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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3)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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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小序極工하야 多悽愴嗚咽之旨하고 而哀辭特爾雅
歐陽詹世居하니 自詹已上 皆爲하야縣令者 累累有焉이라
閩越地肥衍하고 有山泉禽魚之樂하야 雖有으로 通文書吏事與齒者라도 未嘗肯出仕하니라
爲福建諸州觀察使하야 治其地하니라
袞以文辭進하야 有名於時러니 又作大官하야 臨莅其民하니라
鄕縣小民有能誦書作文辭者 袞親與之爲客主之禮하고 觀遊宴饗 必召與之하니 時未幾 皆化翕然하니라
詹于時獨秀出하야 袞加敬愛하니 諸生皆하니라 閩越之人擧進士 由詹始하니라
建中貞元間江南할새 未接人事 往往聞詹名閭巷間하니 詹之稱於江南也久
貞元三年 余始至京師擧進士 聞詹名尤甚하니라 八年春 遂與詹文辭同考試登第하야 始相識하니라
自後詹歸閩中하고 余或在京師他處하야 不見詹久者
惟詹歸閩中時爲然이요 其他時與詹離라도 率不歷歲니라
移時則必合하고 合必하야 久然後去 故余與詹相知爲深이라
詹事父母盡孝道하고 仁於妻子하며 於朋友義以誠하니라 氣醇以方하고 容貌하니라
하고 其文章切深하야 喜往復하고 善自道하니라 讀其書 知其於慈孝
十五年冬 余以徐州從事於京師 詹爲國子監四門助敎하야 將率其徒伏闕下하야 擧余爲博士러니 會監有獄하야 不果上하니라
觀其心이면 有益於余하야 將忘而爲之也니라 嗚呼 詹今其死矣로다
詹閩越人也 父母老矣로되 捨朝夕之養하고 以來京師 其心將以有得於是하야 而歸爲父母榮也
雖其父母之心亦皆然이라 詹在側 雖無離憂 其志不樂也하고 詹在京師 雖有離憂 其志樂也니라
若詹者 所謂者歟ㄴ저 詹雖未得位 其名聲流於人人하고 其德行信於朋友하니 雖詹與其父母皆可無憾也
詹之事業文章 旣爲之傳이라 故作哀辭以舒余哀하야 以傳於後하고 以遺其父母하야 而解其悲哀하고 以卒詹志云이라
求仕與友兮
遠違其鄕하고
父母之命兮
子奉以行이라
友則旣獲兮
祿實不豐하고
以志爲養兮
牛羊
事實旣修兮
名譽又光이라
父母忻忻兮
常若在旁이라
命雖云短兮
其存者長이라
終要必死兮
願不永傷이라
友朋親視兮
藥物甚良이요
飮食孔時兮
所欲無妨이라
壽命不齊兮
人道之常이요
在側與遠兮
非有不同이라
山川阻深兮
魂魄流行이라
祀祭則及兮
勿謂不通하라
哭泣無益兮
抑哀自強이라
推生知死兮
以慰孝誠이라
嗚呼哀哉兮
是亦難忘이라
愈性不喜書하야 自爲此文이나 惟自書兩通하야 其一通遺淸河하니 群與余皆歐陽生友也
哀生之不得位而死하야 哭之過時而悲하니라 其一通今書以遺彭城劉君伉하니라
君喜古文하야 以吾所爲合於古라하야 詣吾廬而來請者八九至로되 而其色不怨하고 志益堅하니라
凡愈之爲此文 蓋哀歐陽生之不顯榮於前하고 又懼其泯滅於後也
今劉君之請 未必知歐陽生이요 其志在古文耳 雖然이나 愈之爲古文 豈獨取其句讀不類於今者耶
思古人而不得見일새 學古道則欲兼通其辭하니 通其辭者 本志乎古道者也
古之道不苟譽毁於人하니 劉君好其辭 則其知歐陽生也無惑焉이라


02. 歐陽生을 위한 哀辭
小序는 매우 공교하여 비참해 오열할 만한 내용이 많고, 哀辭는 특별히 雅正하다.
歐陽詹은 대대로 閩越에 살았으니, 歐陽詹으로부터 윗대는 모두 閩越에서 지방관을 지내어 州佐縣令이 된 분이 여럿이었다.
閩越土地가 비옥한 데다가 山泉禽獸魚鼈의 즐거움까지 있어서, 비록 재능이 뛰어나고 品行이 우수한 사람으로 文書吏事에 정통한 것이 中國의 선비와 같은[] 자라 하더라도 일찍이 出仕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今上 卽位 에 전 宰相 常袞福建 諸州觀察使가 되어 그 지방을 다스렸다.
常袞은 문장으로 官界에 진출하여 당시에 명망이 있었는데, 또 大官이 되어 閩越의 백성을 다스렸다.
