永貞元年
에 愈自陽山移江陵法曹參軍
하야 獲事
하니라
公嘗與其從事言
호되 하고 命官司擧貞觀開元之烈
하니
當時自
而上
으로 以及下百執事
히 官闕一人
하야 將補
면 必取其良
하니라
故於府之參軍則得我公
하고 於河南主簿則得
하고 於汜水主簿則得
하고
盧公去河南爲右補闕이라가 其後由尙書左丞至宰相하고
鄭公去汜水爲監察御史하야 佐山南軍하고 其後由工部侍郞至宰相이라가 罷而又爲하고
趙公去陸渾爲右拾遺라가 其後由給事中爲宰相하고 顧公去登封爲監察御史라가 其後由京兆尹至吏部尙書東都留守하고
我公去府爲長水尉라가 其後由膳部郞中爲荊南節度行軍司馬하고 遂爲節度使라가 自工部尙書至吏部尙書하니라
之勞在史冊
하니라 顧吏部愼職小心
하야 于時有聲
하니라
我公愿潔而沈密하고 開亮而卓偉하야 行茂于宗하고 事修于官하며 嗣紹家烈하야 不違其先하니라
作帥
에 厥聞休顯
하야 武志旣揚
하고 文敎亦熙
하니 이면 其慶且至
리라
故好語故事者는 以爲五公之始跡也同하고 其後進而偕大也亦同하며
其稱名臣也又同하고 官職雖分이나 而功德有巨細와 其有忠勞於國家也同하니
有若將同其後하야 而先同其初也라하니라 有聞而問者어늘 於是焉書하노라
旣五年
에 始立石刻其語河南府
하니라 於時河東公爲左僕射宰相
하야 出藩大邦
하야 開府漢南
하고
鄭公以工部尙書留守東都하고 趙公以吏部尙書鎭江陵이라 漢南地連七州요 戎士十萬이요 其官宰相也라
留守之官은 居禁省中이라가 歲時出旌旗하야 序留司文武百官於宮城門外而衙之하나니라
江陵故楚都也니 戎士五萬이라 三公同時하야 千里相望하니 可謂盛矣로다 河東公名均이요 姓裴氏라
永貞 원년(805)에 나는 陽山縣令에서 江陵府法曹參軍으로 量移되어 河東公(裵均)을 섬겼다.
公이 언젠가 公의 從事(幕僚)들과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建中 초기에 天子께서 비로소 연대를 기록하고 年號를 고치고서, 百官에게 명하여 貞觀과 開元 때의 功業[烈]을 열거하게 하시니,
모든 신하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해 직무를 봉행하고, 人才를 임명하고 良士를 등용하였으며, 감히 사사로움으로 인해 천자의 명을 어기지 않았다.
이때 조정의 반열에 끼어 있는 士(고급 관리) 이상으로부터 아래로 모든 관리에 이르기까지 官職에 한 사람의 缺員이 생겨 보충하려면 반드시 良士를 뽑아 보충하였다.
그러나 河南府는 同時代의 天下의 다른 곳에 비해 인재가 크게 많아서 유독 將‧相 5인을 얻었다.
그러므로 河南府의 參軍에는 우리 河東公을 얻고, 河南府의 主簿에는 故 相國 范陽 盧公을 얻고, 汜水의 主簿에는 지금 太子賓客으로 있는 故 相國 滎陽 鄭公을 얻고,
陸渾의 主簿에는 지금 吏部侍郞으로 있는 相國 天水 趙公을 얻고, 登封의 主簿에는 故 吏部尙書 東都留守 吳郡 顧公을 얻었다.
盧公은 河南을 떠나 右補闕이 되었다가 뒤에 尙書左丞을 거쳐 宰相에 이르고,
鄭公은 汜水를 떠나 監察御史가 되어 山南軍節度使를 보좌하다가 뒤에 工部侍郞을 거쳐 宰相에 이르렀는데, 재상에서 파직되었다가 다시 재상이 되었고,
趙公은 陸渾을 떠나 右拾遺가 되었다가 뒤에 給事中을 거쳐 宰相이 되었고, 顧公은 登封을 떠나 監察御史가 되었다가 뒤에 京兆尹을 거쳐 吏部尙書 東都留守에 이르고,
우리 河東公은 河南府를 떠나 長水尉가 되었다가 뒤에 膳部郞中을 거쳐 荊南節度行軍司馬가 되고, 마침내 節度使가 되었다가 工部尙書를 거쳐 吏部尙書에 이르렀다.
세 相國의 공로는 史冊에 실려 있다.
顧吏部는 직무를 처리함에 삼가고 조심하여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
우리 河東公은 성실하고 깨끗하며[愿潔] 沈着하고 嚴密하며[沈密] 속이 트이고 보는 눈이 밝아서[開亮] 宗族 중에서 德行이 우수[茂]하고 官職에 있을 때에 事績이 아름다웠으며, 家業을 계승해 그 祖先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았다.
荊南節度使가 되었을 때에는 아름다운 명성이 드러나서 武勇의 뜻을 이미 드날렸고 文敎(禮樂敎化) 또한 흥성하였으니, 槐府에 올라 천자를 보좌한다면 장차 福慶이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옛 일을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다섯 公은 처음 벼슬길로 들어간 정황도 같고, 뒤에 升進하여 함께 大官이 된 것도 같으며,
名臣으로 칭송되는 것도 같고, 官職은 비록 다르지만 功德에 대소의 차이가 있고 국가에 충성하고 勞苦한 것은 같으니,
이는 뒤에 같아지려고 처음부터 먼저 같았던 것인 듯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묻는 자가 있기에 이에 위에서 한 말을 기록하였다.
5년 뒤에 비로소 이 말을 비석에 새겨 河南府 參軍舍의 뜰 가운데 세웠다. 이때 河東公은 左僕射로 宰相이 되어 큰 藩鎭의 節度使로 나아가 漢南에 開府하였고,
鄭公은 工部尙書로서 東都留守가 되었고, 趙公은 吏部尙書로서 江陵을 鎭守하였다. 漢南은 管轄하는 地域이 일곱 州이고 軍士가 십만이며, 그 官長은 宰相이다.
東都留守府의 官長은 禁省(宮城) 안에 있다가 매년 일정한 시기에 旌旗를 세우고서 나온다. 그러면 留守府[留司]의 文武百官은 성문 밖에 차례로 서서 衙參(알현)한다.
江陵은 옛날 楚나라의 首都였던 곳으로 군사가 5만이다.
세 公은 동시에 〈높은 관직에 올라〉 천 리 밖에 있으니, 성대하다 할 만하다. 河東公은 이름이 均이고 姓이 裴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