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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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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태종太宗에 대한
罪太宗以不知道三字 確論이니라
태종太宗을 ‘부지도不知道’란 세 글자로써 죄를 준 것은 확론確論이다.
唐太宗之賢 自西漢以來一人而已니라
태종太宗의 어짊은 서한西漢 이후로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어진 사람을 임용하고 유능한 인재를 사역했기 때문에 장수와 정승에 적격자 아닌 사람이 없었으며, 공근恭謹하고 검박儉朴하고 비용을 절약했기 때문에 온 천하가 형벌을 사용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自三代以下 未見其比也니라
삼대三代(夏‧) 이후로 그에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들에게 전하고 손자에 이르러서 무씨武氏을 만나니, 자손子孫도륙屠戮이 마치 실처럼 끊어지지 않았다.
後世推原其故而不得이로되 以吾觀之컨대 惜夫其未聞也哉인저
후세에 그 원인을 아무리 추구해도 규명되지 않았으되, 나의 소견으로 보건대, 애석하게도 그가 대도大道에 대한 것을 듣지 못한 탓이었다.
昔楚昭王有疾이어늘 卜之曰 河爲라한대 大夫請祭諸郊하니
옛날 소왕昭王이 병환이 났거늘, 복자卜者가 말하기를 “황하黃河가 괴변을 부려 빌미가 되었다.”고 하니, 대부大夫들은 교외郊外에 나아가서 〈황하黃河에〉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였다.
王曰 三代 祭不越이니라
이에 소왕昭王은 말하기를 “삼대三代(夏‧)의 명사命祀에 〈제후들은〉 자기 영토 안의 산천에만 제사 지내게 하였다.
江漢 楚之望也 禍福之至 不是過也니라
우리 나라는 장강長江한수漢水수수睢水장수漳水의 네 강의 신에게만 망제望祭를 지낼 뿐이니, 화복禍福이 오는 것도 여기(네 강의 신)에서 지나지 않을 것이다.
雖不德이나 河非所獲罪也니라하고 遂弗祭하니라
내가 비록 부덕하기는 하지만 황하의 신에게는 별다른 죄를 지은 바가 없다.” 하고서는 결국 제사 지내지 않았다.
及將死 有雲如衆赤 夾日以飛三日이어늘
소왕昭王이 장차 죽으려 할 때 적조赤鳥 떼 모양의 구름이 3일 동안이나 해의 가장자리를 나돌고 있었다.
王使問周史한대 史曰 其當王身乎인저 可移於令尹司馬하리로소이다하니
소왕昭王사자使者나라 태사太史에게 보내어 그 까닭을 물어보게 하였더니, 나라 태사太史가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왕의 신상에 관계되는 일인데, 만일 재앙을 제거해 달라고 비는 영제禜祭를 올린다면 이 화액을 영윤令尹이나 사마司馬의 신상으로 옮겨놓을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王曰 除腹心之疾하여 而寘諸이면 何益이리오
소왕昭王은 말하기를 “뱃속 병을 제거하여 팔다리 위에 옮겨놓는다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不榖 不有大過 天其夭諸 有罪受罰이어늘 又焉移之리오하고 亦弗禜이니라
나에게 큰 과실이 있지 않다면 하늘이 요절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며, 죄과가 있으면 벌을 받을 것이거늘, 또한 어찌 이를 옮겨 면할 수 있으랴?” 하고서 결국 영제禜祭를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그것을 듣고 말하기를 “ 소왕昭王대도大道를 잘 알고 있으니, 그가 나라를 잃지 않음이 당연하도다.”라고 하였다.
吾觀太宗所爲컨대 其不知道者 衆矣어늘 其能免乎
내가 태종太宗이 한 일들을 살펴보건대, 대도大道를 알지 못한 것이 많았거늘 화환禍患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之間 天下旣平이언만 征伐四夷하고 滅突厥하고 夷高昌하고 殘吐谷渾하여 兵出四克하니 務勝而不知止니라
정관貞觀 연간에 천하天下가 이미 평정되었건만, 사이四夷를 정벌하고 돌궐突厥을 멸하고 고창高昌을 평정하고 토욕혼吐谷渾을 격파하는 등 군사가 사방으로 나가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승리만을 힘쓰고 중지할 줄을 몰랐다.
하니 로되 而帝安爲之하니 原其意컨대 亦欲夸當世하고 高後世耳니라
최후에는 친히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하려 함에 대신大臣들이 힘써 간쟁諫諍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겨우 이겼으니, 수씨隋氏보다 나은 점은 다행히 한 번 이긴 것뿐이건만, 태종太宗은 태연하게 그 일을 하였으니, 그 뜻을 추구하건대, 또한 당세에 뽐내고 후세에 높이 추앙받으려는 심산이었을 뿐이다.
