此篇은 正言秦之所以取天下는 當以此요 不以彼니 兩篇合一篇이니라
三代聖人
이 以道御天下
하되 하며 逡巡廟堂之上
이언만 而諸侯承德
하고 四夷向風
하니 何其盛哉
아
旣已畢矣
나 然
이나 하고 繼之以
하여 天下遂爲戰國
이니라
之間
에 非詐不言
하고 非力不用
하며 相與爲盗跖之行
하되 猶恐不勝
이니라
夫蒹葭之方盛也 蒼蒼하니 其强勁而不適於用하고 至於白露凝戾爲霜然後에 堅成可施於人이니라
當
에 諸侯大者
는 連地數千里
하고 數十萬
이니 雖使
晉文假仁義挾天子以令之
라도 其勢將不能行
이니라
惟得至誠之君子
가 自修而不爭
을 如
이라야 庻幾可以服之
니라
以爲詐謀奇計之所不能下
하고 長㦸勁弩之所不能克
이어늘 區區之仁義
가 何足以
리오
魏文侯는 行仁義하고 禮下賢者하며 用卜子夏田子方段干木하니 而秦人不敢加兵이니라
君王后는 用齊四十餘年에 事秦謹하고 與諸侯信하니 而齊亦未嘗受兵이온
而況於力行仁義
하고 하여 終身不懈而有不能勝者哉
아
夫衣冠佩玉
은 可以化强暴
요 은 可以却猛獸
요 은 可以
이니라
誠因秦之地
하여 用秦之民
하고 하고 修德以來天下
면 리니 而
이리오
이 편篇에서는 진秦이 천하天下를 취하는 방법은 응당 이와 같이 해야 되고 저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으니, 두 편篇을 한 편篇으로 합해야 한다.
삼대三代(하夏‧상商‧주周)의 성인聖人(聖君)은 도道(仁政)로써 천하天下를 통치하되 몸을 움직이고 말소리를 내며 묘당廟堂을 맴돌았지만, 제후諸侯들은 천자天子의 덕德을 받들고 사방 오랑캐들은 중화中華의 풍속을 흠모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흥성興盛했을까?
그 후세後世에 와서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미衰微해지니,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이 번갈아 일어나 주周나라 왕실王室을 옹호해 유지維持시키면서 제후諸侯들을 맞이하여 회맹會盟하고 제후諸侯들을 정벌征伐로써 지배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군聖君의 시대는 이미 끝났으나 춘추春秋시대 이후에 오왕吳王 합려闔閭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방자하게 굴고, 이어서 전상田常의 난亂과 삼진三晉의 난亂이 일어나서 천하天下가 드디어 전국戰國시대가 되었다.
군신君臣의 사이에 사위詐僞가 아니면 말을 못하고 힘이 아니면 쓰지를 못하며, 서로 더불어 도척盗跖의 행동을 하되 오히려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이 시대는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일도 시험할 수 없었거늘, 하물며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옛 인정仁政이야 엄두나 낼 수 있었겠는가?
진秦나라는 서쪽 변두리 지역에서 일어나 융적戎狄과 섞여 살았지만, 본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정책을 최상으로 삼았다.
그 선대先代인 양공襄公이 가장 어질었으니, 시인詩人이 그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 또한 이와 같았을 뿐이다.
시詩에 이르기를 “갈대가 푸르고 푸르니, 흰 이슬이 서리가 되었도다.
이른바 저분이 저 물가의 한쪽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갈대는 바야흐로 성할 때에 새파랗게 우거지는데, 그때는 강경强勁해서 쓰기에 적합하지 않고, 흰 이슬이 맺혀 서리가 된 뒤에야 성숙해져서 사람에게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양공襄公은 자력으로 농업과 군사를 발전시켰으나 예의禮義로 성취할 줄을 몰랐으니, 어찌 새파랗게 무성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군자君子는 그가 성취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 후세後世가 이익을 챙기는 데 집착하여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상군商君에 와서 법률法律로써 국가를 정돈하니, 풍속風俗이 날로 사나워지고 비사鄙詐와 맹포猛暴가 육국六國보다 심하여 최후에는 이것으로써 천하天下를 정복하였다.
그래서 진秦나라 군신君臣은 이것이 아니면 인민을 복종시킬 수 없다고 여겼다.
이때에 제후諸侯 중에 큰 나라는 연이어진 땅이 수천 리나 되고 군대가 수십만이나 되었으니, 비록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이 인의仁義와 천자天子(周室)의 명의를 빌어 제후諸侯들에게 명령한다 하더라도 그 사세상 장차 시행될 수가 없었다.
오직 지극히 진실하고 인의仁義의 마음을 가진 군자君子가 스스로 덕德을 닦고 진秦나라와 전쟁하지 않기를 마치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선군先君처럼 했어야만 거의 제후諸侯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맹자孟子가 제齊와 양梁에 가서 인의仁義로써 그 임금들을 설득하였지만, 제齊‧양梁의 임금은 오활하다 하고 모두 믿지 않았다.
그것은 사모詐謀와 기계奇計도 그들의 콧대를 낮출 수 없고, 장극長㦸과 경노勁弩도 그들을 이길 수 없거늘, 하찮은 인의仁義가 어떻게 족히 천자天子가 되려는 목적에 도달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魏 문후文侯(魏斯)는 당시當時의 약국弱國이었고, 군왕후君王后는 제齊나라의 일개 부인婦人이었다.
위魏 문후文侯는 인의仁義를 행하고 예禮를 갖추어 현자賢者에게 몸을 낮추고, 복자하卜子夏‧전자방田子方‧단간목段干木 같은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니, 진秦나라 사람이 감히 침략하지 못하였다.
군왕후君王后가 제齊나라에 쓰인 40여 년 동안 진秦나라를 근실謹實히 섬기고 제후諸侯들과 신의를 유지하니, 제齊나라 또한 제후諸侯들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하물며 힘써 인의仁義의 정치를 행하고 마음속에 항상 백성들에 대해 측은한 생각을 가지고 종신토록 태만하지 않아서,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자야말로 더할 나위가 있겠는가.
무릇 의관衣冠과 패옥佩玉으로 예모禮貌를 갖추는 것은 강폭强暴함을 화해和解시킬 수 있고, 깊은 곳에 처하여 외출을 적게 하는 것은 맹수猛獸를 물리칠 수 있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은 귀신鬼神이 돕게 할 수 있다.
《맹자孟子》에서 “〈공자가 말씀하기를〉 인자仁者 앞에서는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무력해져서〉 많은 무리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진실로 진秦의 땅을 가지고 진秦의 백성을 쓰고, 군사를 한 곳에 주둔시켜 스스로 지키고 덕德을 닦아 천하의 백성들을 불러온다면 백성들이 장차 어린 자식을 포대기로 싸서 업고 몰려올 터인데, 누가 진秦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밝은 지혜가 족히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힘을 다해 적敵을 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적敵을 쳐서 승리한 뒤에 불과 이세二世 만에 망亡하였으니, 그 나라를 다스리는 책략策略에 취할 만한 교훈이 들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