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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1)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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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利害明悉하다
하고 하여 이어늘 適當中外匱竭不繼之時하니 日夜憂惶하여 常慮敗事니이다
竊見見緡一月出納之數 大抵皆五十餘萬이요 略無贏餘 其他金帛諸物 雖小有羨數 亦不足賴니이다
臣之愚怯 常恐天災流行하고 水旱作하며 하여 邊鄙繹騷하며 하여 賦役橫起 三事有一이면 大計不支니이다
雖使復生이라도 計無從出矣 而況於臣之駑下乎잇가
今者 幸賴慈仁恭儉하여 天地垂貺하사 諸道秋稼 稍復成熟하니 이나 而一方之患 未爲深憂니이다
하여 旋聞니이다
하여 事之經歲 二萬人이요 蓄聚梢椿等物 三千餘萬이니이다
災傷困弊之餘 興必不可成之功하니 吏民竊嘆勞苦已甚이어늘니이다
天啓聖意하여 灼知民心하시고 이시니이다
이라하니 臣平日過憂 頓然釋去니이다
하여 라하니 如此 則河北來年之憂 亦與今年何異리잇가
況黃河之性 急則通流하고 緩則淤澱하니 旣無東西皆急之勢어늘 安有兩河竝行之理哉리잇가
縱使兩河竝行이라도 不免各立隄防이니 其爲費耗 又倍今日矣리이다
臣聞 自古聖人 不能無過 過而能改하니 善莫大焉이니이다
朝廷擧動 義當如此니이다
今議河失當 知其害人하여 中道而復本이면 何所愧리잇가
雖使天下知之라도 亦足以明二聖憂民之深이니 爲之改過不吝이니이다
今乃顧惜前議하여 未肯曠然更張하며 果於遂非하고 難於遷善하니 臣實爲朝廷惜之니이다
이나 臣聞 議者初建開河分水之策 其說有三하니
其二曰 恩冀 漲水爲害하여 라하고
其三曰 河徙無常하니 萬一自界入海 라하나이다
凡其所以熒惑하고 沮難公議 皆以三說藉口니이다
夫河決西流 勢如이요 引之復東 勢如이니 雖使三說可信이라도 亦莫如之何矣 況此三說 皆未必然이리잇가
臣請得具言之하리이다
하니 饋運旣便하고 商賈通行이니이다
하니 失此大利 誰則不知리오마는 天實使然이니 人力何及이리잇가
議者能復澶淵故道 니이다
此御河之說不足聽 一也니이다
河之所行 利害相半이니이다
夏潦漲溢하여 浸敗秋田이면 濱河數十里爲之 此其害也니이다
漲水旣去 淤厚累尺이면 粟麥之利 比之他田하여 其收十倍 寄居丘冡하여 以避淫潦 民習其事하여 不甚告勞 此其利也니이다
今河水在西 勢亦如此 이니 正得漢니이다
比之故道 歲省兵夫稍芟 其數甚廣이요 而故道已退之地 桑麻千里 賦稅完復이니 爲利不貲어늘 安用逆天地之性하고 移西流之憂하여 爲東流之患哉리잇가
此恩冀以北漲水爲害之說不足聽 二也니이다
河昔在東 自河以西郡縣 與虜接境하여 無山河之限이니 邊臣建爲하여 以捍胡馬之衝이니이다
今河旣西行이라 則西山一帶 胡馬可行之地 已無幾矣 其爲邊防之利 不言可知니이다
이나 議者尙恐河復北徙 則海口出虜(敵)界中이니 造舟爲梁하여 便于이니이다
臣聞 虜中(塞外)諸河 自北南注하여 以入于海니이다
盖地形北高하니 河無北徙之道 而海口深浚하니 勢無徙移니이다
臣雖非目見이나 而習北方之事者 爲臣言之 大略如此하니 可以遣使按視圖畫而知니이다
此河入虜(敵)界邊防失備之說不足聽 三也니이다
臣願以此三說 質之 則開河分水之說 誠不足復爲矣리이다
又臣訪聞 今歲四五月間 河上役兵勞苦無告하여 嘗有數百人之械하고 訪求者 意極不善이러니 賴防邏之卒擁拒而散이라하고 盛夏苦役으로 病死者相繼어늘 使者恐朝廷知之하여 皆於垂死 放歸本郡하니 斃於道路者 不知其數라하나이다
若今冬하고 來歲春暖 復調就役이면 則意外之患 復當如前이리니 臣不知朝廷何苦而不罷此役哉잇가
今建議之臣 恥於不效 而堅持之於上하고 小臣急於利祿하여 不顧可否하고 隨而和之於下니이다
上下膠固하여 以罔朝廷하니 其間正言不避權要 纔一二人耳니이다
이나 事非本職이니 亦不敢盡言이니이다
臣以戶部休戚 計在此河어늘 若復緘黙이면 誰當言者잇가
惟斷自聖心하여 盡罷其議하시면 則天下不勝幸甚이리이다
取進止하소서


06. 손촌하孫村河를 틔울 일을 논한 차자箚子
이해관계가 분명하다.
