覽其文이면 如廣陵之濤 砰磕洶悍而不可制나 然이나 其骨理少切은 譬之揮斤成風이니 特屬耀眼이니라
轍
은 讀書
하여 至於諸子百家
之辯
과 後世
之學
이니이다 蓋嘗喟然太息
하여
以爲聖人之道
는 譬如山海藪澤之奧
니 人之入於其中者
는 莫不皆得其
하되
取其大者는 以爲楹하고 小者는 以爲桷하고 圓者는 以爲輪하고 挺者는 以爲軸하되
長者는 擾雲霓하고 短者는 蔽牛馬하며 大者는 擁丘陵하고 小者는 伏榛莽이어늘
而獵夫漁師는 結網聚餌하고 左彊弓右毒矢하여 陸攻則斃象犀하고 水伐則執蛟鮀하니 熊羆虎豹之皮毛와 黿龜犀兕之骨革과 上盡飛鳥와 下及走獸昆蟲之類가 紛紛籍籍이 折翅捩足하고 鱗鬣委頓하여 縱橫滿前하며 肉登鼎俎하고 膏潤砧几하며 皮革齒骨은 披裂四出하여 被於器用이니이다
求珠之工
은 隋侯夜光
과 間以
가 磊落的皪
하여 充滿其家
니이다
求金之工은 輝赫晃蕩하고 鏗鏘交戛하여 遍爲天下冠冕佩帶飮食之飾이니이다
此數者는 皆自以爲能盡山海之珍이나 然이나 山海之藏은 終滿而莫見其盡이니이다
是以
로 從之周旋奔走
하여 하고 困厄而莫有去之者
하니 是誠有得乎爾也
니이다
蓋顔淵
은 見於夫子
하고 出而告人曰
라하고 子路子貢冉有
는 出而告人
하되 亦曰 吾知之
라하나이다
下而至於邽巽孔忠公西輿公西箴此數子者
는 門人之下第者也
라 竊窺於道德之光華
하고 而有聞於議論之末
하여 皆以
니이다
其後田子方段干木之徒
는 하여 乃竊以爲
之說
하고 而吳起禽滑釐之類
는 又以
이니이다
蓋夫子之道
하니 後之人得其遺波餘澤者 至於如此
니이다
而楊朱墨翟莊周鄒衍田騈愼到韓非申不害之徒
는 又不見夫子之大道
하여 하니 譬如陷於大澤之陂
하여 荊榛棘茨
로 蹊隧滅絶
하니 求以自致於通衢
나 而不可得
하여 乃妄冒蒺藜
하고 蹈崖谷
하여 而不能自止
니이다
轍嘗怪古之聖人
은 旣已知之矣
로되 而不遂以明告天下
하고 而著之
이니이다
六經之說은 皆微見其端이니 而非所以破天下之疑惑하여 使之一見而寤者니이다
今夫易者
는 聖人之所以盡天下剛柔喜怒之情
과 勇敢畏懼之性
하여 而寓之
하고 因八物之相遇吉凶得失之際
하여 以敎天下之趨利避害
니 蓋亦如是而已
니이다
而世之
는 至以老子之虛無
하고 은 至以陰陽災異之數
니이다
言詩者
는 不言咏歌勤苦酒食燕樂之際
에 하고 而
니이다
言書者
는 不言其君臣之歡
嗟嘆
이 有以深感天下
하고 而論其
니이다
是以로 不爲明著其說하고 使天下各以其所長而求之시니이다
夫使仁者效其仁
하고 智者效其智
하며 大者推明其大
하되 而不遺其小
하고 小者樂致其小
하여 以自附於大
하고 各因其才而盡其力
하여 以求其至微至密之地
면 則天下將有
而無倦者矣
니이다
至於後世
하여는 不明其意
하고 患乎
之多而學者之難明也
니이다
於是
에 擧聖人之微言
하여 而折之以一人之私意
하니 而
之學
이 橫放於天下
니이다
由是로 學者愈怠하고 而聖人之說은 益以不明이니이다
今夫使天下之人
으로 因說者之異同
하여 得以縱觀博覽
하여 而辨其是非
하고 論其可否
하고 하며 而後
에 至於微密之際
