後世推原其故而不得
이로되 以吾觀之
컨대 惜夫其未聞
也哉
인저
昔
초楚소왕昭王有疾
이어늘 卜之曰
황하河爲
라한대 대부大夫請祭諸郊
하니
장강江한수漢장수漳이 초楚之望也
니 禍福之至 不是過也
니라
소왕王使問
주周태사史한대 태사史曰 其當
소왕王身乎
인저 若
之
면 可移於
영윤令尹사마司馬하리로소이다하니
不榖이 不有大過면 天其夭諸아 有罪受罰이어늘 又焉移之리오하고 亦弗禜이니라
吾觀태종太宗所爲컨대 其不知道者 衆矣어늘 其能免乎아
之間
에 天下旣平
이언만 征伐四夷
하고 滅
돌궐突厥하고 夷
고창高昌하고 殘
토욕혼吐谷渾하여 兵出四克
하니 務勝而不知止
니라
하니 로되 而帝安爲之
하니 原其意
컨대 亦欲夸當世
하고 고구려高後世耳
니라
帝嘗得秘讖하니 言당唐後必中微하여 有女武代王이라하거늘 以問이순풍李淳風하여 欲求而殺之한대 이순풍淳風曰 其兆旣已成하여 在宮中矣니이다
夫天命之不可易은 惟修德或能已之어늘 而帝欲以殺人弭之하니 難哉인저
이적李勣起於布衣하여 忠力勁果하고 有節俠之氣니라
嘗事이밀李密하고 友단웅신單雄信이러니 이밀密敗에 不忍以其地求利하고 이밀密死에 不廢舊君之禮니라
帝以是爲可用하여 疾革에 謂고종高宗하되 爾於이적勣無恩이니라
今以事出之하니 我死어든 卽授以복야僕射하라한대 고종高宗從之하니라
及廢皇后하고 立무소의武昭儀에 召이적勣與장손무기長孫無忌저수량褚遂良計之한대 이적勣稱疾不至하니라
帝曰 皇后無子 罪莫大於絶嗣라 將廢之라하니 저수량遂良等不可라하니라
他日이적勣見에 帝曰 將立소의昭儀나 而顧命大臣이 皆以爲不可라하여 今止矣니라하니
이적勣曰 此陛下家事니 不須問外人이니이다한대 由此廢立之議遂定하니라
이적勣은 匹夫之俠也라 以死徇人은 不以爲難이나 至於禮義之重하여는 社稷所由安危이니 이적勣不知也니라
且使이적勣信賢인댄 託國於父하여 竭忠力以報其子可矣어늘 何至父逐之子復之而後可哉아
挾數以待臣下는 於義旣已薄矣니 凡此皆不知道之過也니라
苟不知道면 則凡所施於世에 必有逆天理하고 失人心하되 而不自知者니라
故
로 이요 태종太宗은 惟不知道
라 雖天下旣安且治
나 而幾至於絶滅
이니라
당형천唐荊川曰 篇中整段抄故事나 而斷語全少하니 蓋論之一體也라하니라
태종太宗을 ‘부지도不知道’란 세 글자로써 죄를 준 것은 확론確論이다.
당唐 태종太宗의 어짊은 서한西漢 이후로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유능한 인재를 사역했기 때문에 장수와 정승에 적격자 아닌 사람이 없었으며, 공근恭謹하고 검박儉朴하고 비용을 절약했기 때문에 온 천하가 형벌을 사용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삼대三代(夏‧은殷‧주周) 이후로 그에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 이르러서 무씨武氏의 난亂을 만나니, 자손子孫의 도륙屠戮이 마치 실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후세에 그 원인을 아무리 추구해도 규명되지 않았으되, 나의 소견으로 보건대, 애석하게도 그가 대도大道에 대한 것을 듣지 못한 탓이었다.
