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元和九年歲在甲午八月己亥에 貞曜先生孟氏卒하니라 無子하야 其配鄭氏以告하니라
愈走
哭
하고 且召張籍會哭
하니라 明日
에 使以錢如東都
하야 供葬事
하니라 諸嘗與往來者
가 咸來哭弔韓氏
하니라
愈哭曰 嗚呼라 吾尙忍銘吾友也夫아 興元人以幣如孟氏賻하고 且來商家事하니라
樊子使來速銘曰 不則無以掩諸幽라하야늘 乃序而銘之하니라
先生諱郊요 字東野라 父廷玢이 娶裴氏女하고 而選爲崑山尉하며 生先生及二季酆郢而卒하니라
先生生六七年
에 하고 長而愈
하야 하고 內外完好
하야 하야 可畏而親
이라
及其爲詩
하야는 하여 하며 를 하야 이 間見層出
이라
年幾五十에 始以尊夫人之命으로 來集京師하야 從進士試하고 旣得에 卽去하니라
間四年에 又命來하야 選爲溧陽尉하야 迎侍溧上하니라
去尉二年
에 而故相鄭公尹河南
에 奏爲水陸運從事
協律郞
하고 親拜其母於門內
하니라
母卒五年에 而鄭公以節領興元軍에 奏爲其軍參謀試大理評事하니라
挈其妻行之興元타가 次於閿鄕에 暴疾卒하니 年六十四라 買棺以斂하고 以二人輿歸하니라
酆郢皆在江南하니라 十月庚申에 樊子合凡贈賻하야 而葬之洛陽東其先人墓左하고 以餘財附其家而供祀하니라
將葬
에 張籍曰 先生
가 於古有光
이라 이온 況士哉
아
하야 不待講說而明
이라 皆曰 然
이라하야늘 遂用之
하니라
初에 先生所與俱學同姓簡이 於世次爲叔父라 由給事中觀察浙東하니라 曰 生吾不能擧하니 死吾知恤其家리라 銘曰
於戲貞曜여
維執不猗하고
維出不訾로다
維卒不施나
以昌其詩리라
按孟東野是昌黎生平極厚交나 而其志銘處亦不妄許一字라
唐나라
元和 9년(814),
歲在 甲午 8월
己亥日에
貞曜先生 孟氏가
卒하였다. 자식이 없어서 그
夫人 鄭氏가
訃告를 보내왔다.
孟郊
나는 〈나의 집에〉 靈位를 설치하고 달려가서 弔哭하고, 또 張籍을 불러 함께 弔哭하였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돈을 가지고 東都로 가서 葬事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게 하였다. 일찍이 선생과 왕래하던 벗들이 모두 나의 집으로 와서 弔哭하였다.
나는 드디어 興元府尹으로 있는 전 재상 鄭餘慶에게 편지를 보내어 선생의 사망을 알렸다. 閏月에 樊宗師가 사람을 보내어 조곡하고, 선생의 葬日을 알려주면서 나에게 墓誌銘을 지으라고 요구하였다.
나는 곡하면서 “아! 내 어찌 차마 내 벗의 묘지명을 지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興元 사람이 錢財를 가지고 孟家의 집에 가서 喪事를 돕고, 또 와서 맹씨의 家事를 상의하였다.
樊宗師가 사람을 보내어 묘지명을 재촉하며 말하기를 “〈지금〉 묘지명을 지어 보내지 않으면 묘지명을 무덤에 묻을 방법이 없다.”라고 하기에, 사실을 서술하여 이 묘지명을 짓는다.
先生은 諱가 郊이고 字가 東野이다. 父親 廷玢은 裴氏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崑山縣尉에 選任되었으며, 先生과 두 동생 酆과 郢을 낳고서 서거하셨다.
선생은 6, 7세 때에 이미 頭角을 드러냈고, 장성해서는 더욱 뛰어났다. 학식이 해박하고 사리에 정통하였으며 內面의 수양과 外面의 處事가 완벽하여 容色이 화평하고 神氣가 嚴峻하여 두려워할 만하고 친애할 만하였다.
그가 詩를 지음에 미쳐서는 온갖 심혈을 기울여 통달하고 유창하였으며 복잡한 章法과 독특한 詩句를 心肝에서 뽑아내어 귀신이 지은 것 같은 아름다운 詩句가 연거푸 나왔다.
그러나 선생은 문학에만 정력을 쏟고 세속의 榮辱에는 무관심하여, 사람들은 모두 名利에 급급하였으나 오직 선생만은 여유롭게 스스로의 생활에 만족하였다.
어떤 사람이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선생을 깨우치자, 선생은 “내 이미 일체의 名利를 밀어내어 남들에게 주었으니, 어찌 도리어 그리워할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은 거의 50이 되어서 비로소 모친의 명으로 京師로 와서 進士試에 응시하였고, 進士에 급제한 뒤에는 즉시 京師를 떠났다.
4년이 지난 뒤에 또 모친의 명을 받들고 와서 선발되어 溧陽縣尉가 되어서는 溧水 가에 거주하며 모친을 봉양하였다.
溧陽縣尉에서 물러난 2년 뒤에 전임 宰相 鄭公(鄭餘慶)이 河南府尹이 되자, 조정에 奏請해 선생을 水陸轉運從事 試協律郞으로 삼고서, 직접 선생의 집을 방문하여 그 모친께 拜謁하였다.
모친이 사망한 5년 뒤에 鄭公이 符節을 가지고 興元軍을 領率하게 되자, 조정에 주청해 선생을 興元軍參謀 試大理評事로 삼았다.
선생은 아내를 데리고 興元으로 가다가 閿鄕에서 머물던 중에 갑자기 병이 나서 사망하니, 향년이 64세였다. 棺을 買入해 大斂한 뒤에 두 사람을 시켜 수레로 運柩해 洛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 선생의 두 아우인 孟酆과 孟郢은 모두 江南에 있었다. 10월 庚申日에 樊宗師가 부조로 들어온 재물을 모두 모아, 선생을 낙양 동쪽에 있는 先人의 무덤 왼쪽에 장사 지내고, 남은 재물은 선생의 가족에게 내어주어 제사를 받드는 데 쓰게 하였다.
장사 지내려 할 적에 張籍이 “선생은 덕행을 수립하고 文風을 진작시킨 찬란한 빛이 古人에 못지않다. 故事에 賢者는 易名하는 例가 있었는데, 하물며 〈도덕과 문장을 겸비한〉 선비이겠는가?
만약 ‘貞曜先生’이라 한다면 〈‘貞曜’라는 글자에〉 姓字와 名字와 德行이 모두 실려 있어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해질 것이다.”라고 하니, 모두 “그렇다.”고 하기에 마침내 〈‘貞曜’를 선생의 諡號로〉 쓰기로 하였다.
당초에 선생과 함께 배우던 사람 중에 姓이 같은 孟簡이 있었는데, 항렬에 있어 叔父가 된다. 給事中을 거쳐 浙東觀察使로 나가 있었는데, 〈선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생전에는 내 천거하지 못했으나 사후에는 내 그 가족을 돌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銘은 다음과 같다.
아 貞曜先生이시여
지조 지켜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셨고
걸출한 재능 적지 않으셨네
끝내 시행하지 못하셨으나
詩歌는 성대하게 칭송되리라
살펴보건대 孟東野는 바로 昌黎의 평소 지극히 친한 벗이었으나, 그의 銘을 지음에는 한 글자도 함부로 허여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