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公之不汲汲著書는 固其力之未至어나 抑其時之不暇耳라
吾子不以愈
하고 意欲推而納諸聖賢之域
하야 하고 謂愈之質
이 有可以至於道者
라하야 하고 하니 此盛德者之所辭讓
이온 況於愈者哉
아
昔者
矣
로되 然猶不敢公傳道之
하고 口授弟子
하야 至於後世然後
에 其書出焉
하니 其
也
니라
擇其可語者誨之
라도 猶
하니 若遂成其書
면 則見而怒之者必多矣
요 必且以我爲狂爲惑
하리니 其身之不能恤
이어니 리오
其餘輔而相者周天下
로되 猶且
하고 하고 하고 하니
賴其徒相與守之하야 卒有立於天下하니 向使獨言之而獨書之면 其存也可冀乎아
自文王沒로 武王周公成康相與守之하야 禮樂皆在하니 及乎夫子未久也요 自夫子而及乎孟子未久也요 自孟子而及乎揚雄도 亦未久也라
然猶其勤若此하고 其困若此而後에 能有所立하니 吾其可易而爲之哉리오
然觀古人컨대 得其時하야 行其道면 則無所爲書하니 書者는 皆所爲不行乎今而行乎後世者也니라
今吾之得吾志
와 失吾志
를 未可知
니 竢五六十爲之
라도 라
其行道
아 其爲書
아 其化今
가 其傳後
아는 니 吾子其
於吾所爲哉
아
前書謂吾與人商論不能下氣
하야 若好勝者然
이라하니 雖誠有之
나 抑非好己勝也
라 好己之道勝也
니라 라
한공韓公이 저서著書에 급급하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힘이 미치지 못해서였거나, 아니면 시간을 낼 겨를이 없어서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러이러하다고 말한 것은 장적張籍의 말에 따라 변명한 것이다.
그대는 나를 불초不肖하다 여기지 않고 나를 추대해 성현聖賢의 경지로 들여보내고자 생각하여, 부정不正한 마음을 제거하여 아직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덕행德行을 증진增進시키게 하며, 나의 자질이 도道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겨, 그 근원을 준설浚渫하여 물길을 인도하고, 그 뿌리에 물을 주어 그 열매를 먹게 하려 하니, 이는 도덕이 성대한 사람도 사양할 일인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겠소.
그러나 그대의 말 중에 마땅히 대답해야 할 내용이 있으므로, 드디어 이대로 논의를 종결終結해서는 안 되겠기에 〈다시 답신을 보내는 바이오.〉
옛날에 성인聖人(孔子)께서 《춘추春秋》를 지을 적에, 이미 〈포폄褒貶의 대의大義를〉 문사文辭 속에 깊이 숨기고서도 오히려 공공연히 전하여 말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구두口頭로 전수傳授하여 후세에 이르러서야 그 책이 세상에 나오게 하셨으니, 공자께서 화환禍患을 염려하신 방법이 은미하다고 하겠소.
지금 저 노불老佛[二氏]을 존경해 신앙信仰의 대상으로 삼아 섬기는 자들이 〈위로 천자에서부터〉 아래로 공경公卿과 보상輔相에 이르렀으니, 내 어찌 감히 공공연히 말하여 배척할 수 있겠소.
말해줄 만한 자를 가려서 가르쳐주어도 오히려 때때로 나와 의견이 어긋나서 논쟁하며 반박하는 소리가 요란하니, 만약 끝내 글로 써서 책을 만든다면 보고서 화를 내는 자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고, 반드시 또 나를 광망狂妄(시건방짐)하다 하고 미혹迷惑(시비를 분간하지 못함)되었다고 할 것이니, 내 몸도 구제할 수 없을 것인데 책이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소.
