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萬章이 問曰 敢問交際 何心也ㅣ잇고(잇고) 孟子[ㅣ] 曰 恭也ㅣ니라
集註
際는 接也니 交際 謂人以禮儀幣帛으로 相交接也라
曰 卻之卻之[ㅣ] 爲不恭은 何哉잇고 曰 尊者[ㅣ] 賜之어든 曰 其所取之者ㅣ 義乎아 不義乎아 而後受之라(면) 以是爲不恭이니(이라) 故[로] 弗卻也ㅣ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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卻은 不受而還之也라 再言之는 未詳이라 萬章疑 交際之間에 有所卻者면 人便以爲不恭은 何哉오 孟子言 尊者之賜에 而心竊計其所以得此物者未知合義與否여 必其合義然後에 可受요 不然則卻之矣니 所以卻之爲不恭也니라
曰 請無以辭卻之오 以心卻之曰 其取諸民之不義也(ㅣ라야) 而以他辭[로] 無受ㅣ 不可乎ㅣ잇가(잇가) 曰 其交也[ㅣ] 以道ㅣ오 其接也[ㅣ] 以禮면 斯 孔子도(ㅣ) 受之矣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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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章以爲 彼旣得之不義면 則其餽를 不可受니 但無以言辭間而卻之요 直以心度탁其不義여 而託於他辭以卻之니 如此可否邪아하니라 交以道는 如餽贐, 聞戒, 周其飢餓之類요 接以禮는 謂辭命恭敬之節이라 孔子受之는 如受陽貨蒸豚之類也라
萬章[이] 曰 今有禦人於國門之外者ㅣ(호) 其交也[ㅣ] 以道ㅣ오(며) 其餽也[ㅣ] 以禮면 斯可受禦與잇가 曰 不可니 康誥[애] 曰 殺越人于貨야 閔不畏死를() 凡民[이] 罔不譈라니(ㅣ라니) 是 不待敎而誅者也ㅣ니 (殷受夏 周受殷 所不辭也 於今爲烈) 如之何其受之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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禦는 止也니 止人而殺之고 且奪其貨也라 國門之外는 無人之處也라 萬章以爲 苟不問其物之所從來고 而但觀其交接之禮면 則設有禦人者 用其禦得之貨여 以禮餽我면 則可受之乎아하니라 康誥는 周書篇名이라 越은 顚越也라 今書에 閔은 作暋고 無凡民二字니라 譈는 怨也라 言 殺人而顚越之고 因取其貨여 閔然不知畏死를 凡民이 無不怨之라 孟子言 此乃不待敎戒而當卽誅者也니 如何而可受之乎아하시니라 商[殷]受至爲烈十四字는 語意不倫니 李氏以爲 此必有斷簡或闕文者가 近之어니와 而愚는 意其直爲衍字耳라 然이나 不可考니 姑闕之可也니라
曰 今之諸侯ㅣ 取之於民也ㅣ 猶禦也ㅣ어 苟善其禮際矣면 斯[] 君子[도] 受之라시니 敢問何說也ㅣ니잇고(ㅣ잇고) 曰 子ㅣ 以爲 有王者作인댄 將比今之諸侯而誅之乎아 其敎之不改而後[애] 誅之乎아 夫謂非其有而取之者[] 盜也 充類至義之盡也ㅣ라(ㅣ니) 孔子之仕於魯也애 魯人이 獵較이어 孔子ㅣ 亦獵較시니 獵較[도] 猶可ㅣ온(ㅣ어든) 而況受其賜乎ㅣ녀(아)
集註
比는 連也라 言 今諸侯之取於民이 固多不義나 然이나 有王者起면 必不連合而盡誅之요 必敎之不改而後에 誅之니 則其與禦人之盜不待敎而誅者로 不同矣라 夫禦人於國門之外와 與非其有而取之는 二者固皆不義之類라 然이나 必禦人이라야 乃爲眞盜요 其謂非有而取를 爲盜者는 乃推其類여 至於義之至精至密之處而極言之耳니 非便以爲眞盜也라 然則今之諸侯 雖曰取非其有나 而豈可遽以同於禦人之盜也哉아 又引孔子之事여 以明世俗所尙을 猶或可從이니 況受其賜 何爲不可乎아 獵較은 未詳이라 趙氏以爲 田獵相較각하여 奪禽獸以祭니 孔子不違는 所以小同於俗也라하고 張氏以爲 獵而較교所獲之多少也라하니 二說이 未知孰是라
曰 然則孔子之仕也 非事道與잇가 曰 事道也ㅣ시니라 事道ㅣ어시니(호) 奚獵較也ㅣ잇고(ㅣ시니잇고) 曰 孔子ㅣ 先簿正祭器샤 不以四方之食[으로] 供簿正시니라 曰 奚不去也ㅣ시니잇고 曰 爲之兆也ㅣ시니 兆[ㅣ] 足以行矣(로) 而不行而後[에] 去시니 是以[로] 未嘗有所終三年淹也ㅣ시니라(ㅣ러시다)
集註
