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以조맹덕曹孟德形容사마중달司馬仲達하고 後以곽광霍光제갈공명孔明爲案하니라
世之說者曰
사마중달司馬仲達之於
위魏는 則
라하니 是不然
이니라
雖使終身奉
헌제獻帝하고 率天下而朝之
라도 天下不歸
한漢而歸
위魏者 十室而九矣
니 조공曹公誠能安而俟之
하여 使天命自至
면 라도 리오
사마중달仲達因其隙而乘之
하여 而奪其成業
하니 事與
조공曹公異矣
니라
소제昭帝尙幼하니 연왕燕王개장공주蓋개장공주主有簒取之心하고 상관걸上官桀상홍양桑弘羊助之하니 此其禍急於조상曹爽이니라
곽광霍光內斃연왕燕개장공주蓋하고 外誅상관걸桀상홍양羊하여 擁護소제昭帝언만 訖無驕君之色이니라
及소제昭帝早喪에 國空無主하니 迎立창읍왕昌邑이언만 창읍왕昌邑不令이어늘 又援立선제宣帝하니라
柄在其手者屢矣나 然이나 退就臣位를 不以自疑하니 中外悉其本心하여 亦無一人有異議者니라
촉蜀先후주主將亡에 召제갈공명諸葛孔明而告之曰 사자嗣子可輔면 輔之요 如其不才면 君可自取하라하고 復語후주後主하되 汝與승상丞相從事하여 事之如父하라하니라
후주後主之暗弱과 공명孔明之賢智를 촉蜀人知之矣니라
然
이나 外
이평平徼外蠻夷
하고 하고 旁禦
위魏오吳하여 功成業定
하고 又付之
하니 奉一昏主三十餘年
하되 而無纖芥之隙
이니라
故로 人患不誠이니 苟誠忠孝인댄 순舜之於父母와 이윤伊尹之於태갑太甲에 終無間然者니라
自사마중달仲達之後로 人臣受六尺之寄하고 因而取之者多矣니라
皆以地勢迫切하니 置而不取면 則身必危하고 國必亂이라하여 至自比騎虎不可復下하니 此亦自欺而已哉인저
兩동한漢之衰는 왕망王莽啓其端하고 동탁董卓幸其禍하고 조조曹操踵其謀하고 而사마중달司馬以後로 遂至於世히 相擅以狐媚託孤定亂之間하고 至당唐태종太宗而始絶이니라
蓋문왕文王之戴은殷也에 終其身未嘗有一毛利天下之心하대 而조조操特擁한漢以劫天下之諸侯耳니
雖순문약荀文若之死라도 君子謂其以身순문약文奸也라하니라
앞에서는 조맹덕曹孟德(曹操)으로 사마중달司馬仲達(司馬懿)을 형용하고, 뒤에서는 곽광霍光과 제갈공명諸葛孔明으로 사안事案을 하였다.
세상에서 시사를 평론하는 자가 말하기를 “위魏나라에서의 사마중달司馬仲達은 곧 한漢나라에서의 조맹덕曹孟德과 같다.”라고 하니, 이 평론은 옳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은 지혜智慧‧용맹勇猛‧권술權術‧모략謀略은 같지만 처해진 지위는 달랐다.
한漢나라는 동탁董卓 이후로 안에서는 무너지고 밖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헌제獻帝는 분주히 곤경을 당하기에 겨를이 없었으니, 제왕帝王의 세력은 다하고 제왕帝王이란 이름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조공曹公(曹操)은 그 명호名號를 빌어서 천하天下를 신복臣服시키고 헌제獻帝를 감싸 허창許昌으로 옮기어 도읍을 세웠으니, 반역叛逆을 정벌한 것은 모두 조공曹公이 한 일이었다.
가사 종신토록 헌제獻帝를 시봉侍奉하며 천하天下를 거느리고 조신朝臣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천하天下에서 한漢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위魏나라로 돌아온 자가 10실室에 9실室이었으니, 조공曹公이 참으로 안심하고 기다려 천명天命이 스스로 이르게 하였더라면, 비록 문왕文王이 천하의 3분의 2를 가졌으면서도 주紂를 섬긴 일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였겠는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도의道義를 행하지 못하여 헌제獻帝는 위에서 불안에 떨게 하고 의사義士는 아래에서 분원憤怨하게 하였다.
순문약荀文若(荀彧)도 오히려 제 명에 죽지 못하였으니, 이는 조공曹公의 과실인 것이다.
명제明帝의 말년에 조씨曹氏의 기업基業이 이미 견고해졌다.
