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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1)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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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覽其文이면 如廣陵之濤 砰磕洶悍而不可制이나 其骨理少切 譬之揮斤成風이니 特屬耀眼이니라
讀書하여 至於諸子百家之辯 後世之學이니이다 蓋嘗喟然太息하여
以爲聖人之道 譬如山海藪澤之奧 人之入於其中者 莫不皆得其하되
하여 各自以爲有餘하고 而無慕乎니이다
今夫 旦而操斧斤하고 以遊其叢林하여
取其大者 以爲楹하고 小者 以爲桷하고 圓者 以爲輪하고 挺者 以爲軸하되
長者 擾雲霓하고 短者 蔽牛馬하며 大者 擁丘陵하고 小者 伏榛莽이어늘
하여 皆自以爲盡山林之奇怪矣라하나이다
而獵夫漁師 結網聚餌하고 左彊弓右毒矢하여 陸攻則斃象犀하고 水伐則執蛟鮀하니 熊羆虎豹之皮毛 黿龜犀兕之骨革 上盡飛鳥 下及走獸昆蟲之類 紛紛籍籍 折翅捩足하고 鱗鬣委頓하여 縱橫滿前하며 肉登鼎俎하고 膏潤砧几하며 皮革齒骨 披裂四出하여 被於器用이니이다
求珠之工 隋侯夜光 間以 磊落的皪하여 充滿其家니이다
求金之工 輝赫晃蕩하고 鏗鏘交戛하여 遍爲天下冠冕佩帶飮食之飾이니이다
此數者 皆自以爲能盡山海之珍이나이나 山海之藏 終滿而莫見其盡이니이다
是三千人者 莫不皆於其師니이다
是以 從之周旋奔走하여 하고 困厄而莫有去之者하니 是誠有得乎爾也니이다
蓋顔淵 見於夫子하고 出而告人曰 라하고 子路子貢冉有 出而告人하되 亦曰 吾知之라하나이다
下而至於邽巽孔忠公西輿公西箴此數子者 門人之下第者也 竊窺於道德之光華하고 而有聞於議論之末하여 皆以니이다
其後田子方段干木之徒 하여 乃竊以爲之說하고 而吳起禽滑釐之類 又以이니이다
蓋夫子之道 하니 後之人得其遺波餘澤者 至於如此니이다
而楊朱墨翟莊周鄒衍田騈愼到韓非申不害之徒 又不見夫子之大道하여 하니 譬如陷於大澤之陂하여 荊榛棘茨 蹊隧滅絶하니 求以自致於通衢 而不可得하여 乃妄冒蒺藜하고 蹈崖谷하여 而不能自止니이다
何者 彼亦自以爲니이다
轍嘗怪古之聖人 旣已知之矣로되 而不遂以明告天下하고 而著之이니이다
六經之說 皆微見其端이니 而非所以破天下之疑惑하여 使之一見而寤者니이다
是以 世之君子 니이다
今夫易者 聖人之所以盡天下剛柔喜怒之情 勇敢畏懼之性하여 而寓之하고 因八物之相遇吉凶得失之際하여 以敎天下之趨利避害 蓋亦如是而已니이다
而世之 至以老子之虛無하고 至以陰陽災異之數니이다
言詩者 不言咏歌勤苦酒食燕樂之際 하고니이다
言書者 不言其君臣之歡嗟嘆 有以深感天下하고 而論其니이다
夫孔子豈不知後世之리잇가
其意以爲後之學者 無所據依感發以自盡其才
是以 設爲六經而使之求之시니이다
蓋又欲其深思而得之也
是以 不爲明著其說하고 使天下各以其所長而求之시니이다
故曰 仁者見謂之仁이요 라하나이다
夫使仁者效其仁하고 智者效其智하며 大者推明其大하되 而不遺其小하고 小者樂致其小하여 以自附於大하고 各因其才而盡其力하여 以求其至微至密之地 則天下將有而無倦者矣니이다
至於後世하여는 不明其意하고 患乎之多而學者之難明也니이다
於是 擧聖人之微言하여 而折之以一人之私意하니之學 橫放於天下니이다
由是 學者愈怠하고 而聖人之說 益以不明이니이다
今夫使天下之人으로 因說者之異同하여 得以縱觀博覽하여 而辨其是非하고 論其可否하고 하며 而後 至於微密之際 則講之當益深하고 當益固리이다
孟子曰 君子之以道 欲其自得之也
自得之 則居之安하고 居之安이면之深하고 資之深이면 則取之이니
君子 니라하나이다
昔者 轍之始學也 得一書하여 伏而讀之하되 不求其하고 而惟其書之知하고 求之而莫得이면 則反覆而思之하고 至於終日而莫見이면 而後 退而求其이니이다
何者 懼其하고 而守之不堅也니이다
