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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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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이나이나 却澹宕이니라
왕군王君정국定國 爲堂於其居室之西하니
前有山石瓌奇琬琰之觀하고 後有竹林陰森氷雪之植하며 中置圖史百物하여 而名之曰淸虛라하고 日與其遊하니 賢士大夫 相從於其間이니라
嘯歌吟咏하고 擧酒相屬하며 油然不知日之旣夕이러라
凡遊於其堂者 蕭然如入於山林高僧之居하여 而忘其경도京都塵土之鄕也니라
或曰 此其所以爲淸虛者耶아하니 客曰 不然하다
凡物自其濁者視之 則淸者爲淸하고 自其實者視之 則虛者爲虛니라
淸者以濁爲汚하고 而虛者以實爲礙니라
然而皆非物之正也니라
蓋物無不淸하고 亦無不虛者니라
雖泥塗之渾이나 而至淸存焉하고 雖山石之堅이나 而至虛存焉이니라
하여 棄其綺紈膏粱之習하고 而跌宕於圖書翰墨之囿하여 沈酣縱恣하니 洒然與衆殊好니라
雜然前陳하되왕희지傾囊而不厭하니 慨乎思見其人而不得이면 則旣與우세남俗遠矣니라
이나 及其年日益壯하고 學日益篤하여는 經涉世故하고 出入患禍하니 顧疇昔之好 知其未離乎累也니라
乃始發其箱箧하고 出其玩好하여 投以與人而不惜이니라
將曠焉黜去外累하고 而獨求諸內하니 意其有眞淸虛者在焉이나 而未見之也니라
왕군王君浮沈경사京師하여하고 而又娶於하니
장공張公超達遠騖하여 體乎至道하고 而順乎流俗이니라
嘗試以吾言問之하면 其必有得於是矣리라
당형천唐荊川曰 此文亦有箴規言이나 其所以爲청허淸虛 不足爲청허淸虛니라
議論亦本장자莊子니라


01. 왕씨王氏청허당淸虛堂에 대한 기문
글 뜻은 얄팍하지만, 문장은 담백하고 호탕하다.
왕군王君 정국定國이 그가 거처하는 방 서쪽에 을 만들었다.
앞에는 아름다운 구슬처럼 구경할 만한 진기珍奇산석山石이 있고, 뒤에는 차가운 빙설氷雪처럼 음산하게 심어진 죽림竹林이 있으며, 가운데는 도적圖籍사서史書 그리고 온갖 문물文物을 배치해서 이름을 ‘청허당淸虛堂’이라 하고는 날마다 거기서 노니,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서로 그 사이에서 종유하였다.
휘파람과 노래도 불고 를 읊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기도 하며 유연油然히 해가 이미 석양이 된 줄도 몰랐다.
무릇 그 청허당淸虛堂에서 노는 자들은 소연蕭然산림山林 속에 있는 고승高僧일인逸人의 거처에 들어간 것 같아서 경도京都진토塵土세계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혹자或者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마음이 맑고 정욕情欲이 없이 한 것인가?”라고 하니, 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이 그 한 것으로부터 본다면 맑은 것이 맑은 유세를 하고, 그 한 것으로부터 본다면 한 것이 한 유세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맑은 사람은 한 사물을 더럽게 보고, 마음이 〈정욕情欲 없이〉 텅 빈 사람은 부실富實한 사물이 장애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모두 사물의 정당한 이치는 아니다.
대개 사물에는 맑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비록 진흙의 혼탁한 것도 지극히 맑은 것이 존재하고, 비록 산석山石의 견고한 것도 지극히 한 것이 존재한다.