부자夫子는 성인이셨는데도 “내가 자로子路를 얻고부터는 헐뜯는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고 하셨고,
그 밖에도 부자를 보좌하는 자들이 천하에 두루 퍼져 있었는데, 오히려 진陳나라에서는 식량食量이 떨어지고, 광읍匡邑에서는 포위를 당하고, 숙손무숙叔孫武叔에게 헐뜯음을 당하고, 제齊‧노魯‧송宋‧위衛의 교야郊野를 분주히 돌아다니셨으니,
그 도가 비록 높았으나 그 곤궁함 또한 심하셨소.
그 제자들이 함께 수호守護한 덕분에 끝내 천하에 수립樹立하게 된 것이니, 그때 만약 혼자 말하고 혼자 책을 쓰셨다면 어찌 보존되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소.
지금 저 노불老佛의 사설邪說이 중국에 유행한 지가 대체로 600여 년이 되었소.
박힌 뿌리가 견고하고 퍼진 세력이 광범위하니, 아침에 명령하여 저녁에 금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문왕文王이 죽은 뒤로 무왕武王‧주공周公‧성왕成王‧강왕康王이 함께 지켜 예악禮樂이 모두 보존되었으니, 그로부터 부자夫子에 이르기까지는 시대가 오래되지 않았고, 부자로부터 맹자孟子에 이르기까지도 시대가 오래되지 않았으며, 맹자로부터 양웅揚雄에 이르기까지도 시대가 오래되지 않았소.
그런데도 오히려 이처럼 근로勤勞하고 이처럼 곤궁困窮한 뒤에 수립樹立한 바가 있었으니, 내 어찌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겠소.
그러나 옛사람을 보건대 때를 만나 자기의 도를 행하였으면 책을 짓지 않았으니, 책을 지은 이는 모두 자신의 도를 당시에 실행하지 못하여 후세에 실행되게 하기 위함이었소.
지금 내가 나의 뜻을 실현할 수 있을는지 실현할 수 없을는지를 알 수 없으니, 5, 60세가 되기를 기다려 책을 지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늘이 이 백성에게 〈노불老佛의 허황됨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나의 수명壽命을 기약할 수 없겠으나, 만약 하늘이 이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어 한다면 〈알릴 사람이〉 내가 아니고 그 누구이겠소.
나에게 도를 행하게 할 것인지, 책을 짓게 할 것인지, 지금 세상을 교화하게 할 것인지, 후세에 전하게 할 것인지는 하늘이 결정하였을 것이니, 그대는 무엇 때문에 내가 하는 일을 이처럼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이오.
그대의 지난번 편지에 “내가 남과 토론할 때 심기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이 마치 이기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그런 점이 있소만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도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오.
나의 도는 바로 공자孔子‧맹자孟子‧양웅揚雄이 전한 도이오.
만약 이기지 못한다면 도가 될 수 없으니, 내 어찌 감히 〈이기기를 좋아한다는〉 이름을 피하겠소.
부자夫子의 말씀에 “내가 종일토록 안회顔回와 강론講論할 때 괴이하게 여겨 반문反問함이 없는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 같았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으로 보면 부자께서도 사람들과 변론한 적이 있었던 것이오.
박잡駁雜하다는 나무람에 대해서는 지난번 편지에 다 말하였으니 그대는 다시 그 편지를 살펴보시오.
옛날에 부자께서도 오히려 농담을 하신 적이 있으셨소.
그리고 《시경詩經》에도 “농담으로 우스갯소리를 잘하였으나 지나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소.
《예기禮記》에도 “항상 긴장하고 그 긴장을 풀지 않는 것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도 할 수 없었다.”고 하였으니, 농담을 한다 해서 도에 무슨 해가 되겠소.
맹군孟君(孟郊)이 갈 곳이 있어 그대와 작별하기를 생각하고 있으니, 한 번 오기 바라오.
당형천唐荊川은 “본래 삼단논법三段論法의 문자文字인데, 문사文辭가 생동감生動感이 있고 활발活潑하며 형식과 내용이 틀에 얽매지 않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