予讀詩書
에 歷觀唐虞
하고 至於夏商
하여 以爲自生民以來
로 天下未嘗一日而不
也
니라
父子君臣之間과 兄弟夫婦之際에 此文之所由起也니라
昔者生民之初엔 父子無義하고 君臣無禮하며 兄弟不相愛하고 夫婦不相保하니 天下紛然而淆亂하고 忿鬪而相苦하니라
文理不著而人倫不明하여 生不相養而死不相葬하니 天下之人이 舉皆戚然하여 不寧於中이니라
然後에 反而求其所安하여 屬其父子而列其君臣하고 聯其兄弟而正其夫婦하니라
蓋其當時
엔 莫不自謂
나 而後之人
은 乃更以爲質也
니라
是故로 祭祀之禮엔 陳其籩豆하고 列其鼎俎하고 備其醪醴하여 俯伏以薦하고 思其飲食醉飽之樂而不可見也라
體魄降於地
하고 魂氣升於天
하여 恍惚誕謾而不知其所由處
하니 니라
於是
에 於
하고 於
하여 以爲人子之心
이 無所不至也
니라
薦之以滋味
하고 重之以膾炙
하되 恐鬼神之不屑也
하고 薦之以
하고 重之以
하되 恐父祖之不吾安也
니라
於是
에 先黍稷而
稻粱
하고 先
而
하여 以爲不敢忘禮
하고 亦不敢忘愛也
니라
丁寧反復하고 優游而不忍去하여 以爲可以盡人子之心하고 而人子之心도 亦可以少安矣니라
仲尼區區於衰周之末
하여 收先王之遺文
하고 而與曾子推論禮之所難處
하여 至於毫釐纎悉
하되 니라
及周之亡하여는 天下大壞하여 强凌弱하고 衆暴寡하니 而後世乃以爲用文之弊니라
夫自唐虞以至於商은 漸而入於文하고 至周而文極於天下니라
當唐虞夏商之世
엔 蓋將求周之文
이나 而其
하니 非有所謂質與忠也
니라
自周而下는 天下習於文이라 非文則無以安天下之所不足이니 此其勢然也니라
今夫冠婚喪祭而不爲之禮하고 墓祭而不廟하고 室祭而無所하니
仁人君子有所不安於其中而曰 不文하여 以從唐虞夏商之質이니라하나
夫唐虞夏商之質
은 蓋將以求周之文而未至者
니 非所以爲法也
愚竊謂忠質文三字는 以之名三代之治則可어니와 以之論三代之相救하고 而又謂若循環然則不可니라
當其風氣之日開하여 而聖人以漸爲之經緯其間하고 至周而文始大備니라
及周之衰而茍有王者起라도 亦不過循文武成康之遺爾니 豈得又推文而之忠與質乎哉리오
亦特曰 政由舊故라하나 愚獨謂夏未嘗尚忠이요 商未嘗尚質이요 周亦未嘗尚文이니라
此皆後世之所以仰觀三王之典禮와 與其風俗之可見者而强名之爾니라
孔子曰 周監於二代하니 郁郁乎文哉라하니 頌美之也시니라
假令如後世儒相救之說이면 孔子於此에 必深言之矣시리라
전傳에 이르기를 “하夏나라의 정치풍조는 충忠(忠厚)을 숭상하고, 상商나라의 정치풍조는 질質(質實)을 숭상하고, 주周나라의 정치풍조는 문文(禮樂制度)을 숭상했다.”고 하였다.
중니仲尼(孔子) 또한 “주周나라는 두 왕조王朝(하夏‧은殷)의 제도를 참작하였으니, 그 문물제도가 찬란하구나!
나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읽을 때에 당우唐虞시대를 대대로 살펴보고 하상夏商시대에 이르러서 ‘인류가 탄생한 이후로 온 천하가 하루도 문文으로 향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문文’이란 것은 “만물萬物이 각각 그 이치를 얻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부자父子‧군신君臣의 사이와 형제兄弟‧부부夫婦의 사이에서 이 문文이 말미암아 일어난다.
이전에 인류가 탄생하던 초기에는 부자父子간에 정분情分이 없고, 군신君臣간에 예법禮法을 지키지 않으며, 형제兄弟간에 서로 우애하지 않고, 부부夫婦간에 서로 보호하지 아니하니, 천하天下가 혼란하여 무질서하고 분투忿鬪하여 서로 고통을 안겨주었다.
문리文理(禮儀)가 현양顯揚되지 않고 인륜人倫이 밝지 아니하여 살아 있는 어른을 봉양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아니하니, 온 천하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여 마음이 편치 못하였다.
그런 뒤에 반성해서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예의禮儀를 추구하여 부자父子는 정분을 가지게 하고, 군신君臣은 각각 지위를 지키게 하고, 형제兄弟는 서로 우애하게 하고, 부부夫婦는 내외관계를 바르게 하였다.
우虞나라와 하夏나라 시대에 와서 그 비야鄙野한 제도를 더욱 제거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천자天子의 지존至尊으로서 와기瓦器에 밥을 담아 먹고 토기土器에 국을 담아 먹었으며, 거실居室은 토계土階가 석 자 높이이고 지붕을 띠풀로 이고서 그 끝을 가지런히 자르지 않는 등 간소하고 누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주周나라에 와서 예악禮樂이 크게 갖추어졌다.
예악禮樂의 대략적인 것은 부자父子의 사이에서 시작되고, 예악禮樂의 정화精華는 만물萬物의 전반에 걸쳐 베풀어졌으니 그 작용의 범위가 너무도 넓어 무궁무진하였다.
