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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韓愈(1)

당송팔대가문초 한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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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한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懼作史之禍 非也
孔子善善惡惡二百四十二年之間이로되 何以至今皎然與天地幷
昌黎不及作하고 從而爲之辭
愈白秀才하노라
愚以爲凡史氏 後之作者 在據事跡實錄이면 則善惡自이라
然此尙非淺陋者所能就어든 況褒貶邪
孔子 聖人이로되 作春秋하고 하야 卒不遇而死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하며 足下所稱 亦不聞身貴而令其後有聞也
夫爲史者 不有人禍 則有天刑하니 豈可不畏懼而輕爲之哉
唐有天下二百年矣
聖君賢相相踵하고 其餘文武之士 立功名跨越前後者不可勝數 豈一人能紀而傳之邪
僕年志已就衰退하야 不可自이라
宰相知其無他才能하야 不足用이로되 哀其老窮하야 無所合하고 不欲令四海內有하야 猥言之上하야 니라
하며 하고 巧造語言하야 하니 於今何所承受取信하야 而可作傳記令傳萬世乎
若無鬼神이라도 豈可不自心慙愧
若有鬼神이면 將不福人이리라
僕雖騃 亦粗知自愛 實不敢爲也로라
鉅跡 及賢士大夫事하니 決不이라
今館中非無人하니 將必有作者勤而纂之리라
安知不在足下리오
亦宜勉之어다


02. 사서史書편찬編纂을 논하여 유수재劉秀才에게 답한 편지
사서史書를 지음으로 인해 를 입게 될까 두려워한 것은 옳지 않다.
공자孔子는 〈《춘추春秋》를 지으시어〉 242년 동안의 선악善惡포폄褒貶하였는데도 어찌하여 지금까지 찬란하게 천지와 함께 병립竝立하셨는가?
그런데 창려昌黎는 제때에 미처 사서를 짓지 않고서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였다.
수재秀才에게 아룁니다.
안부를 물으신 편지를 받아보건대 애정을 보여주시고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라고 가르쳐주시고 권면하셨으니, 감히 내려주신 말씀을 감사히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나는, 사가史家포폄褒貶법칙法則이 《춘추春秋》에 이미 구비具備되었으니, 후대後代의 작자가 사적事跡에 의거해 사실을 기록하면 선악善惡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학식이 천박하고 고루하며 처신이 구차하고 게으른 자가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하물며 포폄이겠습니까?
공자孔子성인聖人이셨으되 《춘추春秋》를 짓고서 에서 곤욕을 당하시고 끝내 불우하게 일생을 마치셨으며, 나라 태사씨太史氏 형제兄弟는 거의 다 피살被殺되었으며, 좌구명左丘明춘추春秋 때의 일을 기록하고서 눈이 멀었으며,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를 짓고서 형벌을 받았으며, 반고班固옥중獄中에서 병사病死하였으며, 진수陳壽기용起用되었다가 다시 폐출廢黜되어 끝내 좋은 관직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왕은王隱은 비방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집에서 죽었으며, 습착치習鑿齒는 한쪽 다리를 잃었으며, 최호崔浩범엽范曄멸족滅族을 당하였으며, 위수魏收요절夭絶하였으며, 송효왕宋孝王주살誅殺되었으며, 족하足下께서 칭찬하신 오긍吳兢도 생전에 몸이 귀해지고 사후에 아름다운 명성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사를 기록한 자들은 인화人禍를 당하지 않으면 천형天刑을 당하였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고 경솔히 사서史書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지 20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성군聖君현상賢相이 계속 나왔고 그 밖에도 전인前人후인後人을 뛰어넘는 공명功名을 세운 문사文士무사武士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으니, 어찌 한 사람이 급하게 〈그 많은 일들을〉 기록하여 전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나이와 뜻이 이미 쇠퇴衰退하여 스스로 부지런히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재상宰相께서 나에게는 다른 재능이 없어 등용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노쇠하고 곤궁하여 사람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사해四海 안에 우수憂愁하는 자가 없게 하시려는 뜻에서 외람되이 성상聖上께 말씀드려 잠시 수찬修撰에 임명하여 나를 영예榮譽롭게 한 것일 뿐이지, 반드시 나를 독촉하거나 다그쳐서 사서史書편찬編纂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비천卑賤한 나는 감히 재상의 두터운 뜻을 거역할 수 없어 〈그 관직을 받아들인 것이니,〉 장차 사직辭職하고서 떠날 생각입니다.