此는 因孔子事而反覆辯論也라 事道者는 以行道爲事也라 事道奚獵較也는 萬章問也라 先簿正祭器는 未詳이라 徐氏曰 先以簿書로 正其祭器여 使有定數여 而不以四方難繼之物實之니 夫器有常數고 實有常品이면 則其本正矣라 彼獵較者 將久而自廢矣라하니 未知是否也라 兆는 猶卜之兆니 盖事之端也라 孔子所以不去者는 亦欲小試行道之端여 以示於人여 使知吾道之果可行也니 若其端이 旣可行이로되 而人不能遂行之然後에 不得已而必去之시니 蓋其去雖不輕이나 而亦未嘗不決이라 是以로 未嘗終三年留於一國也시니라
孔子ㅣ 有見行可之仕시며 有際可之仕시며 有公養之仕시니 於季桓子앤 見行可之仕也ㅣ오 於衛靈公앤 際可之仕也ㅣ오 於衛孝公앤 公養之仕也ㅣ니라
集註
見行可는 見其道之可行也라 際可는 接遇以禮也요 公養은 國君養賢之禮也라 季桓子는 魯卿季孫斯也라 衛靈公은 衛侯元也라 孝公은 春秋, 史記에 皆無之니 疑出公輒也라 因孔子仕魯而言 其仕有此三者라 故로 於魯則兆足以行矣而不行然後去요 而於衛之事엔 則又受其交際問餽而不卻之一驗也니라○ 尹氏曰 不聞孟子之義면 則自好者 爲於오陵仲子而已니 聖賢辭受進退는 惟義所在니라 愚按 此章文義는 多不可曉니 不必强爲之說이니라
4. 만장이 여쭈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교제하는 것은 어떤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손한 마음으로 하네.”
[James Legge] Wan Chang asked Mencius, saying, 'I venture to ask what feeling of the mind is expressed in the presents of friendship?' Mencius replied, 'The feeling of respect.'
“예물을 받지 않고 되돌려 보내는 것을 불공(不恭)하다고 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존귀한 자가 물건을 줄 때에 받는 자가 그 물건을 대하고서 마음속으로 ‘그가 이 물건을 취한 것이 의로웠을까? 의롭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계산하여 의에 맞은 뒤에야 받고, 그렇지 않으면 되돌려 보내는 것을 불공하다고 하는 것이네. 이 때문에 되돌려 보내지 않는 것이네.”
[James Legge] 'How is it,' pursued Chang, 'that the declining a present is accounted disrespectful?' The answer was, 'When one of honourable rank presents a gift, to say in the mind, "Was the way in which he got this righteous or not? I must know this before I can receive it;"-- this is deemed disrespectful, and therefore presents are not declined.'
“말로써 트집 잡아 되돌려 보내지 말고, 마음속으로 ‘그가 백성들에게서 취한 것이 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는, 다른 말로 구실을 삼아 받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사귀기를 도로써 하고, 그가 대하기를 예로써 하면, 공자께서도 받으셨네.”
[James Legge] Wan Chang asked again, 'When one does not take on him in so many express words to refuse the gift, but having declined it in his heart, saying, "It was taken by him unrighteously from the people," and then assigns some other reason for not receiving it;-- is not this a proper course?' Mencius said, 'When the donor offers it on a ground of reason, and his manner of doing so is according to propriety;-- in such a case Confucius would have received it.'