비록 명제明帝가 음학淫虐으로 민심을 잃고 조상曹爽이 교만 방종으로 죄를 얻었다 하더라도 망국亡國의 조짐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천하天下가 위魏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다.
사마중달司馬仲達은 그 틈을 타서 등을 살살 도닥여 그들이 이루어놓은 공업功業을 빼앗았으니, 일이 조공曹公과 사뭇 달랐던 것이다.
한漢 무제武帝가 늙음에 소제昭帝를 곽광霍光에게 부탁하였다.
소제昭帝가 아직 어리니, 연왕燕王 단旦과 개장공주蓋長公主는 찬취簒取할 마음을 가졌고 상관걸上官桀과 상홍양桑弘羊은 그 일을 도왔으니, 이것은 그 화禍가 조상曹爽보다 급한 것이었다.
곽광霍光은 안으로는 연왕燕王 단旦과 개장공주蓋長公主를 살해하고 밖으로는 상관걸上官桀과 상홍양桑弘羊을 주살하여 소제昭帝를 옹호하였지만, 임금에게 교만을 부리는 기색은 끝내 없었다.
소제昭帝가 일찍 죽음에 미쳐 나라가 비어 주군主君이 없자, 창읍왕昌邑王을 맞아 세웠건만 창읍왕昌邑王이 착하지 못하거늘 또 선제宣帝를 감싸 세웠다.
권병權柄이 그의 손에 있는 지 여러 번이었으나 신하의 자리로 물러감으로써 사람들이 자기를 의심하지 않게 하였으니, 온 나라 사람이 그의 본심을 알았으므로 또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사마중달司馬仲達을 곽광霍光에 견주면 누가 낫겠는가?
촉蜀나라의 선주先主(劉備)가 임종시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을 불러서 당부하기를 “사자嗣子(劉禪)가 보필할 만하면 보필하고 만일 재주가 없으면 그대가 스스로 〈나라를〉 취해도 좋소.”라고 하고, 다시 후주後主에게 말하되 “너는 승상丞相과 함께 종사從事하여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라.”고 하였다.
후주後主의 암약暗弱과 공명孔明의 현지賢智는 촉蜀나라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이다.
가사 공명孔明이 찬위簒位할 마음을 가졌다면 손 한 번 움직여서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밖으로는 변경의 만이蠻夷를 평정하고, 안으로는 이평李平과 요립廖立을 폐하고, 곁으로는 위魏나라와 오吳나라를 막아 공功을 이루고 업業을 정하였으며, 또 장완蔣琬와 비위費褘에게 부탁하였으니, 한 혼암昏暗한 주군主君을 30여 년 동안 받들되 미세한 혐극嫌隙도 없었다.
이 또한 곽광霍光이 능히 바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심誠心이 없는 게 걱정이니, 진실로 충忠과 효孝를 할진대, 순舜이 그 부모에게, 이윤伊尹이 그 태갑太甲에게 끝내 흠잡을 데가 없이 〈충忠과 효孝를 한〉 것처럼 해야 한다.
사마중달司馬仲達 이후로 남의 신하가 된 자들은 어린 임금의 보필을 부탁받고는 그 기회를 인하여 국병國柄을 찬취簒取한 자가 많다.
모두들 처지가 위험하니 놓아두고 취하지 않으면 몸은 반드시 위험하고 나라는 반드시 어지럽기 때문이라 핑계하여, 심지어 범을 타고 다시 내릴 수 없는 일에 비유하기까지 하니, 이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일 뿐이다.
양한兩漢(西漢과 동한東漢)의 쇠락衰落은 왕망王莽이 그 단서端緖를 열었고, 동탁董卓이 그 화禍를 요행으로 여겼고, 조조曹操가 그 모략謀略을 답습하였고, 사마중달司馬仲達 이후 먼 세대에 이르기까지 어린 임금의 보필을 부탁받고 난亂을 평정하는 사이에서 서로들 멋대로 유미책柔媚策을 써서 사람을 유혹하였는데, 그 풍조가 당唐 태종太宗에 이르러서 비로소 끊어졌다.
나는 생각하건대 ‘위의부종爲義不終(처음부터 끝까지 도의道義를 행하지 못함)’이란 네 글자는 조조曹操를 평론하는 데 쓸 문구가 아니다.
대개 문왕文王은 은殷나라를 받듦에 있어서 종신토록 터럭만큼도 천하를 탐할 마음을 가지지 않았는데, 조조曹操는 다만 한漢나라를 끼고 천하天下의 제후諸侯들을 위협한 것일 뿐이다.
비록 순문약荀文若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군자君子는 그 몸으로 간악奸惡함을 문식한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