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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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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1. 무제武帝에 대한
하여 挾天子以令諸侯하니 其志本欲盡掃群雄而後 取漢耳니라
동한東漢 말기에 조공曹公(曹操)이 비로소 오패五伯의 자취를 답습하여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諸侯를 호령하였으니, 그 뜻은 본래 군웅群雄을 다 소탕하고 나서 나라를 찬취簒取할 셈이었다.
이미 원소袁紹원술袁術여포呂布유표劉表를 멸하고 드디어 강동江東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고, 마초馬超한수韓遂를 격파하고 아울러 파촉巴蜀을 차지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두 번이나 에 굴하고 또한 늙었다.
於是 之議한대 幡然聽之하니 而桓文之業 至此盡矣니라
이에 동소董昭가 ‘구석九錫’의 의논을 드리자 선뜻 받아들이니, 환공桓公 문공文公패업霸業이 이에 이르러 다한 것이다.
이나 方是時 公在하고 而漢都許昌하니 雖使하고 而不廢이라도 上可以爲周文王이요 下亦不失爲桓文이어늘 公不能忍하고 而甘心하니 此荀文若之所以爲恨也니라
그러나 이때에 조공曹公하삭河朔에 있었고 나라는 허창許昌에 도읍을 세웠으니, 비록 지방 세력의 맹주盟主가 되고 구군舊君(獻帝)을 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위로는 문왕文王이 될 수 있었고, 아래로는 또한 환공桓公 문공文公패업霸業을 잃지 않을 수 있었는데, 조공曹公은 참지 못하고 왕망王莽구석九錫의 일을 달갑게 여겼으니, 이는 바로 순문약荀文若(荀彧)이 한스럽게 여긴 바이다.
사마중달司馬仲達부자父子로 말하면 그 사세가 조공曹公과 달랐다.
하니 固已不順이요 하니 非人臣矣니라
군사를 가지고 천자天子의 곁을 싸고 있었으니 진실로 불순한 처사요, 이미 왕릉王凌을 죽이고 제갈탄諸葛誕을 살해했으니 신하의 직분이 아니다.
하니 非貪其土地而利其人民也 志亦在九錫耳니라
유선劉禪을 항복시켰으니 조씨曹氏(曹操)가 복종시킬 수 없었던 것을 복종시킨 셈인데, 이는 그 토지土地를 탐하거나 그 인민人民을 이롭게 여긴 것이 아니고 뜻은 역시 구석九錫에 있었다.
雖欲復爲桓文이나 尙可得乎
그러니 비록 다시 환공桓公 문공文公이 되려고 한들 될 수가 있었겠는가?
하며 하고 하고 하고 하여 立四大功하니 天下莫能抗이니라
무제武帝는 이미 환씨桓氏를 베어 죽이고 잔존殘存 왕가王家종실宗室을 거두어 세력을 부식扶植하였으며, 또 초종譙縱을 쳐서 이겼고, 모용초慕容超를 공격하여 붙잡았고, 노순盧循을 맹추격하였고, 요홍姚泓을 사로잡아 4대공大功을 세웠으니, 천하天下에 감히 항거할 자가 없었다.
이나 其志不在桓文이요 而在九錫하니 亦已卑矣니라
그러나 그 뜻은 환공桓公 문공文公패업霸業에 있지 않고 오직 구석九錫에 있었으니 역시 비루한 일이었다.
方帝之克長安也 中原震恐하니라
무제武帝가 공격하여 장안長安에 들어감에 중원中原이 벌벌 떨었다.
원위元魏는 비록 요씨姚氏와 혼인관계가 있는 처지이나 감히 구원하지 못하였고, 강저羌氐는 비록 관중關中과 상호 의존관계를 가졌지만 감히 항쟁하지 못하였다.
此其智力有餘 足以有爲之時也니라
이것은 지력智力이 남아났기 때문이니, 족히 큰일을 할 수가 있는 시기였다.
