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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2)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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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永貞元年 愈自陽山移江陵法曹參軍하야 獲事하니라
公嘗與其從事言호되 하고 命官司擧貞觀開元之烈하니
群臣하야 하고 하니라
當時自而上으로 以及下百執事 官闕一人하야 將補 必取其良하니라
然而河南同時於天下稱多하야 獨得하니라
故於府之參軍則得我公하고 於河南主簿則得하고 於汜水主簿則得하고
於陸渾主簿則得하고 於登封主簿則得하니라
盧公去河南爲右補闕이라가 其後由尙書左丞至宰相하고
鄭公去汜水爲監察御史하야 佐山南軍하고 其後由工部侍郞至宰相이라가 罷而又爲하고
趙公去陸渾爲右拾遺라가 其後由給事中爲宰相하고 顧公去登封爲監察御史라가 其後由京兆尹至吏部尙書東都留守하고
我公去府爲長水尉라가 其後由膳部郞中爲荊南節度行軍司馬하고 遂爲節度使라가 自工部尙書至吏部尙書하니라
之勞在史冊하니라 顧吏部愼職小心하야 于時有聲하니라
我公愿潔而沈密하고 開亮而卓偉하야 行茂于宗하고 事修于官하며 嗣紹家烈하야 不違其先하니라
作帥 厥聞休顯하야 武志旣揚하고 文敎亦熙하니 이면 其慶且至리라
故好語故事者 以爲五公之始跡也同하고 其後進而偕大也亦同하며
其稱名臣也又同하고 官職雖分이나 而功德有巨細 其有忠勞於國家也同하니
有若將同其後하야 而先同其初也라하니라 有聞而問者어늘 於是焉書하노라
旣五年 始立石刻其語河南府하니라 於時河東公爲左僕射宰相하야 出藩大邦하야 開府漢南하고
鄭公以工部尙書留守東都하고 趙公以吏部尙書鎭江陵이라 漢南地連七州 戎士十萬이요 其官宰相也
留守之官 居禁省中이라가 歲時出旌旗하야 序留司文武百官於宮城門外而衙之하나니라
江陵故楚都也 戎士五萬이라 三公同時하야 千里相望하니 可謂盛矣로다 河東公名均이요 姓裴氏


04. 河南府同官에 쓴 記文
永貞 원년(805)에 나는 陽山縣令에서 江陵府法曹參軍으로 量移되어 河東公(裵均)을 섬겼다.
이 언젠가 從事(幕僚)들과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建中 초기에 天子께서 비로소 연대를 기록하고 年號를 고치고서, 百官에게 명하여 貞觀開元 때의 功業[]을 열거하게 하시니,
모든 신하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해 직무를 봉행하고, 人才를 임명하고 良士를 등용하였으며, 감히 사사로움으로 인해 천자의 명을 어기지 않았다.
이때 조정의 반열에 끼어 있는 (고급 관리) 이상으로부터 아래로 모든 관리에 이르기까지 官職에 한 사람의 缺員이 생겨 보충하려면 반드시 良士를 뽑아 보충하였다.
그러나 河南府同時代天下의 다른 곳에 비해 인재가 크게 많아서 유독 5인을 얻었다.
그러므로 河南府參軍에는 우리 河東公을 얻고, 河南府主簿에는 相國 范陽 盧公을 얻고, 汜水主簿에는 지금 太子賓客으로 있는 相國 滎陽 鄭公을 얻고,
陸渾主簿에는 지금 吏部侍郞으로 있는 相國 天水 趙公을 얻고, 登封主簿에는 吏部尙書 東都留守 吳郡 顧公을 얻었다.
盧公河南을 떠나 右補闕이 되었다가 뒤에 尙書左丞을 거쳐 宰相에 이르고,
鄭公汜水를 떠나 監察御史가 되어 山南軍節度使를 보좌하다가 뒤에 工部侍郞을 거쳐 宰相에 이르렀는데, 재상에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재상이 되었고,
趙公陸渾을 떠나 右拾遺가 되었다가 뒤에 給事中을 거쳐 宰相이 되었고, 顧公登封을 떠나 監察御史가 되었다가 뒤에 京兆尹을 거쳐 吏部尙書 東都留守에 이르고,
우리 河東公河南府를 떠나 長水尉가 되었다가 뒤에 膳部郞中을 거쳐 荊南節度行軍司馬가 되고, 마침내 節度使가 되었다가 工部尙書를 거쳐 吏部尙書에 이르렀다.
相國의 공로는 史冊에 실려 있다.
