기발奇拔하고 괴이怪異한 곳이 많아서 《사기史記》나 《한서漢書》의 서사법敍事法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멋을 부린 곳에 간혹 힘차고 자유분방한 기운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간간이 또한 나의 의견을 그 옆에 기록하였다.
구양공歐陽公(歐陽脩)의 비문과 지문은 홀로 태사太史 사마천司馬遷의 진수를 얻었다고 이를 수 있고, 왕형공王荊公(王安石)은 또 따로 한 격조格調를 창출創出하였으니 자세히 음미吟味해야 할 것이다.
서序‧기記‧서書는 한공韓公이 문호門戶를 일으켰고, 논論‧책策 이하는 응당 소씨蘇氏 부자와 형제(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에게 돌려야 한다.
사륙문자四六文字(騈儷文)는 내가 당초에는 수록하고자 하지 않았으나, 구양공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과 소자첨蘇子瞻(소식)의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것과 왕형공의 심각한 풍자諷刺가 군신 상하 사이에 감동을 줄 수 있을 것 같으므로 수록하였다.
내가 유자후柳子厚(柳宗元)의 문장을 보건대 그의 의議와 논論은 날카롭게 묘사한 곳이 많고, 산수기山水紀는 뜻이 깊고 문장이 활달한 곳이 많으며, 묘지墓誌와 비갈碑碣은 그가 어사御使와 예부원외禮部員外로 있을 때 지은 것이어서 육조六朝의 유습遺習을 답습한 변려체騈儷體가 많으므로 수록하지 않았고, 그가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左遷된 이후의 작품作品으로 의미意味가 깊은 것에 속하는 약간 편篇을 수록하여 그의 풍도風度와 기개氣槪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창려昌黎의 글만큼 많이 수록하지 않았다.
송宋나라 제현諸賢의 서사문敍事文은 구양공歐陽公을 으뜸으로 쳐야 한다.
그 문장의 격조格調가 태사太史 사마천司馬遷에서 나와서 모든 문장에 용어用語를 선택해 배열하고[結構] 불필요한 말들을 깎아내는 데[裁翦] 법이 있고, 중간에 감개感慨가 뛰어난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따금 그 글에 심취하곤 하였다.
증공曾公(曾鞏)의 문장의 대지大旨는 유향劉向에 가까우나 세속을 초월超越한 격조格調가 부족하다.
왕형공王荊公의 문장은 용어를 선택해 배열하고 불필요한 말들을 깎아낼 때에 지나치게 깎아내어 세련되게 꾸미느라 고심한 곳이 매우 많으나, 이따금 경건하여 엄숙하고 고결하여 법도에 맞았다.
그러나 증공에 비교하면 단지 엇비슷할 뿐이니, 구양공보다는 한 격格이 아래이다.
소씨蘇氏 형제로 말하면 대체로 장공長公(蘇軾)은 문재文才가 서글서글하고 시원하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곳이 많으나, 용어를 선택해 배열하고 불필요한 말들을 깎아내는 것은 그의 장기長技가 아니다.
여러 신도비神道碑 중에 글자가 많은 것은 8, 9천 자에 이르고 적은 것도 4, 5천 자 이하가 아니니, 당연히 상세히 기록할 곳과 간략히 기록할 곳, 수렴收斂할 곳과 발산發散할 곳에 사서史書를 편찬하는 체제體制를 얻지 못한 것이다.
학鶴의 다리는 길지 않을 수 없고, 오리의 다리는 짧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양공兩公의 책策과 논論은 천 년 이래의 뛰어난 문장이다.
그러므로 신도비神道碑에는 혹 한 격格이 떨어진 듯하니, 이 또한 하늘이 그 재능을 제한制限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구양공歐陽公과 소씨蘇氏 두 사람의 논論은 같지 않다.
구양공은 사실을 서술함에 있어 핵심을 정확히 집어 자세히 말하였다.
그러므로 그 논의論議가 대체로 정확하여 중복을 피하지 않았고, 소씨 형제는 《전국책戰國策》의 종횡縱橫의 뜻에 근거하여 문장을 지었기 때문에 그 논의가 솔직하고 유창하여 서글서글하고 시원하며 힘차고 자유분방한 기세가 많다.
구양공의 문장은 비교하자면 강하江河의 물을 끌어와 산림山林을 뚫고 농수로農水路로 흘려보내는 것 같고, 소씨 형제의 문장은 비교하자면 강하의 물을 끌어와 세차게 흘려보내다가 소용돌이치는 물은 빙빙 돌고, 흐르는 물은 흘러 멈출 곳을 알 수 없이 아득히 흘러가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작자는 서로 다르나 정교한 솜씨는 동일하다.’ 하겠으니, 학자들은 반드시 스스로 터득해야 할 것이다.
소명윤蘇明允(蘇洵)의 〈역론易論〉‧〈시론詩論〉‧〈서론書論〉‧〈예론禮論〉‧〈악론樂論〉은 편견偏見을 난잡하게 배열排列함을 면치 못하였으나, 단지 그 문장이 힘이 있기 때문에 수록하였을 뿐이다.
