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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1)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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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事與今國家事不同하니 難以遽斷이라
大較文定公 亦只因主幼하고 而當時兵將 未得其禦夷之便이라 爲此棄之之說하니 恐非至計也니라
右臣竊見 因夏國內亂으로 하고 하니 議者講求利害하되 久而不決이니이다
其一曰 蘭州五寨 所在嶮遠하여 饋運不便이니 若竭力固守라가 이면 得以養勇하여 이니라
要之久遠이니 不得不棄니라
危而後棄 不如方今無事 猶足以示國恩惠라하나이다
其二曰 此地皆西邊要害 朝廷用兵費財 僅而得之하고 聚兵積粟하여니라
蘭州下臨黃河하여하고 土多衍沃하니 이면 可以招募弓箭手하여 爲耕戰之備니라
自開拓以來 平治徑路하여 皆通行大兵이니라
若擧而棄之 熙河必有이리라
所謂이니 其勢必爲後患이라하나이다
此二議者 臣聞之久矣니이다
이나背畔으로 하니 則棄守之議 朝廷無因自發이니이다
今聞 遣使來賀하고 歸未出境 라하니 講和請地 必在玆擧리이다
雖廟堂議論 已得詳熟이나 而小臣憂國하여 不能嘿已니이다
輒嘗覈實其事컨대 以爲棄守之議 皆非妄言이나
然而朝廷當決從一議니이다
欲決此議인댄 當論時之可否 理之曲直 算之多寡니이다
誠使三者得失 皆見於前이면 則棄守之議 可一言而決也니이다
何謂時之可否오하면
方今皇帝陛下 하사 하고 하시며
太皇太后陛下 覽政簾幃之中하사 이시니이다
當此之時 則有餘 則不足이니 利在綏撫 不利征伐이니이다
今若固守不與 西戎必至於爭이리이다
一起 이리니 緩急之際 何所咨決이리잇가
況陝西河東兩路 比遭用兵之厄이라 民力困匱하여 瘡痍未復이니 一聞兵事 無不리이다
若使外患不解 必相因而起리이다
此所謂時可棄而不可守一也니이다
何謂理之曲直고하면 雖梁氏廢放其子 而夷狄 外臣이라 本不須治以中國之法이니이다
先朝必欲弔伐하되 但誅其하고 하니 則雖之群이라도 猶將伏以聽命이니이다
今乃割其土地하고 作爲城池하여 以自封殖하니 雖吾中國之人이라도 猶知其爲利 而不知其義也니이다
曲直之辨 不言可見이니이다
之世 元昊叛命하고 하니 邊臣하여
然而四方士民 裹糧奔命하되 唯恐在後하니 雖捐骨中野 不以爲怨이니이다
兵民競勸하여 邊守卒固하니 而中國徐亦自定하여 無土崩之勢니이다
何者 知曲在元昊 而用兵之禍 朝廷之所不得已也니이다
頃自出師 而計其所亡失하면 未若니이다
然而邊人憤怨하고 天下咨嗟하니 土崩之憂 企足可待니이다
何者 知曲在朝廷이니 非不得已之兵也니이다
今若固守하고 惜而不與라가 하여 而使子弟 肝腦塗地 臣恐邊人 自此有怨叛之志니이다
此所謂理可棄而不可守二也니이다
何謂算之多寡오하면 棄守之議 朝廷若擧而行之인댄必有幸有不幸이니이다
이나 臣今所論 於守則言其幸하고 於棄則言其不幸하여이니이다
今夫固守蘭州하고 增築하여 이니이다
方其未成 而西戎不順하여 求助하고 하니 하고 하며 賊兵乘勝하니 師喪國蹙하고 蘭州不守하니 熙河危急이니이다
此守之不幸者也니이다
割棄蘭州하고 專守熙河하며 하고 兵馬有備하면 戎人懷惠하여 不復作過니이다
此棄之幸者也니이다
二者 臣皆不復言이리이다
何者 利害不待言而決也니이다
若夫固守蘭州하여 增築堡寨하고 招置土兵하여 且耕且戰이면 西戎懷怨하여 未能忘爭하고 時出하여 勝負相半이리니 耕者不安하고 餽運難繼하며 耗蠹中國하여 民不得休息이리이다
此守之幸者也니이다
割棄蘭州하고 專守熙河하면 西戎據蘭州之堅城하고 道熙河之夷路하리이다
我師不利하여 復以秦鳳爲境하고 修完廢壘하며 復置 人力旣勞하고 費亦不小리이다
此棄之不幸者也니이다
