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用意本莊子일새 而其行文造語敍實處도 亦大類莊子라
苟可以寓其巧智하야 使機應於心하야 不挫於氣면 則神完而守固하야 雖外物至라도 不膠於心이라
堯, 舜, 禹, 湯治天下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고
往時
善草書
하야 不治他技
하니라 喜怒窘窮
과 憂悲愉佚
과 怨恨思慕
와 酣醉無聊不平
이 有動於心
이면 必於草書焉發之
하니라
觀於物에도 見山水崖谷과 鳥獸蟲魚와 草木之花實과 日月列星과 風雨水火와
雷霆霹靂과 歌舞戰鬪와 天地事物之變으로 可喜可愕을 一寓於書라
故旭之書變動猶鬼神
하야 不可
하니 以此終其身而名後世
하니라
今閑之於草書에 有旭之心哉아 不得其心而逐其迹이요 未見其能旭也라
爲旭有道하니 利害必明하야 無遺錙銖하고 情炎於中하야
今閑師浮屠氏니 一死生하고 解外膠리라 是其爲心이 必泊然無所起하고 其於世에 必淡然無所嗜리라
泊與淡相遭면 頹墮委靡하야 潰敗不可收拾이니 則其於書得無象之然乎아
然吾聞浮屠人善幻하고 多技能이라하니 閑如通其術이면 則吾不能知矣로라
그 用意(主意)가 ≪莊子≫에 근거하였기 때문에 글을 엮고 말을 만들고 사실을 서술한 것 또한 ≪莊子≫와 매우 유사하다.
가령 자기의 교묘한 지혜를 〈어떤 사물에〉 붙여, 마음이 시기와 정황에 따라 순응하여 志氣가 꺾이지 않게 한다면 정신이 완전하고 지킴이 견고하여, 비록 외물(雜念)이 침범하여도 마음속에 붙어 있지 못한다.
堯‧舜‧禹‧湯은 천하를 다스리는 일을, 養叔은 활쏘는 일을, 庖丁은 소를 해체하는 일을, 師曠은 음악을 연주하는 일을, 扁鵲은 병을 치료하는 일을,
熊宜僚는 彈丸을 던지는 일을, 奕秋는 바둑을 두는 일을, 伯倫은 술을 마시는 일을 즐겨 종신토록 싫어하지 않았으니 外物을 사모할 겨를이 어디 있었겠는가?
외물을 사모하여 職業을 바꾸는 자는 모두 그 堂에 오르지 못하고 그 고깃점을 맛보지 못한 자들이다.
옛날에 張旭은 草書에 뛰어나서 다른 기예는 익히지 않았다. 喜怒와 窘窮, 憂悲와 愉佚, 怨恨과 思慕, 酣醉와 無聊로 평정하지 못해 마음이 동요하면 반드시 그것을 草書에 드러냈다.
사물을 관찰함에도 산과 물, 벼랑과 골짜기, 새와 짐승, 벌레와 물고기, 초목의 꽃과 열매, 해와 달과 별들, 바람과 비, 물과 불,
우레와 벼락, 歌舞와 戰鬪 등 천지 만물의 변화로 기뻐할 만한 것과 놀랄 만한 것들을 보면 그것을 모두 草書에 담았다.
그러므로 張旭의 草書는 변동하는 것이 귀신과 같아서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몸을 마치도록 이렇게 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지금
高閑도
草書를 쓸 때에
張旭과 같은 마음이 있는가?
張旭과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하고 드러난 자취만을 쫓고서
張旭의 경지에 이른 자를 보지 못하였다.
高閑의 草書 〈千字文〉(부분)
張旭처럼 되려면 방법이 있으니, 利害를 반드시 밝게 살펴 조금도 빠뜨림이 없고, 마음속에 감정이 불길처럼 치솟고
이롭고자 하는 욕망이 앞다퉈 일어나서 얻음이 있거나 잃음이 있거나 발끈하니 화가 나서 즐겁지 않은 뒤에 모든 것을 초서에 표현한[決] 뒤에야 張旭의 경지에 근접할 수 있다.
지금 高閑은 부처를 信奉하니 死生을 하나로 여기고 外物의 집착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그 마음이 반드시 맑고 깨끗해[泊然] 일어나는 욕심이 없고, 세상일에 반드시 담박[淡然]해 嗜好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泊然과 淡然이 서로 만나면 맥이 빠지고 의욕이 시들어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니, 글씨에 있어서도 어찌 이런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듣건대 佛僧은 幻術(요술)을 잘 부리고 技能이 많다 하니, 高閑이 만약 그 幻術에 통달하였다면 〈그 幻術을 書法에〉 드러낼 수 있을는지 나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