또 사람들은 각자 소견에 따라 선악善惡판정判定하기 때문에 〈인물人物이나 사적事迹에 대해〉 전하는 말이 서로 같지 않으며, 심한 경우에는 당론黨論을 좇아 애증愛憎하는 것이 대중의 공론公論과 동일하지 않고, 교묘하게 말을 만들어 선악의 사적을 터무니없이 날조捏造하기도 하니, 지금 어떤 말을 믿고서 받아들여 허둥지둥 전기傳記를 지어 만세萬世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귀신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스스로의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만약 귀신이 있다면 아마도 복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어리석지만 자신의 몸을 아낄 줄 대략 아니, 실로 감히 경솔히 사서史書를 짓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대체로 나라의 위대한 공적과 현능한 사대부士大夫들의 사적事迹이 모두 거룩하여 천지 사이에 드높으니, 결코 묻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사관史館 안에 인재가 없지 않으니, 반드시 사서史書를 편찬하는 일에 부지런히 힘쓸 자가 있을 것입니다.
“후생이 두렵다.[後生可畏]”고 하였으니, 족하足下가 그러한 사람이 아닐지 어찌 알겠습니까?
족하 또한 그 일에 힘씀이 마땅합니다.


역주
역주1 答劉秀才論史書 : 이 편지는 韓愈가 比部郞中 兼史館修撰이 되어 史官의 職任을 맡았던 元和 8년(813)에 史書의 편찬을 권면한 劉氏 姓을 가진 秀才의 편지를 받고서, 回答한 것이다. 秀才는 唐나라 때 進士科에 應試한 사람들을 이르던 呼稱이다.
역주2 辱問見愛 敎勉以所宜務 : 안부를 묻는 편지를 받아보니 깊은 사랑을 보여주고, 또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라고 가르쳐주고 권면하였다는 말이다.
역주3 拜賜 : 주신 것을 감사히 받겠다는 말이다.
역주4 褒貶大法 春秋已備之矣 : 기존의 魯史에 孔子가 筆削을 가해 《春秋》를 지어, 隱微한 말 속에 大義와 褒貶을 숨겨 亂臣賊子들이 도망할 곳이 없게 한 것을 이른다.
역주5 : 현
역주6 偸惰 : 구차하고 나태함이다.
역주7 辱於魯衛陳宋齊楚 : 孔子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諸侯國을 돌아다니며 갖은 모욕을 받은 일을 이른다. 《史記》 〈孔子世家〉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8 齊太史氏兄弟幾盡 : 齊나라 大夫 崔杼가 그 임금 莊公을 弑害하자, 齊나라 太史(史官)가 “崔杼가 그 임금을 시해하였다.[崔杼弑其君]”라고 솔직하게 기록하니, 최저가 그 사관을 죽였다. 그 사관의 두 아우가 형의 뒤를 이어 또 “崔杼弑其君”이라고 기록하니, 최저가 그 두 아우마저 모두 죽였다. 그러나 그 막내아우가 또 뒤를 이어 “崔杼弑其君”이라고 기록하니, 최저가 그를 죽이지 않고 그냥 놓아두었다. 《春秋左氏傳 襄公 25년》
역주9 左丘明紀春秋時事以失明 : 左丘明은 魯나라 史官으로 《春秋》의 傳과 《國語》를 지었다. 《史記》 〈太史公自序〉에 “左丘가 실명한 뒤에 《國語》를 지었다.[左丘失明 厥有國語]”란 말이 보인다.
역주10 司馬遷作史記刑誅 : 司馬遷은 漢 武帝 때 匈奴에 投降한 李陵을 辯護하였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宮刑을 당하였다. 刑誅는 형벌을 받음이다. 韓愈의 이 논의는 옳지 않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것은 《史記》를 지은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
역주11 班固瘐死 : 班固는 《漢書》를 지은 東漢의 史家이다. 반고는 竇憲의 사건에 연루되어 獄中에서 病死하였다. 瘐死는 옥중에서 병사함이다.
역주12 陳壽起又廢 卒亦無所至 : 陳壽는 蜀漢의 觀閣令史로 촉한이 망한 뒤에 晉나라 司空 張華의 추천으로 著作郞이 되어 《三國志》를 지었다. 荀勖의 시기를 받아 長廣太守로 左遷되자, 진수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辭職하였고, 뒤에 杜預의 천거로 御史에 除授되었으나, 母喪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몇 해 뒤에 다시 太子中庶子에 起用되었으나 出仕하지 않았다. ‘卒亦無所至’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끝내 좋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는 말인 듯하다.