鄕縣의 백성 중에 古書誦讀하고 문장을 짓는 자가 있으면 常袞은 친히 그를 客禮로 대우하고, 구경하고 遊覽하거나 宴饗이 있으면 반드시 그를 초청해 참여시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교화되어 화합하였다.
이때 歐陽詹이 유독 출중하여 常袞이 더욱 존경하고 사랑하니 諸生이 모두 존경해 감복하였다. 閩越 사람으로 進士試에 응시한 것은 歐陽詹으로부터 비롯하였다.
建中貞元 연간 사이에 내가 江南에서 생계를 도모할 적에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으나, 골목 사이에서 이따금 歐陽詹의 이름을 들었으니, 歐陽詹의 이름이 江南에 칭송된 지 오래였다.
貞元 3년(787)에 내가 차음으로 京師로 가서 進士科에 응시할 적에 歐陽詹의 이름을 더욱 많이 들었다. 貞元 8년(792) 봄에 마침내 歐陽詹과 함께 文辭로써 進士試에 동참하여 급제하고서야 비로소 서로 알게 되었다.
그 뒤에 歐陽詹閩中으로 돌아갔고, 나는 혹은 京師에 있기도 하고 혹은 다른 곳에 있기도 하여 歐陽詹을 만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오직 歐陽詹閩中으로 돌아갔을 때에만 그러하였고, 다른 때에는 歐陽詹과 헤어져 있더라도 대체로 해를 넘긴 적이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만났고, 만나면 반드시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이 志向한 바를 잊을 정도로 〈뜻이 서로 맞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뒤에야 헤어졌다. 그러므로 나와 歐陽詹은 서로를 앎이 깊다.
歐陽詹父母를 섬김에 孝道를 다하고, 妻子에게 仁慈하며 벗에게 信義誠實로 대하였다. 質性이 순후하되 도의[]에 부합하였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중후하였다.
그가 한가로이 지낼 때는 우스갯소리를 잘하였으나 풍자해 남을 해치지 않았고, 그의 문장은 심각하여 글을 주고받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잘하였다. 그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慈孝를 가장 重視했음을 알 수 있다.
貞元 15년(799) 겨울에 나는 徐州從事로서 京師로 와서 朝正하였다. 이때 歐陽詹國子監四門助敎로서 그 門徒들을 거느리고 闕下에 엎드려 皇上께 나를 博士로 천거하려 하였는데, 마침 國子監訟事가 생겨 上書하지 못하였다.
그의 마음을 보면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기 직위의 미천함을 잊고 그렇게 한 것이다. 아! 歐陽詹이 이제 죽었구나.
歐陽詹閩越 사람이다. 父母가 연로하신데도 조석의 봉양을 버려두고 京師로 온 것은 장차 이곳에서 무언가를 얻어 가지고 돌아가서 父母를 영예롭게 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부모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歐陽詹이 곁에 있었다면 비록 헤어지는 근심은 없었겠지만 그 마음은 즐겁지 않았을 것이고, 歐陽詹京師에 있었다면 비록 헤어진 근심은 있었겠지만 그 마음은 즐거웠을 것이다.
歐陽詹으로 말하면 이른바 자기의 뜻으로써 부모의 뜻을 봉양한 자인 듯하다. 歐陽詹이 비록 높은 官位는 얻지는 못하였으나, 그 명성은 사람들에게 전해졌고 그 덕행은 벗들에게 신임을 받았으니, 歐陽詹과 그 부모가 모두 여한이 없을 것이다.
歐陽詹의 사업과 문장에 대해서는 李翺가 이미 그를 위해 을 지었다. 그러므로 나는 哀辭를 지어 나의 슬픔을 토로하여 후세에 전하고, 그 부모에게 드려 슬픔을 풀어드리고 歐陽詹의 뜻을 이루게 하노라.
벼슬과 벗을 구하려고
고향을 멀리 떠나왔네
부모가 명하셨고
자식이 받들어 행하였네
벗은 이미 얻었으나
祿은 실로 많지 않았네
뜻을 받들어 봉양하니
어찌 고기반찬 따지랴
사업 이미 성취되었으니
명예가 더욱 빛을 발했네
부모님 기뻐하시며
늘 곁에 있는 듯이 여기셨네
수명은 비록 짧았으나
명성은 길이 보존되리
사람은 끝내 죽기 마련이니
장구히 슬퍼하지 말기 바라네
벗들 직접 와서 살폈으니
사용한 약물 매우 좋았고
음식을 제때에 올리고
원하는 것들 마련하였네
수명이 같지 않은 것은
인생에 늘 있는 일이라
곁에 있건 멀리 있건
다를 게 없네
山川이 막혀 있어도
魂魄은 다닐 수 있으니
제사 지낼 때 되거든
길 막혔다 이르지 마소
통곡해도 소용없으니
슬픔 누르고 힘을 내세나
生者의 마음 미루어 死者의 마음 알 수 있으니
死者孝誠 위로하세나
아! 슬프다
이 사람 또한 잊기 어려우리
나는 성질이 글쓰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스스로 이 글을 지었으나 오직 두 통만을 직접 베껴서 한 통은 淸河崔群에게 주었으니, 崔群과 나는 모두 歐陽生의 벗이다.