그래서 대개 그 당시에는 전대前代보다 문명文明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후세 사람은 도리어 그 문명文明이 질박質朴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제사祭祀 지내는 예식禮式에 있어서 대그릇과 나무그릇을 진열하고, 솥과 도마를 진열하고, 막걸리와 단술을 준비한 다음,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숭경崇敬하는 마음으로 제수祭需를 올리고서 조상의 영혼靈魂이 그 음식을 흐뭇한 마음으로 배불리 잡수실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그 영혼靈魂을 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울창주鬱鬯酒를 잔에 따라 모사茅沙 위에 부어 신神의 강림降臨을 구하고, 깨끗한 흰 띠를 땅에 깔아서 제품祭品을 진열하였다.
이미 울창주鬱鬯酒를 모사茅沙 위에 부어서 술이 그 속으로 스며들어 보이지 않으면 영혼靈魂이 흠향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자死者의 체백體魄은 땅속으로 들어가고 영혼靈魂은 하늘로 올라가므로 황홀恍惚하고 산만散漫하여 영혼靈魂이 경유하는 곳을 알지 못하니, 자손의 성음聲音과 기미氣味 같은 것이 행여 조상의 영혼靈魂이 오르내릴 때에 도움을 주지 못할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옥루屋漏에서 종제終祭를 지내고 팽祊에서 역제繹祭를 지내어 인자人子의 마음이 도달되지 않는 곳이 없음을 표시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올리고 다시 회자膾炙를 올리되 행여 귀신鬼神이 달갑게 여기지 않을까 염려하였고, 희생犧牲의 피와 털을 올리고 다시 반쯤 해체解體한 희생犧牲을 올리되 행여 부조父祖께서 우리를 돕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먼저 서직黍稷을 올리고 뒤에 도량稻粱을 올리며, 먼저 대갱大羮을 올리고 뒤에 서수庶羞를 올림으로써 감히 예의禮儀를 잊지 않음을 표시하고 또한 감히 조상의 유애遺愛를 잊지 않음을 표시하였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조상의 신령神靈에게 고하고 배회하며 차마 물러가지 못함으로써 인자人子의 마음을 다하고, 인자人子의 마음이 또한 조금 편할 수 있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이 이른바 ‘문文’이란 것은 모두 사람의 불안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이치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중니仲尼께서는 왕실王室이 쇠미衰微한 주周나라의 말기에 바삐 다니시면서 먼저 선왕先王(주周나라 군주君主)의 유문遺文을 수집하시고 증자曾子와 함께 예禮의 어려운 곳을 추론推論하여 아주 세밀하고 자상하게 하되, 대개 왕도王道의 융성隆盛은 그 문물제도文物制度가 예禮에 있어서 가장 완미完美한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주周나라가 망함에 이르러서는 천하天下가 크게 무너져서 강자强者는 약자弱者를 능멸하고 다수多數는 소수少數를 억압하였으니, 후세後世에는 바로 문물제도文物制度를 시용施用한 폐단이라 여겼다.
당우唐虞로부터 상商나라에 이르기까지는 점차로 문명文明의 단계에 들어갔고, 주周나라에 이르러서는 문명文明이 천하天下에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당唐‧우虞‧하夏‧상商의 세대에는 아마 주周나라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구하려고 해도 형세가 예악제도禮樂制度를 구비할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질質과 충忠’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周나라 이후는 천하天下가 예악제도禮樂制度를 익혔으므로 예악제도禮樂制度가 아니면 천하의 부족한 점을 편안하게 할 수가 없었으니, 이것은 그 형세가 그렇게 하도록 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가관加冠‧혼인婚姻‧상장喪葬‧제사祭祀 때에 의식儀式을 거행하지 않는가 하면, 묘소에서는 제사 지내되 사당에서는 제사 지내지 않고, 실내에서 제사 지내되 제사 지낼 처소가 제대로 없으니,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마음속에 불안한 바가 있어서 말하기를 “문명文明하지 아니함으로써 당唐‧우虞‧하夏‧상商의 질박質朴을 따를 것이다.”라고 하나
무릇 당唐‧우虞‧하夏‧상商의 질박質朴은 아마 주周나라의 예악제도禮樂制度를 구하려고 해도 형세가 예악제도禮樂制度를 구비할 단계에 도달하지 못해서이니, 본받을 바가 아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하건대, 충忠‧질質‧문文 세 글자는 삼대三代의 다스림에 대하여 이름을 매기는 것은 가하거니와, 삼대三代가 서로 구제함을 논하고 또 마치 순환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 풍기風氣가 날로 열릴 때를 당하여 성인聖人이 점차로 그 사이에서 발전시켰고, 주周나라에 이르러서 문물제도文物制度가 비로소 크게 구비되었다.
주周나라가 쇠할 때에 와서 참으로 왕자王者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또한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의 유풍遺風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을 뿐인데, 어찌 또 문文을 미루어 충忠과 질質로 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탕湯은 어찌하여 우禹의 옛일을 계승하고 무왕武王은 상商을 쳤겠는가?
또한 다만 “정치는 옛것을 따를 뿐이다.”라고 하지만, 나만은 ‘하夏나라는 일찍이 충忠을 숭상하지 않았고, 상商나라는 일찍이 질質을 숭상하지 않았고, 주周나라 또한 일찍이 문文을 숭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후세後世 사람들이 삼왕三王의 전례典禮와 그 풍속風俗 중에 볼 수 있는 것을 우러러보고 억지로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주周나라는 두 왕조王朝(하夏‧은殷)의 제도를 참작하였으니, 그 문물제도가 찬란하구나!”라고 하셨으니, 아름다움을 칭송하신 것이다.
가령 후세의 유자儒者가 서로 구제한 말처럼 하였다면 공자孔子께서는 이에 대해 반드시 심도 있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유독 이 같은 한 문단의 대의大議만 남기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