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女奴抱嬰兒來하야 致其主夫人之語曰 妾張圓之妻劉也라 妾夫常語妾云호대 吾常獲私於夫子라하고
且曰 夫子天下之名能文辭者
니 凡所
必傳世行後
라하니라
今妾不幸하야 夫逢盜死途中일새 將以日月葬하니 妾重哀其生志不就하고 恐死遂沈泯하야 敢以其稚子汴見先生하노니
將賜之銘이면 是其死不爲辱하고 而名永長存하야 所以蓋覆其遺胤子若孫이라
且死萬一能有知면 將不悼其不幸於土中矣리라하고 又曰 妾夫在嶺南時에 嘗疾病에
泣語曰 吾志非不如古人
이어늘 吾才豈不如今人而至於是
하야 而死於是
아
若爾吾哀
면 必求夫子銘
하라 是爾與吾不朽也
라하니라 愈旣哭弔
辭
하고 遂敍次其族世名字事始終而銘曰
君字直之라 祖讙과 父孝新은 皆爲官汴宋間하니라 君嘗讀書하야 爲文辭有氣하고
有吏才하야 嘗感激欲自奮拔하야 樹功名以見世하니라
初에 擧進士나 再不第에 因去하야 事宣武軍節度使하야 得官至監察御史하니라
坐事貶嶺南이라가 再遷至河中府法曹參軍하야 攝虞鄕令하니라 有能名하야 進攝河東令하니라
又有名하야 遂署河東從事하니라 絳州闕刺史에 攝絳州事러니 能聞朝廷하니라
元和四年秋에 有事適東方이라가 旣還타가 八月壬辰에 死於汴城西雙丘하니 年四十有七이라
明年二月日에 葬河南偃師하니라 妻彭城人이니 世有衣冠하니라
祖好順은 泗州刺史요 父泳은 卒蘄州別駕하니라 女四人이요 男一人은 嬰兒汴也라 是爲銘하노라
張君의 아내가 울면서 애절하게 한 말에 근거해 誌文을 지었다. 歐陽公(歐陽脩)의 誌文에는 이 법을 모방한 것이 많다.
계집종이 갓난아이를 안고 와서 그 주인마님의 말을 전하였다. “妾은 張圓의 아내 劉氏입니다. 妾의 지아비는 항상 첩에게 ‘나는 항상 夫子(韓愈)께 사랑을 받았소.’라고 하고,
또 ‘夫子는 천하에 문장으로 유명하신 분이니, 夫子께서 지으신 문장은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妾이 불행하여 지아비가 자객을 만나 途中에서 죽었기에 아무 달 아무 날에 장사 지내려 하니, 妾은 지아비가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거듭 애통하고, 죽은 뒤에 이름이 묻혀버릴까 두려워서 감히 갓난아이 汴을 先生께 보이는 바입니다.
만약[將] 墓碣銘을 지어주신다면 지아비의 죽음이 욕되지 않고 명성이 영원히 보존되어, 남긴 혈육과 자손들까지 비호를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죽은 지아비가 만약 知覺이 있다면 아마도 地下에서 자기의 불행을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말하였다. “妾의 지아비가 嶺南에 있을 때에 병을 앓은 적이 있는데,
그때 눈물을 흘리며 妾에게 말하기를 ‘내 뜻은 옛사람에 못지않은데, 내 재주는 어째서 지금 사람만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고 이곳에서 죽게 되었단 말인가?
만약 부인이 나를 가엾게 여긴다면 반드시 夫子에게 墓碣銘을 받으시오. 이것이 부인과 나의 명성이 영원히 전해질 수 있는 방법이오.’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弔哭하고서 한 번 사양한 뒤에 드디어 그 家族‧世系‧名字‧事業의 시종을 서술하여 銘을 지었다. 銘은 다음과 같다.
張君은 字가 直之이다. 祖父 讙과 父親 孝新은 모두 汴州와 宋州 사이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張君은 일찍이 글을 읽어서 文辭에 기운이 있었고,
吏才가 있어서 일찍이 감격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功名을 세워 세상에 명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당초에 進士試에 응시하였으나 재차 낙방하자, 고향을 떠나 宣武軍節度使를 섬겨 官職이 監察御史에 이르렀다.
뒤에 어떤 일에 연루되어 嶺南으로 貶謫되었다가 재차 승진하여 河中府 法曹參軍에 이르러 虞鄕縣令을 代理하였는데, 유능하다는 명성이 있음으로 인해 승진하여 河東縣令을 대리하였다.
여기에서 또 명성이 있음으로 인해 드디어 河東府從事에 임명되었다. 絳州에 刺史 자리가 비자, 絳州의 政事를 대리하였는데, 유능하다는 명성이 조정에 알려졌다.
張君은 元和 4년(809) 가을에 일이 있어 東方으로 유배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8월 壬辰日에 汴州城 서쪽 雙丘에서 被殺되었으니, 향년이 47세였다.
이듬해 2월 아무 날에 河南 偃師에 장사 지냈다. 아내는 彭城 사람이니 대대로 士大夫[衣冠]였다.
아내의 祖父 劉好順은 泗州刺史를 지냈고, 父親 劉泳은 죽을 때에 蘄州別駕였다. 딸이 넷이고, 아들 하나는 바로 갓난아이 張汴이다. 이에 墓誌銘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