及旣長 乃觀百家之書하니 하여 이라 無所不讀이나 泛然無所適從이니이다
蓋晩而讀孟子하고 而後 徧觀乎百家하니 而不亂也니이다
而世之言者曰 學者不可以讀天下之이니라
不幸而見之 則小道異術 將乘間而入於其中이라하나이다
古之所謂知道者 邪詞入之而不能蕩하고 犯之而不能詐하고 爵祿不能使之驕하고 貧賤不能使之辱이니이다
如使深居自閉於閨闥之中하여 兀然頹然而曰 知道라하면 知道云者 此乃所謂腐儒者也니이다
而孔子曰 伯夷叔齊 不降其志하고 不辱其身하며 柳下惠少連 降志而辱身이나 言中倫하고 行中慮하며 虞仲夷逸 隱居放言하나 身中淸하고 廢中權이니라
夫伯夷柳下惠 是君子之所不爲니이다
至於孟子하여는하고니이다
士之言學者 皆曰 孔孟 何者
以其知道而已니이다
今轍山林之匹夫 其才術技藝 無以大過於中人이어늘 而何敢自附於孟子리잇가
이나 其所以泛觀天下之異說 三代以來 興亡治亂之際 而皎然其有以折之者 蓋其學出於孟子而不可誣也니이다
天子將求直言之士 而轍適來調官京師니이다
不知其不肖하고 取其鄙野之文五十篇而薦之하여 이니이다
伏惟 執事 方今之偉人이요 而朝之名卿也니이다
其德業之所服 聲華之所耀 孰不欲一見하여 以效薄技於左右리잇가
夫其五十篇之文 從中而下 則執事亦旣見之矣니이다
是以 不敢復以爲獻하고 姑述其所以爲學之道하니 而執事試觀焉


02. 양제제공兩制諸公에게 올린 서찰
그 문장을 보면 마치 광릉廣陵의 물결이 사납게 요동을 쳐서 제어할 수 없는 것과 같지만, 문장의 짜임새는 비유하자면 도끼를 휘둘러서 잘 다듬어놓은 것과 같으니, 눈부시게 찬란하다.
은 글을 읽어 제자백가諸子百家분운동이紛紜同異언변言辯후세後世의 교묘하고 화려한 작품과 깊이 연찬하고 정밀하게 분석한 학설들까지 두루 섭렵하고 나서 개탄하기를
성인聖人는 비유하자면 산해山海수택藪澤의 심오함과 같으므로, 그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되
충족充足하고 포만飽滿하여 각자 유여有餘하다고 여기고 그 밖의 세계를 선모羨慕하지 않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반수班輸공공共工이 아침 일찍 도끼를 가지고 총림叢林 속으로 가서
큰 나무는 베어서 기둥을 만들고 작은 나무는 서까래를 만들며, 둥근 목재는 수레의 바퀴를 만들고 곧은 목재는 수레의 굴대를 만든다고 가정할 때,
긴 나무는 운예雲霓 위로 우뚝 치솟고, 짧은 나무는 우마牛馬에 가리워져 있으며, 큰 나무는 구릉丘陵을 빙 둘러 서 있고 작은 나무는 떨기를 이루고 있는 곳에서
작벌斫伐하여 취사선택을 하면서 모두 ‘산림山林기괴奇怪한 것들을 다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엽부獵夫어사漁師(漁父)는 그물을 만들고 낚싯밥을 장만하며, 왼쪽에는 강궁彊弓을 메고 오른쪽에는 독시毒矢를 꽂고서 육지에서 사냥을 할 경우에는 코끼리와 무소를 죽이고, 물에서 낚시질을 할 경우에는 교룡과 모래무지를 잡으니, 곰‧범‧표범의 가죽과 털과, 자라‧거북‧무소‧들소의 뼈와 가죽과, 위로 나는 새에서부터 아래로 달리는 짐승과 곤충昆蟲에 이르기까지 엄청 많은 것들이 날개가 꺾이고 발이 부러지고 비늘과 갈기가 벗겨진 채 가로세로로 앞에 가득하여, 고기는 정조鼎俎에 오르고, 기름은 침궤砧几를 윤기 나게 하며, 짐승의 가죽과 이빨과 뼈는 쪼개지고 찢겨져서 사방으로 나아가 기용器用의 장식품으로 입혀집니다.
보주寶珠를 찾아 가공하는 공장工匠의 손을 거친 수후주隋侯珠야광주夜光珠는 물론, 결점 있는 주옥珠玉방주蚌珠까지 번쩍번쩍 빛을 내며 그 집에 가득합니다.
을 찾아 가공하는 공장工匠의 손을 거친 은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쟁그랑 소리를 내며 두루 천하의 관면冠冕패대佩帶음식飮食의 장식품이 됩니다.