호부우조戶部右曹가 되고 겸하여 금부金部창부倉部를 통솔하여 중원천하中原天下 재부財賦을 맡고 있는데, 마침 중앙과 지방의 재정이 고갈되어 이어지지 못하는 때를 만났으니, 밤낮으로 걱정하여 항상 일이 낭패될까 염려합니다.
좌장左藏에서 한 달에 출납出納되는 현금의 숫자를 가만히 살펴보면 모두 50여만 냥이고, 조금도 여분이 없으며, 그 밖의 등 여러 물건은 비록 조금 남아돌지만 또한 족히 그 덕을 볼 수는 없습니다.
어리석고 겁 많은 이 항상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천재天災유행流行하여 수한水旱재해災害를 일으키며, 서강西羌이 모여 항거해서 변방이 소란하며, 황하黃河의 물길을 돌리자는 의논이 합당하지 못하여 부역賦役이 갑자기 일어나는 점이니,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있어도 국가재정이 지탱하지 못합니다.
비록 재정에 밝은 상홍양桑弘羊유안劉晏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 하더라도 좋은 계책이 나올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처럼 재능才能이 낮은 사람이 막중한 재정을 맡고 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지금 다행히도 두 분 성상聖上자인공검慈仁恭儉을 힘입어 천지天地가 선물을 내리셔서 제도諸道의 농사가 약간 성숙成熟하였으니, 비록 경서京西섬서陝西재한災旱이 서로 이어졌다 하더라도 한 방면의 화환禍患은 깊이 걱정할 것이 못 됩니다.
강인羌人곤궁困窮하여 지금 찾아와서 복종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들립니다.
오직 황하黃河가 서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옛 물길을 회복시키자는 의론이 일어나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역병役兵은 2만 명이 동원되고, 축적된 공사 장비들은 3천여만 개나 됩니다.
하삭河朔재상災傷으로 온갖 곤폐困弊를 겪은 끝에 꼭 해서는 안 될 공사를 일으켰으니 이민吏民절탄竊嘆노고勞苦가 이미 심하거늘, 막대莫大역사役事가 오히려 명년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계시啓示성상聖上께서 백성들의 고달픈 마음을 환히 아시고 특별히 하북전운사河北轉運司관리官吏를 불러 역사役事로 인한 이해득실을 알아보셨습니다.
요즘 듣기에 황하의 물길을 돌리자는 의론이 이미 중지되어 시행하지 않는다 하니, 평일과우平日過憂돈연頓然히 사그라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듣건대 의논하는 자들이 개하분수책開河分水策을 고집하여 비록 대역大役은 파하였으나 병공소역兵工小役은 끝내 지식止息되지 않았다고 하니, 이와 같다면 하북河北이 내년에 겪을 걱정이 또한 금년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 소오소小吳埽결구決口는 땅속으로 이미 깊숙이 들어가 있고, 손촌孫村에 개통된 감수하減水河장척丈尺에 한계가 있으니, 황하의 물길을 돌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드시 물을 분산시킬 수도 없습니다.
하물며 황하黃河의 성질은 물살이 급하면 콸콸 흐르고 물살이 느리면 진흙이 쌓이게 되는데, 이미 동서東西에 다 급한 경사가 없거늘 어떻게 두 개의 하수河水가 나란히 흘러갈 이치가 있겠습니까?
