比於東都에 略見顔色하고 未得接言語나 心固已相奇로라
知人
은 堯舜所難
이요 又嘗
라 故未敢決然決
하고 亦不敢忽然忘也
로라
到城已來
로 不多與人還往
하니 友朋之中
에 所敬信者
는 니라
東野
說足下不離口
하고 不多見
이나 每每說人物
에 亦以足下爲
之秀
하고 近又得李七翶書
하니 亦云足下之文
이 遠
甚
이라하니라
夫以平昌之賢으로 其言一人이라도 固足信矣어든 況又崔與李繼至而交說邪아
故不待相見
이오도 相信已熟
하고 旣相見
에 不要約已相親
하니 로라
故具白所以하노니 而今而後에 不置疑於其間可也니라
처음 교제를 맺을 때에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것이 교제를 맺은 뒤에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은 까닭이다.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표表‧기記‧술述‧서書‧사辭 등 다섯 편의 문장을 받았습니다.
근자에 동도東都에서 얼굴만 잠시 대하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기재奇才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감히 용모만 보고서 과감히 사람을 평정評定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요순堯舜도 어렵게 여긴 바이고, 또 일찍이 재여宰予를 경계하신 공자孔子의 말씀을 학습學習하였기 때문에 감히 결연히 결정하지도 않고 감히 홀연히 잊지도 않았습니다.
경성京城에 온 뒤로 사람들과 왕래하는 일이 적었으니, 벗 가운데 내가 존경해 믿는 사람으로는 오직 평창平昌 맹동야孟東野뿐입니다.
그런데 동야東野가 족하足下를 칭찬하는 말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고, 최대崔大 돈시敦詩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인물人物을 말할 때마다 역시 족하를 처사處士 중에 우수한 자라고 하였으며, 근자에 또 이칠李七 고翶의 편지를 받아보니, 그 역시 족하의 문장이 족하 형님의 문장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습니다.
저 평창平昌은 현명賢明한 사람이므로 그렇게 말하는 이가 그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본래 믿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또 최대崔大와 이고李翶가 연이어 와서 번갈아가며 말하는 데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서로 만나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그대에 대한 믿음이 이미 깊었고, 그대를 만난 뒤에는 우정友情을 변치 말자고 약속하지 않았어도 이미 친밀해졌으니, 족하의 재능이 용모에 부합함을 잘 알았습니다.
지금 주신 편지에 이러이러하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이른바 “황금黃金을 걸고 내기 활을 쏠 경우에 외물外物을 중시하여 마음이 혼란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족하足下는 소년少年이어서 늙은 나와 생각이 같지 않을 듯하니, 오히려 말로써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답신答信에 그 까닭을 구체적으로 말하였으니, 앞으로 우리 둘 사이에 의심을 두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유韓愈는 장자莊子의 이 비유譬喩를 인용하여, 황금을 걸고 활을 쏘는 자가 마음이 혼란해져서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것처럼, 문장을 배워 명예를 얻으려는 데 뜻을 두면 심지心智가 어두워져서 소기所期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니, 문장을 중시重視하지 말고 도덕을 중시해 수양하도록 양경지楊敬之를 권면한 것이다.
족하足下가 말한 ‘인재人才를 기르는 일’이라면 천자天子의 대신大臣이 있습니다.
나로 말하면 관직 하나를 맡아 직무를 처리하기에도 힘이 부치는데, 하물며 인재를 기르는 중책이겠습니까?
학문學問하는 여가에 때때로 왕림枉臨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