顧吏部는 직무를 처리함에 삼가고 조심하여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
우리 河東公은 성실하고 깨끗하며[愿潔] 沈着하고 嚴密하며[沈密] 속이 트이고 보는 눈이 밝아서[開亮] 宗族 중에서 德行이 우수[]하고 官職에 있을 때에 事績이 아름다웠으며, 家業을 계승해 그 祖先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았다.
荊南節度使가 되었을 때에는 아름다운 명성이 드러나서 武勇의 뜻을 이미 드날렸고 文敎(禮樂敎化) 또한 흥성하였으니, 槐府에 올라 천자를 보좌한다면 장차 福慶이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옛 일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다섯 은 처음 벼슬길로 들어간 정황도 같고, 뒤에 升進하여 함께 大官이 된 것도 같으며,
名臣으로 칭송되는 것도 같고, 官職은 비록 다르지만 功德에 대소의 차이가 있고 국가에 충성하고 勞苦한 것은 같으니,
이는 뒤에 같아지려고 처음부터 먼저 같았던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묻는 자가 있기에 이에 위에서 한 말을 기록하였다.
5년 뒤에 비로소 이 말을 비석에 새겨 河南府 參軍舍의 뜰 가운데 세웠다. 이때 河東公左僕射宰相이 되어 큰 藩鎭節度使로 나아가 漢南開府하였고,
鄭公工部尙書로서 東都留守가 되었고, 趙公吏部尙書로서 江陵鎭守하였다. 漢南管轄하는 地域이 일곱 이고 軍士가 십만이며, 그 官長宰相이다.
東都留守府官長禁省(宮城) 안에 있다가 매년 일정한 시기에 旌旗를 세우고서 나온다. 그러면 留守府[留司]의 文武百官은 성문 밖에 차례로 서서 衙參(알현)한다.
江陵은 옛날 나라의 首都였던 곳으로 군사가 5만이다.
은 동시에 〈높은 관직에 올라〉 천 리 밖에 있으니, 성대하다 할 만하다. 河東公은 이름이 이고 裴氏이다.


역주
역주1 河南府同官記 : 이 記文은 한유가 양산현령으로 있던 貞元 20년(804)에 지은 것이다.
역주2 烟波感慨甚曲折 :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감히 손을 댈 수 없으므로 闕譯한다.
역주3 河東公 : 裵均이다. 배균은 하동부 聞喜縣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尊稱해 河東公이라고 한 것이다.
역주4 建中初 天子始紀年更元 : 大曆 14년(779)에 代宗이 죽고 德宗이 즉위하여 다음 해에 建中으로 改元한 것을 이른다.
역주5 惕慄奉職 : 두려워하고 조심해 직무를 봉행함이다.
역주6 命材登良 : 재능이 있는 자를 임명하고 선량한 자를 등용한 것이다.
역주7 不敢私違 : 감히 사정으로 인해 천자의 명을 어기지 않은 것이다.
역주8 齒朝之士 : 朝班에 낀 벼슬아치로 高官을 이른다.
역주9 將相五人 : 아래에 열거한 盧邁, 鄭餘慶, 趙宗孺의 세 재상과 裵均, 顧少連의 두 장수를 이른다.
역주10 故相國范陽盧公 : 盧邁이다. 자는 子玄이고 范陽人이다. 정원 9년(793)에 尙書右丞에서 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발탁되었기 때문에 ‘相國’이라 칭한 것이다.
역주11 故相國今太子賓客滎陽鄭公 : 鄭餘慶이다. 字는 居業이고, 滎陽人이다. 정원 13년(797)에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기 때문에 ‘相國’이라 칭한 것이다.
역주12 相國今吏部侍郞天水趙公 : 趙宗孺이다. 字는 秉文이고 天水人이다. 정원 12년(796)에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기 때문에 ‘相國’이라 칭한 것이다.
역주13 故吏部尙書東都留守吳郡顧公 : 顧少連이다. 字는 夷仲이고 吳郡(蘇州)人이다. 정원 16년에 京兆尹이 되었고, 18년에 東都留守가 되었다.
역주14 三相國 : 盧邁‧鄭餘慶‧趙宗孺를 이른다.
역주15 (南荊)[荊南] : 저본에는 ‘南荊’으로 되어 있으나, ≪韓文考異≫에 의거하여 ‘荊南’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登槐贊元 : 丞相이 되어 元首를 보좌함이다. 槐는 三槐이다. 옛날 周나라 조정에는 세 그루의 槐木과 아홉 그루의 가시나무를 심어 공경대부의 坐位를 정하여, 三公은 三槐 아래에 앉고,九卿은 九棘 아래에 앉았다. 이로 인해 후세에 登槐를 三公에 오르는 비유로 썼다.
역주17 參軍舍庭中 : 參軍廳의 庭中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2) 책은 2020.12.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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