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文帝寬仁大度하여 有고제高帝之風하고 경제景帝忌刻少恩하여 無人君之量이니 其實非문제文帝比也니라
주아부周亞夫爲大將에 折오吳초楚之銳鋒하여 不數月而平大難하니라
其於君臣父子兄弟之際에 背理而傷道者 一至於此니라
原其所以能全身保國컨대 與문제文帝俱稱賢君者는 惟不改其恭儉故耳니라
如경제景帝之失道非一也로되 而猶稱賢君은 豈非躬行恭儉하여 罪不及民故耶아
이 또한 자유子由가 경제景帝의 본말本末을 꿰뚫어본 곳이다.
한漢나라의 현군賢君은 모두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다.”라고 하였다.
문제文帝는 너그럽고 인자하고 도량이 커서 고제高帝의 풍격風格이 있었고, 경제景帝는 투기妬忌하고 각박刻薄하고 은덕恩德이 적어 인군人君의 도량이 없었으니 기실은 문제文帝와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경제景帝가 태자太子로 있을 때에 오왕吳王 비濞의 세자世子가 내조來朝하여 경제景帝과 함께 장기를 두면서 불공한 태도를 보이거늘, 경제景帝가 노怒하여 장기판으로 쳐서 그를 죽였으니, 비濞의 반역叛逆은 그 형세가 여기서 격발한 것이다.
장석지張釋之는 문제文帝의 명신名臣이었건만 탄핵해서 아뢴 데 대한 앙갚음으로 회남淮南에 내쳐서 죽게 하였고, 등통鄧通은 문제文帝의 행신倖臣이었건만 종기를 빤 데 대한 원망으로 곤궁하게 살다가 죽게 하였다.
조조鼂錯가 처음에 경제景帝와 함께 제후諸侯들의 영토를 삭탈削奪할 것을 모의하니 경제景帝는 여러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조조鼂錯의 계략을 썼건만, 7국國이 반역함에 미쳐서는 원앙袁盎의 한마디 말에 속음으로써 동시東市에서 조조鼂錯를 참수하고 끝내 고념顧念하지 않았다.
주아부周亞夫는 대장大將이 되자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예봉銳鋒을 꺾어 몇 달 안 가서 대난大難을 평정하였다.
그가 정승이 되어서는 정도를 지키고 아부하지 않으니, 그의 굴하지 않는 태도를 미워하여 결국 죄가 없는 그를 죽였다.
양왕梁王 무武는 모제母弟였건만, 교만하여 멋대로 놀아나다가 거의 죽을 뻔하였다.
임강왕臨江王 영榮은 태자太子였건만, 그의 모친이 경제景帝에게 사랑을 잃음으로써 혹리酷吏로 하여금 그(榮)를 살해하게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 군신君臣, 부자父子, 형제兄弟의 사이에 도리道理를 위배하고 상하게 하는 것이 한결같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경제景帝가 몸과 나라를 잘 보전하게 된 까닭을 추구하건대, 문제文帝와 더불어 현군賢君이라고 칭하는 것은 오직 그 공검恭儉을 변개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춘추春秋》의 법法에 임금을 시해한 경우에 임금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임금이 무도無道했음을 나타내고, 신하의 이름을 말하는 것은 신하에게 죄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진후陳侯 평국平國과 채후蔡侯 반般이 모두 무도無道로 시해하였는데, 시해에서 모두 신하의 이름을 말한 것은 그 죄가 백성에 미치지 않았다고 여긴 것이다.
경제景帝와 같은 경우는 도道를 잃은 점이 하나가 아니었음에도 오히려 현군賢君이라고 칭한 것은, 어찌 몸소 공검恭儉을 행하여 죄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공검恭儉하지 않는 자의 경계가 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