崔群歐陽生이 높은 관직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죽은 것을 애달파하여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곡하며 슬퍼하였다. 한 통은 지금 베껴서 彭城劉君 에게 주었다.
劉君古文을 좋아하였는데 내가 지은 문장이 古文에 부합한다고 여겨, 나의 집으로 와서 나의 글을 보여주기를 요청한 것이 8, 9차례였다. 그러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고 뜻이 더욱 굳건하였다.
대체로 내가 이 글을 지은 것은 歐陽生이 생전에 현달하지 못한 것도 슬픈데, 또 죽은 뒤에 그 명성이 없어질까 두려워서이다.
지금 劉君이 〈이 글을〉 청하는 것은 반드시 歐陽生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그 뜻이 다만 古文에만 있을 뿐이다. 비록 그러나 내가 古文을 지을 때에 어찌 다만 句讀가 오늘날의 문장과 같지 않은 것만을 취하였겠는가.
옛사람을 그리워해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옛 도를 배워서 그 文辭까지 겸하여 통달하고자 하는 것이니, 그 문사를 통달하고자 하는 자는 본래 옛 도에 뜻을 둔 자이다.
옛 도는 사람들에 대해 함부로 기리지도 헐뜯지도 않으니, 劉君이 이러한 古人의 문사를 좋아한다면 그는 歐陽生을 잘 알고 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역주
역주1 歐陽生哀辭 : 이 哀辭는 貞元 17년(801)에 歐陽詹(?~800)을 애도하여 지은 것이다.
역주2 閩越 : 越王 句踐의 후예 無諸가 전국시대에 남방의 閩으로 들어가서 閩越王이라 자칭하고서 東冶(지금의 福州)를 國都로 정하였다.
역주3 閩越官 : 唐나라 제도에 의하면 閩中의 郡縣 관리는 吏部에서 선발해 보내지 않고, 5品 이상의 京官 한 사람을 專使로 파견해, 그 지방에 가서 관리를 선발해 補任하게 하고, 동시에 御史 한 사람을 파견해 감독하게 한다. 4년마다 한 번씩 선발하는데, 이를 ‘南選’이라 한다.
역주4 州佐 : 州刺史의 屬官으로 長史나 司馬 같은 것이다.
역주5 長材秀民 : 재능이 출중하고 덕행이 우수한 사람이다.
역주6 上國 : 京師와 中原을 이른다.
역주7 今上初 : 唐 德宗 建中 初年을 가리킨다.
역주8 故宰相常袞 : 常袞(729~783)은 唐 代宗 大曆 12년(777)부터 14년까지 宰相으로 있다가 德宗 建中 원년(780)에 福建觀察使로 나갔다.
역주9 推服 : 존경해 感服함이다.
역주10 就食 : 외지로 가서 살길을 찾음이다.
역주11 兩忘其所趨 :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 “趨는 趣와 같으니 意趣이다. 兩忘所趨는 바로 두 사람 모두 형식을 벗어던지고 어째서 그러는지조차 잊어버림을 가리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일설은 “두 사람은 정의가 투합하여 항상 함께 있기를 원하고 다시 헤어져 다른 곳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음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2 嶷嶷 : 단정하고 중후한 모양이다.
역주13 燕私善謔以和 : 燕私는 한가로이 지냄이고, 善謔은 우스갯소리를 잘함이고, 以和는 남을 풍자하여 해치지 않음이다.
역주14 最隆 : 最重이다.
역주15 朝正 : 옛날에 臣屬이 元旦에 入朝하여 天子를 謁見함이다.
역주16 其身之賤 : 신분이 미천함이다. 四門助敎는 從8品이어서 品階와 職位가 모두 낮았다. 그러므로 ‘賤’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17 以志養志 : 養志는 ≪孟子≫ 〈離婁 上〉에 보이는데, 부모의 뜻을 받들어 마음을 즐겁게 함이다. 韓愈는 歐陽詹이 부모의 마음을 깊이 살핌으로써 부모를 孝養하였다는 뜻으로 말한 듯하다.
역주18 李翺 : 字는 習之이다. 韓愈의 제자로 貞元 14년(798)에 進士에 올랐다. 官職이 山南東道節度使에 이르렀다.
역주19 何有 : 反問語氣에 사용하여 無關함을 표시한다.
역주20 崔群 : 772~832. 字가 惇詩이다. 한유와 同榜進士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3)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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