면 則講之當益深
하고 當益固
리이다
自得之
면 則居之安
하고 居之安
이면 則
之深
하고 資之深
이면 則取之
이니
昔者 轍之始學也
에 得一書
하여 伏而讀之
하되 不求其
하고 而惟其書之知
하고 求之而莫得
이면 則反覆而思之
하고 至於終日而莫見
이면 而後
에 退而求其
이니이다
及旣長
에 乃觀百家之書
하니 하여 이라 無所不讀
이나 泛然無所適從
이니이다
蓋晩而讀孟子하고 而後에 徧觀乎百家하니 而不亂也니이다
不幸而見之면 則小道異術이 將乘間而入於其中이라하나이다
古之所謂知道者
는 邪詞入之而不能蕩
하고 犯之而不能詐
하고 爵祿不能使之驕
하고 貧賤不能使之辱
이니이다
如使深居自閉於閨闥之中하여 兀然頹然而曰 知道라하면 知道云者는 此乃所謂腐儒者也니이다
而孔子曰 伯夷叔齊는 不降其志하고 不辱其身하며 柳下惠少連은 降志而辱身이나 言中倫하고 行中慮하며 虞仲夷逸은 隱居放言하나 身中淸하고 廢中權이니라
今轍山林之匹夫니 其才術技藝가 無以大過於中人이어늘 而何敢自附於孟子리잇가
然이나 其所以泛觀天下之異說은 三代以來 興亡治亂之際에 而皎然其有以折之者니 蓋其學出於孟子而不可誣也니이다
이 不知其不肖
하고 取其鄙野之文五十篇而薦之
하여 이니이다
其德業之所服과 聲華之所耀를 孰不欲一見하여 以效薄技於左右리잇가
夫其五十篇之文은 從中而下는 則執事亦旣見之矣니이다
是以
로 不敢復以爲獻
하고 姑述其所以爲學之道
하니 而執事試觀焉
그 문장을 보면 마치 광릉廣陵의 물결이 사납게 요동을 쳐서 제어할 수 없는 것과 같지만, 문장의 짜임새는 비유하자면 도끼를 휘둘러서 잘 다듬어놓은 것과 같으니, 눈부시게 찬란하다.
철轍은 글을 읽어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분운동이紛紜同異한 언변言辯과 후세後世의 교묘하고 화려한 작품과 깊이 연찬하고 정밀하게 분석한 학설들까지 두루 섭렵하고 나서 개탄하기를
“성인聖人의 도道는 비유하자면 산해山海와 수택藪澤의 심오함과 같으므로, 그 속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두 원하는 것을 얻되
충족充足하고 포만飽滿하여 각자 유여有餘하다고 여기고 그 밖의 세계를 선모羨慕하지 않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반수班輸와 공공共工이 아침 일찍 도끼를 가지고 총림叢林 속으로 가서
큰 나무는 베어서 기둥을 만들고 작은 나무는 서까래를 만들며, 둥근 목재는 수레의 바퀴를 만들고 곧은 목재는 수레의 굴대를 만든다고 가정할 때,
긴 나무는 운예雲霓 위로 우뚝 치솟고, 짧은 나무는 우마牛馬에 가리워져 있으며, 큰 나무는 구릉丘陵을 빙 둘러 서 있고 작은 나무는 떨기를 이루고 있는 곳에서
작벌斫伐하여 취사선택을 하면서 모두 ‘산림山林의 기괴奇怪한 것들을 다 취했다.’고 생각합니다.
