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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1)

당송팔대가문초 한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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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公三試吏部不售하니 斯立遺公書
故答之云云하니라
蓋崔斯立 屬公相知之深者 故吐露如此하니라
斯立足下하노라
僕見險不能止하야 動不得時일새 하야 로라
困不知變하야 以至辱於再三하니 君子小人之所 天下之所背而馳者也로되 足下猶復以爲可敎라하야 하야 乃至手筆以問之호라
辭義高遠하고 하니 足下之於故舊之道得矣로라
雖僕亦固望於吾子 不敢望於他人者耳로라
不然이면 何子之不以丈夫期我也
不能黙黙일새 聊復自明하노라
僕始年十六七時 未知人事하고 讀聖人之書之仕者 皆爲人耳 非有利乎己也라가
及年二十時하야 苦家貧하야 衣食不足하야 然後 知仕之不唯爲人耳로라
及來京師하야 見有 人多貴之하고 僕誠樂之하야 就求其術하니 或出禮部所試賦詩策等以相示하니라
僕以爲可無學而能이라하야 因詣州縣求擧로라
하야 이나 亦未卽得仕하니라
聞吏部有以博學宏辭選者 人尤謂之才라하고 且得美仕하고 就求其術하니 或出所試文章하니라
亦禮部之類
하야 因又詣州府求擧하야
雖不得仕 人或謂之能焉이라하니라
退自取所試讀之하니 乃類於俳優者之辭하야而心不寧者數月이라
旣已爲之일새 則欲有所成就하니
因復求擧 亦無幸焉일새
乃復自疑하야 以爲所試與得之者不同其程度러니 及得觀之컨대 余亦無甚愧焉하니라
夫所謂博學者 豈今之所謂者乎 夫所謂宏辭者 豈今之所謂者乎
誠使古之豪傑之士若屈原孟軻司馬遷相如揚雄之徒進於是選이면 必知其懷慙하야 設使與夫今之善 이면 僕必知其이라
然彼五子者 且使生於今之世 其道雖不顯於天下라도 其自負何如哉
故凡僕之汲汲於進者 其小得인댄 蓋欲以 其大得인댄 蓋欲以同吾之所樂於人耳니라
其他可否 自計已熟하니 誠不待人而後知니라
今足下乃復比之하야
以爲必竢工人之剖然後見知於天下하니 이요
이라하니 誠足下相勉之意厚也
然仕進者豈舍此而無門哉리오
足下謂我必待是而後進者 尤非相悉之辭也니라
하니 足下無爲爲我戚戚也하라
하고 邊境尙有被甲執兵者하야 主上不得怡하야 而宰相以爲憂니라
僕雖不賢이나 亦且潛究其得失하니 致之乎吾相하고 薦之乎吾君이면 上希卿大夫之位 下猶리라
若都不可得이면 猶將耕於寬閑之野하고 釣於寂寞之濱하며 求國家之遺事하고 考賢人哲士之終始하야 하야 垂之於無窮하야 하고 이리라
又所謂勍者 果誰哉 再剋之刑 信如何也
士固信於知己 微足下 無以發吾之狂言이라


03. 최입지崔立之에게 답한 편지
(韓愈)이 이부시吏部試(博學宏辭科)에 세 차례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최사립崔斯立(崔立之)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그러므로 이렇게 회답한 것이다.
대체로 최사립은 공과 서로 마음을 깊이 아는 벗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토로吐露한 것이다.
사립斯立 족하足下께 아룁니다.
나는 위험을 보고도 멈추지 못하여 행동이 시대에 맞지 않았기에 실패해 좌절挫折하고 궁지에 몰려 평소의 지조志操를 상실하였습니다.
이런 곤경困境에 빠졌으면서도 변경할 줄을 몰라 재삼再三 모욕을 당하는 데 이르렀으니, 군자들은 나를 동정하고 소인들은 나를 조소嘲笑하며, 천하 사람은 나를 등지고 떠나는데, 족하만은 오히려 다시 나를 가르칠 만하다고 여겨, 자신의 도덕道德을 낮추고서 친히 편지를 써서 나를 위문慰問하셨습니다.