태자太子 승건承乾이 이미 태자太子의 자리에 선 지 10여 년 만에 태종太宗은 다시 위왕魏王 를 총애하여 형제兄弟들로 하여금 서로 배제하게 하였다.
承乾旣廢 晉王 嫡子也
승건承乾이 이미 폐위됨에 진왕晉王적자嫡子였다.
그런데 태종은 를 세워서 후일에 진왕晉王에게 전위傳位가 되게 하려고 하였으나 유예하며 결정하지 못하고, 패도佩刀를 끌어당겨 스스로 찌르려고까지 했다가 대신大臣들이 구원하여 중지되었다.
父子之間 以愛故輕予奪 至於如此니라
부자父子의 사이는 애정 때문에 가볍게 주고 빼앗는 것이 이와 같기까지 하였다.
帝嘗得秘讖하니 言唐後必中微하여 有女武代王이라하거늘 以問李淳風하여 欲求而殺之한대 淳風曰 其兆旣已成하여 在宮中矣니이다
태종太宗이 일찍이 비참秘讖을 구득하였더니 거기에 “나라가 반드시 중간에 미약해져서 여무女武가 대신 왕이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거늘, 이순풍李淳風에게 물어서 그 여무女武를 찾아 죽이려고 하니, 이순풍李淳風이 말하기를 “그 조짐이 이미 이루어져서 궁중宮中에 있습니다.
天之所命 不可去也니이다
하늘이 한 것은 제거할 수 없습니다.
徒使疑似之戮 淫及無辜니이다
한갓 의심스런 살육殺戮이 잘못하면 무고한 사람에게 미치게 할 뿐입니다.
且自今以往四十年 其人已老리니 老則仁이니이다
또한 이후 40년이 지나면 그 사람이 이미 늙을 것이니, 늙으면 인자仁慈할 것입니다.
雖受終易姓이나 必不能絶李氏니이다
비록 제위帝位를 이어받아 조대朝代를 바꾼다 하다라도 반드시 이씨李氏를 단절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를 죽이고 다시 소장少壯한 자를 낳아 많이 죽여 원풀이를 한다면 자손子孫에 남아날 자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종이 그 말을 받아들여 중지하였다.
이나 하니라
그러나 오히려 의심으로 이군선李君羨를 죽였다.
夫天命之不可易 惟修德或能已之어늘 而帝欲以殺人弭之하니 難哉인저
무릇 천명天命은 바꿀 수는 없어도 오직 을 닦으면 혹 그치게 할 수도 있거늘, 태종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치게 하려고 하였으니, 곤란한 일이었다.
帝之老也 將擇大臣以輔少主니라
태종太宗이 늙음에 장차 대신大臣을 골라서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하려고 하였다.
李勣起於布衣하여 忠力勁果하고 有節俠之氣니라
이적李勣포의布衣(선비) 출신으로 충성스럽고 힘세고 강인하고 과감하며 절조와 의협기가 있었다.
嘗事李密하고 友單雄信이러니 密敗 不忍以其地求利하고 密死 不廢舊君之禮니라
그는 일찍이 이밀李密을 섬겼고 단웅신單雄信을 친구로 삼았는데, 이밀李密이 패함에 차마 그의 땅으로써 이익을 구하지 않았고, 이밀李密이 죽음에 옛 임금에 대한 예법을 폐하지 않았다.
그리고 단웅신單雄信이 처형됨에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여 〈그 살이〉 그와 함께 죽게 하였다.
帝以是爲可用하여 疾革 謂高宗하되 爾於勣無恩이니라
태종太宗은 이로써 이적李勣을 쓸 만한 사람으로 여기어, 병이 위중하자 고종高宗에게 이르기를 “너는 이적李勣에게 은혜를 베푼 일이 없다.
今以事出之하니 我死어든 卽授以僕射하라한대 高宗從之하니라
지금 그는 일 때문에 밖에 나가 있으니, 내가 죽거든 즉시 불러들여 복야僕射 벼슬을 주도록 하라.”고 하니, 고종高宗이 그 말을 따랐다.
及廢皇后하고 立武昭儀 召勣與長孫無忌褚遂良計之한대 勣稱疾不至하니라
고종高宗이〉 황후皇后를 폐하고 무소의武昭儀(則天武后)를 세우려 할 때에 이적李勣장손무기長孫無忌저수량褚遂良을 불러 그 일을 의논하고자 하니, 이적李勣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다.