각각 제방隄防을 쌓는 일을 면할 수 없으니, 그에 대한 경비가 또 오늘날보다 갑절이나 들 것입니다.
은 듣건대 자고로 성인聖人은 허물이 없을 수 없었지만 허물이 있으면 잘 고쳤기 때문에 이 그보다 더 클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허물은 일식日蝕월식月蝕과 같아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볼 수가 있고, 허물을 고쳤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고 하였습니다.
조정朝廷의 행동은 의리상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합니다.
지금 황하黃河에 대한 의론의 온당하지 못함이 사람에게 해가 됨을 알아서 중도에서 원점으로 회복시킨다면 무엇이 부끄럽겠습니까?
비록 천하 사람들이 알게 한다 하더라도 또한 족히 두 분 성상聖上께서 백성을 깊이 걱정하시는 것을 밝히는 일이니, 이를 위하여 허물을 고치는 일에 인색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전의 의론에 연연하여 시원스럽게 변경하지 못하며, 잘못을 합리화시키는 데에는 과감하고 개과천선改過遷善을 어렵게 생각하니, 은 실로 조정朝廷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 듣건대 의논하는 자들이 처음 개하분수책開河分水策을 건의함에 그 주장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첫째는 “어하御河인멸堙滅하여 궤운饋運의 이익을 잃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은주恩州기주冀州 이북은 창수漲水가 되어 공사公私간에 손모損耗가 된다.”는 것이고,
셋째는 “황하黃河 물길의 이동이 일정하지 않으니, 만일 변계邊界로부터 바다로 들어간다면 변방邊防이 수비를 잃는다.”는 것이라 합니다.
무릇 성총聖聰형혹熒惑하고 공론公論저해沮害함에 모두 이 세 가지 말로써 구실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황하黃河를 서쪽으로 흐르게 하는 것은 그 형세가 마치 물병을 거꾸로 세워서 물이 쏟아지게 하는 것과 같고, 황하黃河를 이끌어 동쪽으로 흐르게 하는 것은 그 형세가 마치 옥상에 올라가는 것과 같으니, 세 가지 주장이 설령 믿을 만한 것이라도 시행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이 세 가지 주장이 모두 반드시 옳지는 못함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은 청컨대 그에 대한 까닭을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옛날에 대하大河(黃河)는 동쪽에 있고, 어하御河회주懷州위주衛州로부터 북경北京을 거쳐서 점차로 변군邊郡을 통과하였으니, 궤운饋運은 물론 편리하고 상고商賈도 잘 통행通行하였습니다.
지금은 황하黃河는 이미 서쪽으로 흐르고 있고, 어하御河인멸堙滅하였으니, 이와 같은 큰 이익을 잃은 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인력人力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의논하는 자들이 능히 전연澶淵의 옛 길을 회복시킨다면 어하御河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황하黃河소오小吳로부터 북행北行하여 어하御河의 옛 지대를 차지하였으니, 설사 의논하는 자들의 생각처럼 북경北京으로부터 남쪽으로 꺾어져 동쪽으로 흐르게 한다 하더라도 어하御河인멸堙滅된 구간이 이미 1, 2백 리나 되니, 역시 다시 나타날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어하御河에 대한 말을 따를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황하黃河가 흘러가는 곳에는 상반相半입니다.
여름철에 홍수洪水가 넘쳐 농토를 침몰시키면 황하黃河 주변의 수십 리는 부세賦稅를 거두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그 입니다.
홍수洪水가 물러간 곳에 진흙이 몇 자가 쌓이면 속맥粟麥의 이득은 다른 농토에 비하여 10배나 거둘 수 있고, 높은 지대에 주거지를 마련하여 홍수洪水를 피하는 것은 백성들이 그 일에 습관이 되어 있어 몹시 괴로워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그 입니다.
현재 황하黃河가 서쪽에 있어 그 형세 또한 이와 같으므로 멀리 제방隄防을 설치하여 홍수洪水와 전쟁을 벌이지 않으니, 바로 한대漢代 가손賈遜하천河川을 다스린 뜻을 터득한 것입니다.