이 몇 사람은 모두 스스로 ‘능히 산해山海진귀珍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산해山海보장寶藏은 끝내 가득하여 그것이 다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옛날 부자夫子(孔子)께서 살아계실 때에 부자夫子를 따라 유학遊學하는 자들이 대개 3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3천여 명은 모두 그 스승에게 배워서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부자를 따라 바삐 돌아다녀, 나라와 나라에서는 쫓겨나고, 나라와 나라에서는 굶주림을 당하는 등 갖은 곤액困厄을 겪었지만 부자의 곁을 떠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확실히 배워 얻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안연顔淵부자夫子를 뵙고 나와서 사람에게 하기를 “나는 부자夫子의 사상을 잘 알았다.”고 하였고, 자로子路자공子貢염유冉有는 나와서 사람에게 하되 역시 “나는 부자夫子의 사상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래로 규손邽巽공충孔忠공서여公西輿공서잠公西箴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몇 사람은 문인門人의 하등에 속한 자들인지라, 도덕道德광화光華를 가만히 엿보고 의론議論의 말단을 들은 것이 있어서, 모두 한 세대에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전자방田子方단간목段干木의 무리는 부자의 학설을 연구한 것이 상세하지 못하여 슬그머니 허무담박虛無淡泊한 학설을 펼쳤고, 오기吳起금골리禽滑釐의 무리는 또 독창적인 학설로 전국시대에 맹렬한 기세를 떨쳤습니다.
대개 부자夫子가 사방으로 전파하니, 후세 사람 중에 그 유파遺波여택餘澤을 얻은 자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양주楊朱묵적墨翟장주莊周추연鄒衍전병田騈신도愼到한비韓非신불해申不害의 무리는 또 부자夫子대도大道를 보지 못하여 허둥대고 미혹迷惑하고 혼란混亂하여 어쩔 줄을 몰랐으니, 비유하자면 대택大澤 가에 푹 빠졌는데, 형진荊榛극자棘茨가 우거져서 작은 길이 멸절滅絶되었으니, 스스로 사통팔달한 거리에 이르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어서, 이에 가시덤불을 무릅쓰고 비탈과 계곡을 걷는데, 도로가 평탄하지 못하고 구불구불해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들 또한 자기들이 공자 학설의 정수에 도달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은 일찍이, ‘옛날 성인聖人은 모든 이치를 환히 아셨을 텐데도 결국은 천하 사람들에게 밝게 알려주지 않고 그것을 육경六經에 나타내셨을까’ 하고 괴상히 여겼습니다.
육경六經은 모두 그 단예端倪를 은미하게 보이므로 천하 사람들의 의혹疑惑을 깨뜨려 그들로 하여금 한 번 보고 금방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군자君子들이 분분하게 해석하여 한 가지를 고집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른바 《》이란 것은 성인聖人이 천하에 있는 감정感情천성天性을 모두 가져다가 8종의 사물 속에 붙이고, 8종 사물이 서로 만나 길흉吉凶득실得失의 국면을 형성할 때를 틈타서 천하 사람들에게 재리財利를 추구하고 재난災難을 도피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니, 대개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을 해설한 사람들 중에 왕씨王氏한씨韓氏는 심지어 노자老子허무虛無를 가지고 해설하기까지 하고, 경방京房초공焦貢은 심지어 음양陰陽재이災異를 가지고 해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를 말하는 사람은 영가咏歌근고勤苦주식酒食연악燕樂 등의 일이 있을 때에 마냥 즐기고 마냥 슬퍼하되 를 어기지 않았던 것은 말하지 않고, 오제五際자오묘유子午卯酉의 일을 말하였습니다.
》를 말하는 사람은 군신君臣간의 화기애애한 토론이 천하 사람들을 감동시킴이 있었던 것은 말하지 않고, 〈비서費誓〉와 〈진서秦誓〉는 마땅히 지어지지 않아야 했음을 논하였습니다.
공자孔子께서 후세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 생각은 ‘후대의 학자가 의거해서 감발感發하여 스스로 그 재주를 다할 바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육경六經을 베풀어서 육경六經의 뜻을 탐구하게 하였습니다.
