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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1)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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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秦論 二
此篇 正言秦之所以取天下 當以此 不以彼 兩篇合一篇이니라
三代聖人 以道御天下하되 하며 逡巡廟堂之上이언만 而諸侯承德하고 四夷向風하니 何其盛哉
至其後世稍衰하니 桓文迭興而維持之하여 하니라
旣已畢矣이나 하고 繼之以하여 天下遂爲戰國이니라
之間 非詐不言하고 非力不用하며 相與爲盗跖之行하되 猶恐不勝이니라
雖桓文之事 且不試矣 而況於文武成康之舊歟
秦起於西陲하여 與戎狄雜居 이니라
其先襄公最賢하니 稱之니라
이나 其所以爲國者 亦猶是耳니라
詩曰 蒹葭蒼蒼하니 白露爲霜이로다
所謂伊人 在水一方이로다하니라
夫蒹葭之方盛也 蒼蒼하니 其强勁而不適於用하고 至於白露凝戾爲霜然後 堅成可施於人이니라
今夫襄公이나 豈不蒼然盛哉
然而君子以爲未成이니라
其後世狃於爲利而不知義니라
秦之君臣 以爲非是 無足以服人矣니라
諸侯大者 連地數千里하고 數十萬이니 雖使晉文假仁義挾天子以令之라도 其勢將不能行이니라
惟得至誠之君子 自修而不爭이라야 庻幾可以服之니라
孟子遊於齊梁 以此干其君하니 皆不能信이니라
以爲詐謀奇計之所不能下하고 長㦸勁弩之所不能克이어늘 區區之仁義 何足以리오
이나 當時之弱國也 齊之一婦人也니라
魏文侯 行仁義하고 禮下賢者하며 用卜子夏田子方段干木하니 而秦人不敢加兵이니라
君王后 用齊四十餘年 事秦謹하고 與諸侯信하니 而齊亦未嘗受兵이온
而況於力行仁義하고 하여 終身不懈而有不能勝者哉
夫衣冠佩玉 可以化强暴 可以却猛獸 可以이니라
誠因秦之地하여 用秦之民하고 하고 修德以來天下 리니이리오
惜乎其明不足以知之하고 竭力以勝敵이니라
敵勝之後 二世而亡하니


06. 에 대한 2
에서는 천하天下를 취하는 방법은 응당 이와 같이 해야 되고 저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으니, 두 을 한 으로 합해야 한다.
삼대三代()의 성인聖人(聖君)은 (仁政)로써 천하天下를 통치하되 몸을 움직이고 말소리를 내며 묘당廟堂을 맴돌았지만, 제후諸侯들은 천자天子을 받들고 사방 오랑캐들은 중화中華의 풍속을 흠모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흥성興盛했을까?
후세後世에 와서 나라 왕실王室이 점점 쇠미衰微해지니, 환공桓公 문공文公이 번갈아 일어나 나라 왕실王室을 옹호해 유지維持시키면서 제후諸侯들을 맞이하여 회맹會盟하고 제후諸侯들을 정벌征伐로써 지배하였다.
이렇게 해서 성군聖君의 시대는 이미 끝났으나 춘추春秋시대 이후에 오왕吳王 합려闔閭월왕越王 구천句踐이 방자하게 굴고, 이어서 전상田常삼진三晉이 일어나서 천하天下가 드디어 전국戰國시대가 되었다.
군신君臣의 사이에 사위詐僞가 아니면 말을 못하고 힘이 아니면 쓰지를 못하며, 서로 더불어 도척盗跖의 행동을 하되 오히려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이 시대는 환공桓公 문공文公의 일도 시험할 수 없었거늘, 하물며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옛 인정仁政이야 엄두나 낼 수 있었겠는가?
나라는 서쪽 변두리 지역에서 일어나 융적戎狄과 섞여 살았지만, 본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정책을 최상으로 삼았다.
선대先代양공襄公이 가장 어질었으니, 시인詩人이 그를 칭찬하였다.
그러나 그가 나라를 다스리는 방식 또한 이와 같았을 뿐이다.
에 이르기를 “갈대가 푸르고 푸르니, 흰 이슬이 서리가 되었도다.
이른바 저분이 저 물가의 한쪽에 있도다.”라고 하였다.
갈대는 바야흐로 성할 때에 새파랗게 우거지는데, 그때는 강경强勁해서 쓰기에 적합하지 않고, 흰 이슬이 맺혀 서리가 된 뒤에야 성숙해져서 사람에게 쓰일 수 있는 것이다.
양공襄公은 자력으로 농업과 군사를 발전시켰으나 예의禮義로 성취할 줄을 몰랐으니, 어찌 새파랗게 무성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군자君子는 그가 성취하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 후세後世가 이익을 챙기는 데 집착하여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상군商君에 와서 법률法律로써 국가를 정돈하니, 풍속風俗이 날로 사나워지고 비사鄙詐맹포猛暴육국六國보다 심하여 최후에는 이것으로써 천하天下를 정복하였다.
그래서 나라 군신君臣은 이것이 아니면 인민을 복종시킬 수 없다고 여겼다.