예전 황하黃河의 물길에 비하면 해마다 병부兵夫와 공사도구를 줄인다 하더라도 그 면적은 몹시 넓고, 물이 물러간 예전 황하 자리는 상마桑麻천리千里나 늘어서 있으므로 부세賦稅가 완전히 회복되니 그 이득이 되는 것이 적지 않거늘, 어찌 대자연大自然규율規律을 어겨가면서 황하黃河가 서쪽으로 흐르는 걱정을 옮겨다가 동쪽으로 흐르는 걱정을 만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은주恩州기주冀州 이북은 홍수洪水가 된다.’는 말을 따를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황하黃河가 옛날 동쪽으로 흐르고 있을 때에 황하黃河로부터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군현郡縣노적虜敵접경接境하여 산하山河한계限界가 없었으므로 변신邊臣당수塘水를 설치하여 호마胡馬충돌衝突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황하黃河가 이미 서쪽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서산일대西山一帶호마胡馬가 다닐 만한 지대가 거의 없으니, 황하黃河변방邊防의 이익이 되는 점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논하는 자들은 오히려 황하黃河가 다시 북쪽으로 옮겨가면 해구海口노계虜界 가운데로 나게 되니, 배를 만들어 다리를 놓아 남침南侵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은 듣건대 “노중虜中의 모든 하천河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대체로 지형地形은 북쪽이 높은 법이니 황하黃河가 북쪽으로 옮겨갈 이치가 없고, 해구海口는 땅속 깊이 자리잡고 있으니 형세상 옮겨갈 수 없습니다.
이 비록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북방北方의 일에 익숙한 자가 을 위해 말한 것이 대략 이와 같으니, 사자使者를 보내어 살펴보고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해서 알아볼 만한 일입니다.
이것이 ‘황하黃河노계虜界에 들어가면 변방邊防의 수비를 잃는다.’는 말을 따를 수 없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은 원컨대 이 세 가지 말을 가지고 의논하는 자들과 질정을 한다면 개하분수설開河分水說은 참으로 족히 다시 꺼낼 말이 못될 것입니다.
이 조사해서 알아본 결과, 금년 4, 5월 사이에 하상河上에서 일하던 역병役兵들이 노고勞苦를 호소할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한번은 수백 명이 판축板築의 도구를 가진 채 도수사都水使를 찾아가서 험악한 태도를 보였는데 다행히 방라졸防邏卒의 저지로 해산되었다고 하고, 한여름에 고역苦役으로 병사자病死者가 속출하자 사자使者는 행여 조정朝廷에서 그것을 알까 겁이 나서 모두 죽어갈 무렵에야 본군本郡으로 놓아 보내니 도로道路에서 죽은 자가 그 숫자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만일 금년 겨울에 방동放凍하고 내년 봄 따스할 때에 다시 소집하여 역사를 시킨다면 뜻밖에 발생하는 화환禍患이 다시 전과 같을 것인데, 조정朝廷에서는 무엇 때문에 고통을 감수하며 이와 같은 공사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인지 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그 일을 건의建議대신大臣은 일의 성과가 없음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위에서 견지하고 있고, 소신小臣이록利祿을 챙기기에 급급하여 일의 옳고 그름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그저 덩달아 아래에서 맞장구를 치고 있는 것입니다.
위아래에서 끈끈하게 붙어서 호흡을 맞추어 조정朝廷을 속이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권좌權座에 있는 대신大臣의 위엄을 피하지 않고 바른말을 하는 사람은 고작 한두 명뿐입니다.
그러나 발생한 일이 의 직분으로 말할 범위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감히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맡고 있는 호부戶部휴척休戚화복禍福 등에 관한 운명이 황하黃河의 물길을 돌리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뻔히 보고서도 만일 입을 꾹 다문다면 그 누가 이 일을 말하겠습니까?
오직 바라옵건대 성상의 마음속으로부터 결단을 내리시어 부당한 대신大臣의 의론을 모두 파기시키신다면 온 천하가 그보다 더 큰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소신의 건의에 대한 실행 여부를 결정하옵소서.