〈편지 속에〉 옛사람의 일을 인용하신 곳의 문사文辭함의含意고상高尙하고 심원深遠하며, 또 나를 추중推重하고 권면勸勉하셨으니, 족하께서 벗을 대하심이 도리에 맞았습니다.
비록 나 또한 본래 족하께만 〈이리 대해주시기를〉 바랐지, 감히 다른 사람에게는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나를 이해하지 못하신 점이 있는 듯하니, 이는 고의로 나를 분발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면 족하는 어찌하여 대장부大丈夫의 일로써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까?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서 우선 다시 내 생각을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세상일을 모르고서 성인의 글만을 읽던 열예닐곱 살 때는 사람들이 벼슬하는 것은 모두 백성을 돕기 위함이고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집안 살림이 매우 가난하여 입고 먹을 것이 부족해 친근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 생활하기를 꾀한 스무 살이 되어서야, 벼슬하는 것이 단지 백성을 위한 것만은 아님을 알았습니다.
경사京師로 올라온 뒤에, 많은 사람들이 주현州縣의 천거를 받아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는 자들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서 나는 참으로 즐거워서,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서 진사과에 응시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간혹 자기가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였던 등을 꺼내어 보여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글을 보고서 이런 글이라면〉 배우지 않고도 지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이에 주현으로 가서 천거해주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사有司(考試官)들의 호오好惡가 각각 자기 마음대로여서 네 차례 응시한 뒤에야 비로소 합격하였으나 즉시 벼슬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부吏部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선발된 자는 사람들이 더욱 인재人才로 여기고 또 좋은 벼슬까지 얻는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알 만한 사람을 찾아가서 그 방법을 물었더니, 간혹 이부시吏部試에 응시하였던 문장을 꺼내다가 보여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 문장을 보았더니〉 역시 예부시의 문장과 같았습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까닭을 괴이쩍게 여기면서도 오히려 〈박학굉사과에 응시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될 것을 기뻐하여, 이에 또 주부州府로 가서 천거해주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부시에 두 차례 응시하여 한 번 합격하였으나, 또 중서성中書省사정査定에서 탈락하였습니다.
비록 벼슬을 얻지는 못하였으나, 문장에 능하다고 나를 칭찬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물러나와 제가 과장科場에서 지었던 문장을 꺼내어 읽어보니, 광대의 말과 같아서 몇 달 동안 부끄러워 마음이 편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과거科擧응시應試하였으므로 성공하기를 바랐으니, 이는 《상서尙書》에 이른바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숨기거나 변명하는 잘못을 저지른다.”는 것과 일반입니다.
이어 다시 천거해주기를 구하였으나 역시 합격하는 행운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다시 나의 실력을 의심하며 내가 과장에서 지었던 문장이 합격한 자의 문장과 그 정도程度(수준)가 같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뒤에 합격한 자들의 문장을 구해 읽어보니 나의 문장 또한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박학博學’이란 것이 어찌 오늘날 말하는 ‘박학굉사博學宏辭’의 ‘박학博學’이겠으며, 이른바 ‘굉사宏辭’란 것이 어찌 오늘날 말하는 ‘박학굉사博學宏辭’의 ‘굉사宏辭’이겠습니까?
가령 옛날에 굴원屈原맹가孟軻사마천司馬遷사마상여司馬相如양웅揚雄 같은 호걸스런 인사人士들에게 이런 선발시選拔試에 나아가 응시應試하게 하였다면 내가 알기로는 저들은 반드시 마음에 부끄러움을 품고서 스스로 나아가지 않고 그만두었을 것이고, 가령 오늘날 진취進取에 능한 자들과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 경쟁을 하게 한다면 내가 알기로는 반드시 탈락의 치욕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 다섯 사람이 가령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그 학술學術주장主張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자부自負하는 마음이야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지식이 얕고 도량度量이 좁은 좀스러운 무리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 한 고시관考試官의 눈에 의해 결정되는 합격과 불합격을 근심하거나 즐거워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사진仕進에 급급해하는 것은 작은 관직을 얻으면 동복冬服[裘]과 하복夏服[葛]을 준비하여 의지할 곳 없는 곤궁한 사람들을 부양하고, 큰 관직을 얻으면 나의 즐거움을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자 해서일 뿐입니다.
