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文公敎人作文에 大意要自樹立과 不尋常과 不取悅於今世라
來者則接之는 擧城士大夫莫不皆然이로되 而愈不幸獨有接後輩名하니 名之所存이 謗之所歸也라
或問호되 爲文宜何師오하면 必謹對曰 宜師古聖賢人이라하고
曰 古聖賢人所爲書具存이나 辭皆不同하니 宜何師오하면 必謹對曰 師其意하고 不師其辭라호라
又問曰 文宜易宜難
이면 必謹對曰 無難易
하고 라호라
夫百物朝夕所見者는 人皆不注視也로되 及覩其異者면 則共觀而言之니라
然則
이나 若皆
하고 이면 雖不爲當時所怪
라도 亦必無後世之傳也
리라
今後進之爲文
에 能
하야 以古聖賢人爲法者
가 雖未必皆是
나 要若有司馬相如太史公劉向揚雄之徒出
이면 必自於此
요 不自於
之徒也
리라
한문공韓文公이 사람들에게 문장 짓는 법을 가르침에 있어, 요지要旨는 자신의 논리를 세우는 것과 평범한 문장을 인습하지 않는 것과 지금 세상에 영합하지 않는 것이었다.
본문本文에 이른바 ‘능히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통상적인 문장을 인습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 바로 공公의 본래의 모습이다.
유愈는 진사進士 유군劉君 족하足下에게 아룁니다.
주신 편지를 받아보니 나의 부족한 곳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미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또 부끄럽게도 나의 부족한 점이 진실로 지적하신 것과 같으니, 매우 다행입니다.
주현州縣의 천거를 받아 진사과進士科에 응시應試한 자는 어느 선진先進의 집엔들 찾아가지 않겠습니까?
선배의 문하에 후배가 찾아오면 선배가 어찌 그 성의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찾아오면 접대하는 것은 온 성안의 사대부가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나만이 불행하게도 후배를 접대한다는 명성이 났으니, 명성이 있는 곳은 비방이 돌아오는 곳입니다.
찾아와서 묻는 자가 있으면 감히 성실히 대답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어떤 자가 와서 “문장을 지을 때 누구를 본받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반드시 정중하게 “옛날 성현聖賢을 본받아야 한다.”고 대답해주었고,
“옛 성현이 지은 책이 모두 남아 있지만, 문사文辭가 모두 같지 않으니, 누구를 본받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반드시 정중하게 “그 뜻만을 본받고 그 문사는 본받지 않아야 한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또 “문장을 쉽게 지어야 하는가, 어렵게 지어야 하는가?” 하고 물으면 나는 반드시 정중하게 “어렵고 쉬움에 마음을 쓰지 말고 오직 도리에 맞기만을 추구하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일러주었을 뿐이고, 굳이 이렇게 지으라고 인도하지도 저렇게 짓지 말라고 금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보는 각종 물건은 사람들이 주의해 보지 않지만 기이한 물건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함께 구경하면서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한漢나라 때 사람은 능숙하게 문장을 짓지 못하는 이가 없었으나, 유독 사마상여司馬相如‧태사공太史公(司馬遷)‧유향劉向‧양웅揚雄의 문장만이 가장 뛰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공부가 깊은 자는 그 명성이 오래도록 전해지지만, 세상의 조류潮流에 휩쓸리고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 못한 문장이라면 비록 당시에는 괴이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족하足下 집안에 있는 각종 물건은 모두 편리하게 쓰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나 족하가 진귀하게 여겨 아끼는 것은 반드시 이런 평범한 물건이 아닐 것입니다.
군자가 문장에 있어서도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지금 후진後進이 문장을 지음에 있어 〈성인의 글을〉 깊이 탐구하여 〈그 뜻을〉 능력껏 가져다가 옛 성현의 글을 본보기로 삼는 자들의 문장이 비록 모두 정확하게 도리에 맞는 것은 아니지만, 요컨대 사마상여‧태사공‧유향‧양웅 같은 무리가 나온다면 반드시 이 무리 중에서 나오지, 통상적인 문장을 인습하는 무리에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인의 도道를 문장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사용한다면 반드시 〈성인의 문장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을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뛰어난 문장’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능히 자신의 주장을 세우고 통상적인 문장을 인습하지 않는 문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문자文字가 생긴 이래로 누군들 문장을 짓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반드시 뛰어난 문장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단지 이렇게 말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부끄럽게도 족하足下와 같은 길을 걷는 선배이고, 또 항상 현존급사賢尊給事와 종유從遊하는 사이입니다.
이미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또 어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여 회답回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