또 깊이 생각해서 그 뜻을 터득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을 명백하게 나타내지 않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그 장점에 따라 그 뜻을 탐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자仁者는 이것을 보고 이라 이르고, 지자智者는 이것을 보고 라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공子貢 또한 “〈문왕文王무왕武王가 아직도〉 인간 세상에 남아 있어서 현명한 이는 그 의 대체 강령을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그 의 작은 조목은 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인자仁者는 그 을 발휘하고 지자智者는 그 를 발휘하며, 대자大者는 큰 것을 추명推明하되 작은 것을 빠뜨리지 않고 소자小者는 작은 것을 기꺼이 발휘하여 스스로 큰 것에 부착附着하고, 각각 재주에 따라 힘을 다하여 지극히 정미하고 지극히 주밀한 경지를 구하게 하면, 천하에 장차 평생 그 학설을 연구하고 게으름을 부리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는 그 뜻은 밝히지 않고 이단사설異端邪說이 많아서 학자學者가 밝히기 어려울까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의 은미한 말을 들어다가 한 사람의 사적인 뜻으로 분석하였으니, 전소傳疏이 천하에 횡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학자學者는 더욱 나태해지고 성인聖人은 더욱 밝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설자說者이동異同으로 인하여 군서群書를 널리 섭렵하고서 그 시비是非를 분변하고 그 가부可否를 논하며, 그 정조精粗를 추구한 뒤에 정미하고 주밀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강구함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지킴은 더욱 견고할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깊이 나아가기를 , 곧 방법을 가지고 하는 것은 자득自得하고자 해서이다.
자득自得하면 함에 편안하고 함에 편안하면 자용資用함이 깊고 자용資用함이 깊으면 좌우左右에서 취함에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자득自得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이 처음으로 글을 배울 때에 책 한 권을 얻어서 조용히 읽되 에서 뜻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 책만을 가지고 뜻을 알려고 하였으며, 뜻을 구하되 얻지 못하면 반복해서 생각하였고, 온종일 생각해도 뜻이 보이지 않은 뒤에 물러와서 에서 그 뜻을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쉽게 들어와서 지키는 것이 견고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미 장성함에 미쳐서 백가百家의 책을 보니, 잡다하게 많은 것들이 흥취를 돋울 만도 하고 깜짝 놀라게 할 만도 하기에 읽어보지 않는 책이 없었지만 범연하여 따를 바가 없었습니다.
늦게야 《맹자孟子》를 읽고 난 뒤에 백가百家의 책들을 두루 보았더니 생각이 혹란惑亂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말깨나 하는 자가 말하기를 “학자學者천하天下잡설雜說을 읽어서는 안 된다.
불행하게도 그것을 본다면 소도小道이술異術이 장차 그 틈을 타고서 그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양웅揚雄도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여 “나는 성인聖人의 책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현인賢人으로서 스스로 그 마음을 수양하는 이는 마치 사람의 약자弱子유제幼弟를 내보내 분화紛華하고 잡요雜擾한 지대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여겼으니, 이는 어쩌면 그리도 생각하지 못함이 심하단 말입니까.
옛날 소위 ‘를 안다.’는 자는 사사邪詞가 침입해도 방탕하게 할 수 없고, 피사詖詞가 침범해도 방사하게 할 수 없고, 작록爵祿도 그를 교만하게 할 수 없고, 빈천貧賤도 그를 욕보이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규달閨闥(內室) 속에 깊이 들어앉아 펑퍼짐한 자세로 말하기를 “나는 를 아노라.”라고 한다면 그 ‘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른바 ‘부유腐儒’인 것입니다.
옛날에 백이伯夷는 마음이 좁았고, 유하혜柳下惠는 태도가 불공不恭하였으니, 마음이 좁음과 태도가 불공함은 군자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이伯夷숙제叔齊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유하혜柳下惠소련少連은 비록 뜻을 굽히고 몸을 더럽혔으나 말이 도리에 맞고 행실이 사려에 맞았으며, 우중虞仲이일夷逸은 숨어 지내면서 호언장담하였으나 몸가짐이 청렴결백하고 세상을 버리는 행위도 때에 알맞았다.
나(孔子)는 그들과는 달라서 한 가지 원칙이나 지조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백이伯夷유하혜柳下惠의 행위는 바로 군자君子가 하지 않는 바이지만 공자孔子에게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맹자孟子의 이른바 ‘공자孔子집대성集大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맹자孟子에 이르러서는 향원鄕原이 풍속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미워하였고, 오릉중자於陵仲子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왕禹王후직后稷이 천하를 구제하는 일에 급급했던 업적을 찬미하였고, 안씨顔氏(顔回)가 스스로 즐거워한 일이 고루固陋하지 않았음을 알았으며, 천하의 제후諸侯들이 취한 바가 도둑질이었음을 알았고, 왕자王者는 반드시 다 베어 죽이지 않을 것을 알았으며, 현자賢者는 부를 수 없음을 알았고, 불러서 부역을 시키는 것이 가 됨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선비가 학자學者들에게 말할 때 모두 공맹孔孟을 칭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그 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산림山林필부匹夫이므로 재술才術기예技藝가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맹자孟子에게 소속시키겠습니까?
그러나 널리 보아온 천하의 이설異說삼대三代 이래 흥망치란興亡治亂의 즈음에 대하여 명백하게 분석한 것이 있으니, 대개 그 학문이 맹자孟子에게서 나온 것이어서 속일 수가 없습니다.
