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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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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낙양이씨원지시洛陽李氏園池詩〉에 대한 기문
文不着思而自風雅니라
문장은 유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스스로 풍아風雅의 맛이 풍긴다.
洛陽 古帝都 其人習於漢唐衣冠之遺俗이니 居家 治園池하고 築臺榭하고 植草木하여 以爲歲時遊觀之好니라
낙양洛陽은 옛날 제왕帝王의 도읍지인지라, 그곳 사람들은 의관衣冠유속遺俗을 익혔으니, 집에 있을 때에는 원지園池를 다스리고 대사臺榭를 건축하고 초목草木을 심어서 세시歲時유관遊觀하는 좋은 환경을 만든다.
其山川風氣 淸明盛麗하니 居之可樂이니라
산천풍기山川風氣청명淸明하고 성려盛麗하니 그곳에 살면서 즐길 수 있다.
平川廣衍 東西數百里 嵩高少室天壇王屋 岡巒靡迤 四顧可挹이요
평탄한 냇물이 흐르는 넓은 땅은 동서로 수백 리가 펼쳐져 있고, 숭고산嵩高山(嵩山), 소실산少室山, 천단산天壇山, 왕옥산王屋山은 산등성이와 산봉우리가 연이어졌으니, 사방을 돌아봄에 끌어당길 만하였다.
伊洛瀍澗 流出平地
이하伊河, 낙하洛河, 전수瀍水, 간수澗水는 평지에서 흘러나간다.
其山林之勝 泉流之潔 雖其閭閻之人이나 與其公侯共之니라
그러므로 그 산림山林의 승경과 천류泉流의 맑음은 비록 여염閭閻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공후公侯와 함께 즐길 수 있다.
一畝之宮 上矚靑山하고 下聽流水하며 奇花脩竹 布列左右하니 而其貴家巨室園囿亭觀之盛 實甲天下 若夫李侯之園 洛陽之所以一二數者也니라
1이 위로는 청산靑山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유수流水를 굽어보며, 기화奇花수죽脩竹이 좌우로 펼쳐져 있으니, 그 귀가貴家거실巨室원유園囿정관亭觀의 성대함은 실로 천하에서 으뜸이고, 이후李侯원림園林 풍경風景으로 말하면 낙양洛陽원림園林 중에서 첫 번째나 두 번째로 꼽을 만하다.
李氏家 世名將이니라 大父濟州 方用兵河東하여 百戰百勝이요 烈考寧州하고 守雄州十有四年 繕守備하고 撫士卒하며 精於用間하여 其功烈尤奇니라
이씨李氏의 집안은 대대로 명장名將이 나왔으니, 제주자사濟州刺史를 지낸 대부大父(祖父)는 태조황제太祖皇帝에게 포의布衣의 옛 친구가 되는데, 하동河東출병出兵하여 백전백승百戰百勝하였고, 영주자사寧州刺史를 지낸 열고烈考(父親)는 장성황제章聖皇帝(宋 진종眞宗)를 섬기고, 웅주雄州를 14년 동안 지키면서 방위시설防衛施設수선修繕하고 사졸士卒을 어루만지며, 에 대하여 반간계反間計를 잘 써서 그 공렬功烈이 더욱 높았다.
李侯以將家子 從仕하여 歷踐父祖舊職하고 勤勞愼密하여 老而不懈하니 實能世其家니라
이후李侯장수將帥 집안의 자제로서 젊은 시절에 종사從仕하여 부조父祖구직舊職을 내리 지내면서 근로勤勞하고 신밀愼密하여 늙도록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으니, 확실히 그 가풍家風을 승계 보유하였다.
旣得謝하고 居洛陽 引水植竹하여 求山谷之樂이니라
그는 이미 관직을 내놓고 낙양洛陽에 살면서 물을 끌어오고 대나무를 심어서 산곡山谷의 즐거움을 추구하였다.
士大夫之在洛陽者 皆喜從之遊 蓋非獨爲其園也리라
낙양洛陽에 있는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기꺼이 종유從遊한 것은 아마 그 원림園林승경勝景만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으리라.
凡將以講聞濟寧之餘烈하여 而究觀祖宗用兵任將之遺意 其方略遠矣니라
제주자사濟州刺史를 지낸 조부祖父영주자사寧州刺史를 지낸 부친父親여열餘烈을 강론하여 조종祖宗용병用兵하고 장수를 임용하던 유의遺意를 탐구하려고 하였으니, 그 방략方略이 원대하였다.
自朝之公卿 皆因其園而贈之以詩하니 凡若干篇이니라
그러므로 조정의 공경公卿들이 모두 그 원유園囿로 인하여 를 주었으니, 무릇 약간의 편이었다.
仰以嘉其先人하고 而俯以善其子孫이니 則雖洛陽之多大家世族이나 蓋未易以園囿相高也리라
위로는 그 선인先人을 찬양하고 아래로는 자손子孫을 칭찬하였으니, 비록 낙양洛陽의 많은 대가大家세족世族이라 할지라도 아마 쉽게 원유園囿를 가지고 서로 높은 체하지 못할 것이다.
李侯之年 旣八十有三矣 而視聽不衰하고 筋力益强하여 日增治其園而往遊焉이니라
희령熙寧 갑인년甲寅年이후李侯의 나이 이미 83세였으나 시력과 청력이 쇠하지 않고, 근력筋力이 더욱 강장强壯하여 날마다 더 그 원림園林을 다스리면서 가서 놀았다.
將列詩於石할새 其子遵度 官於濟南하니 實從予遊니라
장차 그 를 돌에 새기려고 할 때 그 아들 준도遵度제남濟南에 벼슬하고 있었으니, 실은 나를 따라 놀았던 것이다.
以侯命求文以記어늘 予不得辭하여 遂爲之書니라
그가 이후李侯으로 기문을 구하거늘, 나는 사양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기문을 지었다.
熙寧七年十一月十七日하노라
희령熙寧 7년(1074) 11월 7일에 기문을 쓰노라.
역주
역주1 洛陽李氏園池詩記 : 이 기문은 熙寧 7년(1074)에 지은 것이다. ‘李氏’는 누구인지 참고할 수 없다.
역주2 太祖皇帝 : 여기서는 宋 太祖 趙匡胤을 가리킨다.
역주3 布衣之舊 : 여기서는 趙匡胤이 아직 黃袍를 입고 皇帝가 되기 전의 舊交를 가리킨다.
역주4 章聖皇帝 : 宋 眞宗 趙恒으로, 시호가 應符稽古神功讓德文明武定章聖元孝皇帝이다.
역주5 結髮 : 머리털을 묶는 것이니, 곧 나이가 젊은 때를 가리킨다.
역주6 熙寧甲寅 : 宋 神宗 熙寧 7년을 가리킨다.
역주7 : 張伯行은 《唐宋八大家文鈔》에서 “園亭의 승경을 기록하면서 그 家世의 勳勞와 李侯의 進退大節을 근본으로 내세움으로써 士大夫가 그 園亭에 즐겨 놀면서 詩를 준 것은 단지 耳目의 보고 들을 것만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보였으니, 이것이 바로 文字가 大體를 占得한 곳이다.[記園亭之勝 而本其家世之勳勞 與李侯進退大節 以見士大夫樂遊其園而贈之以詩者 不止爲耳目之觀也 便是文字占得大體處]”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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