帝曰 皇后無子 罪莫大於絶嗣 將廢之라하니 遂良等不可라하니라
고종高宗이 이르기를 “황후皇后에게 아들이 없으니 죄가 후사後嗣를 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지라, 장차 폐하려고 한다.”고 하니, 저수량褚遂良 등은 불가한 일이라고 하였다.
他日勣見 帝曰 將立昭儀 而顧命大臣 皆以爲不可라하여 今止矣니라하니
후일에 이적李勣고종高宗을 뵙자, 고종이 이르기를 “장차 소의昭儀를 세우려고 했으나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이 모두 불가한 일이라고 해서 지금 중지하였다.”고 하니,
勣曰 此陛下家事 不須問外人이니이다한대 由此廢立之議遂定하니라
이적李勣은 말하기를 “이는 폐하陛下의 집안일이니, 외인에게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폐립廢立에 대한 의논이 정해졌다.
匹夫之俠也 以死徇人 不以爲難이나 至於禮義之重하여는 社稷所由安危이니 勣不知也니라
이적李勣필부匹夫협사俠士인지라 죽음으로써 남을 따르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예의禮義의 중요함이야 사직社稷안위安危가 매인 것이니, 이적李勣이 모르는 일이다.
而帝以爲可以屬幼孤寄天下 過矣니라
그런데도 태종太宗이 그에게 어린 임금을 부탁하고 천하를 맡길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은 지나친 일이었다.
且使勣信賢인댄 託國於父하여 竭忠力以報其子可矣어늘 何至父逐之子復之而後可哉
또 가사 이적李勣이 믿을 만하게 어질었다면 아버지에게서 나라를 부탁받아서 충력忠力을 다하여 그 아들에게 보답하게 했어야 옳았거늘, 어찌 아버지는 〈이적李勣을〉 쫓아내고 아들은 〈이적李勣을〉 돌아오게 하는 술수까지 썼어야 옳았겠는가?
挾數以待臣下 於義旣已薄矣 凡此皆不知道之過也니라
술수를 가지고 신하를 대하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 이미 박대한 것이니, 이는 모두 대도大道를 모르는 과실인 것이다.
苟不知道 則凡所施於世 必有逆天理하고 失人心하되 而不自知者니라
진실로 대도大道를 모르면 세상에 베푸는 모든 일에 반드시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인심을 잃어도 스스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이요 太宗 惟不知道 雖天下旣安且治 而幾至於絶滅이니라
그러므로 소왕昭王대도大道를 알았는지라 비록 나라를 잃었으나 반드시 회복하였고, 태종太宗대도大道를 몰랐는지라 비록 천하가 이미 안정되고 다스려졌지만 거의 절멸絶滅에 이르렀다.
孔子之所以觀國者如此니라
공자孔子께서 나라의 정세를 살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다.
唐荊川曰 篇中整段抄故事 而斷語全少하니 蓋論之一體也라하니라
당형천唐荊川(唐順之)이 말하기를 “편중篇中에서 문단文段을 정리하고 고사故事를 발췌했으나 단정斷定한 말은 전혀 적으니, 대개 의 한 체재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唐太宗論 : 唐 太宗은 곧 李淵의 次子인 李世民(599~649)을 가리킨다. 그는 먼저 秦王에 봉해졌다가 뒤에 玄武門의 變을 일으켜 太子가 되었고, 얼마 후에 곧 皇帝位에 올랐다.
《欒城集》에는 本文의 標題가 〈唐太宗〉으로 되어 있다.
역주2 任賢使能……天下幾至刑措 : 본서 권9 〈玄宗憲宗論〉에 “옛날 太宗이 이미 天下를 평정하고 나서 처음에는 房玄齡‧杜如晦‧魏徵을 임용하고, 나중에는 長孫無忌‧岑文本‧褚遂良을 임용하였으며, 皇帝(太宗) 또한 恭儉하고 節用하여 쓸데없는 官員을 없애고 불필요한 비용을 절약하였으며, 안에는 宮掖의 사치스런 供奉이 없었고, 곁에는 寵愛하는 사람에게 선물하는 잘못이 없었다.[昔太宗 旣平天下 始任房玄齡杜如晦魏徵 終用長孫無忌岑文本褚遂良 帝亦恭儉節用 去冗官 節浮費 內無宮掖侈靡之奉 旁無近幸賜予之失]”란 말은 이 구절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역주3 傳子至孫……不絶如線 : 瑯琊王 沖은 博州를 근거지로 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沖의 아들 越王 貞은 豫州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므로 貞과 沖 등을 참수하고 姓을 虺氏로 고치는 일이 있었고, 또한 韓王 元嘉‧魯王 靈夔와 元嘉의 아들 黃國公 譔‧靈夔의 아들 范陽王 藹와 霍王 元軌 및 그 아들 江都王 緖‧故虢王 元夙의 아들 東莞公 融은 貞과 通謀한 일에 연좌되었다.