이때에 제후諸侯 중에 큰 나라는 연이어진 땅이 수천 리나 되고 군대가 수십만이나 되었으니, 비록 환공桓公 문공文公인의仁義천자天子(周室)의 명의를 빌어 제후諸侯들에게 명령한다 하더라도 그 사세상 장차 시행될 수가 없었다.
오직 지극히 진실하고 인의仁義의 마음을 가진 군자君子가 스스로 을 닦고 나라와 전쟁하지 않기를 마치 나라와 나라의 선군先君처럼 했어야만 거의 제후諸侯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맹자孟子에 가서 인의仁義로써 그 임금들을 설득하였지만, 의 임금은 오활하다 하고 모두 믿지 않았다.
그것은 사모詐謀기계奇計도 그들의 콧대를 낮출 수 없고, 장극長㦸경노勁弩도 그들을 이길 수 없거늘, 하찮은 인의仁義가 어떻게 족히 천자天子가 되려는 목적에 도달시킬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후文侯(魏斯)는 당시當時약국弱國이었고, 군왕후君王后나라의 일개 부인婦人이었다.
문후文侯인의仁義를 행하고 를 갖추어 현자賢者에게 몸을 낮추고, 복자하卜子夏전자방田子方단간목段干木 같은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니, 나라 사람이 감히 침략하지 못하였다.
군왕후君王后나라에 쓰인 40여 년 동안 나라를 근실謹實히 섬기고 제후諸侯들과 신의를 유지하니, 나라 또한 제후諸侯들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하물며 힘써 인의仁義의 정치를 행하고 마음속에 항상 백성들에 대해 측은한 생각을 가지고 종신토록 태만하지 않아서,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자야말로 더할 나위가 있겠는가.
무릇 의관衣冠패옥佩玉으로 예모禮貌를 갖추는 것은 강폭强暴함을 화해和解시킬 수 있고, 깊은 곳에 처하여 외출을 적게 하는 것은 맹수猛獸를 물리칠 수 있고,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은 귀신鬼神이 돕게 할 수 있다.
맹자孟子》에서 “〈공자가 말씀하기를〉 인자仁者 앞에서는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무력해져서〉 많은 무리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진실로 의 땅을 가지고 의 백성을 쓰고, 군사를 한 곳에 주둔시켜 스스로 지키고 을 닦아 천하의 백성들을 불러온다면 백성들이 장차 어린 자식을 포대기로 싸서 업고 몰려올 터인데, 누가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애석하게도 밝은 지혜가 족히 이런 것을 알지 못하고 힘을 다해 을 쳐서 승리하였다.
그러나 을 쳐서 승리한 뒤에 불과 이세二世 만에 하였으니, 그 나라를 다스리는 책략策略에 취할 만한 교훈이 들어 있는 것이다.


역주
역주1 動容貌 出辭氣 : 《論語》 〈泰伯〉에 “군자가 소중히 여겨야 할 도리가 셋이 있으니, 몸을 움직일 때에는 거칠고 태만한 태도를 멀리하며, 얼굴빛을 바르게 할 때에는 성실함에 가깝게 하며, 말소리를 낼 때에는 비루하고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멀리해야 한다.[君子所貴乎道者三 動容貌 斯遠暴慢矣 正顔色 斯近信矣 出辭氣 斯遠鄙倍矣]”는 말이 보인다.
역주2 要之以盟會 齊之以征伐 : 춘추시대에 齊 桓公이나 晉 文公과 같은 霸主가 諸侯들을 맞이하여 會盟하고, 아울러 諸侯들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른 나라를 征討하였으니, 이를테면 齊 桓公이 諸侯들을 맞이하여 葵丘에서 會盟하고 諸侯들의 군사를 가지고 蔡나라와 楚나라를 친 것이 그 例이다.
역주3 春秋之後 吳越放恣 : 춘추시대에 吳王 闔閭와 越王 句踐이 각각 五霸(齊 桓公‧晉 文公‧楚 莊王‧吳 闔閭‧越 句踐)의 하나가 되어 방자하게 굴었다. 춘추시대는 周 平王이 東遷한 뒤로부터 韓‧趙‧魏 3家가 晉나라를 나누어 가질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역주4 田常三晉之亂 : 田常의 亂은 田常이 齊 簡公을 弑害하고 스스로 즉위한 일을 가리키고, 三晉의 亂은 춘추시대의 말엽 周 威烈王 23년에 晉의 三卿인 魏斯‧趙籍‧韓虔이 晉나라를 나누어 가진 일을 가리킨다.
역주5 君臣 : 여기서는 周 王室과 諸侯를 가리킨다.
역주6 本以强兵富國爲上 : 본래는 兵力을 강하게 하고 국가를 부유하게 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말이다.
역주7 詩人 : 여기서는 《詩經》 〈秦風 蒹葭〉의 작자를 가리킨다. 〈蒹葭〉는 毛序에 의하면 “秦 襄公을 풍자한 詩인데, 周나라 禮法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나라를 견고하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역주8 耕戰自力 : 자기의 역량에 의하여 농업과 군사를 발전시킴을 가리킨다.