그러니 오직 을 하나로 보고 동체同體로 본 연후에야 사물과 더불어 필적함이 없어서 지극한 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왕군王君세족世族에서 태어나서 비단옷을 입고 고량진미를 먹는 호화스런 생활 습관을 버리고 도서圖書한묵翰墨 속에 묻혀서 거기에 심취하여 마냥 즐겼으니, 선연洒然히 여러 사람과 기호嗜好가 달랐다.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 우세남虞世南, 저수량褚遂良, 안진경顔眞卿, 장욱張旭의 뛰어난 작품과 고개지顧愷之, 육탐미陸探微, 오도자吳道子, 노홍盧鴻, 왕유王維, 한간韓干의 전해오는 그림을 잡다하게 앞에 진열하되, 주머니 속의 돈을 몽땅 떨어서 구매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으니, 개연慨然히 그 사람들을 보기를 애타게 생각하였으나 끝내 보지 못했다면 일단 세속世俗과는 멀어진 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가 날로 장성해지고 그 학문이 날로 심후深厚해지게 되어서는 세간의 변고를 겪고 재화災禍우환憂患을 친히 경험하니, 지난날의 기호嗜好를 회고함에 외루外累에서 떠나지 못했던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상자를 열고 그 완호玩好하던 글씨와 그림 등을 꺼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되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가 장차 외루外累를 내쳐버리고 오직 내심內心에서만 구하려고 하니, 그에게는 참다운 가 있을 터이나 아직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왕군王君경사京師에서 부침浮沈하여 진세塵世 밖의 교우가 많고, 또한 장공씨張公氏에게 장가들었다.
장공張公은 초탈, 달관하고 심사心思가 고원하여 지도至道를 체득하고 유속流俗을 따르는 훌륭한 사람이다.
은 일찍이 내 말을 가지고 그에게 물었을 터이니, 반드시 이에 얻음이 있었을 것이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이 글 또한 잠규箴規가 담긴 말이나 그 청허淸虛를 한 것은 청허淸虛가 되기에 부족하다.
의론議論 또한 《장자莊子》에 근거를 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王氏淸虛堂記 : 〈王氏淸虛堂記〉는 熙寧 10년(1077) 정월 8일에 지은 것이다. ‘王氏’는 王鞏을 가리킨다. 王鞏은 王素의 아들로 자는 定國, 호는 淸虛居士이다. 俊才가 있고 詩에 뛰어났으며, 蘇軾‧蘇轍과 교유하였고, 蘇軾이 죄를 얻자, 그도 폄직되어 賓州에서 謫居하다가 몇 년 만에 돌아왔는데, 豪氣가 조금도 꺾이지 않았고, 뒤에 宗正丞을 역임했다고 한다.
《同都事略》에서는 王鞏에 대해 “王素의 여러 아들 중에 鞏이 지명도가 높았다. 鞏은 字가 定國인데, 蘇軾을 좇아 학문을 하여 文章을 잘하였고 秘書省正字를 역임하였다. 그는 일찍이 蘇軾에 연루되어 여러 번 폄직당해 賓州에 謫居하였고, 元祐 연간에는 蘇軾의 추천으로 太常博士에 제수되었다가 그 뒤에 元祐黨에 연루되어 관직이 떨어져나갔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역주2 逸人 : 逸民. 곧 出仕를 원하지 않는 隱者를 가리킨다.
역주3 或曰……而至淸且虛者出矣 : 여기의 或者와 客이 펼친 문답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莊子의 寓言에서 孔子와 顔回가 펼친 문답 내용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莊子》 〈人間世〉에 “顔回가 ‘저는 더 이상 진취할 길이 없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孔子께서 ‘齋戒하라. 내 네게 말해주리라. 마음에 있어서 한들 그것이 그리 쉽겠는가? 그것을 그리 쉽게 하려 하면 하늘도 마땅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하셨다.
顔回가 ‘저는 집이 가난해서 술도 마시지 않고 냄새나는 채소도 먹지 않은 지가 몇 달이 되었습니다. 이만 하면 재계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께서 ‘그것은 제사 지낼 때의 재계이지 마음의 재계는 아니다.’라고 답하셨다.
顔回가 ‘마음의 재계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공자께서 ‘너는 뜻을 하나로 가져라. 그래서 귀로도 듣지 말고 마음으로도 듣지 말고 오직 氣로만 듣도록 하여라. 듣는 것은 귀에서 그치고 마음은 符合하는 데서 그친다. 하지만 氣는 虛해서 온갖 사물을 포용한다. 오직 道는 虛한 데서 모이니, 虛한 게 곧 마음의 재계이다.’라고 하셨다.
顔回가 ‘제가 가르치심을 듣지 못했을 때에는 제가 顔回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르치심을 듣고 난 뒤에는 자신이 顔回라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이것을 ‘虛’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께서 ‘지극하도다.’라고 하셨다.”라고 하였다.