역주
역주1 論開孫村河箚子 : 본 箚子는 元祐 3년(1088)에 쓴 것인데, 당시 조정에서 孫村河를 틔워서 黃河의 물길을 돌려 동쪽으로 흐르게 하자는 의론을 반박한 내용이니, 곧 ‘黃河를 나누자는 의론은 족히 들을 것이 못된다. 한갓 河朔을 困弊하게 하고 生靈을 도탄에 빠지게 할 뿐이다.’라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역주2 戶部右曹 : 宋代에 戶部는 軍國의 財政을 맡았다. 戶部尙書 아래에 侍郞‧郎中‧員外郞이 있었고, 郎中은 또 左曹‧右曹로 나뉘어 右曹는 常平錢物의 총수를 맡았다.
역주3 兼領金倉二部 : 戶部를 度支‧金部‧倉部 3개 부문으로 나누어 度支部는 국가의 財務를 총괄하고, 金部는 금전의 출납을, 倉部는 국가의 창고 등을 관장하였다.
역주4 任居天下財賦之半 : 戶部에서는 度支가 軍國의 용도 및 貢賦와 租稅의 수입‧지출에 관한 일을 맡고 그 외의 모든 것은 金部와 倉部로 말미암아 통솔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5 左藏 : 國庫의 하나. 왼쪽에 있기 때문에 左藏이라 칭하였다. 晉代에 비로소 左‧右藏令을 설시하였고, 宋代 초기에는 諸州의 貢賦를 모두 左藏으로 실어 들였다.
역주6 : 여기서는 천지가 불화하여 생기는 災害를 가리킨다.
역주7 西羌旅距 : 西羌은 중국 고대 西部에 분포한 소수 민족의 하나이고, 旅距는 여럿이 모여서 항거하는 것이다.
역주8 河議失當 : 元祐朝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黃河의 물길을 돌려서 동쪽으로 흐르게 하자는 의논이 일어나자, 蘇轍은 황하가 북쪽으로 흐르도록 놓아두자는 의논으로 황하의 물길을 돌리자는 의논이 부당함을 강조하였다.
역주9 桑羊 : 漢 武帝 때 治粟都尉를 지낸 桑弘羊. 그는 大司農으로 있을 때 重農抑商과 鹽鐵專賣 등을 주장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의 재용을 넉넉하게 만들었다.
역주10 劉晏 : 唐나라 肅宗‧代宗 연간에 국가재정을 관리하면서 鹽法을 정리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등, 安史의 난을 겪은 뒤 唐朝가 당면한 경제의 곤경과 재정의 문란을 개선하였다.
역주11 二聖 : 宋 哲宗과 垂簾聽政한 高太后를 가리킨다.
역주12 雖京西陝西災旱相接 : 京西는 곧 宋代의 京西路로 15路의 하나. 陝西는 곧 宋代의 陝西路로 15路의 하나. 《宋史》 〈五行志〉에 “元祐 원년 봄에 諸路가 가물었다.…… 이해 겨울에 다시 가물었다.…… 2년 봄에 가물었다. 3년 가을에 諸路가 가물었다. 京西와 陝西가 더욱 심하였다.”라는 말이 보인다.
역주13 羌人困窮 : 西羌 사람이 旱災로 인하여 艱難하고 窘迫함을 이른다.
역주14 款塞 : 塞門을 두드림. 곧 塞門을 두드려 열게 하고 와서 服從함을 가리킨다.
역주15 惟有黃河西流 議復故道 : 《宋史》 〈河渠志 黃河〉에 의하면, 熙寧 초년에 조정에서 오로지 黃河의 물길을 동쪽으로 흐르도록 유도하고 북쪽으로 흐르는 길을 폐쇄하려고 하였다. 元豐 이후에 黃河가 자주 터져서 북쪽으로 흐르자, 神宗은 水性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도록 놓아둘 것을 생각하였다. 安燾의 상소에 “黃河가 터졌다 하면 번번이 서쪽으로 터지고 서쪽으로 터졌다 하면 黃河의 꼬리는 그때마다 북쪽으로 뻗치기 마련이다.[河決每西 則河尾每北 河流旣益西決 固已北抵境上]”라고 한 말로 보아 이른바 ‘西流’와 ‘北流’는 그 뜻이 동일한 바, ‘西流’와 ‘北流’를 혼동해서 썼음을 알 수 있다. 元豐 8년(1085)에 哲宗이 즉위하였는데, 당시 黃河가 비록 북쪽으로 흘렀으나 孫村이 지대가 낮았기 때문에 여름과 가을에 장마가 지면 불어난 물이 이따금 동쪽으로 흘렀다. 小吳埽의 決口를 막지 못하였는데, 10월에 또 大名의 小張口가 터지니, 河北의 諸郡이 모두 水災를 입었다. 本路 轉運使 范子奇가 ‘大吳北岸에 鋸牙를 설치해서 거센 黃河의 水勢를 약화시키자.’고 청하였으므로 이에 황하의 물길을 돌려 동쪽으로 흐르게 하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역주16 役兵 : 勞役하는 士兵. 宋代의 兵制에 禁兵‧廂兵‧役兵‧民兵 등이 있었는데, 役兵은 遊民으로 충당하여 한 業種만을 전담하게 하였으니, 곧 河防을 쌓고 國馬를 기르는 일 등과 같은 것이었다.