금년 봄에 천자天子께서 직언直言하는 인사를 구하였는데, 이 마침 와서 관직에 조용되어 경사京師에 있었습니다.
사인舍人 양공楊公은 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 비야鄙野한 글 50편을 가져가 추천하여 직언과直言科에 응시할 인원의 말미에 끼워 넣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집사執事는 오늘날의 위인偉人이요 조정朝廷명경名卿이십니다.
덕업德業의 복종할 바와 성화聲華의 빛나는 바를 그 누구인들 한 번 뵙고 하찮은 기예技藝를 보여드리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50편의 글은 중간 이하는 집사執事께서도 이미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드리지 않고, 우선 학문을 해온 방법을 기술하였으니, 집사執事께서는 시험삼아 보옵소서.


역주
역주1 上兩制諸公書 : 본 서찰은 嘉祐 5년(1060)에 쓴 것이다. 兩制는 內制와 外制를 合稱한 것인데, 內制는 翰林學士, 外制는 中書舍人을 가리킨다.
역주2 紛紜同異 : 당시 流派紛爭으로 持論이 같지 않거나 대립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工巧組繡 : 詞藻가 화려하고 技巧가 뛰어난 작품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漢賦‧永明體詩歌‧近體詩 같은 것을 여기에 해당시킬 수 있다.
역주4 鑽硏離析 : 깊이 연구하고 정밀하게 분석함을 가리킨다. 전국시대에 유행한 ‘堅白異同’의 詭辯學說을 여기에 해당시킬 수 있다.
역주5 所欲 : 원하는 것은 바로 聖人의 思想임을 가리킨다.
역주6 充足飽滿 : 聖人의 思想을 자기에게 충족시키는 것이다.
역주7 其外 : 山海‧藪澤의 바깥 세계를 가리킨다.
역주8 班輸共工 : 班輸는 魯나라 巧匠인 公輸班을 가리킨다. 일설에는 班은 魯班, 輸는 公輸라고 한다. 共工은 古代의 工官이다.
역주9 芟夷蹶取 : 여기서는 斫伐의 取舍選擇을 가리킨다.
역주10 纇玭 : 결점이 있는 珠玉과 蚌珠를 이른다.
역주11 昔者……蓋三千餘人 : 《史記》 〈孔子世家〉에 “孔子가 詩‧書‧禮‧樂으로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 수가 대개 3천 명이 되었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12 有得 : 배워 소득이 있음을 가리킨다.
역주13 逐於宋魯 饑餓於陳蔡 : 《史記》 〈孔子世家〉에 “(孔子가) 이윽고 魯나라를 떠났고, 齊나라에서 내쳐졌고, 宋나라와 衛나라에서 쫓겨났고, 陳나라와 蔡나라 사이에서 곤욕을 당했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14 吾能知之 : 아래에 있는 ‘吾知之’와 같이 능히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였음을 표시한 말이다.
역주15 自得于一世 : 當世에 공자에게 수업함으로써 마음에 얻은 것이 있음을 가리킨다.
역주16 講之不詳 : 공자의 학설에 대하여 연구한 것이 투철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역주17 虛無淡泊 : 淸虛하고 恬淡하여 바라는 바가 없다는 뜻으로 老莊의 학술을 가리킨다.
역주18 猖狂於戰國 : 吳起와 禽滑釐의 학설이 전국시대에 꽤 영향력이 있었음을 말한다.
역주19 分散四布 : 사방에 전파함을 가리킨다.
역주20 皇皇惑亂 : 허둥대고 迷惑하고 混亂하여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가리킨다.
역주21 崎嶇繚繞 : 도로가 평탄하지 못하고 또 이리저리 굽음을 가리킨다.
역주22 己之得之 : 자기들이 공자 학설의 精髓에 도달함을 가리킨다.
역주23 六經 : 《詩》‧《書》‧《易》‧《禮》‧《樂》‧《春秋》을 가리킨다.
역주24 紛紛至此而不可執也 : 六經을 읽을 때에 각각 다르게 해석하여 한 가지 방법을 고집할 수가 없음을 가리킨다.
역주25 八物 : 雷‧風‧水‧日‧山‧澤‧天‧地를 가리킨다.
역주26 說者 : 《易》을 해설하는 사람을 이른다.
역주27 王氏韓氏 : 중국 三國時代 魏나라 王弼과 晉나라 韓康伯을 가리킨다.
역주28 京房焦貢 : 京房은 漢 元帝 때의 易學者로, 焦延壽에게 《易》을 배워 易傳을 지었는데, 이를 《京氏易傳》이라 한다. 焦貢(焦延壽)은 漢 昭帝 때의 易學者로, 《易林》을 지었다.