그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스스로 깊이 헤아렸으니, 진실로 남의 가르침을 기다린 뒤에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족하足下께서 다시 나를 을 바친 변화卞和에 비유하시면서
“반드시 옥공玉工박옥璞玉을 쪼갠 뒤에는 천하 사람들의 알아줌을 받았으니 비록 두 발의 발꿈치가 잘렸어도 원통하거나 한스러울 것이 없고,
강자强者에게 재차 발꿈치가 잘린 일이 없었다.”고 하셨으니, 진실로 족하께서 권면하신 뜻이 깊습니다.
그러나 관직官職에 진출하는 자에게 어찌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족하께서는 나에게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기를 기다린 뒤에 출사出仕하라고 하시니, 이는 더욱 나를 이해하고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나의 옥을 본래 바친 적도 없고 나의 발꿈치를 잘린 적도 없으니 족하는 나를 위해 근심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천하의 풍속이 아직 고대古代의 풍속에 미치지 못함이 있고, 변경邊境에 아직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병사가 있으므로, 주상主上께서는 즐거워하지 않으시고 재상宰相들은 근심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현능賢能하지 못하나, 또한 그 득실得失을 깊이 연구하였으니, 나의 생각을 우리 재상께 올리고 우리 주상께 아뢴다면 높게는 경대부卿大夫의 자리를 바랄 수 있고, 낮아도 오히려 변방의 요새要塞를 지키는 관직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중에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오히려 넓고 한적한 들에서 밭을 갈고 쓸쓸한 물가에서 낚시질을 하며, 국가의 유사遺事를 모으고 현인賢人철사哲士들의 시종始終(一生)을 고증考證하여 나라의 사서史書 한 질을 편찬해 무궁한 후세에 전하여, 이미 죽은 간사하고 아첨한 자들의 행위를 글로 써서 비판하고, 남이 모르는 미덕美德이 있는 사람들의 숨은 덕행德行을 드러내 밝히겠습니다.
장차 이 두 가지 중에 반드시 한 가지는 할 수 있을 것이니, 족하足下는 나의 을 몇 차례나 바치고 나의 발꿈치가 몇 차례나 잘릴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또 말씀하신 ‘강자强者’는 과연 누구이며, 재차 발꿈치가 잘리는 이라는 것은 진실로 어떤 것입니까?
선비는 본래 지기의 벗에게 진실을 말하는 법이니, 족하足下가 아니었다면 나의 광망狂妄한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答崔立之書 : 이 편지는 貞元 11년(795)에 韓愈가 博學宏辭科에 세 번째 落榜하였을 때 崔立之가 보낸 위문편지에 답한 回信이다. 최립지는 字가 斯立으로 정원 4년에 進士에 及第하고 정원 6년에 박학굉사과에 合格하였다.
역주2 顚頓狼狽 : 顚頓은 失敗해 挫折함이고, 狼狽는 몹시 곤궁한 처지에 빠짐이다.
역주3 失其所操持 : 평소 지키던 지조를 잃음이다.
역주4 憫笑 : 憐憫과 嘲笑이다.
역주5 貶損道德 : 貶損은 낮춘다는 말이니, 곧 崔斯立이 자신의 존엄한 신분을 낮추었다는 뜻이다.
역주6 扳援古昔 : 古代의 일을 例로 인용한 것이니, 곧 崔斯立의 편지에 玉을 바친 卞和의 故事를 인용한 것을 이른다.
