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洛陽은 古帝都라 其人習於한漢당唐衣冠之遺俗이니 居家엔 治園池하고 築臺榭하고 植草木하여 以爲歲時遊觀之好니라
平川廣衍은 東西數百里요 숭고산嵩高소실산少室천단산天壇왕옥산王屋은 岡巒靡迤니 四顧可挹이요
故로 其山林之勝과 泉流之潔은 雖其閭閻之人이나 與其公侯共之니라
一畝之宮은 上矚청산靑山하고 下聽流水하며 奇花脩竹은 布列左右하니 而其貴家巨室園囿亭觀之盛은 實甲天下요 若夫이후李侯之園은 낙양洛陽之所以一二數者也니라
이씨李氏家
는 世名將
이니라 大父
제주자사濟州는 於
에 爲
니 方用兵
하동河東하여 百戰百勝
이요 烈考
영주자사寧州는 事
하고 守
웅주雄州十有四年
에 繕守備
하고 撫士卒
하며 精於用間
하여 其功烈尤奇
니라
이후李侯以
장수將家子
로 從仕
하여 歷踐父祖舊職
하고 勤勞愼密
하여 老而不懈
하니 實能世其家
니라
旣得謝하고 居낙양洛陽에 引水植竹하여 求山谷之樂이니라
士大夫之在낙양洛陽者 皆喜從之遊는 蓋非獨爲其園也리라
凡將以講聞제주자사濟영주자사寧之餘烈하여 而究觀祖宗用兵任將之遺意니 其方略遠矣니라
故로 自朝之公卿이 皆因其園而贈之以詩하니 凡若干篇이니라
仰以嘉其先人하고 而俯以善其子孫이니 則雖낙양洛陽之多大家世族이나 蓋未易以園囿相高也리라
에 이후李侯之年
이 旣八十有三矣
나 而視聽不衰
하고 筋力益强
하여 日增治其園而往遊焉
이니라
將列시詩於石할새 其子준도遵度 官於제남濟南하니 實從予遊니라
以이후侯命求文以記어늘 予不得辭하여 遂爲之書니라
07. 〈낙양이씨원지시洛陽李氏園池詩〉에 대한 기문
문장은 유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스스로 풍아風雅의 맛이 풍긴다.
낙양洛陽은 옛날 제왕帝王의 도읍지인지라, 그곳 사람들은 한漢‧당唐 의관衣冠의 유속遺俗을 익혔으니, 집에 있을 때에는 원지園池를 다스리고 대사臺榭를 건축하고 초목草木을 심어서 세시歲時로 유관遊觀하는 좋은 환경을 만든다.
그 산천풍기山川風氣는 청명淸明하고 성려盛麗하니 그곳에 살면서 즐길 수 있다.
평탄한 냇물이 흐르는 넓은 땅은 동서로 수백 리가 펼쳐져 있고, 숭고산嵩高山(嵩山), 소실산少室山, 천단산天壇山, 왕옥산王屋山은 산등성이와 산봉우리가 연이어졌으니, 사방을 돌아봄에 끌어당길 만하였다.
이하伊河, 낙하洛河, 전수瀍水, 간수澗水는 평지에서 흘러나간다.
그러므로 그 산림山林의 승경과 천류泉流의 맑음은 비록 여염閭閻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공후公侯와 함께 즐길 수 있다.
1묘畝의 궁宮이 위로는 청산靑山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유수流水를 굽어보며, 기화奇花와 수죽脩竹이 좌우로 펼쳐져 있으니, 그 귀가貴家‧거실巨室의 원유園囿와 정관亭觀의 성대함은 실로 천하에서 으뜸이고, 이후李侯의 원림園林 풍경風景으로 말하면 낙양洛陽의 원림園林 중에서 첫 번째나 두 번째로 꼽을 만하다.
이씨李氏의 집안은 대대로 명장名將이 나왔으니, 제주자사濟州刺史를 지낸 대부大父(祖父)는 태조황제太祖皇帝에게 포의布衣의 옛 친구가 되는데, 하동河東에 출병出兵하여 백전백승百戰百勝하였고, 영주자사寧州刺史를 지낸 열고烈考(父親)는 장성황제章聖皇帝(宋 진종眞宗)를 섬기고, 웅주雄州를 14년 동안 지키면서 방위시설防衛施設을 수선修繕하고 사졸士卒을 어루만지며, 적敵에 대하여 반간계反間計를 잘 써서 그 공렬功烈이 더욱 높았다.
이후李侯는 장수將帥 집안의 자제로서 젊은 시절에 종사從仕하여 부조父祖의 구직舊職을 내리 지내면서 근로勤勞하고 신밀愼密하여 늙도록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으니, 확실히 그 가풍家風을 승계 보유하였다.
그는 이미 관직을 내놓고 낙양洛陽에 살면서 물을 끌어오고 대나무를 심어서 산곡山谷의 즐거움을 추구하였다.
낙양洛陽에 있는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기꺼이 종유從遊한 것은 아마 그 원림園林의 승경勝景만을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으리라.
제주자사濟州刺史를 지낸 조부祖父와 영주자사寧州刺史를 지낸 부친父親의 여열餘烈을 강론하여 조종祖宗이 용병用兵하고 장수를 임용하던 유의遺意를 탐구하려고 하였으니, 그 방략方略이 원대하였다.
그러므로 조정의 공경公卿들이 모두 그 원유園囿로 인하여 시詩를 주었으니, 무릇 약간의 편이었다.
위로는 그 선인先人을 찬양하고 아래로는 자손子孫을 칭찬하였으니, 비록 낙양洛陽의 많은 대가大家‧세족世族이라 할지라도 아마 쉽게 원유園囿를 가지고 서로 높은 체하지 못할 것이다.
희령熙寧 갑인년甲寅年에 이후李侯의 나이 이미 83세였으나 시력과 청력이 쇠하지 않고, 근력筋力이 더욱 강장强壯하여 날마다 더 그 원림園林을 다스리면서 가서 놀았다.
장차 그 시詩를 돌에 새기려고 할 때 그 아들 준도遵度가 제남濟南에 벼슬하고 있었으니, 실은 나를 따라 놀았던 것이다.
그가 이후李侯의 명命으로 기문을 구하거늘, 나는 사양할 수가 없어서 드디어 기문을 지었다.
희령熙寧 7년(1074) 11월 7일에 기문을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