역주29 極歡極慼而不違於道 : 孔子가 “〈關雎〉의 시상은 마냥 즐거우면서도 음탕하지 않고, 마냥 슬프면서도 상심하는 정도에 빠지지 않았다.[關雎之詩 樂而不淫 哀而不傷]”라고 칭찬한 것과 같은 바로 感情의 올바름을 얻은 詩를 가리킨다.
역주30 言五際子午卯酉之事 : 漢初에 《詩》에 齊‧魯‧韓 3家가 있었는데, 《齊詩》에서 學者 翼奉이 詩를 해설할 때에 陰陽‧五行의 說을 附會하여 政治變化를 推論하되, 매번 卯‧酉‧午‧戌‧亥의 해에 당할 때마다 정치상에 반드시 중대한 변동이 발생한다고 하였다.
역주31 吁兪 : 吁咈都兪의 약칭. 《書經》 〈虞書 堯典〉에 “堯帝가 말하기를 ‘아! 너의 말이 옳지 않다.[吁咈哉]’고 했다.”라고 보이고, 〈益稷〉에 “禹가 말하기를 ‘아! 훌륭합니다. 황제시여. 지위에 있음을 삼가소서.’라고 하니, 舜帝가 말하기를 ‘아! 너의 말이 옳다.[禹曰 都 帝 愼乃在位 帝曰 兪]’고 했다.”라고 보이는데, 吁는 不同意를 표시하고, 咈은 反對를 표시하고, 都는 贊美를 표시하고, 兪는 同意를 표시한 것이다. 본래 堯‧舜‧禹가 政事를 토론할 때 發言한 語氣였는데, 뒤에 君臣간의 意氣投合을 贊美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역주32 費誓 : 저본에는 ‘魯誓’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費誓’로 바꾸었다.
역주33 論其費誓秦誓之不當作也 : 《書經》 중에 다른 편들은 모두 帝王의 일을 기술하였고, 〈費誓〉와 〈秦誓〉만이 侯國의 일을 기술했기 때문에 論者가 “마땅히 지어지지 않았어야 했다.”라고 한 것이다.
역주34 至此極 : 자기 생각에 근거하여 六經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35 : 여기서는 道의 한 모서리를 가리킨다.
역주36 仁者見之謂之仁 智者見之謂之智 : 《周易》 〈繫辭上傳〉에 있는 말인데, 朱子의 本義에 “仁은 陽으로, 智는 陰으로 각각 이 道(一陰一陽之謂道란 道)를 얻었다. 그러므로 그 보는 바에 따라 지목하여 전체로 삼는다.”라고 풀이하였다.
역주37 在人……識其小者 : 《論語》 〈子張〉에 “文王과 武王의 道가 땅에 완전히 떨어지진 않았으며 아직도 인간 세상에 남아 있어서 현명한 이는 그 道의 대체 강령을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그 道의 작은 조목은 안다. 그리하여 문왕‧무왕의 道가 누구에게나 남아 있다.”라고 보인다.
역주38 終身於其說 : 평생 그 학설을 연구함을 가리킨다.
역주39 異說 : 異端邪說을 가리킨다.
역주40 傳疏 : 六經을 해석하는 文字를 이르는데 傳으로써 經文을 해석하고, 疏로써 傳의 뜻을 부연 설명한다.
역주41 推其精粗 : 精華와 糟粕을 闡明하는 것이다.
역주42 守之 : 자기의 관점을 굳게 가짐을 이른다.
역주43 深造 : 끊임없이 전진하여 精深한 경지에 도달함을 가리킨다.
역주44 : 資用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문을 이른다.
역주45 左右逢其原 : 여기서는 학문 공부가 깊어서 닿는 곳마다 모두 그 이익을 얻음을 가리킨다.
역주46 孟子曰……欲其自得之也 : 《孟子》 〈離婁 下〉에 “대의는 곧 君子가 학문에 있어서 정확한 방법을 가지고 끊임없이 전진하는 목적은 自覺力을 얻고자 해서이다. 자각력을 얻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날로 달로 축적되어 資用이 深廣해진다. 資用이 深廣하면 마음이 하고 싶은 바에 따라 아무리 취해 써도 바닥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각하려고 한다.”라고 보인다.
역주47 : 저본과 《欒城集》에는 ‘博’으로 되어 있는데, 明代 賀復徵이 編한 《文章辨體彙選》에 의하여 ‘傳’으로 바꾸었다.
역주48 : 저본에는 ‘博’으로, 《欒城集》에는 ‘得’으로 되어 있는데, 《文章辨體彙選》에 의하여 ‘傳’으로 바꾸었다.
역주49 入於心之易 : 傳疏文字를 접하면 마음에 쉽게 들어온다는 말이다.
역주50 縱橫顚倒 : 잡다하게 많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역주51 可喜可愕 : 사람으로 하여금 기쁘게도 하고 놀라게도 한다는 말이다.