역주17 河朔 : 黃河 이북 지역을 범연하게 칭하는 말이다.
역주18 莫大之役 尙在來歲 : 水官 張景先이 元祐 2년(1087) 12월 “내년 봄에 황하의 옛길을 다시 닦자.”고 건의하니 조정에서 건의를 따랐기 때문이다.
역주19 特召河北轉運司官吏 訪以得失 : 元祐 2년(1087) 三省에서 “黃河가 북쪽으로 터진 뒤로부터 恩州와 冀州 이하 몇 지대가 수해를 입는다.”라고 아뢰자, 河北轉運使‧轉運副使에게 詔書를 내려 “두 달 동안에 水官과 함께 그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서 아뢰라.”고 한 기사가 《宋史》 〈河渠志 黃河〉에 보인다.
역주20 近聞回河大議 已寢不行 : 元祐 3년(1088) 6월 戊戌日에 “黃河의 옛 물길을 회복하지 못하여 마침내 河北의 禍患이 되게 하였다. 王孝先 등의 건의에 의해 이미 일으킨 役事는 중도에 파할 수 없으니, 계속 공사를 진행하여 결단코 옛 물길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三省과 樞密院은 서둘러 서로 상의해서 시행하도록 하라.”고 詔書를 내렸는데, 얼마 후에 王存이 다시 “자고로 황하의 물길을 유도하는 경우와 황하의 물길을 막는 경우만이 있었습니다. 황하의 물길을 유도하는 경우는 水勢를 순종하여 높은 데서 아래로 내려가도록 유도하였고, 황하의 물길을 막는 경우는 황하의 터진 곳에 제방을 쌓아 터진 물이 황하의 몸통으로 들어가도록 하였을 뿐이지, 황하를 끌어서 높은 데로 흐르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아뢰자, 戊戌日에 내렸던 詔書를 환수하였기 때문이다.
역주21 然尙聞議者 固執開河分水之策 : 元祐 원년(1086)에 秘書監 張問에게 “河北水事를 살펴보도록 하라.”고 詔書를 내리자, 張問이 陳言하기를 “臣이 滑州決口에 이르러 살펴보니, 迎陽埽는 지극히 크고 小吳는 水勢가 낮아 진흙이 쌓였기 때문에 옛 물길을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南樂 大名埽에 直河와 簽河를 개통하여 水勢를 분산시켜 이끌어서 孫村口로 들어가 北京으로 집중되는 水患을 해소하소서.”라고 하니, 이에 減水河(곧 인공으로 河를 개통하여 물을 나누어 흐르게 하는 河를 가리킴)의 의론이 다시 일어나서 그를 따르도록 조서를 내렸기 때문이다.
역주22 雖權罷大役……竟未肯休 : 元祐 원년(1086) 2월에 “비가 오지 않으니 임시로 修河하는 일을 파하고 諸路의 兵夫를 놓아 보내라.”라고 詔書를 내렸지만, 減水河를 만드는 일은 그대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兵工小役은 오히려 있었던 것이다. 《宋史》 〈河渠志 黃河〉에 이에 대한 사실이 자세히 보인다.
역주23 小吳 : 곧 小吳埽. 埽는 범연하게 堤岸을 가리킨다. 孫村埽와 함께 澶州에 속했으니, 지금의 河南 濮陽 일대이다.