若能因其兵勢하여 據秦隴之形勝하고 引吳越之饒富하여 以經略中夏하고 成曹公河朔之勢 則王伯之功可冀 顧所以用之何如耳니라
만일 능히 그 병세兵勢를 인하여 지리적 조건이 좋은 형승形勝을 의거하고, 재정적 조건이 우월한 요부饒富를 이용해서 중하中夏경략經略하고 조공曹公이 떨친 하삭河朔의 세력을 이루었다면 왕도王道패업霸業을 바랄 수 있었으니, 다만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매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군사가 나라에 쳐들어가지 못하고 부량傅亮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건업建業에 달려가서 구석九錫의 의론을 발의하게 하였다.
유목지劉穆之가 죽음에 남방南方에 다시 부탁할 사람이 없었으니, 비록 이미 나라에 쳐들어갔으나 나라 땅에 머무를 뜻이 없었고, 천 리의 땅을 들어 한 유자孺子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혁련발발赫連勃勃이 그 틈을 타서 공격하였으니, 병졸과 장수 가운데 죽은 자가 반을 넘었고, 낭패해서 돌아와 겨우 몸만 살아났을 뿐이다.
以帝之明으로 非不知諸將之不足以保秦이언만 而志有所在 不暇他慮矣니라
무제武帝의 밝은 지혜로써 여러 장수들이 나라 땅을 보존하기에 부족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뜻이 있는 데가 있는지라,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悲夫
슬프다.
以目前之利 而棄百世之功하고 有曹公削平之業이나 而俯從司馬父子攘竊之陋하니 此君子之所니라
목전目前의 이익을 탐하여 백세百世을 버렸고, 조공曹公평정平定업적業績이 있었으나 사마중달司馬仲達 부자父子찬탈簒奪한 비루한 일을 따랐으니, 이는 군자君子추한追恨하는 바이다.
孔子曰 知及之라도 仁不能守之 雖得之 必失之니라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지혜로 그 지위까지 갔어도 인덕으로 지키지 못하면 비록 지위를 얻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잃게 된다.
知及之하며 仁能守之라도 不莊以涖之 則民不敬이니라
지혜로 그 지위까지 갔고, 인덕으로 이를 지킨다 할지라도 위엄을 세워 임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공경하지 않을 것이다.
니라하니 古之爲國 必具此而後 能成大功이니라
지위로 그 지위까지 갔고, 인덕으로 이를 지키고, 위엄을 세워 임한다 해도 로써 백성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이 네 가지를 갖춘 뒤에야 능히 큰 공을 이룰 수 있다.
如武帝之用兵 無敵於天下 可以言智矣어니와 至其棄秦而歸하여 以求九錫之 尙可以爲仁乎
무제武帝용병用兵천하天下에 대적할 자가 없었던 경우와 같은 것은 라고 말할 수 있겠거니와, 나라 땅을 버리고 돌아와서 구석九錫음명淫名을 구하는 데에 이른 것도 오히려 이라 할 수 있겠는가?
惟其仁智不具
가 갖추어지지 못했다.
其功業 止於是也니라
그러므로 그 공업功業이 여기에 그치고 만 것이다.
역주
역주1 宋武帝 : 宋 武帝는 南朝의 宋을 창시한 劉裕(356~422)를 가리킨다. 그는 東晉 北部兵將領이 되어 孫恩과 盧循 등이 起義한 農民軍을 진압한 데 이어 桓玄을 격파하였고, 또 四川 등지를 할거한 세력을 제거하고 江南을 통일하였으며, 아울러 北伐하여 南燕과 後秦을 멸하였다.
그리고 元熙 2년(420)에 晉帝를 폐하고 宋나라를 건립하여 北方에서 崛起한 北魏와 남북이 대치하는 국면을 형성하였다.
역주2 東漢之衰……挾天子以令諸侯 : 曹操는 獻帝를 맞아 세우고 나서 漢나라 大丞相의 名義를 가지고 群雄을 토벌하였으니, 그 소행이 五霸의 소행과 같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五伯(패)之跡 : 五伯는 곧 춘추시대의 五霸이다. 당시 周室이 비록 미약했지만 이들 5개 세력은 모두 周室을 존중하고 夷狄을 물리쳤으니, 이것이 바로 天子의 名義를 가지고 사방을 征討한 셈이다.