옛날 초楚 소왕昭王이 병환이 났거늘, 복자卜者가 말하기를 “황하黃河가 괴변을 부려 빌미가 되었다.”고 하니, 대부大夫들은 교외郊外에 나아가서 〈황하黃河에〉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였다.
이에 소왕昭王은 말하기를 “삼대三代(夏‧은殷‧주周)의 명사命祀에 〈제후들은〉 자기 영토 안의 산천에만 제사 지내게 하였다.
우리 초楚나라는 장강長江‧한수漢水‧수수睢水‧장수漳水의 네 강의 신에게만 망제望祭를 지낼 뿐이니, 화복禍福이 오는 것도 여기(네 강의 신)에서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비록 부덕하기는 하지만 황하의 신에게는 별다른 죄를 지은 바가 없다.” 하고서는 결국 제사 지내지 않았다.
소왕昭王이 장차 죽으려 할 때 적조赤鳥 떼 모양의 구름이 3일 동안이나 해의 가장자리를 나돌고 있었다.
소왕昭王이 사자使者를 주周나라 태사太史에게 보내어 그 까닭을 물어보게 하였더니, 주周나라 태사太史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왕의 신상에 관계되는 일인데, 만일 재앙을 제거해 달라고 비는 영제禜祭를 올린다면 이 화액을 영윤令尹이나 사마司馬의 신상으로 옮겨놓을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소왕昭王은 말하기를 “뱃속 병을 제거하여 팔다리 위에 옮겨놓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나에게 큰 과실이 있지 않다면 하늘이 요절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며, 죄과가 있으면 벌을 받을 것이거늘, 또한 어찌 이를 옮겨 면할 수 있으랴?” 하고서 결국 영제禜祭를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초楚 소왕昭王이 대도大道를 잘 알고 있으니, 그가 나라를 잃지 않음이 당연하도다.”라고 하였다.
내가 태종太宗이 한 일들을 살펴보건대, 대도大道를 알지 못한 것이 많았거늘 화환禍患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정관貞觀 연간에 천하天下가 이미 평정되었건만, 사이四夷를 정벌하고 돌궐突厥을 멸하고 고창高昌을 평정하고 토욕혼吐谷渾을 격파하는 등 군사가 사방으로 나가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승리만을 힘쓰고 중지할 줄을 몰랐다.
최후에는 친히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려 함에 대신大臣들이 힘써 간쟁諫諍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겨우 이겼으니, 수씨隋氏보다 나은 점은 다행히 한 번 이긴 것뿐이건만, 태종太宗은 태연하게 그 일을 하였으니, 그 뜻을 추구하건대, 또한 당세에 뽐내고 후세에 높이 추앙받으려는 심산이었을 뿐이다.
태자太子 승건承乾이 이미 태자太子의 자리에 선 지 10여 년 만에 태종太宗은 다시 위왕魏王 태泰를 총애하여 형제兄弟들로 하여금 서로 배제하게 하였다.
승건承乾이 이미 폐위됨에 진왕晉王이 적자嫡子였다.
그런데 태종은 태泰를 세워서 후일에 진왕晉王에게 전위傳位가 되게 하려고 하였으나 유예하며 결정하지 못하고, 패도佩刀를 끌어당겨 스스로 찌르려고까지 했다가 대신大臣들이 구원하여 중지되었다.
부자父子의 사이는 애정 때문에 가볍게 주고 빼앗는 것이 이와 같기까지 하였다.
태종太宗이 일찍이 비참秘讖을 구득하였더니 거기에 “당唐나라가 반드시 중간에 미약해져서 여무女武가 대신 왕이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거늘, 이순풍李淳風에게 물어서 그 여무女武를 찾아 죽이려고 하니, 이순풍李淳風이 말하기를 “그 조짐이 이미 이루어져서 궁중宮中에 있습니다.
한갓 의심스런 살육殺戮이 잘못하면 무고한 사람에게 미치게 할 뿐입니다.