夫守之雖幸이나이나 仇怨不解하여 屯兵饋糧 無有休日이리니 熙河因此物價翔貴리이다
見今守而不戰이로되 歲費已三百餘萬貫矣어늘 戰若不止 戍兵必倍하고 糧草衣賜 隨亦增廣하리니 民力不支 則土崩之禍 或不可測也니이다
棄之雖不幸이나이나 所棄 外無用之城이니이다
秦鳳之間 兵民習熟하고 近而易守하며 이니 比之熙蘭이면 難易十倍 有守邊之勞 而無 與平日無異也니이다
夫以守之幸으로 較棄之不幸이면 利害如此니이다
而況守未必幸하고 而棄未必不幸乎잇가
且朝廷以天地之量으로 赦其罪惡하고 歸其侵疆하고 復其하고 通其하면 雖豺狼野心이라도 能不愧恥잇가
縱使 內懷不順이나 而國恩深厚하니 無以激怒其民이니이다
臣料一二年間 其勢必未能擧動이리이다
萬一不然이면 而使中國之士 知朝廷棄已得之地하여 하고 西戎背恩하니 彼曲我直하소서
人懷此心이면 勇氣하여 以攻則取 以守則固 而況於人乎잇가
臣願 朝廷決計棄此하고 然後 愼擇名將하여 以守熙河하고 하며 多置弓箭手於熙蘭往還要路하여 爲一大城이면 度可屯二三千人하여 以塞其入寇之道리이다
於秦鳳以來 多置하여 以爲熙河緩急救應之備니이다
明敕將佐하고 繕完守備하며 常若寇至하고 先爲하여 以待敵之至 庶幾可以無後患也리이다
臣自聞西使復來 謹采衆議하고 以三事參較利害하며 反覆詳究하니 理無可疑니이다
是以 輒獻狂言하니 惟陛下裁擇하시면 幸甚이리이다


04. 난주蘭州 등지等地를 논한 장문狀文
송대宋代의 일은 오늘날 국가의 일과 같지 않으니, 얼른 결단하기 어렵다.
대략 문정공文定公도 단지 임금이 어리고 당시 사병士兵장좌將佐이적夷狄을 방어하는 편리한 계책을 얻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이와 같이 ‘버린다.’는 말을 하였으니, 최상의 계책은 아닌 것 같다.
이 가만히 보옵건대, 선제先帝께서 하국夏國내란內亂을 계기로 군사를 이용해서 공토攻討하고, 희하로熙河路에는 난주蘭州를 더 설치하고 부연로鄜延路에는 안강安疆미지米脂 등 5를 더 설치하시니, 의논하는 자들이 이해利害관계를 강구하되 오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난주蘭州와 5는 소재처가 험악하고 멀어서 군량을 운반하기가 불편한데, 만일 힘을 다 쏟아 그곳을 굳게 지키다가 그로 인해 중국을 고달프게 한다면 강인羌人이 군사력을 길러서 빼앗을 기회를 엿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난주蘭州와 5는 먼 곳이니 결국은 버리지 않을 수 없다.
위험한 곤경을 겪은 뒤에 버리는 것은 지금 무사할 때 모두 넘겨주는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하면 오히려 족히 나라의 은혜를 명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 다른 하나는 “이 땅은 모두 서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조정朝廷에서 병력과 경비를 근근이 마련하고 무기를 모으고 군량을 쌓아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견고한 지대를 만들었다.
난주蘭州황하黃河에 다다라 서융西戎인후지咽喉地에 해당하고 토지는 대부분 넓고 비옥하니, 약간의 보장堡障을 설치하면 궁전수弓箭手를 불러 모아 농사를 지으면서 전쟁을 하도록 대비시킬 수 있다.
변경을 개척한 이후로 작은 길을 확장하여 모두 대군大軍을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만일 그곳을 모두 버린다면 전란戰亂경보警報가 있어서 성문을 낮에도 걸어 잠가야 할 것이다.