역주4 旣滅二袁呂布劉表 : 二袁은 袁紹와 袁術을 이른다. 袁紹는 建安 7년(202)에 曹操와 官渡에서 싸워 패전하자 병이 나서 죽었고, 袁術은 袁紹의 從弟로 ‘帝’라고 僭稱하였는데, 建安 4년(199)에 식량이 떨어져 군중이 흩어졌고, 그는 도주하여 袁譚에게 의지하였으며, 또 劉備에게 공격을 당하여 도로 壽春으로 도주했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처럼 袁紹와 袁術은 曹操에게 멸망당한 것이 아닌데, 蘇轍이 ‘이미 二袁을 멸했다.’고 한 것은 아마 싸잡아서 한 말 같다.
呂布는 建安 3년(198)에 曹操에게 살해되었고, 劉表가 죽은 뒤에 曹操가 정벌하니, 劉表의 아들 劉琮이 曹操에게 항복하였다.
역주5 欲遂取江東 而不克 : 曹操가 劉琮을 항복시킨 뒤에 江을 따라 내려가서 東吳 孫權의 영토를 탈취하려고 하였으나 孫權과 劉備가 연합하여 曹操를 赤壁江에서 깨뜨리니, 曹操는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역주6 欲幷擧巴蜀 而不果 : 張魯는 본래 漢中 巴蜀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張魯가 투항한 뒤에 劉備가 劉璋을 습격하고 益州를 취하여 드디어 巴中에 웅거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7 再屈於吳蜀而公亦老矣 : 曹操는 赤壁戰에서 패한 뒤에 다시 孫權을 정벌하였으나 江東을 가지지 못하였고, 夏侯淵이 漢中을 지키다가 劉備에게 살해되자 曹操가 劉備를 정벌하였으나 성과 없이 돌아왔다. 이때가 建安 24년(219)이었으니, 曹操의 나이 65세였다.
역주8 董昭進九錫之議 : 《後漢書》 〈荀彧傳〉에 “董昭 등이 曹操에게 國公이란 벼슬을 올리고 아홉 종류의 예물을 갖추어 주려는 일을 獻帝에게 건의하기 위하여 음밀히 荀彧을 찾아가 상의하였더니, 荀彧이 ‘曹公이 본래 義兵을 일으킨 목적은 漢朝를 바로잡아 세우려는 것이니,……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그 일이 중지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曹操는 荀彧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曹操에게 魏公이란 벼슬이 주어졌고, 曹操는 뒤에 荀彧이 음독자살하게 하였다.”고 한다.
역주9 九錫 : 옛날 천자가 큰 공을 세운 제후에게 아홉 가지 물품을 주었으니, 곧 車馬, 衣服, 樂器, 朱戶, 納陛, 虎賁, 弓矢, 斧鉞, 秬鬯이다.
역주10 河朔 : 黃河 이북 지역을 범연하게 칭한다.
역주11 主盟諸夏 : 諸夏는 諸侯의 代稱이다. 여기서는 각 지방에 割據한 세력을 가리키니, 곧 각 지방 세력의 盟主란 뜻이다.
역주12 舊君 : 漢 獻帝를 가리킨다.
역주13 王莽九錫之事 : 《漢書》 〈王莽傳〉에 의하면 “王莽이 먼저는 大司馬가 되고 뒤에는 宰衡이 되었는데, 群臣들이 ‘宰衡의 지위는 응당 諸侯王 위에 있어야 하니, 束帛加璧, 大國乘車, 安車 각 1필, 驪馬 1駟를 하사하도록 하소서.’라고 아뢰자, 황제가 그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王莽이 九錫의 儀典을 받았다.”고 한다.