역주52 雜說 : 여기서는 百家의 학설을 가리킨다.
역주53 雖揚雄尙然……此何其不思之甚也 : 明代 蘇伯衡이 撰한 《蘇平仲文集》 〈洗心亭記〉에는 “ ‘마음을 깨끗이 씻는다.’는 것은 어찌 참으로 깨끗이 씻는 것이겠으며, ‘물러나서 자취를 감춘다.’는 것 역시 어찌 올연히 그 몸을 엎드려서 전연 마음을 쓰는 바가 없는 것이겠는가? 저 揚雄이란 자는 ‘세상의 賢人으로서 스스로 그 마음을 수양하는 이는 마치 사람의 弱子와 幼弟를 내보내 紛華하고 雜擾한 지대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여겼으니, 아! 또한 이미 생각지 못한 것이로다.[其洗心也 豈眞有以澡雪之 而其退藏也 亦豈兀然伏其身 頹然無所用其心哉 彼揚雄者 顧以爲世之賢人之所以自養其心者 如人之弱子幼弟不當出而寘之紛華轇轕之地 嗟乎亦已不思矣]”라고 적고 있다.
역주54 詖詞 : 偏私하고 부정한 언론을 이른다.
역주55 伯夷……是君子之所不爲也 : 《孟子》 〈公孫丑 上〉에 보이는데, 대의는 “伯夷는 心胸이 너무 狹隘하고, 柳下惠는 태도가 너무 불공하였으니, 협애함과 불공함은 군자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是君子之所不爲也’라고 하였으나 《孟子》에는 ‘君子不由也’로 되어 있다.
역주56 孔子曰……無可無不可 : 《論語》 〈微子〉에 보이는데, 대의는 “伯夷와 叔齊는 몸을 곧게 가져 반란을 일으킨 사람을 섬기지 않고 首陽山에서 굶어죽었다. 그러므로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라고 하였고, 柳下惠와 少連은 亂朝에서 祿을 먹으며 道를 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뜻을 굽히고 몸을 더럽혔으나 말이 도리에 맞고 행실이 사려에 맞았다.’라고 하였고, 虞仲과 夷逸은 숨어 지내면서 호언장담하여 塵埃 밖에 超然하였다. 그러므로 ‘몸가짐이 청렴결백하였고, 세상을 버리는 행위도 때에 알맞았다.’라고 하고, 이어서 ‘나(孔子)는 그들과는 달라서 한 가지 원칙이나 지조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역주57 不棄於孔子 : 孔子가 逸者의 행위에 대하여 각각 취한 바가 있음을 가리킨다.
역주58 此孟子所謂孔子 集大成者也 : 《孟子》 〈萬章 下〉에 “孟子가 말하기를 ‘伯夷는 聖의 淸한 자요, 伊尹은 聖의 自任한 자요, 柳下惠는 聖의 和한 자요, 孔子는 聖의 時中인 자이시다. 孔子를 集大成이라 이른다.’고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59 鄕原 : 鄕里에서 겉모습은 謹厚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流俗과 영합하는 僞善者를 가리킨다. 原은 愿과 같다.
역주60 至於孟子 惡鄕原之敗俗 : 《孟子》 〈盡心 下〉에 “孔子가 ‘鄕原은 德의 賊.’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孟子가 이를 해석하기를 “비난하려고 해도 뚜렷이 들 것이 없고, 풍자하려고 해도 뚜렷이 풍자할 것이 없으며, 流俗과 동화하고 汚世와 영합하면서 居함에 忠信한 사람과 같고 行함에 청렴결백한 사람과 같아서, 여러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거든 스스로 옳다고 여기되 堯舜의 道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德의 賊’이라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61 知於陵仲子之不可常也 : 《孟子》 〈滕文公 下〉에 “孟子가 말하기를 ‘齊國의 선비 중에서 나는 반드시 仲子를 巨擘으로 여긴다. 그러나 仲子가 어찌 청렴할 수 있겠는가? 仲子의 지조를 그대로 채우려면 지렁이가 된 뒤에야 가할 것이다. 지렁이는 위로 마른 흙을 먹고 아래로 누런 물을 마시나니, 仲子가 거처하는 집은 伯夷가 지은 것인가? 아니면 盜跖이 지은 것인가? 먹는 곡식은 伯夷가 심은 것인가? 아니면 盜跖이 심은 것인가? 이것을 알 수 없구나.’라고 했다.”는 등 於陵仲子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보인다.