이른바 적에게 병력을 빌려주고 강도에게 양식을 보조하는 격이니, 그 형세는 반드시 후환이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 두 의론은 이 들어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나 하융夏戎이 배반하였기 때문에 비록 여러 번 사신을 우리 조정에 보내왔지만, 신하 된 직분을 닦지도 않고 침탈한 땅을 돌려줄 것을 청하지도 아니하였으니, 난주蘭州 등의 땅을 버려야 한다느니 지켜야 한다느니 하는 의론을 조정에서는 표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듣자옵건대 “사신을 보내와 등극을 하례하였고, 하례를 끝내고 돌아가는 사신이 아직 국경을 나가지도 않았을 때에 다른 사자使者가 다시 이르렀다.”고 하니, 강화講和를 요구하고 침탈한 땅을 돌려줄 것을 청하는 일이 반드시 이 사행使行에 거론될 것입니다.
비록 조정의 의론이 이미 자상하고 깊이 고려한 것이었지만, 소신小臣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의 실상을 조사해 보건대 전에 언급한 버려야 한다느니, 지켜야 한다느니 하는 의론은 모두 망언妄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마땅히 한쪽 의론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 의론을 결정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시기적으로 옳은가 옳지 않은가와, 이치상으로 부당한 일인가 정당한 일인가와, 계산상으로 소비가 많은 일인가 적은 일인가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이 세 가지의 득실이 모두 앞에 투명하게 보이도록 한다면 버리자는 의론과 지키자는 의론은 단 한마디 말로 결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따져야 한다.”고 왜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지금 황제폐하皇帝陛下께서는 젊으신 나이로 거상居喪 중에 명령이나 지시를 내리지 않고 공손하고 침묵하는 태도로 치도治道를 생각하시며,
태황태후폐하太皇太后陛下께서는 수렴청정垂簾聽政하시며 모든 정사政事보상대신輔相大臣에게 맡겨서 처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때에는 안정安靖적인 정치를 할 시간은 남아돌고, 변경의 수비상에서 행동을 할 시간은 부족하니, 적국敵國을 어루만지는 것은 이롭고 정벌征伐하는 것은 이롭지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만일 침탈한 땅을 굳게 지키고 넘겨주지 않는다면 서융西戎이 반드시 전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한번 일어나면 경각간에 변란이 생길 터인데, 변란이 발생했을 때에 어디에 물어서 일을 결단하겠습니까?
더구나 섬서陝西하동河東 양로兩路가 요즘 용병用兵을 만났으므로 민력民力곤궤困匱하여 창이瘡痍가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으니,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한번 들었다 하면 낭고狼顧의 태도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외환外患이 풀리지 않는다면 내변內變이 반드시 서로 인연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시기적으로 버리는 것은 좋고 지키는 것은 불가하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치상으로 부당한 일인가 정당한 일인가를 따져야 한다.”고 왜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서융西戎근세近歲에 와서는 조정朝廷에 대하여 큰 죄를 범한 일이 없고, 비록 양씨梁氏가 그 아들을 폐방廢放하였으나 이적夷狄외신外臣이므로 본래 중국中國에서 신하를 대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선조先朝에서 반드시 해를 입은 백성을 위문하고 죄 있는 사람을 토벌하고자 하되 단지 그 죄인罪人만을 주벌하고 병상秉常은 계속 하주夏主가 되게 하니, 아무리 견양犬羊처럼 미개한 서하西夏라 하더라도 오히려 복종하여 조정의 명령을 들었습니다.
현재는 그들의 토지土地를 점거하고 성지城池를 만들어 영토와 세력을 확장하였으니, 아무리 우리 중국中國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 행위가 를 위한 것인지는 알겠고 그것이 인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부당한 일인가 정당한 일인가의 분변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군사를 논한 자는 정당한 것을 사기가 강성해지는 원인으로 삼고, 부당한 것을 사기가 쇠퇴해지는 원인으로 삼았습니다.