역주7 且進且勸 : 進은 推重(높이 평가함)이니, 곧 또 나를 推重하고 또 나를 권면하였다는 말이다.
역주8 尙有似不相曉者 非故欲發余乎 : 주신 편지에 오히려 나를 이해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하니, 이는 고의로 나를 激發(자극하여 분발하게 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
역주9 爲人 : 爲民이다. 唐人들은 太宗 李世民의 諱를 피하기 위해 ‘民’을 ‘人’으로 썼다. 何焯의 《義門讀書記》 권32에 “爲人은 그 임금을 堯舜 같은 聖王이 되도록 輔佐하고, 백성에게 은택을 입히는 것이다.[致君澤民]”라고 하였다.
역주10 謀於所親 : 친근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기를 꾀함이다.
역주11 擧進士者 : 唐代에는 鄕試에 합격한 자를 州縣에서 천거하여 서울로 보내어 禮部의 考試에 應試하게 하였는데, 이를 ‘擧進士’라 하였다.
역주12 有司者好惡出於其心 : 有司者는 考試官이다. 好惡出於其心은 문장에 대한 好惡가 고시관들 마음대로여서, 마음에 들면 합격시키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합격시키지 않았다는 말이다.
역주13 四擧而後有成 : 韓愈가 19세 때인 貞元 2년(786)에 州郡의 천거로 서울로 올라와서 禮部에서 실시하는 進士試에 응시한 지 네 번 만인 정원 8년(792)에 及第한 것을 이른다. 이때 한유의 나이 25세였다. 唐나라 제도는 진사시에 급제하여도 즉시 官職을 除授하지 않고 반드시 吏部에서 실시하는 博學宏辭科에 급제하여야 朝廷의 官員이나 藩鎭의 幕僚가 될 수 있었다.
역주14 私怪其故 然猶樂其名 : 禮部試에 합격한 文章의 수준과 吏部試에 합격한 문장의 수준에 차이가 없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면서도, 오히려 이부시에 응시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될 것을 기뻐하였다는 말이다.
역주15 二試於吏部……而又黜於中書 : 貞元 9년에 韓愈가 博學宏辭科에 합격하였으나, 최종적으로 中書省에 의해 脫落한 것을 이른다. 본서 3권의 〈上考功崔虞部書〉 참조.
역주16 忸怩 : 부끄러움이다.
역주17 書所謂恥過作非者 : 《尙書》 〈說命 中〉에 “허물을 부끄러워하여 숨기거나 변명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無恥過作非]”란 말이 보인다.
역주18 不自進而已耳 : 스스로 나아가 應試하지 않고, 科擧 보는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역주19 進取者 : 進取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적극적으로 科擧에 임하여 목적을 달성한 자를 이른다.
역주20 競於蒙昧之中 : 蒙昧는 模糊이니, 곧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서로 경쟁하게 한다는 말인 듯하다.
역주21 辱焉 : 脫落의 恥辱을 이른다.
역주22 斗筲者 : 斗는 한 말들이 말이고, 筲는 한말 두되들이 竹器로, 지식이 짧고 度量이 협소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23 決得失於一夫之目而爲之憂樂哉 : 一夫之目은 考試官의 눈을 이르니, 곧 좀스러운 무리들과 함께 시험을 치러 한 고시관의 品評에 의해 결정되는 합격을 즐거움으로 삼고, 불합격을 근심으로 삼겠느냐는 말이다. 韓愈가 자신을 孟子 등 다섯 사람에 비유하고. 당시 사람들을 斗筲之人에 비유하면서, 이런 무리와 함께 시험을 치러야 하는 현실에 분개하여 격한 감정을 토로한 것이다.
역주24 具裘葛養窮孤 : 裘는 갖옷이니 冬服을 뜻하고, 葛은 갈옷이니 夏服을 뜻한다. 窮孤는 早死한 韓愈의 兄 韓會의 子女를 이른 듯하다.