엽부獵夫와 어사漁師(漁父)는 그물을 만들고 낚싯밥을 장만하며, 왼쪽에는 강궁彊弓을 메고 오른쪽에는 독시毒矢를 꽂고서 육지에서 사냥을 할 경우에는 코끼리와 무소를 죽이고, 물에서 낚시질을 할 경우에는 교룡과 모래무지를 잡으니, 곰‧범‧표범의 가죽과 털과, 자라‧거북‧무소‧들소의 뼈와 가죽과, 위로 나는 새에서부터 아래로 달리는 짐승과 곤충昆蟲의 유類에 이르기까지 엄청 많은 것들이 날개가 꺾이고 발이 부러지고 비늘과 갈기가 벗겨진 채 가로세로로 앞에 가득하여, 고기는 정조鼎俎에 오르고, 기름은 침궤砧几를 윤기 나게 하며, 짐승의 가죽과 이빨과 뼈는 쪼개지고 찢겨져서 사방으로 나아가 기용器用의 장식품으로 입혀집니다.
보주寶珠를 찾아 가공하는 공장工匠의 손을 거친 수후주隋侯珠와 야광주夜光珠는 물론, 결점 있는 주옥珠玉과 방주蚌珠까지 번쩍번쩍 빛을 내며 그 집에 가득합니다.
금金을 찾아 가공하는 공장工匠의 손을 거친 금金은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쟁그랑 소리를 내며 두루 천하의 관면冠冕‧패대佩帶‧음식飮食의 장식품이 됩니다.
이 몇 사람은 모두 스스로 ‘능히 산해山海의 진귀珍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산해山海의 보장寶藏은 끝내 가득하여 그것이 다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옛날 부자夫子(孔子)께서 살아계실 때에 부자夫子를 따라 유학遊學하는 자들이 대개 3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 3천여 명은 모두 그 스승에게 배워서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부자를 따라 바삐 돌아다녀, 송宋나라와 노魯나라에서는 쫓겨나고, 진陳나라와 채蔡나라에서는 굶주림을 당하는 등 갖은 곤액困厄을 겪었지만 부자의 곁을 떠나는 자가 없었으니, 이는 확실히 배워 얻은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안연顔淵은 부자夫子를 뵙고 나와서 사람에게 고告하기를 “나는 부자夫子의 사상을 잘 알았다.”고 하였고, 자로子路‧자공子貢‧염유冉有는 나와서 사람에게 고告하되 역시 “나는 부자夫子의 사상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래로 규손邽巽‧공충孔忠‧공서여公西輿‧공서잠公西箴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몇 사람은 문인門人의 하등에 속한 자들인지라, 도덕道德의 광화光華를 가만히 엿보고 의론議論의 말단을 들은 것이 있어서, 모두 한 세대에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전자방田子方과 단간목段干木의 무리는 부자의 학설을 연구한 것이 상세하지 못하여 슬그머니 허무담박虛無淡泊한 학설을 펼쳤고, 오기吳起와 금골리禽滑釐의 무리는 또 독창적인 학설로 전국시대에 맹렬한 기세를 떨쳤습니다.
대개 부자夫子의 도道가 사방으로 전파하니, 후세 사람 중에 그 유파遺波와 여택餘澤을 얻은 자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양주楊朱‧묵적墨翟‧장주莊周‧추연鄒衍‧전병田騈‧신도愼到‧한비韓非‧신불해申不害의 무리는 또 부자夫子의 대도大道를 보지 못하여 허둥대고 미혹迷惑하고 혼란混亂하여 어쩔 줄을 몰랐으니, 비유하자면 대택大澤 가에 푹 빠졌는데, 형진荊榛과 극자棘茨가 우거져서 작은 길이 멸절滅絶되었으니, 스스로 사통팔달한 거리에 이르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될 수가 없어서, 이에 가시덤불을 무릅쓰고 비탈과 계곡을 걷는데, 도로가 평탄하지 못하고 구불구불해서 걸음을 멈출 수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들 또한 자기들이 공자 학설의 정수에 도달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철轍은 일찍이, ‘옛날 성인聖人은 모든 이치를 환히 아셨을 텐데도 결국은 천하 사람들에게 밝게 알려주지 않고 그것을 육경六經에 나타내셨을까’ 하고 괴상히 여겼습니다.