옛날 인조仁祖의 세대에 원호元昊가 배반하고 매년 입구入寇하였는데, 변신邊臣패전敗戰하여 패망敗亡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방四方사민士民들이 자발적으로 먹을 식량을 싸 가지고 출정出征하되 행여 뒤질세라 염려하였으니, 비록 들판에 백골이 버려진다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병사와 평민이 서로 권면하여 변경의 수비가 결국 견고해지니, 중국中國이 서서히 안정되어 여지없이 무너질 조짐이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부당함이 원호元昊에게 있으니 용병用兵를 피할 수 없는 것은 조정朝廷의 부득이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출병出兵하여 서하西夏를 치면서부터 비록 일승일부一勝一負하였으나 그 망실亡失한 것을 계산하면 강정康定보원寶元 연간에 발생한 많은 수효와는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변인邊人분원憤怨하고 천하天下자차咨嗟하니 여지없이 무너질 걱정은 경각간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부당함이 조정朝廷에 있으니, 부득이한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일 침탈한 땅을 굳게 지키고 아끼어 돌려주지 않다가 출병出兵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비방을 들으면서 관우關右자제子弟들로 하여금 간뇌肝腦가 땅을 도배하게 한다면 변인邊人이 이로부터 원망하고 배반할 뜻을 가질까 은 두렵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이치상으로 버리는 것이 옳고 지키는 것이 불가하다.”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계산상으로 소비가 많은 일인가 적은 일인가를 따져야 한다.”고 왜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버리자는 쪽의 건의와 지키자는 쪽의 건의를 조정에서 다 받아들여 시행할 경우, 그 형세상 반드시 다행함도 있고 불행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논하는 것은 지키는 쪽에 있어서는 다행함을 말하고, 버리는 쪽에 있어서는 불행함을 말하여 이해관계의 실질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난주蘭州고수固守하고 보채堡寨증축增築하여 지방병地方兵을 더 모집해 충원하였습니다.
아직 보채堡寨 등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서융西戎불순不順하여 북로北虜에게 도움을 구하고 나란히 나와서 침략을 하니, 둔전屯田방수병防戍兵이 점점 늘어나고 군량을 운수運輸하는 길이 이어지지 못하며, 적병賊兵승세勝勢를 타니 군사가 상실되고 국토가 줄어들며, 난주蘭州를 지키지 않으니 희하熙河위급危急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키는 쪽의 불행한 점입니다.
난주蘭州를 떼어버리고 희하熙河만을 오로지 지키며, 창고에 원래 쌓인 곡물이 있고 병사兵士마필馬匹이 구비되었으면 융인戎人이 은혜를 생각하여 다시 죄과罪過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버리는 쪽의 다행한 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이 모두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이해관계는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판가름이 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난주蘭州고수固守하여 보채堡寨증축增築하고 지방병地方兵을 더 충원하여 한편으로는 둔전屯田을 갈아 농사를 짓고 한편으로는 적과 싸운다면, 서융西戎이 원망을 품어 전쟁할 생각을 잊지 못하고 수시로 나와서 노략질하여 승부가 반반일 것이므로, 농사짓는 사람은 불안에 떨고 양식을 운수하는 일은 계속되지 못하며, 중국을 해치게 되어 백성들이 휴식을 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키는 쪽의 다행한 점입니다.
난주蘭州를 떼어내어 버리고 희하熙河만을 오로지 지킨다면 서융西戎난주蘭州의 견고한 을 의거하고 희하熙河의 평탄한 길을 마음대로 달릴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불리해져서 다시 진봉秦鳳으로 경계를 삼아 폐치된 성루城壘를 수정 보완하고 다시 봉후烽候를 설치하게 된다면 인력人力이 이미 지친데다 비용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버리는 쪽의 불행한 점입니다.
지키는 것이 비록 다행이기는 하지만, 전쟁의 재난이 한번 일어나면 구원仇怨이 풀리지 않고 주둔한 군대에게 군량을 운송하는 일은 쉴 날이 없을 것이니, 희하熙河는 이로 인하여 물가物價가 폭등할 것입니다.
현재 지키기만 하고 전쟁을 하지 않는데도 1년의 비용이 이미 300여만 이거늘, 전쟁이 만일 그치지 않는다면 수병戍兵은 반드시 배로 늘고, 군량軍糧마초馬草의복衣服도 증가될 것이니, 민력民力이 지탱하지 못한다면 여지없이 무너지는 화환禍患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 비록 불행이기는 하지만, 버리는 것은 원래의 지계地界 이외에 쓸 수 없는 입니다.
진봉秦鳳의 사이는 병사兵士평민平民이 친숙하고 가까워서 지키기 쉬우며, 전수轉輸가 이르는 속도는 마치 침석枕席 위에 이르듯 빠를 것이니, 희하熙河난주蘭州에 비하면 어려움과 쉬움의 차이는 10배나 될 것이고, 변경을 지키는 수고는 있어도 복심腹心화환禍患이 없음은 평일平日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지키는 쪽의 다행함을 가지고 버리는 쪽의 불행함과 비교하면 이해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하물며 지키는 것이 꼭 다행한 것만은 아니고, 버리는 것이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닌 것이 아닙니까?