“지금 도성문 밖에서 사람을 가로막고 강도짓을 하는 자가 있는데, 그가 사귀기를 도로써 하고 선물 보내는 것을 예로써 한다면, 그 강도질한 물건을 받아도 됩니까?” “안 되네. 《서경》 〈강고(康誥)〉에 이르기를 ‘사람을 죽여서 재물을 빼앗고, 포악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모든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음이 없다.’ 하였으니, 이러한 자는 굳이 가르칠 필요도 없이 죽일 자인 것이네. 어찌 그러한 사람이 주는 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James Legge] Wan Chang said, 'Here now is one who stops and robs people outside the gates of the city. He offers his gift on a ground of reason, and does so in a manner according to propriety;-- would the reception of it so acquired by robbery be proper?' Mencius replied, 'It would not be proper. in "The Announcement to Kang" it is said, "When men kill others, and roll over their bodies to take their property, being reckless and fearless of death, among all the people there are none but detest them:"-- thus, such characters are to be put to death, without waiting to give them warning. Yin received this rule from Hsiâ and Châu received it from Yin. It cannot be questioned, and to the present day is clearly acknowledged. How can the grift of a robber be received?'
“지금의 제후들이 백성들에게 재물을 취함이 강도짓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도, ‘만일 그가 예(禮)와 교제를 잘하면 이는 군자도 받으셨다.’ 하시니, 무슨 말씀인지 감히 여쭙겠습니다.” “자네 생각에 왕도정치를 하는 자가 나온다면, 장차 지금의 제후들을 모조리 죽이겠는가? 가르쳐도 고치지 않은 뒤에 죽이겠는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데 취하는 자를 도둑이라 이르는 것은, 같은 종류를 극단적으로 미루어 의(義)를 지극히 엄격하게 적용한 것이네. 공자께서 노나라에서 벼슬하실 적에 노나라 사람들이 사냥하는 것을 서로 겨루는 엽각(獵較)을 하자 공자 또한 엽각을 하셨으니, 엽각도 하는데 하물며 제후가 주는 것을 받음에 있어서야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James Legge] Chang said, 'The princes of the present day take from their people just as a robber despoils his victim. Yet if they put a good face of propriety on their gifts, then the superior man receives them. I venture to ask how you explain this.' Mencius answered, 'Do you think that, if there should arise a truly royal sovereign, he would collect the princes of the present day, and put them all to death? Or would he admonish them, and then, on their not changing their ways, put them to death? Indeed, to call every one who takes what does not properly belong to him a robber, is pushing a point of resemblance to the utmost, and insisting on the most refined idea of righteousness. When Confucius was in office in Lû, the people struggled together for the game taken in hunting, and he also did the same. If that struggling for the captured game was proper, how much more may the gifts of the princes be received!'
“그렇다면 공자께서 벼슬하신 것은 도를 행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도를 행하기 위한 것일세.” “도를 행하려 하시면서 어째서 엽각을 하셨습니까?” “공자께서 먼저 문서상으로 제기(祭器)의 숫자와 제물(祭物)의 종류를 확정해서 계속 공급하기 어려운 사방의 귀한 음식은 문서로 정해놓은 제물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신 것이네.” “어찌하여 떠나가지 않으셨습니까?” “도를 행할 수 있는 조짐을 보여주신 것이니, 도를 행할 수 있는 조짐이 충분한데도 도가 행해지지 않은 뒤에야 떠나셨네. 이 때문에 일찍이 3년이 되도록 한 나라에 머문 일이 없으셨네.
[James Legge] Chang urged, 'Then are we to suppose that when Confucius held office, it was not with the view to carry his doctrines into practice?' 'It was with that view,' Mencius replied, and Chang rejoined, 'If the practice of his doctrines was his business, what had he to do with that struggling for the captured game?' Mencius said, 'Confucius first rectified his vessels of sacrifice according to the registers, and did not fill them so rectified with food gathered from every quarter.' 'But why did he not go away?' He wished to make a trial of carrying his doctrines into practice. When that trial was sufficient to show that they could be practised and they were still not practised, then he went away, and thus it was that he never completed in any State a residence of three years.
공자께서는 도를 행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고서 하신 벼슬이 있으셨고, 군주가 예우하는 것이 타당할 경우에 하신 벼슬이 있으셨으며, 군주가 봉양을 하는 경우에 하신 벼슬이 있으셨네. 계환자(季桓子)에 대해서는 도를 행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고서 하신 벼슬이었고, 위(衛)나라 영공(靈公)에 대해서는 예우하는 것이 타당하므로 하신 벼슬이었고, 위나라 효공(孝公)에 대해서는 임금이 봉양함으로써 하신 벼슬이었네.”
[James Legge] 'Confucius took office when he saw that the practice of his doctrines was likely; he took office when his reception was proper; he took office when he was supported by the State. In the case of his relation to Chî Hwan, he took office, seeing that the practice of his doctrines was likely. With the duke Ling of Wei he took office, because his reception was proper. With the duke Hsiâo of Wei he took office, because he was maintained by the St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