역주13 王隱謗退死家 : 王隱은 晉나라 사람으로 著作郞이 되어 《晉書》를 편찬하였으나, 虞預의 비방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 집안에서 지내다가 죽었다.
역주14 習鑿齒無一足 : 習鑿齒는 晉나라 사람으로 桓溫의 부하였다. 습착치는 환온이 逆心을 품은 것을 알고 《漢晉春秋》를 지어 환온을 諷諫하였다. 뒤에 脚疾(脚氣)로 인해 폐기되어 鄕里에서 생을 마쳤다.
역주15 崔浩范曄赤誅 : 崔浩는 北魏 사람으로 《國書》 30권을 지었는데, 鮮卑國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太平眞君 11년(450)에 滅族의 화를 당하였다. 范曄은 南朝의 宋나라 사람으로 《後漢書》를 지었다. 뒤에 宋 武帝의 아들 義康을 擁立하는 逆謀에 가담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아들과 함께 被殺되었다. 赤誅는 赤族과 같은 말로 滅族의 뜻이다.
역주16 魏收夭絶 : 魏收는 北齊 사람으로 《魏書》를 지었다. 《北齊書》에 의하면, 그의 나이 27세 때 사냥을 일삼는 孝武帝를 풍자하는 〈南狩賦〉를 지었고, 北齊 後主 武平 3년(572)에 죽었으니, 70세의 수명을 누린 것이다. 결코 ‘夭絶’이라 할 수 없는데, ‘요절’이라고 한 것은 아마도 딸 하나만을 두고 아들이 없어 後嗣가 끊긴 것을 이른 듯하다.
역주17 宋孝王誅死 : 《冊府元龜》에 의하면, 宋孝王은 北齊의 北平王文學으로 文林館에 들어가기를 구하였으나 되지 않자, 朝官을 비방하는 《別錄》 20권을 지었는데, 때마침 北周가 北齊를 滅하니, 다시 듣고 본 것을 보태어 《關東風俗傳》 30권을 지었다. 北周 大象 初年(579)에 尉遲逈의 逆謀에 연루되어 誅殺되었다.
역주18 吳兢 : 唐나라 사람으로 著作郞이 되어 劉知幾와 함께 《則天實錄》을 편수하였다.
역주19 卒卒 : 急하게 서두르는 모양이다.
역주20 敦率 : 敦勉과 같은 말로 勤勉(부지런히 힘씀)의 뜻이다.
역주21 齟齬 : 아래윗니가 서로 맞지 않는 것인데, 남과 意見이 合致하지 않거나 사이가 화목하지 못한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22 戚戚 : 憂愁하며 슬퍼하는 모양이다.
역주23 苟加一職榮之耳……令就功役也 : 苟는 暫時이고, 一職은 史館의 修撰에 임명한 것을 이르고, 督責은 독촉함이고, 迫蹙은 다그침이고, 功役은 土木이나 建築 공사의 勞役인데 여기서는 史官의 職務를 이르는 말로 쓰였다. 곧 잠시 나를 수찬에 임명하여 나를 영예롭게 한 것일 뿐이지, 나를 독촉하거나 다그쳐서 史書를 편찬하는 일을 하게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역주24 賤不敢逆盛指 行且謀引去 : 盛指는 盛意와 같은 말로 두터운 恩情을 이르고, 行且는 장차이고, 引去는 辭職하고 떠남이니, 곧 卑賤한 내가 감히 宰相의 두터운 은정을 거역할 수 없어 관직을 받아들였으니, 장차 사직하고서 떠날 생각이라는 말이다.
역주25 傳聞不同 善惡隨人所見 : 傳聞은 전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각자 소견에 따라 善惡을 판정하기 때문에 인물이나 사적에 대해 전하는 말이 서로 같지 않다는 말이다.
역주26 甚者附黨 憎愛不同 : 심한 경우에는 黨論을 좇아 愛憎하는 것이 대중의 公論과 같지 않다는 말이다.
역주27 鑿空構立善惡事迹 : 鑿空은 터무니없는 일을 끌어댐이고, 構立은 捏造이니, 善惡의 事迹을 터무니없이 날조한다는 말이다.
역주28 草草 : 허둥대는 모양이다.
역주29 率爾 : 輕率한 모양이다.
역주30 聖唐 : 聖은 聖朝의 뜻으로 當代의 王朝를 이르니, 곧 당대의 왕조인 唐나라를 이른다.
역주31 磊磊軒天地 : 磊磊는 거룩함이고, 軒天地는 천지 사이에 드높음이다.
역주32 沈沒 : 묻혀 없어짐이다.
역주33 後生可畏 : 《論語》 〈子罕〉에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한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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