자첨子瞻의 대비각大悲閣 등等의 기문記文과 십팔아라한十八阿羅漢 등의 찬贊은 부처의 말에 미혹迷惑[狃]한 것 같으나, 그 견해가 뛰어나게 명확하고, 그 사이에 또 문장의 뜻이 깊지 않아 거자업擧子業에 가까운 것이 있으므로 아울러 수록收錄하였다.
증남풍曾南豐(曾鞏)의 문장은 대체로 경술經術(經學)에 근거하고 유향劉向을 본받아, 깊은 사고思考와 엄밀한 법法이 옛 작자들과 서로 우열을 다투기에 충분하니, 그 광채가 외부의 작용으로 인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소씨蘇氏 형제에 의해 빛이 가려졌으나, 유독 주회암朱晦庵(朱熹)은 그의 문장을 매우 칭찬하였고, 수백 년이 지나 근년에 와서는 왕도사王道思(王愼中)가 비로소 남풍의 문장을 알아보고서 읽어보고는 마치 목마른 자가 금경로金莖露를 마신 것처럼 좋아하였다.
내 일찍이 문평文評을 지어 다음과 같이 논평論評하였다.
“굴원屈原과 송옥宋玉 이후로 문장이 심후深厚하고 엄밀嚴密하기가 마치 장강長江 대곡大谷과 같아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끝이 보이지 않고 아무리 채취하여도 자원資源이 고갈되지 않아, 백가百家를 함축하고 만대萬代를 포괄한 것은 사마자장司馬子長(司馬遷)의 문장이고, 규모가 광대廣大하고 뜻이 심오하며 문사文辭에 전거典據가 있고 고아高雅하여 서한西漢의 문인 중에 유학儒學의 종사宗師 자리를 독점한 것은 유향劉向의 문장이고, 경위經緯를 따져 위로 사마자장의 문장을 본받고 아래로 유향父子의 문장을 채용하여 일가一家의 문장을 이룬 이는 반고班固이고,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힘차게 달리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여 마치 천리마千里馬가 번개처럼 달리고 질풍疾風처럼 달리는 것 같으며, 평범한 문장은 산이 서 있는 것처럼 장중莊重하고, 괴기怪奇한 문장은 벼락을 치듯이 맹렬한 것은 한유韓愈의 문장이고, 험준한 암산巖山과 높이 솟은 봉우리처럼 시문詩文이 웅장하고 뛰어나서 마치 깊은 골짜기의 절벽 아래서 노는데 골짜기 바람과 싸늘한 비가 사방에서 이르는 것 같은 것은 유종원柳宗元의 문장이고, 힘이 있고 아름다우며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여, 마치 미인美人을 대동하고 동산東山에서 잔치를 열어 즐겁게 노는 것 같아, 풍류風流와 문물文物이 강좌江左에 비춘 것은 구양자歐陽子의 문장이고, 글을 엮어 의사를 표출해야 할 것은 글을 엮고, 붓을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붓을 멈추어서, 기세가 한없이 성대하여 천 리를 달려온 하수河水가 바다로 흘러드는 것 같은 것은 소장공蘇長公의 문장이다.
이 일곱 사람은 문장에 있어 성인聖人이라 할 수 있고, 이 밖에 가의賈誼‧동중서董仲舒‧사마상여司馬相如‧양웅揚雄 같은 사람들도 재능과 학문이 서경西京을 빛냈다고 할 수 있으나 문장이 극치에 도달한 이들은 아니고,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소순蘇洵‧소철蘇轍은 극치에 도달한 분들이다.
증공은 또 대도大道를 절충하여 바름을 잃지 않았으나, 그 재능이 부족하여 간혹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나는 우선 이하와 같이 서술하여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감상하기를 기다린다.”
팔대가八大家 이후로 나는 우리 명明나라의 문장 중에 유독 왕문성공王文成公(王守仁)의 학문學問을 논한 여러 편의 글과 기학記學‧기존경각記尊經閣 등의 문장만을 좋아하니, 이는 정주程朱가 말하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서江西의 사작소辭爵疏와 무전주撫田州 등의 소疏는 당唐나라 육선공陸宣公과 송宋나라 이충정공李忠定公도 미치지 못할 바이다.
바로 이두浰頭와 용강槦岡의 군공軍功을 논한 소疏는 군대의 정황을 조목별로 서술한 것이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분명한데, 하물며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출기出奇(奇襲)하는 선후와 본말이 대부분 병법兵法에 부합함에랴.
사람들은 단지 그의 이 소가 자신의 공을 약간 자랑한 것이라 하여 이따금 헐뜯을 뿐이다.
공은 진실로 백세百世에 뛰어난 인물이니, 하찮은 문장이 정교하냐의 여부는 논할 거리가 못된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에 특별히 공을 부기附記하여 우리 명明나라 시대의 뛰어난 인물임을 드러내었으니, 후세에 문장을 품평品評하는 자들은 당연히 정론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