역주24 孫村所開……亦必不能分水 : 張問이 말한 “水勢를 분산시켜 이끌어 孫村口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은 減水河를 만들자는 뜻인데, 孫村의 減水河가 小吳埽보다 높고 水性은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물을 분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주25 君子之過……人皆仰之 : 子貢이 한 말로, 《論語》 〈子張〉에 보인다.
역주26 御河堙滅 失饋運之利 : 《宋史》 〈河渠志 御河〉에 의하면 “御河는 衛州 共城縣 百門泉에서 發源하여 通利‧乾寧을 거쳐 界河로 들어가 바다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熙寧 때에 水官이 黃河水를 御河로 끌어들여서 饋運의 이익을 구하였으나 얼마 안 가 黃河가 衛州로 터져서 御河에서 물을 나누기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또 徐曲에서 黃河水를 꺾어 막자는 의론이 있었다. 그런데 오래 가지 않아서 “小吳埽가 터져 大河가 북쪽으로 흐르고, 御河가 자주 漲水에 湮滅당하였다.”고 한다. 당시 황하의 물길을 상고해보면 黃河가 동쪽으로 흘렀으므로 御河가 다시 나올 수 있었다. 王巖叟가 일찍이 아뢰기를 “황하가 御河를 倂呑하니, 邊城이 轉輸의 편리함을 잃었습니다.”라고 하였고, 王存‧胡宗愈‧王覿도 모두 御河가 湮沒하여 轉運의 이익을 잃은 점에 대해 말하였다.
역주27 : 저본에는 ‘已’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以’로 바꾸었다.
역주28 恩冀以北……公私損耗 : 《宋史》 〈河渠志 黃河〉에 의하면 “元祐 2년(1087)에 王覿이 아뢰기를 ‘河北의 人戶가 이사를 많이 하는 것은 黃河가 범람하여 民田을 呑食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고, 王巖叟도 아뢰기를 ‘黃河가 북쪽으로 흘러 西山의 물을 가로막아 순하게 흘러내릴 수 없어 천 리가량 넘치므로 백만 生靈이 거처할 집이 없고 갈아먹을 전지가 없게 만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다.
역주29 : 저본에는 ‘北’으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邊’으로 바꾸었다.
역주30 河徙無常……邊防失備 : 《宋史》 〈河渠志 黃河〉에 의하면, 황하의 물길을 돌리자고 주장하는 자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를테면 知樞密院事 安燾는 東流를 적극 주장하여 “小吳埽가 아직 터지기 이전에는 黃河가 바다에 들어가는 지대가 아무리 여러 번 변경되었더라도 모두 그 지대가 중국 땅에 있었기 때문에 京師는 그것을 의지하여 북쪽으로 强敵을 막을 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景德 때 있었던 澶淵의 일에서 징험할 수 있다. 또 黃河가 터졌다 하면 번번이 서쪽으로 터지고 서쪽으로 터졌다 하면 黃河의 꼬리는 그때마다 북쪽으로 뻗치기 마련인데, 黃河가 서쪽으로 터지고 그 꼬리가 북쪽으로 뻗치는 일이 계속된다면 남쪽 연안은 결국 遼界에 속하고, 저들은 반드시 그곳에 舟橋를 놓을 것이다.…… 지금 黃河를 다스리는 일을 편할 대로만 하고 험한 지대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장구한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王巖叟도 이 의론을 주장하였으며, 文彦博‧呂大防‧安燾 같은 이는 “黃河가 동쪽으로 흐르지 않는다면 중국은 요새지를 잃고, 契丹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역주31 聖聰 : 帝王의 明察을 칭한 말이다.
역주32 建瓴 : 물병을 거꾸로 세워서 그 속에 있는 물을 쏟아지게 하는 일. 여기서는 地勢가 東高西低하니 河水의 西流를 막기가 어렵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역주33 登屋 : 옥상에 오름. 여기서는 東流를 주장하는 것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하는 일이니, 그 형세가 어렵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역주34 昔大河在東……經北京漸歷邊郡 : 黃河가 東流할 적에는 御河의 길을 침범하지 않았으므로 御河의 흐르는 물은 懷州와 衛州를 지나고 北京을 거쳐서 점차로 변경의 郡縣을 통과하였다. 懷州와 衛州는 宋代에 河北西路에 속하였다. 宋代에는 東京‧西京‧南京‧北京이 있었는데, 慶曆(宋 仁宗의 연호) 2년(1042)에 河北 大名府를 北京으로 삼았다. 邊郡은 乾寧을 가리킨다. 慶曆 8년(1048)에 黃河가 澶州 商胡埽(지금의 河南 濮陽 東北)에서 터져 북쪽으로 乾寧에 쏟아져 御河를 침범하여 바다로 들어갔으므로 드디어 黃河 北流의 경과 지대가 되었다.