또한 이후 40년이 지나면 그 사람이 이미 늙을 것이니, 늙으면 인자仁慈할 것입니다.
비록 제위帝位를 이어받아 조대朝代를 바꾼다 하다라도 반드시 이씨李氏를 단절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를 죽이고 다시 소장少壯한 자를 낳아 많이 죽여 원풀이를 한다면 자손子孫에 남아날 자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그 말을 받아들여 중지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의심으로 이군선李君羨를 죽였다.
무릇 천명天命은 바꿀 수는 없어도 오직 덕德을 닦으면 혹 그치게 할 수도 있거늘, 태종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치게 하려고 하였으니, 곤란한 일이었다.
태종太宗이 늙음에 장차 대신大臣을 골라서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하려고 하였다.
이적李勣은 포의布衣(선비) 출신으로 충성스럽고 힘세고 강인하고 과감하며 절조와 의협기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이밀李密을 섬겼고 선웅신單雄信을 친구로 삼았는데, 이밀李密이 패함에 차마 그의 땅으로써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이밀李密이 죽음에 옛 임금에 대한 예법을 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웅신單雄信이 처형됨에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여 〈그 살이〉 그와 함께 죽게 하였다.
태종太宗은 이로써 이적李勣을 쓸 만한 사람으로 여기어, 병이 위중하자 고종高宗에게 이르기를 “너는 이적李勣에게 은혜를 베푼 일이 없다.
지금 그는 일 때문에 밖에 나가 있으니, 내가 죽거든 즉시 불러들여 복야僕射 벼슬을 주도록 하라.”고 하니, 고종高宗이 그 말을 따랐다.
〈고종高宗이〉 황후皇后를 폐하고 무소의武昭儀(則天武后)를 세우려 할 때에 이적李勣과 장손무기長孫無忌‧저수량褚遂良을 불러 그 일을 의논하고자 하니, 이적李勣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고종高宗이 이르기를 “황후皇后에게 아들이 없으니 죄가 후사後嗣를 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지라, 장차 폐하려고 한다.”고 하니, 저수량褚遂良 등은 불가한 일이라고 하였다.
후일에 이적李勣이 고종高宗을 뵙자, 고종이 이르기를 “장차 소의昭儀를 세우려고 했으나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이 모두 불가한 일이라고 해서 지금 중지하였다.”고 하니,
이적李勣은 말하기를 “이는 폐하陛下의 집안일이니, 외인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폐립廢立에 대한 의논이 정해졌다.
이적李勣은 필부匹夫의 협사俠士인지라 죽음으로써 남을 따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예의禮義의 중요함이야 사직社稷의 안위安危가 매인 것이니, 이적李勣이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태종太宗이 그에게 어린 임금을 부탁하고 천하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또 가사 이적李勣이 믿을 만하게 어질었다면 아버지에게서 나라를 부탁받아서 충력忠力을 다하여 그 아들에게 보답하게 했어야 옳았거늘, 어찌 아버지는 〈이적李勣을〉 쫓아내고 아들은 〈이적李勣을〉 돌아오게 하는 술수까지 썼어야 옳았겠는가?
술수를 가지고 신하를 대하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이미 박대한 것이니, 이는 모두 대도大道를 모르는 과실인 것이다.
진실로 대도大道를 모르면 세상에 베푸는 모든 일에 반드시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인심을 잃어도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초楚 소왕昭王은 대도大道를 알았는지라 비록 나라를 잃었으나 반드시 회복하였고, 태종太宗은 대도大道를 몰랐는지라 비록 천하가 이미 안정되고 다스려졌지만 거의 절멸絶滅에 이르렀다.
공자孔子께서 나라의 정세를 살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당형천唐荊川(唐順之)이 말하기를 “편중篇中에서 문단文段을 정리하고 고사故事를 발췌했으나 단정斷定한 말은 전혀 적으니, 대개 논論의 한 체재인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