然
이나 하여 以重父之過
하니 可以爲廉矣
나 未得爲
인仁也
니라
昔者에 공자孔子之門人계로季路고시高柴는 皆事출공出公이니라
공자孔子自진陳反於위衛하신대 자로子路問曰 위衛君待공자子而爲政하시나니 공자子將奚先이시릿가 공자孔子曰 必也正名乎인저
名不正이면 則言不順하고 言不順이면 則事不成하고 事不成이면 則禮樂不興하고 禮樂不興이면 則刑罰不中하고 刑罰不中이면 則民無所措手足이니라
영공靈公黜其子而子其孫하고 출공出公不父其父而禰其祖하니 人道絶矣니라
使첩輒而知禮인댄 必辭하고 辭而不獲인댄 必逃하며 첩輒逃而영郢立이면 則名正矣리니라
若첩輒避位而納其父면 是세자世子爲君也어늘 而名有不正乎아
위衛나라의 대란大亂은 두 차례나 있었는데, 모두 부자父子, 부부夫婦의 사이에서 일어났다.
선공宣公과 영공靈公이 오로지 화단禍端을 일으키려고 한 것은 진실로 족히 말할 것이 못 되거니와, 급자急子와 수자壽子는 서로 앞다투어 죽었고, 장공莊公과 출공出公은 부자父子가 서로 공격하여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온 기간이 20여 년이나 되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같지 않음이 이렇게까지 되었던가?
그러나 급자急子와 수자壽子는 의리를 중시하였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은 오吳나라의 태백太伯(泰伯)이 되지 못하고 신생申生의 화禍를 답습하여 자기 아버지의 과실을 가중시켰으니, 청렴한 사람은 될 수 있으나 인仁한 사람은 될 수 없었다.
옛날에 공자孔子의 문인인 계로季路(子路)와 고시高柴는 모두 출공出公(衛輒)을 섬겼다.
공자孔子께서 진陳나라로부터 위衛나라에 돌아오시니, 자로子路가 묻기를 “위衛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 정치를 맡기려고 하시니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명분을 먼저 바로잡겠다.
명분이 바로 서지 못하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며,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예악이 흥기되지 못하고, 예악이 흥기되지 못하면 형벌이 바르게 적용되지 못하며, 형벌이 바르게 적용되지 못하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명분이 서면 반드시 말을 할 수 있고, 말을 하면 반드시 그대로 시행할 수 있으니, 군자는 말을 함에 있어서 구차할 것이 없을 뿐이니라.”고 하셨다.
위衛나라의 명분이 이때에 바로 서지 못했다고 할 수 있도다.
영공靈公은 아들을 내쫓고 손자를 아들로 여겼고, 출공出公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겼으니, 인륜人倫의 도덕이 절단된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이때에 명분을 바로 세우려고 하셨다면 어떻게 했어야 옳았겠는가?
영공靈公이 죽자 위衛나라 사람들은 공자公子 영郢을 세우려 하다가 영郢이 마땅치 않자 첩輒을 임금으로 세웠다.
가사 첩輒이 예禮를 알았다면 반드시 사양을 했을 것이고 사양해도 안 되면 반드시 도망을 갔을 것이며, 첩輒이 도망가고 영郢이 임금으로 즉위했다면 명분이 바로 섰을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공자孔子께서 정치를 하심에 어찌 장차 첩輒을 폐하고 영郢을 세우시겠는가?
또한 장차 첩輒으로 하여금 임금의 지위를 피하게 하고 괴외蒯聵를 들여앉히는 정도였을 것이다.
괴외蒯聵는 아버지에게 죄를 얻어 살아서는 봉양하지 못하고 죽어서는 거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위衛나라에 들어온 것에 대하여 《춘추春秋》에서는 “진晉나라 조앙趙鞅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위衛나라 세자世子 괴외蒯聵를 척戚 지방에 들여보냈다.”라고 적었다.
세자世子가 아닌데도 세자世子라고 이름을 한 것은 그 아들이 위衛나라에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는 세자世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첩輒이 임금의 지위를 피하고 그 아버지를 들여보냈다면 이 세자世子가 자연히 임금이 되는 것이니, 명분이 바로 서지 않았겠는가?
명분이 바로 서면 위衛나라가 안정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