역주14 至司馬仲達父子 其勢蓋與公異矣 : 司馬仲達 父子는 司馬懿 및 그 아들 司馬師와 司馬昭를 가리킨다. 司馬懿(178~251)는 字가 仲達인데, 魏 明帝의 遺詔를 받아 曹爽과 함께 齊王 芳을 보필하다가 뒤에 曹爽을 죽이고 스스로 丞相이 되어 단독으로 國政을 총괄하였다. 司馬師(207~255)는 司馬懿의 長子로 魏나라의 大將軍이 되어 國政을 전담하였으며, 曹芳을 폐하고 高貴鄕公 曹耄를 맞아 세웠다. 司馬昭(211~265)는 司馬懿의 次子로 司馬師가 죽은 뒤에 魏나라 大將軍을 이어받아 國政을 전담하였다. 曹耄가 불만을 품은 나머지 군중을 이끌고 司馬昭를 공격하다가 도리어 살해되었다. 曹奐이 즉위하자, 司馬昭를 晉公으로 봉했다가 晉王으로 승진시켰다.
역주15 擁兵天子之側 : 司馬懿의 父子가 모두 大將軍이 되어 兵權을 쥐고 京城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6 旣殺王凌 害諸葛誕 : 《三國志》 〈魏志 王凌傳‧諸葛誕傳〉에 의하면 “司馬懿가 曹爽을 죽인 뒤에 王凌을 太尉로 승진시켰다. 뒤에 王凌이 ‘齊王 芳이 王位를 제대로 맡지 못하여 强臣에게 제재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나이가 많고 재주가 있는 楚王 彪를 세우려고 도모하였는데, 모의가 누설되자 司馬懿가 군사를 거느리고 치니, 王凌은 음독자살하였다. 諸葛誕은 司馬懿를 따라 吳를 정벌하고 王凌과 毌丘儉을 쳐서 공을 세워 高平侯에 봉해지고 征東大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뒤에 군사를 일으켜 司馬昭를 배반했다가 군사가 패하여 피살되었다고 한다.
역주17 又降劉禪 服曹氏之所不能服 : 景耀(蜀 後主의 연호) 6년(263) 魏나라가 蜀나라를 칠 때에 鎭西將軍 鄧艾가 陰平道로부터 들어가서 成都를 핍박하니, 後主가 魏나라에 항복하였다. 당시 司馬昭가 魏나라의 國政을 전담하고 있었다. 曹操가 國政을 담당했을 때에는 魏나라‧蜀나라‧吳나라 3國이 鼎立하였는데, 이때에 蜀主가 항복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8 宋武旣誅桓氏 收遺晉而封植之 : 東晉 말년에 桓溫의 아들 桓玄이 帝位를 簒奪하고 晉 安帝를 潯陽으로 옮기자, 劉裕가 군사를 일으켜 桓玄을 치니, 桓玄의 군사가 패하여 桓玄이 붙잡혔으므로 그를 江陵에서 斬首하고, 따라서 桓修‧桓弘‧桓謙‧桓升‧桓振 등도 베어 죽였다. 劉裕는 桓溫의 神主를 불태우고 晉의 神主를 제작하여 太廟에 봉안하였으며, 殘存한 晉 王家의 宗室을 거두어 세력을 扶植하였다.
역주19 又克譙縱 : 譙縱(?~413)은 十六國時代 後蜀의 國君이다. 재위한 지 2년 만에 後秦主 姚興에게 稱臣하였고, 義熙(東晉 安帝의 연호) 9년(412)에 劉裕의 部將 朱齡石에게 멸망되었다.
역주20 執慕容超 : 慕容超는 慕容德의 형이자 北海王 慕容納의 아들로, 慕容德을 이어 南燕主가 되었다가 劉裕에게 잡혀 建康에서 참수되었다.
역주21 逐盧循 : 盧循은 바로 東晉 農民起義軍 孫恩의 妹婿이다. 孫恩이 죽자 首領으로 추대되었는데, 劉裕의 공격을 받고 피해 다니다가 뒤에 交州刺史 林慧度에게 참수되었다.
역주22 擒姚泓 : 姚泓은 後秦主 姚興의 아들이다. 姚泓이 즉위한 뒤에 兄弟가 殘殺하였다. 義熙 12년(416)에 劉裕가 北討하고, 다음해에 姚泓을 藍田에서 대파하고, 뒤에 長安에 쳐들어가서 姚泓을 잡아 보내 建康의 저자에서 참수하였다.