또한 조정朝廷에서 천지 같은 넓은 아량으로 그들의 죄악罪惡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침탈한 강토疆土를 돌려주고, 그들에게 매년 전물錢物을 주어오던 전례를 회복하고, 그들과 통상교역을 한다면 비록 시랑豺狼야심野心이라 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부락의 추장酋長들이 속으로 불순한 마음을 품는다 하더라도 국은國恩심후深厚하므로 그 백성을 격노激怒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 헤아리옵건대 1~2년 사이에는 형세상 반드시 거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하신다면 중국中國의 인사들로 하여금 조정朝廷은 이미 얻은 땅을 버려가면서까지 백성을 위하여 치욕恥辱을 꾹 참고, 서융西戎은 은혜를 배반하니, 저들은 부당하고 우리는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하소서.
사람이 이런 마음을 품으면 용기가 스스로 백 배나 생겨서 공격하면 취하게 되고, 지키면 견고하게 되니, 천지도 오히려 순응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은 원하옵건대 조정朝廷에서 결정하여 그곳을 버리고 그런 다음에 신중하게 명장名將을 골라서 희하熙河를 지키고 속국屬國을 후하게 대우하며, 궁전수弓箭手희하熙河난주蘭州의 왕래하는 요로要路에 많이 배치하여 하나의 큰 을 만들면 2, 3천 명을 주둔시켜 그들의 침입로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봉秦鳳에서부터 번휴병番休兵을 많이 배치하여 희하熙河의 위급함을 구원할 대비를 할 것입니다.
장좌將佐를 분명히 경계하고 방어설비를 수선修繕하며 항상 적이 이를 것처럼 생각하고 먼저 적이 승리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준비해놓고 적이 이르기를 기다리면 거의 후환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서하西夏의 사신이 다시 왔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신중하게 여러 사람들의 의론을 채취하고, 세 가지 일로써 이해관계를 참고 비교하며 반복해서 자세히 고찰하니 이치에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문득 광언狂言을 바치오니, 폐하陛下께서 취택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역주
역주1 論蘭州等地狀 : 〈蘇潁濱年譜〉에 의하면 본 狀文은 元祐 원년(1086) 6월에 쓴 것으로 되어 있으나, 文中에 元祐 2년의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해에 쓴 듯하다.
역주2 先帝 : 여기서는 宋 神宗을 가리킨다.
역주3 先帝……用兵攻討 : 《宋史紀事本末》에 의하면 “元豐 4년(1081)에 夏國主의 모친인 梁氏가 정권을 빼앗고 夏國主 秉常을 유폐시켰다. 宋 神宗은 오랫동안 用兵할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이 기회를 타서 죄를 묻는 군사를 일으켜서 크게 夏國을 쳤다.”고 한다.
역주4 於熙河路……增置安疆米脂等五寨 : 《宋史紀事本末》에 의하면, 神宗朝 熙寧 연간에 用兵한 이후로 전후에 걸쳐 西夏의 땅 蘭州와 葭蘆堡‧吳堡‧義合堡‧米脂堡‧浮圖堡‧塞門堡‧安疆堡 등을 취득하였다. 당시에 陝西路를 秦鳳路‧涇原路‧瓌慶路‧鄜延路로 나누었고, 熙寧 5년(1072)에 또 熙河路를 더 설치하였다. 熙河路는 熙州‧河州‧洮州‧岷州‧蘭州‧通遠軍 등을 포괄하였다. 安疆堡‧米脂堡 등 5寨는 綏德軍에 설치하여 鄜延路에 소속시켰다. 鄜延路는 延州‧鄜州‧丹州‧坊州‧保安軍‧綏德軍을 포괄하였다.
역주5 坐困中國 : 힘을 다해 굳게 지키는 일로 인하여 중국을 고달프게 한다는 말이다.
역주6 羌人 : 여기서는 西夏를 가리킨다.
역주7 羌人得以養勇 窺伺間隙 : 西夏가 군사력을 길러서 빼앗을 기회를 엿본다는 말이다.
역주8 擧而與之 : 蘭州와 5寨를 모두 西夏에게 넘겨줌을 말한다.