역주25 獻玉者 : 卞和를 이른다. 《春秋戰國異辭》에 의하면 春秋 때 楚나라 사람 卞和가 楚山에서 璞玉(돌 속에 박혀 있는 玉)을 채취하여 楚 厲王에게 바치니, 여왕이 玉尹에게 鑑定하게 하였다. 옥윤이 옥이 아니고 돌이라고 아뢰니, 여왕은 왕을 속였다 하여 변화의 왼쪽 발꿈치를 잘랐다. 여왕이 죽고 武王이 즉위하니 변화는 또 그 박옥을 무왕에게 올렸다. 이번에도 옥윤이 돌이라고 아뢰니, 무왕은 왕을 속였다 하여 변화의 오른쪽 발꿈치를 잘랐다. 무왕이 죽고 文王이 즉위하니, 변화는 그 박옥을 안고서 초산 아래에서 사흘 동안 밤낮으로 통곡하였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이 사람을 보내어 “천하에 발꿈치가 잘리는 형벌을 받은 자가 많은데, 너는 어째서 그리 슬피 우느냐?”고 물으니, 변화는 “寶玉을 돌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거짓말쟁이라 하기 때문에 이리 슬피 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문왕이 사람을 시켜 그 박옥을 쪼개어 다듬게 하여 보옥을 얻고서 드디어 ‘和氏璧’이라고 命名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獻玉’은 임금에게 자기의 포부를 進言하는 뜻으로 쓰였다.
역주26 雖兩刖足 不爲病 : 刖足은 발꿈치를 자르는 형벌이고, 病은 원통하고 한스러움이니, 곧 卞和의 璞玉이 寶玉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비록 두 발의 발꿈치가 잘리는 형을 받았어도 원통하거나 한스러울 게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한 ‘刖足’은 挫折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27 且無使勍者再剋 : 勍者는 强者이고, 再剋은 재차 발꿈치를 자름이니, 곧 卞和의 璞玉이 寶玉으로 인정을 받은 뒤에는 楚王에게 재차 발꿈치가 잘린 일이 없었다는 말로, 韓愈가 吏部試에 응시하여 문장을 인정받는다면 전처럼 다시 中書省에 의해 퇴출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비유한 것이다.
역주28 僕之玉固未嘗獻 而足固未嘗刖 : 나의 抱負를 임금님께 올린 적도 없고,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한 적도 없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역주29 方今天下風俗 尙有未及於古者 : 風俗은 敎化로 인해 變化하는 것인데, 아직 교화가 未盡하기 때문에 풍속이 옛날처럼 淳厚하지 못하다는 것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본서 권7의 〈送董邵南序〉에 “풍속은 교화에 따라 變易한다.[風俗與化移易]”란 말이 보인다.
역주30 取一障而乘之 : 一障은 外敵을 방어하는 邊方의 작은 城이고, 乘之는 성 위에 올라가 지킴이니, 곧 변방의 要塞를 지키는 官吏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역주31 作唐之一經 : 唐나라 史書를 편찬하겠다는 말이다. ‘唐之一經’에 대해 後人들의 말이 많다. 孔子는 《春秋》를 짓고도 감히 ‘經’이라고 칭하지 않았는데, 韓愈는 감히 자신의 글을 ‘經’으로 칭하였으니, 자부와 오만이 지나쳤다고 하겠다.
역주32 誅姦諛於旣往 : 誅는 筆誅(죄악을 글로 써서 비판함)이고, 姦諛는 간사하고 아첨함이고, 旣往은 이미 죽은 자이니, 곧 이미 죽은 간사하고 아첨한 자들의 행위를 글로 써서 비판한다는 말이다.
역주33 發潛德之幽光 : 發은 드러냄이고, 潛德은 남이 모르는 美德이고, 幽光은 드러나지 않은 光彩로 숨은 德行을 이른다.
역주34 足下以爲僕之玉凡幾獻而足凡幾刖也 : 足下는 내가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임금님께 몇 차례나 進言하고, 내가 몇 차례나 좌절할 것으로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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