역주62 美禹稷之汲汲於天下 而知顔氏之自樂之非固也 : 《孟子》 〈離婁 下〉에 “孟子가 말하기를 ‘禹王과 后稷과 顔回는 道가 같다. 禹王은 천하에 물에 빠진 사람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 사람을 빠뜨린 것처럼 생각하고, 后稷은 천하에 굶주리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자기가 그 사람을 굶주리게 한 것처럼 생각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와 같이 급하게 구제하신 것이다. 禹王과 后稷과 顔回가 처지를 바꾸면 다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등 이 세 사람에 대한 업적이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그리고 顔回의 일은 《論語》 〈雍也〉에 “孔子가 말하기를 ‘어질도다, 回여! 한 도시락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으면서 누추한 시골에서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괴롭게 여겨 견디지 못하는데, 회는 그 즐거움을 변경하지 않았으니, 어질도다. 회여!’라고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63 知天下之諸侯其所取之爲盜 而知王者之不必盡誅也 : 《孟子》 〈萬章 下〉에 “萬章이 묻기를 ‘지금의 諸侯들이 백성들에게 취함이 강도질하는 것과 같거늘, 〈만일 그 禮와 交際를 잘하면 이는 君子도 받는다.〉고 하시니, 감히 묻겠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하니, 孟子가 답하기를 ‘자네가 생각하기에 王者가 나온다면 장차 지금의 諸侯들을 모조리 몰아서 죽이겠는가? 가르쳐도 고치지 않은 뒤에 죽이겠는가?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는 자를 도둑이라 이르는 것은 종류를 채워서 義의 지극함에 이른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이 보인다.
역주64 知賢者之不可召 而知召之役之爲義也 : 《孟子》 〈公孫丑 下〉에 “그러므로 장차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군주는 반드시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신하가 있다. 그리하여 상의할 일이 있으면 찾아갔다.”란 내용이 보이고, 《孟子》 〈萬章 下〉에 “萬章이 묻기를 ‘庶人이 군주가 자기를 불러 賦役을 시키면 가서 賦役을 하고, 군주가 그를 만나보고자 하여 그를 부르면 가서 보지 않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하니, 孟子가 답하기를 ‘가서 賦役하는 것은 義요, 가서 만나보는 것은 義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는 등의 내용이 보인다.
역주65 今年 : 嘉祐 5년(1060)이다.
역주66 舍人楊公 : 中書舍人 楊畋을 가리킨다.
역주67 俾與明詔之末 : 聖明의 詔令으로 치르는 直言科에 응시할 인원의 말미에 자기를 끼워 넣었다는 말이다.
역주68 今轍山林之匹夫………而執事試觀焉 : 孫琮의 《山曉閣選宋大家蘇潁濱全集》에는 “이 편은 순전히 자기의 학문에 대한 것만 차례로 서술하고, 한 글자도 聖道의 高深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다. 대개 글을 잘 읽은 사람은 처음에 반드시 먼저 널리 보아야 바야흐로 깊이 생각하여 자득할 수가 있다. 그런 연후에 聖人의 道를 飽食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학문을 하는 순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子由의 이 글은 반대로 得效處로부터 거꾸로 써 내려가서 用工處에 도달하였다. 그러므로 前幅에서는 聖人의 道를 사람들과 각각 포식한 것을 말한 다음, 그 아래에서 工匠 등 여러 사람을 이끌어서 그 이치를 비유하고, 顔淵 등 여러 사람을 이끌어서 그 일을 사실화하여 自己 또한 일찍이 聖人의 道를 한 번 거쳐왔음을 보였다. 中幅에서는 聖人의 道는 천하 사람들에게 밝게 알릴 수 없으니, 聖人의 道는 비록 사람들과 각각 포식하는 것이지만, 學者는 반드시 모름지기 깊이 탐구해서 自得해야 함을 말하여 自己 또한 일찍이 한 번 깊이 탐구했음을 보였다. 後幅에서는 聖人의 은미한 말이 異說에 파괴되었으니, 學者가 깊이 생각하여 자득하기를 구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널리 群言을 보아야 함을 말하여 自己 또한 일찍이 한 번 널리 보았음을 보였다. 通篇文字는 곳곳마다 학문과정의 즐거운 점과 괴로운 점을 서술하였으니, 이 道 속의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처럼 역력히 말할 수 있겠는가?[此篇 純是歷敍己學 幷無一筆寫到聖道高深 盖善讀書人 其始必先博覽縱觀其旣 方可深思自得其終 然後能飽足乎聖人之道 此爲學之序也 今子由此書 反從得效處 倒寫到用工處 故前幅 說聖人之道 與人各 下引工匠等人 以喩其理 引顔淵諸人 以實其事 見得自己 亦曾有得聖道一番過來 中幅說聖人之道 不明告天下 見得聖道 雖與人以各足 然學者必須深求自得 以見自己 亦曾深求一番過來 後幅說聖人之微言 散壞于異說 見得學者 欲深思求得 必先博綜群言 以見自己 亦嘗博綜一番過來 通篇文字 處處自敍爲學甘苦 非此道中人 何能歷歷言之]”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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