육경六經의 설說은 모두 그 단예端倪를 은미하게 보이므로 천하 사람들의 의혹疑惑을 깨뜨려 그들로 하여금 한 번 보고 금방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군자君子들이 분분하게 해석하여 한 가지를 고집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른바 《역易》이란 것은 성인聖人이 천하에 있는 강剛‧유柔‧희喜‧노怒의 감정感情과 용勇‧감敢‧외畏‧구懼의 천성天性을 모두 가져다가 8종의 사물 속에 붙이고, 8종 사물이 서로 만나 길흉吉凶‧득실得失의 국면을 형성할 때를 틈타서 천하 사람들에게 재리財利를 추구하고 재난災難을 도피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니, 대개 이와 같은 것에 불과하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역易》을 해설한 사람들 중에 왕씨王氏와 한씨韓氏는 심지어 노자老子의 허무虛無를 가지고 해설하기까지 하고, 경방京房과 초공焦貢은 심지어 음양陰陽과 재이災異의 수數를 가지고 해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시詩》를 말하는 사람은 영가咏歌‧근고勤苦‧주식酒食‧연악燕樂 등의 일이 있을 때에 마냥 즐기고 마냥 슬퍼하되 도道를 어기지 않았던 것은 말하지 않고, 오제五際‧자오묘유子午卯酉의 일을 말하였습니다.
《서書》를 말하는 사람은 군신君臣간의 화기애애한 토론이 천하 사람들을 감동시킴이 있었던 것은 말하지 않고, 〈비서費誓〉와 〈진서秦誓〉는 마땅히 지어지지 않아야 했음을 논하였습니다.
공자孔子께서 후세 사람들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를 줄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 생각은 ‘후대의 학자가 의거해서 감발感發하여 스스로 그 재주를 다할 바가 없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육경六經을 베풀어서 육경六經의 뜻을 탐구하게 하였습니다.
또 깊이 생각해서 그 뜻을 터득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설說을 명백하게 나타내지 않고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각각 그 장점에 따라 그 뜻을 탐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자仁者는 이것을 보고 인仁이라 이르고, 지자智者는 이것을 보고 지智라 이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자공子貢 또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도道가 아직도〉 인간 세상에 남아 있어서 현명한 이는 그 도道의 대체 강령을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그 도道의 작은 조목은 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인자仁者는 그 인仁을 발휘하고 지자智者는 그 지智를 발휘하며, 대자大者는 큰 것을 추명推明하되 작은 것을 빠뜨리지 않고 소자小者는 작은 것을 기꺼이 발휘하여 스스로 큰 것에 부착附着하고, 각각 재주에 따라 힘을 다하여 지극히 정미하고 지극히 주밀한 경지를 구하게 하면, 천하에 장차 평생 그 학설을 연구하고 게으름을 부리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에 와서는 그 뜻은 밝히지 않고 이단사설異端邪說이 많아서 학자學者가 밝히기 어려울까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인聖人의 은미한 말을 들어다가 한 사람의 사적인 뜻으로 분석하였으니, 전소傳疏의 학學이 천하에 횡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학자學者는 더욱 나태해지고 성인聖人의 설說은 더욱 밝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설자說者의 이동異同으로 인하여 군서群書를 널리 섭렵하고서 그 시비是非를 분변하고 그 가부可否를 논하며, 그 정조精粗를 추구한 뒤에 정미하고 주밀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면, 강구함은 더욱 깊어질 것이고 지킴은 더욱 견고할 것입니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道, 곧 방법을 가지고 하는 것은 자득自得하고자 해서이다.
자득自得하면 거居함에 편안하고 거居함에 편안하면 자용資用함이 깊고 자용資用함이 깊으면 좌우左右에서 취함에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자득自得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에 철轍이 처음으로 글을 배울 때에 책 한 권을 얻어서 조용히 읽되 전傳에서 뜻을 구하지 않고 오직 그 책만을 가지고 뜻을 알려고 하였으며, 뜻을 구하되 얻지 못하면 반복해서 생각하였고, 온종일 생각해도 뜻이 보이지 않은 뒤에 물러와서 전傳에서 그 뜻을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쉽게 들어와서 지키는 것이 견고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미 장성함에 미쳐서 백가百家의 책을 보니, 잡다하게 많은 것들이 흥취를 돋울 만도 하고 깜짝 놀라게 할 만도 하기에 읽어보지 않는 책이 없었지만 범연하여 따를 바가 없었습니다.