역주9 不知以禮義終成之 : 국력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禮義를 시행할 줄은 몰랐다는 말이다.
역주10 至於商君 厲之以法 : 商君 곧 商鞅에 이르러 法律로써 國家를 정돈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11 風俗日惡……甚於六國 : 《史記》 〈商君列傳〉에 의하면, 商鞅의 法을 따라 富國强兵의 정책을 펼친 결과 秦나라가 크게 다스려져서 길에서는 남의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고, 산에는 도적이 없을 정도로 당시 백성들이 평온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司馬遷은 앞에서 이미 ‘天資가 刻薄한 사람’으로 商鞅을 卑下하였고, 蘇轍은 뒤에서 다시 ‘그는 正道가 아닌 霸道로 孝公을 설득하였고, 겨우 强國의 술책으로 孝公을 설득하여 秦나라의 習慣과 風氣가 날로 점점 敗壞하게 만들고, 軍功을 숭상하여 貪鄙‧詐僞‧凶殘‧暴戾한 風氣를 형성하게 했다.’고 商鞅을 질타하였다.
역주12 是時 : 전국시대를 가리킨다.
역주13 帶甲 : 갑옷을 입은 將士로, 곧 군대를 가리킨다.
역주14 齊桓 : 《朱子全書》, 《西山讀書記》 등에서 齊 桓公을 齊 威公으로 적고 있는데, 이는 宋 欽宗의 이름인 桓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원문의 威도 송대 학자가 바꾸었는데 《欒城集》에 의해 桓으로 환원하였다. 이하에서도 桓이 威로 바뀐 것은 모두 환원하였다.
역주15 商周之先君 : 商나라 成湯이 德을 닦으니 諸侯들이 모두 歸附하였고, 周나라 文王은 天下의 3분의 2를 소유하였으나 그대로 殷紂의 諸侯 노릇을 하였다.
역주16 致此 : 諸侯들을 정복하고 天子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목적에 도달함을 가리킨다.
역주17 魏文侯 : 전국시대에 魏나라를 세운 魏斯를 가리킨다. 그는 賢能한 인재들을 임용해서 弱國인 魏나라를 强國으로 만들었다.
역주18 君王后 : 齊 襄王의 后妃이다. 齊나라 太史 敫의 딸인 그녀는 襄王이 죽고 아들 建이 齊王이 되었을 때에 秦나라를 謹實히 섬기고 諸侯들과 신의를 유지하였다. 그 때문에 建이 齊王으로 있는 40여 년 동안은 諸侯들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史記》 〈田敬仲世家〉에 “湣王의 아들 法章이 變姓名하고 莒 太史 敫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는데, 敫의 딸이 法章의 용모가 비상한 것을 보고 항상 의복과 음식을 몰래 공급하고 그와 私通하였다. 莒 사람들이 함께 法章을 왕으로 세웠으니 이가 바로 襄王이고, 太史氏의 딸을 王后로 삼았으니, 이가 바로 君王后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9 中心慘怛 :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을 항상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짐을 가리킨다.
역주20 深居簡出 : 은밀한 곳에 처하여 외출을 적게 함을 가리킨다.
역주21 虚心寡欲 : 淸心寡慾과 같은 말로, 곧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역주22 懷鬼神 : 귀신으로 하여금 돕게 함을 가리킨다.
역주23 孟子曰 仁不可以爲衆 : 《孟子》 〈離婁 上〉에 “孔子께서 말씀하기를 ‘仁者 앞에서는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무력해져서〉 많은 무리가 될 수 없다.’고 했다.”란 말이 보이는데, 맹자는 이와 같은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임금이 仁德을 좋아하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을 뒷받침하였다.
역주24 按兵自守 : 군사를 한곳에 머물러두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곧 關門을 닫고 스스로 지키고 諸侯들에게 武力을 쓰지 않음을 가리킨다.
역주25 彼將襁負其子而至 : 《論語》 〈子路〉에 樊遲가 농사짓는 방법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께서 말씀하기를 “소견 좁은 細民이로구나, 樊須(樊遲)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예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의리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복종하지 않을 수 없으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신의를 좋아하면 백성들이 감히 성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렇게 된다면 사방에 있는 백성들이 어린 자식을 포대기에 싸서 업고 몰려올 터인데, 어찌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을 필요가 있겠는가?[小人哉 樊須也 上好禮則民莫敢不敬 上好義則民莫敢不服 上好信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則四方之民 襁負其子而至矣 焉用稼]”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여기서는 천하의 민심이 돌아옴을 형용한 것이다.
역주26 誰與共亡 : “가령 秦나라가 仁政을 베풀었다면 누가 秦나라를 멸망시키겠는가?”란 말이다.
역주27 其數有以取之矣 : 治國하는 策略에 취할 만한 교훈이 있음을 가리킨다.
역주28 夫衣冠佩玉은………니라 : 康熙의 《御選古文淵鑑》에서 “앞에서는 雄駿을 논하고 여기서는 平正을 논하였으니, 앞의 논설은 權謀에 가깝고 여기의 논설은 王道에 가깝다.[前論雄駿 此論平正 前論猶近于權謀 此則庶幾王道矣]”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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