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有山石瓌奇琬琰之觀하고 後有竹林陰森氷雪之植하며 中置圖史百物하여 而名之曰淸虛라하고 日與其遊하니 賢士大夫 相從於其間이니라
嘯歌吟咏하고 擧酒相屬하며 油然不知日之旣夕이러라
凡遊於其堂者
는 蕭然如入於山林高僧
之居
하여 而忘其
경도京都塵土之鄕也
니라
凡物自其濁者視之면 則淸者爲淸하고 自其實者視之면 則虛者爲虛니라
雖泥塗之渾이나 而至淸存焉하고 雖山石之堅이나 而至虛存焉이니라
하여 棄其綺紈膏粱之習
하고 而跌宕於圖書翰墨之囿
하여 沈酣縱恣
하니 洒然與衆殊好
니라
과 도 雜然前陳
하되 贖
왕희지之傾囊而不厭
하니 慨乎思見其人而不得
이면 則旣與
우세남世俗遠矣
니라
然이나 及其年日益壯하고 學日益篤하여는 經涉世故하고 出入患禍하니 顧疇昔之好에 知其未離乎累也니라
乃始發其箱箧하고 出其玩好하여 投以與人而不惜이니라
將曠焉黜去外累하고 而獨求諸內하니 意其有眞淸虛者在焉이나 而未見之也니라
왕군王君浮沈
경사京師하여 多
하고 而又娶於
양梁하니
장공張公超達遠騖하여 體乎至道하고 而順乎流俗이니라
당형천唐荊川曰 此文亦有箴規言이나 其所以爲청허淸虛者는 不足爲청허淸虛也니라
글 뜻은 얄팍하지만, 문장은 담백하고 호탕하다.
왕군王君 정국定國이 그가 거처하는 방 서쪽에 당堂을 만들었다.
앞에는 아름다운 구슬처럼 구경할 만한 진기珍奇한 산석山石이 있고, 뒤에는 차가운 빙설氷雪처럼 음산하게 심어진 죽림竹林이 있으며, 가운데는 도적圖籍과 사서史書 그리고 온갖 문물文物을 배치해서 이름을 ‘청허당淸虛堂’이라 하고는 날마다 거기서 노니, 어진 사대부士大夫들이 서로 그 사이에서 종유하였다.
휘파람과 노래도 불고 시詩와 부賦를 읊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기도 하며 유연油然히 해가 이미 석양이 된 줄도 몰랐다.
무릇 그 청허당淸虛堂에서 노는 자들은 소연蕭然히 산림山林 속에 있는 고승高僧과 일인逸人의 거처에 들어간 것 같아서 경도京都의 진토塵土세계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혹자或者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마음이 맑고 정욕情欲이 없이 허虛한 것인가?”라고 하니, 객客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이 그 탁濁한 것으로부터 본다면 맑은 것이 맑은 유세를 하고, 그 실實한 것으로부터 본다면 허虛한 것이 허虛한 유세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이 맑은 사람은 탁濁한 사물을 더럽게 보고, 마음이 〈정욕情欲 없이〉 텅 빈 사람은 부실富實한 사물이 장애하는 것으로 본다.
대개 사물에는 맑지 않는 것이 없고, 또한 허虛하지 않는 것이 없다.
비록 진흙의 혼탁한 것도 지극히 맑은 것이 존재하고, 비록 산석山石의 견고한 것도 지극히 허虛한 것이 존재한다.
그러니 오직 청淸과 탁濁을 하나로 보고 허虛와 실實을 동체同體로 본 연후에야 사물과 더불어 필적함이 없어서 지극한 청淸과 허虛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왕군王君은 세족世族에서 태어나서 비단옷을 입고 고량진미를 먹는 호화스런 생활 습관을 버리고 도서圖書와 한묵翰墨 속에 묻혀서 거기에 심취하여 마냥 즐겼으니, 선연洒然히 여러 사람과 기호嗜好가 달랐다.
종요鍾繇, 왕희지王羲之, 우세남虞世南, 저수량褚遂良, 안진경顔眞卿, 장욱張旭의 뛰어난 작품과 고개지顧愷之, 육탐미陸探微, 오도자吳道子, 노홍盧鴻, 왕유王維, 한간韓干의 전해오는 그림을 잡다하게 앞에 진열하되, 주머니 속의 돈을 몽땅 떨어서 구매해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였으니, 개연慨然히 그 사람들을 보기를 애타게 생각하였으나 끝내 보지 못했다면 일단 세속世俗과는 멀어진 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가 날로 장성해지고 그 학문이 날로 심후深厚해지게 되어서는 세간의 변고를 겪고 재화災禍와 우환憂患을 친히 경험하니, 지난날의 기호嗜好를 회고함에 외루外累에서 떠나지 못했던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상자를 열고 그 완호玩好하던 글씨와 그림 등을 꺼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되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가 장차 외루外累를 내쳐버리고 오직 내심內心에서만 구하려고 하니, 그에게는 참다운 청淸과 허虛가 있을 터이나 아직 보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왕군王君은 경사京師에서 부침浮沈하여 진세塵世 밖의 교우가 많고, 또한 양梁의 장공씨張公氏에게 장가들었다.
장공張公은 초탈, 달관하고 심사心思가 고원하여 지도至道를 체득하고 유속流俗을 따르는 훌륭한 사람이다.
군君은 일찍이 내 말을 가지고 그에게 물었을 터이니, 반드시 이에 얻음이 있었을 것이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이 글 또한 잠규箴規가 담긴 말이나 그 청허淸虛를 한 것은 청허淸虛가 되기에 부족하다.
의론議論 또한 《장자莊子》에 근거를 둔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