늦게야 《맹자孟子》를 읽고 난 뒤에 백가百家의 책들을 두루 보았더니 생각이 혹란惑亂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말깨나 하는 자가 말하기를 “학자學者는 천하天下의 잡설雜說을 읽어서는 안 된다.
불행하게도 그것을 본다면 소도小道‧이술異術이 장차 그 틈을 타고서 그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합니다.
양웅揚雄도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여 “나는 성인聖人의 책이 아니면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현인賢人으로서 스스로 그 마음을 수양하는 이는 마치 사람의 약자弱子와 유제幼弟를 내보내 분화紛華하고 잡요雜擾한 지대에 두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여겼으니, 이는 어쩌면 그리도 생각하지 못함이 심하단 말입니까.
옛날 소위 ‘도道를 안다.’는 자는 사사邪詞가 침입해도 방탕하게 할 수 없고, 피사詖詞가 침범해도 방사하게 할 수 없고, 작록爵祿도 그를 교만하게 할 수 없고, 빈천貧賤도 그를 욕보이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규달閨闥(內室) 속에 깊이 들어앉아 펑퍼짐한 자세로 말하기를 “나는 도道를 아노라.”라고 한다면 그 ‘도道를 안다.’는 것은 바로 이른바 ‘부유腐儒’인 것입니다.
옛날에 백이伯夷는 마음이 좁았고, 유하혜柳下惠는 태도가 불공不恭하였으니, 마음이 좁음과 태도가 불공함은 군자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더럽히지 않았으며, 유하혜柳下惠와 소련少連은 비록 뜻을 굽히고 몸을 더럽혔으나 말이 도리에 맞고 행실이 사려에 맞았으며, 우중虞仲과 이일夷逸은 숨어 지내면서 호언장담하였으나 몸가짐이 청렴결백하고 세상을 버리는 행위도 때에 알맞았다.
나(孔子)는 그들과는 달라서 한 가지 원칙이나 지조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의 행위는 바로 군자君子가 하지 않는 바이지만 공자孔子에게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맹자孟子의 이른바 ‘공자孔子는 집대성集大成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맹자孟子에 이르러서는 향원鄕原이 풍속을 파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미워하였고, 오릉중자於陵仲子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왕禹王과 후직后稷이 천하를 구제하는 일에 급급했던 업적을 찬미하였고, 안씨顔氏(顔回)가 스스로 즐거워한 일이 고루固陋하지 않았음을 알았으며, 천하의 제후諸侯들이 취한 바가 도둑질이었음을 알았고, 왕자王者는 반드시 다 베어 죽이지 않을 것을 알았으며, 현자賢者는 부를 수 없음을 알았고, 불러서 부역을 시키는 것이 의義가 됨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선비가 학자學者들에게 말할 때 모두 공맹孔孟을 칭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현재 철轍은 산림山林의 필부匹夫이므로 재술才術과 기예技藝가 일반인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맹자孟子에게 소속시키겠습니까?
그러나 널리 보아온 천하의 이설異說은 삼대三代 이래 흥망치란興亡治亂의 즈음에 대하여 명백하게 분석한 것이 있으니, 대개 그 학문이 맹자孟子에게서 나온 것이어서 속일 수가 없습니다.
금년 봄에 천자天子께서 직언直言하는 인사를 구하였는데, 철轍이 마침 와서 관직에 조용되어 경사京師에 있었습니다.
사인舍人 양공楊公은 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 비야鄙野한 글 50편을 가져가 추천하여 직언과直言科에 응시할 인원의 말미에 끼워 넣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집사執事는 오늘날의 위인偉人이요 조정朝廷의 명경名卿이십니다.
그 덕업德業의 복종할 바와 성화聲華의 빛나는 바를 그 누구인들 한 번 뵙고 하찮은 기예技藝를 보여드리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50편의 글은 중간 이하는 집사執事께서도 이미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드리지 않고, 우선 학문을 해온 방법을 기술하였으니, 집사執事께서는 시험삼아 보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