역주23 方帝之克長安也……而不敢爭 : 義熙 13년(417)에 劉裕가 長安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姚泓은 항상 晉軍의 핍박을 받았으므로 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援兵을 청하자, 魏나라에서는 勃勃嵩‧乙旃眷‧王洛生 등을 파견하였는데, 그들은 멀리 河內‧河東에 주둔하여 姚泓을 성원하고 감히 가까이서 구원하지 못하였다.
元魏는 곧 北魏이다. 北魏主의 원래 성이 拓跋氏였는데, 孝文帝 때에 와서 성을 元으로 고쳤기 때문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羌氐는 羌族과 氐族을 아울러 칭하는 말이다. 이들은 東晉 때에 前秦과 後涼을 세웠는데, 이때에 모두 멸망되었다. 脣齒는 상호 의존하여 쌍방이 다 이익을 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역주24 其兵未入秦……發九錫之議 : 《宋史》 〈傅亮傳〉에 의하면 “傅亮이 宋 高祖 劉裕를 따라 關洛을 정벌하고 도로 彭城에 이르렀다. 이때 劉裕가 禪位를 받을 생각이 있으나 발언을 하기가 곤란하였다.
그래서 朝臣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조용히 말하기를 ‘桓玄이 簒奪하여 鼎命이 이미 옮겨갔을 때 내가 맨 처음 大義를 외쳐 皇室을 興復시키고, 南征北伐하여 四海를 平定하였으니, 功이 이루어지고 業이 나타났으므로 드디어 九錫을 받았다. 금년이 저물어가는데, 崇極이 이와 같다. 物은 盛滿을 경계하는 법이니 오래 편안함만을 누릴 것이 아니다. 지금 爵位를 받들고 京師로 돌아가서 늙고 싶다.’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은 오직 功德만을 성대하게 칭송할 뿐, 그 말뜻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傅亮만은 그 말뜻을 깨닫고 建康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그래서 都城에 이르자, 晉 天子가 劉裕를 불러 궐내로 들어와 보필하게 하였고, 오래지 않아 劉裕는 禪位를 받았다.”고 한다.
역주25 劉穆之死……付一孺子而去 : 《宋書》 〈武帝本紀〉, 〈劉穆之傳〉에 의하면 劉穆之는 宋 武帝의 유력한 輔佐였다. 宋 武帝가 北伐하려고 大軍을 거느리고 京師를 출발할 때에 世子 劉義符를 中軍將軍으로 삼고, 劉穆之를 左僕射로 삼아 東府에 들어가서 안팎을 총괄하게 하였는데, 다음해에 劉穆之가 죽었다. 宋 武帝는 본래 關中에 가서 趙나라와 魏나라를 經略하려고 하다가 劉穆之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빨리 달려서 彭城으로 돌아왔고, 오래지 않아 京邑으로 들어갔다. 桂陽公 劉義眞을 머물게 하여 安西將軍으로 삼고 腹心將佐를 머물게 하여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孺子는 劉裕의 아들 劉義眞을 가리키는데, 이때 나이가 어려서 重任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역주26 赫連勃勃乘之……僅乃得脱 : 赫連勃勃(?~425)은 匈奴 左賢王 去卑의 후손으로서 朔方의 땅을 다 차지하고 스스로 ‘大夏天王’이라 칭한 사람이다. 《南史》 〈宋本紀〉에 의하면 “關中이 騷亂하자, 宋 武帝가 右將軍 朱齡石을 보내 安西將軍 桂陽公 劉義眞을 대신하여 雍州刺史가 되게 하였으며, 劉義眞은 돌아오면서 赫連勃勃의 추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겨우 몸만 살아났으며, 여러 장수와 朱齡石도 다 함몰하였다.”고 한다.
역주27 追恨 : 지난 일을 거슬러 올라가 후회함을 가리킨다.
역주28 知及之……未善也 : 이 말은 《論語》 〈衛靈公〉에 보인다.
역주29 四者 : 智‧仁‧莊‧禮를 가리킨다.
역주30 淫名 : 본분에 과분한 칭호를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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