역주35 今河旣西流 御河堙滅 : 黃河 小吳埽가 터진 뒤로는 黃河가 서쪽으로 터져서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점점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바다로 들어갔으므로 御河가 자주 漲水에 湮沒되었다.
역주36 : 저본에는 ‘然’으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若’으로 바꾸었다.
역주37 若議者能復澶淵故道 則御河有可復之理 : 大意는 “그러나 만일 黃河의 물길을 돌리자고 힘써 주장하는 大臣들이 능히 黃河를 다시 흐르게 하여 澶淵을 거쳐 京東의 옛길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게 한다면 御河와 물길이 겹치지 않아서 御河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澶淵은 지금의 河南 濮陽市 서쪽에 있었다. 옛날에 黃河는 濮陽으로부터 동쪽으로 商胡埽와 橫隴埽를 거쳐 북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갔고, 御河는 河南 浚縣으로부터 河北 大名을 거쳐 북쪽으로 올라갔으니, 黃河와 御河가 거리가 멀어서 서로 미칠 수 없었다.
역주38 今河自小吳北行……亦無由復見矣 : 《宋史》 〈河渠志 黃河〉에 의하면 “元豐 4년(1081) 小吳埽가 크게 터져 澶淵으로부터 御河로 들어갔으므로 恩州의 위험이 더욱 심하였으며, 黃河의 北流는 곧 濮陽‧大名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올라가서 御河와 竝行하기도 하고 重疊하기도 하였는데, 御河는 漲水에 湮沒되어 다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역주39 破稅 : 朝廷에서 항상 天災로 인하여 租稅를 감면함. 租稅가 完納될 수 없기 때문에 ‘破稅’라고 한 것이다.
역주40 遠爲隄防 不與之爭 : 곧 遙堤를 세우는 일. 遙堤는 大堤의 밖에 있어 洪水가 大堤를 넘으면 그 洪水를 막아 범람하는 범위를 한정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역주41 賈遜 : 漢 哀帝 때 待詔란 관직에 있으면서 〈治河三策〉을 올린 賈讓을 가리킨다. 讓을 遜으로 바꾼 것은 避諱한 것인데, 宋나라 英宗(趙曙)의 부친인 濮安懿王의 諱가 允讓이다.
역주42 正得漢賈遜治河之意 : 《漢書》 〈溝洫志〉에 의하면, 賈讓은 그의 〈治河三策〉 중에서 “隄防을 쌓는 일은 전국시대에 시작되었는데, 냇물을 막아 각각 이득을 취하였다. 齊‧趙‧魏도 黃河에서 25리 떨어진 지점에 隄防을 쌓았다. 비록 정식 제방은 아니지만, 물이 오히려 遊蕩할 장소가 있으므로 수시로 그곳에 들어왔다 나가면 진흙이 메워져서 땅이 肥沃해지므로 백성들이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 오래가도 피해가 없으므로 차츰 집을 지으니 드디어 聚落을 이루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역주43 塘水 : 물을 가두어 險地를 조성하는 것이다.
역주44 南牧 : 남쪽으로 침범함을 이른다.
역주45 議者 : 黃河의 물길을 돌리자고 주장하는 大臣을 가리킨다.
역주46 板築 : 夾板과 절굿공이. 옛날 담을 쌓을 때에 두 쪽 널판을 양쪽에 대고 그 안에 흙을 채워서 절굿공이로 다졌다.
역주47 都水使 : 宋代 都水監의 長官. 河渠‧津梁‧舟楫 등을 담당하였다.
역주48 放凍 : 옛날 겨울철에 河水가 얼면 일시적으로 漕運을 중단하고 舟卒을 兵營으로 복귀시켰기 때문에 ‘放凍’이라 칭하였다. 여기서는 하천공사를 하는 役兵을 兵營으로 복귀시킴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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