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挾天子以令諸侯
하니 其志本欲盡掃群雄而後
에 取
동한漢耳
니라
於是
에 之議
한대 幡然聽之
하니 而
환공桓문공文之業
이 至此盡矣
니라
然
이나 方是時
에 조공公在
하고 而
한漢都
허창許昌하니 雖使
하고 而不廢
이라도 上可以爲
주周문왕文王이요 下亦不失爲
환공桓문왕文이어늘 조공公不能忍
하고 而甘心
하니 此
순문약荀文若之所以爲恨也
니라
하며 하고 하고 하고 하여 立四大功
하니 天下莫能抗
이니라
然이나 其志不在환공桓문공文이요 而在九錫하니 亦已卑矣니라
若能因其兵勢하여 據진秦농隴之形勝하고 引오吳월越之饒富하여 以經略中夏하고 成조공曹公하삭河朔之勢면 則王伯之功可冀니 顧所以用之何如耳니라
以무제帝之明으로 非不知諸將之不足以保진秦이언만 而志有所在라 不暇他慮矣니라
以目前之利
로 而棄百世之功
하고 有
조공曹公削平之業
이나 而俯從
사마중달司馬父子攘竊之陋
하니 此君子之所
也
니라
공자孔子曰 知及之라도 仁不能守之면 雖得之나 必失之니라
知及之하며 仁能守之라도 不莊以涖之면 則民不敬이니라
니라하니 古之爲國
은 必具此
而後
에 能成大功
이니라
如
무제武帝之用兵
이 無敵於天下
는 可以言
지智矣
어니와 至其棄
진秦而歸
하여 以求九錫之
은 尙可以爲
인仁乎
아
동한東漢 말기에 조공曹公(曹操)이 비로소 오패五伯의 자취를 답습하여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諸侯를 호령하였으니, 그 뜻은 본래 군웅群雄을 다 소탕하고 나서 한漢나라를 찬취簒取할 셈이었다.
이미 원소袁紹‧원술袁術‧여포呂布‧유표劉表를 멸하고 드디어 강동江東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고, 마초馬超와 한수韓遂를 격파하고 아울러 파촉巴蜀을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두 번이나 오吳‧촉蜀에 굴하고 공公 또한 늙었다.
이에 동소董昭가 ‘구석九錫’의 의논을 드리자 선뜻 받아들이니,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霸業이 이에 이르러 다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 조공曹公은 하삭河朔에 있었고 한漢나라는 허창許昌에 도읍을 세웠으니, 비록 지방 세력의 맹주盟主가 되고 구군舊君(獻帝)을 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로는 주周 문왕文王이 될 수 있었고, 아래로는 또한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霸業을 잃지 않을 수 있었는데, 조공曹公은 참지 못하고 왕망王莽의 구석九錫의 일을 달갑게 여겼으니, 이는 바로 순문약荀文若(荀彧)이 한스럽게 여긴 바이다.
사마중달司馬仲達의 부자父子로 말하면 그 사세가 조공曹公과 달랐다.
군사를 가지고 천자天子의 곁을 싸고 있었으니 진실로 불순한 처사요, 이미 왕릉王凌을 죽이고 제갈탄諸葛誕을 살해했으니 신하의 직분이 아니다.
또 유선劉禪을 항복시켰으니 조씨曹氏(曹操)가 복종시킬 수 없었던 것을 복종시킨 셈인데, 이는 그 토지土地를 탐하거나 그 인민人民을 이롭게 여긴 것이 아니고 뜻은 역시 구석九錫에 있었다.
그러니 비록 다시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이 되려고 한들 될 수가 있었겠는가?
송宋 무제武帝는 이미 환씨桓氏를 베어 죽이고 잔존殘存한 진晉 왕가王家의 종실宗室을 거두어 세력을 부식扶植하였으며, 또 초종譙縱을 쳐서 이겼고, 모용초慕容超를 공격하여 붙잡았고, 노순盧循을 맹추격하였고, 요홍姚泓을 사로잡아 4대공大功을 세웠으니, 천하天下에 감히 항거할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 뜻은 제齊 환공桓公과 진晉 문공文公의 패업霸業에 있지 않고 오직 구석九錫에 있었으니 역시 비루한 일이었다.
송宋 무제武帝가 공격하여 장안長安에 들어감에 중원中原이 벌벌 떨었다.
원위元魏는 비록 요씨姚氏와 혼인관계가 있는 처지이나 감히 구원하지 못하였고, 강저羌氐는 비록 관중關中과 상호 의존관계를 가졌지만 감히 항쟁하지 못하였다.
이것은 지력智力이 남아났기 때문이니, 족히 큰일을 할 수가 있는 시기였다.
만일 능히 그 병세兵勢를 인하여 지리적 조건이 좋은 진秦‧농隴의 형승形勝을 의거하고, 재정적 조건이 우월한 오吳‧월越의 요부饒富를 이용해서 중하中夏를 경략經略하고 조공曹公이 떨친 하삭河朔의 세력을 이루었다면 왕도王道와 패업霸業의 공功을 바랄 수 있었으니, 다만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매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군사가 진秦나라에 쳐들어가지 못하고 부량傅亮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건업建業에 달려가서 구석九錫의 의론을 발의하게 하였다.
유목지劉穆之가 죽음에 남방南方에 다시 부탁할 사람이 없었으니, 비록 이미 진秦나라에 쳐들어갔으나 진秦나라 땅에 머무를 뜻이 없었고, 천 리의 땅을 들어 한 유자孺子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그 틈을 타서 공격하였으니, 병졸과 장수 가운데 죽은 자가 반을 넘었고, 낭패해서 돌아와 겨우 몸만 살아났을 뿐이다.
송宋 무제武帝의 밝은 지혜로써 여러 장수들이 진秦나라 땅을 보존하기에 부족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뜻이 있는 데가 있는지라,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목전目前의 이익을 탐하여 백세百世의 공功을 버렸고, 조공曹公이 평정平定한 업적業績이 있었으나 사마중달司馬仲達 부자父子가 찬탈簒奪한 비루한 일을 따랐으니, 이는 군자君子가 추한追恨하는 바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지혜로 그 지위까지 갔어도 인덕으로 지키지 못하면 비록 지위를 얻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잃게 된다.
지혜로 그 지위까지 갔고, 인덕으로 이를 지킨다 할지라도 위엄을 세워 임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공경하지 않을 것이다.
지위로 그 지위까지 갔고, 인덕으로 이를 지키고, 위엄을 세워 임한다 해도 예禮로써 백성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이 네 가지를 갖춘 뒤에야 능히 큰 공을 이룰 수 있다.
송宋 무제武帝의 용병用兵이 천하天下에 대적할 자가 없었던 경우와 같은 것은 지智라고 말할 수 있겠거니와, 진秦나라 땅을 버리고 돌아와서 구석九錫의 음명淫名을 구하는 데에 이른 것도 오히려 인仁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공업功業이 여기에 그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