역주4 今夫王君生於世族 : 世族은 대대로 벼슬한 집안을 가리킨다. 王鞏의 조부 王旦(957~1017)은 太平興國 5년(980)에 進士를 하고, 眞宗朝에서 벼슬이 參知政事를 거쳐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이르렀고, 부친 王素(1007~1073)는 진사 출신으로 벼슬이 工部尙書에 이르렀다.
역주5 至於鍾王虞褚顔張之逸迹 : 鍾은 삼국시대 魏나라 書法家 鍾繇, 王은 東晉의 書法家 王羲之, 虞는 唐代의 書法家 虞世南, 褚는 唐代의 書法家 褚遂良, 顔은 唐代의 書法家 顔眞卿, 張은 唐代의 書法家 張旭이다. 逸迹은 여기서는 뛰어난 書法이나 작품을 가리킨다.
역주6 顧陸吳盧王韓之遺墨 : 顧는 東晉의 畵家 顧愷之, 陸은 南朝 宋나라의 畵家 陸探微, 吳는 唐代의 畵家 吳道子, 盧는 唐代의 畵家 盧鴻, 王은 唐代의 畵家 王維, 韓은 唐代의 畵家 韓干이다. 遺墨은 여기서는 전해오는 그림을 가리킨다.
역주7 世外之交 : 高僧, 隱士 등을 가리킨다.
역주8 張公氏 : 張公은 張方平을 가리킨다. 자는 安道, 南京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穎悟하여 한 번 본 것은 잊지 않았으니, 茂(秀)才異等으로 천거되어 벼슬은 參知政事에 이르렀으며, 蘇洵‧蘇軾‧蘇轍 3부자와 종유하여 北宋의 名臣이 되었다. 王鞏은 바로 그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다.
역주9 <주석명/> : 孫琮은 《山曉閣選宋大家蘇潁濱全集》에서 “이 篇은 上‧下篇으로 나누어서 읽어야 된다. 上半篇은 바로 虛, 下半篇은 바로 實인데, 그 虛에서는 다만 淸虛의 이치를 범연히 논했을 뿐이고, 그 實에서는 바야흐로 淸虛한 사람을 실증하였다.
그러나 上半篇에서는 허구적으로 淸虛한 이치를 말하여 深淺의 兩層을 두었으니, ‘山林, 僧舍’와 같은 것은 바로 그 얕은 곳이고, ‘淸濁一觀’과 ‘虛實同體’는 바로 그 깊은 곳이다.
下半篇에서 淸虛한 사람을 실증할 때에도 淺深의 兩層을 두었으니, ‘綺紈과 膏粱을 버리고 圖史를 친근히 한 것’은 바로 얕은 곳이고, ‘外累를 버리고 오로지 內心에서만 구하는 것’은 바로 깊은 곳이다.
궁극적으로는 下半篇의 淺深도 바로 上半篇의 淺深이다. 다만 前後의 虛實을 다르게 적었을 뿐이다.[此篇分作上下篇讀 上半篇是虛 下半篇是實 其虛處 只是泛論淸虛之理 其實處 方是實征淸虛之人 然上半篇虛說淸虛之理 有深淺兩層 如山林僧舍 是其淺處 淸濁一觀 虛實同體 是其深處 下半篇實征淸虛之人 亦有淺深兩層 棄綺紈膏粱而親圖史 此是淺處 去外累而獨求諸內 此是深處 究之下半篇淺深 卽是上半篇之淺深 但前後虛實寫得異而]”라고 비평하였다.
沈德潛은 《唐宋八大家文讀本》에서 “外物에서 빌어 淸虛를 구하였으니, 본디 그것을 ‘淸虛’라 할 수 없거니와 潁濱은 淸濁을 하나로 보고 虛實을 同體로 보려고 하여 말이 齊物論에 벗어나지 못했으니, 또한 淸虛의 올바른 것이 아니다. 보는 자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假乎外物 以求淸虛 固不可謂之淸虛 潁濱則欲淸濁一觀 虛實同體 語涉齊物 亦非淸虛之正也 觀者詳之]”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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