역주9 金湯之固 : 金城湯池처럼 견고하다는 말이다.
역주10 西戎 : 여기서는 西夏를 가리킨다.
역주11 咽喉之地 : 군사상의 요충지를 비유한다.
역주12 略置堡障 : 戰守에 이용할 작은 土城을 쌓음을 이른다.
역주13 晝閉之警 : 戰亂의 警報가 있어서 성문을 낮에도 걸어 잠그는 것으로, 곧 변경에 戰亂이 많음을 비유한다.
역주14 借寇兵資盜糧 : 적에게 병력을 빌려주고 강도에게 양식을 보조하는 것으로, 곧 적을 돕는 일을 비유한다.
역주15 夏戎 : 西夏를 가리킨다.
역주16 雖屢有信使……未請侵地 : 西夏가 여러 차례 使臣을 보내왔지만, 入貢을 하거나 登極을 축하하고 冊封을 사례하는 따위의 신하로서 예절을 준수하는 정식 사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정식으로 侵奪한 땅을 돌라달라는 청구서를 제출한 것도 아니었다는 말이다.
역주17 登極 : 皇帝의 卽位를 가리킨다.
역주18 今聞遣使來賀登極……而使者復至 : 蘇轍의 〈潁濱遺老傳〉에 의하면 “元祐 2년에 西夏가 비로소 사신을 보내와 皇帝의 登極을 하례하였고, 귀환하는 사신의 수레가 아직 지경을 나가기도 전에 또 사신을 보내와 地界에 들어왔다.”고 한다.
역주19 前件 : 전에 이미 언급한 두 종류의 의견을 가리킨다.
역주20 富於春秋 : 年少함을 가리킨다. 이 당시 宋 哲宗의 나이가 10세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21 諒闇不言 : 《書經》 〈周書 無逸〉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諒闇은 天子가 居喪하는 집이니, 諒闇不言은 곧 皇帝가 居喪 중에 호령이나 지시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역주22 恭黙思道 : 《書經》 〈商書 說命 上〉에서 인용한 문구인데, 곧 공순하고 침묵하여 治道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역주23 擧天下事 屬之輔相 : 모든 政事를 輔政大臣에게 맡겨서 처리함을 가리킨다.
역주24 安靖 : 조용한 정치로, 곧 無爲而治를 가리킨다.
역주25 擧動 : 변경의 수비상에 있어서의 행동을 가리킨다.
역주26 甲兵 : 갑옷과 병기로, 戰亂의 대명사이다.
역주27 呼吸生變 : 한 번 숨을 내쉬고 한 번 숨을 들이쉬는 경각의 사이에 변고가 발생함을 가리킨다.
역주28 狼顧 : 이리는 겁이 많은 짐승으로, 다닐 때에 항상 좌우를 돌아보아 뜻밖의 습격을 대비하니, 곧 사람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비유한다.
역주29 內變 : 中原의 백성들이 도적으로 변하여 조정을 배반함을 가리킨다.
역주30 西戎近歲 於朝廷本無大罪 : 西夏가 요즘 몇 년 동안은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나 불순한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가리킨 말이다.
역주31 罪人 : 여기서는 梁氏를 가리킨다.
역주32 存立孤弱 : 孤弱은 秉常을 가리키니, 곧 秉常이 계속 夏王이 되게 함을 이른다.
역주33 犬羊 : 문명이 개화되지 못한 민족에 대한 蔑稱. 여기서는 西夏를 가리킨다.
역주34 蓋古之論兵者……以曲爲老 : 《春秋左傳》 僖公 28년 조에서 晉國의 子犯이 “군사란 정당하면 사기가 왕성해지고, 부당하면 피로해진다.[師直爲壯 曲爲老]”라고 하였는데, 곧 양쪽에서 交戰할 때 정의로운 쪽은 사기가 강성하고, 정의롭지 못한 쪽은 사기가 쇠퇴한다는 뜻이다.
역주35 仁祖 : 宋 仁宗 趙禎을 가리킨다.
역주36 連年入寇 : 景祐 원년(1034)부터 慶曆 4년(1044)까지 元昊가 아홉 차례 변경을 침범하였다.
역주37 失律 : 行軍에 紀律이 없음을 말한다. 후세에 와서는 흔히 敗戰을 가리킨다.
역주38 昔仁祖之世……敗亡相繼 : 宋 仁宗의 세대에 趙元昊가 王이 되어 전후로 慶州‧保安軍‧延州‧三川砦‧渭州 등을 침략하였는데, 邊臣이 패전하여 계속 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이다.
역주39 西討 : 西夏의 征討를 가리킨다.
역주40 頃自出師西討 雖一勝一負 : 《宋史》 〈外國 夏國〉에 의하면, 元豐 8년(1085) 哲宗이 갓 즉위했을 때에는 呂惠卿이 군사를 파견, 西界에 들어가서 6砦를 파괴하고 적군 600여 級을 斬首하였으며, 元祐 2년(1087)에는 夏人이 鎭戎軍 등 여러 堡를 공격하였다.
역주41 康定寶元 : 康定은 宋 仁宗이 제5차 개원한 연호(1040)이고, 寶元은 宋 仁宗이 제4차 개원한 연호(1038~1039)이다.
역주42 而計其所亡失 未若康定寶元之多也 : 두 차례 전투에서 군사를 상실하고 땅을 빼앗긴 수효가 仁宗의 康定‧寶元 연간에 발생한 많은 수효만은 못했다는 말이다.
역주43 侵地 : 侵奪한 땅으로, 여기서는 蘭州‧安疆 등지를 가리킨다.
역주44 負不直之謗 : 出兵이 정당하지 못했다는 비방을 듣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45 關右 : 關西를 가리킨다. 函谷關 또는 潼關 이서의 지구를 범연하게 가리킨다.
역주46 : 形勢나 大勢를 가리킨다.
역주47 : 證驗 또는 證明을 가리킨다.
역주48 棄守之議……以效利害之實 : 버리자는 건의와 지키자는 건의를 조정에서 다 받아들여 시행할 경우, 버리는 쪽에도 다행함과 불행함이 있고, 지키는 쪽에도 다행함과 불행함이 있다. 다만 소철이 말하는 것은 지키는 쪽에 있어서 조심스럽게 다행함을 말하고, 버리는 쪽에 있어서 조심스럽게 불행함을 말하여 이해관계의 실질을 증명한다는 뜻이다.
역주49 堡寨 : 土墻이나 木柵으로 둘러쳐서 만든 戰守의 거점을 가리킨다.
역주50 招置土兵 : 地方兵을 招募하여 증가시킨다는 뜻이다.
역주51 北虜 : 契丹을 가리킨다.
역주52 竝出爲寇 : 西夏와 契丹이 협력하여 변경을 침범함을 이른다.
역주53 屯戍日益 : 屯田과 변경에 수자리하는 將兵이 점점 증가됨을 이른다.
역주54 飛輓不繼 : 飛輓은 運輸하는 수레를 가리키니, 飛輓不繼는 곧 군량을 조달하는 길이 계속되지 않음을 말한다.
역주55 倉庾有素 : 창고에 원래 쌓인 곡물이 있다는 말이다.
역주56 虜略 : 虜掠과 같다.
역주57 烽候 : 烽堠로, 곧 적군을 엿보기 위하여 설치한 烽臺를 말한다.
역주58 兵難一交 : 전쟁의 재난이 한판 일어남을 가리킨다.
역주59 本界 : 원래의 地界이다.
역주60 轉輸所至 如枕席之上 : 運輸하는 일이 몹시 빠름을 비유한다.
역주61 腹心之患 : 배와 심장은 신체의 중요한 부분이므로 이를 빌어 막중한 禍患을 비유한다.
역주62 歲賜 : 여기서는 宋朝에서 매년 西夏에게 輸納하는 錢物을 가리킨다.
역주63 和市 : 여기서는 西夏와의 通商交易을 가리킨다.
역주64 酋豪 : 여기서는 部落의 酋長을 가리킨다.
역주65 含垢爲民 : 백성을 위하여 恥辱을 참음을 이른다.
역주66 : 저본에는 ‘自’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百’으로 바꾸었다.
역주67 天地且猶順之 :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응하는 것이니, 사람이 하늘의 이치에 順應하면 하늘이 장차 사람의 뜻에 순응한다는 말이다.
역주68 厚養屬國 : 臣屬한 藩國을 후한 예우로 대함을 이른다.
역주69 番休之兵 : 돌아가면서 번을 들며 휴식하는 군사로, 곧 戌更하는 兵士를 가리킨다.
역주70 不可勝 : 잘 준비해서 적이 승리할 수 없게 함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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