《舊唐書》 〈則天武后本紀〉에서는 “元嘉와 靈夔는 자살하고, 元軌는 黔州에 流配되고, 譔 등은 伏誅되어 姓이 虺氏로 고쳐졌다. 이로부터 宗室의 諸王이 연달아 거의 다 誅死되었다. 그 자손 가운데 나이가 어린 자는 모두 嶺外로 유배시키고, 그 親黨 수백 집을 誅殺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역주4 大道 : 正道, 常理. 여기서는 특히 치세 원칙과 윤리 강상을 포괄한 것이다.
역주5 : 빌미. 곧 귀신의 禍患을 가리킨다.
역주6 命祀 : 天子의 命에 따라 진행하는 제사란 뜻이다.
역주7 : 제사 이름으로, 국내 山川‧星辰에 제사 지내는 것을 ‘望’이라 한다.
역주8 : 沮와 같다. 저본에는 ‘淮’로 되어 있는데, 《春秋左氏傳》에 의해 ‘睢’로 바꾸었다.
역주9 不穀 : 穀은 不善과 같은 의미이니, ‘不穀’은 고대의 제왕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謙詞로 썼다.
역주10 : 저본에는 ‘烏’로 되어 있는데, 《春秋左氏傳》에 의하여 ‘鳥’로 바꾸었다.
역주11 : 재앙을 막는 제사 이름이다.
역주12 股肱 : 여기서는 좌우에서 보좌하는 신하를 가리킨다.
역주13 昔楚昭王有疾……宜哉 : 《春秋左氏傳》 哀公 6년에 나오는 내용으로 일이 일어난 순서에 따라 문장의 서술을 바꾸었다.
역주14 貞觀 : 唐 太宗의 연호(627~649)이다.
역주15 貞觀之間……僅而克之 : 太宗이 즉위한 후 貞觀 4년(630)에는 頡利可汗을 사로잡고 突厥을 멸하였으며, 貞觀 8년에는 東西 五洞獠가 배반하니 그를 평정하였고, 貞觀 9년에는 吐谷渾을 西海上에서 평정하여 그 왕 慕容伏允을 사로잡았고, 그 아들 慕容順光이 항복하자 그를 西平郡王으로 봉하였으며, 貞觀 14년에는 高昌을 평정하여 그 땅에 西州를 설치하였다. 그 밖에도 배반한 羌虜를 격파하고 薛延陀를 깨뜨렸으며, 貞觀 18년에는 친히 高句麗를 정벌하는 일을 褚遂良과 魏徵 등이 諫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貞觀 19년에 高句麗를 치니 高句麗가 크게 무너져서 高延壽가 군중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래서 太宗이 행차하는 산을 駐蹕山이라 하고 그곳에 돌을 다듬어서 공을 기록하였다.
역주16 其賢於隋氏者 幸一勝耳 : 《隋書》 〈煬帝紀〉에 의하면, 隋 煬帝가 大業 8년(612)과 9년 두 차례에 걸쳐 친히 高句麗를 정벌하였으나 모두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7 太子承乾……使兄弟相傾 : 《舊唐書》 〈太宗諸子恒山王承乾列傳〉에 의하면 “恒山王 承乾은 太宗의 長子인데 承乾殿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이름을 ‘承乾’이라 하였고, 太宗이 즉위하여 皇太子로 삼았는데 이때 나이 8세였다.”고 하고, 또한 “魏王 泰가 당시에 美譽하므로 太宗이 애지중지하니, 承乾은 행여 廢立될까 싶어 매우 그를 꺼려하였고, 泰 역시 材能을 가지고 몰래 奪嫡할 마음을 품었다. 그래서 각각 朋黨을 조직하여 결국 釁隙을 이루었다.”고 한다.
‘旣立十餘年’은 太宗 武德 9년(626)에 承乾이 皇太子가 되었고, 貞觀 14년(640)에 魏王 泰에 대한 太宗의 총애가 가해졌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魏王 泰는 곧 濮王 李泰로 太宗의 넷째아들인데, 承乾‧高宗과 함께 文德長孫皇后의 소생이다.
역주18 承乾旣廢……大臣救之而止 : 《舊唐書》 〈太宗諸子濮王泰列傳〉에 의하면 “承乾은 皇太子로 있을 때 濮王 李泰의 奪嫡을 예방하기 위해 불순한 말을 하였다가 庶人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앞서 太宗이 그를 불러 꾸짖자, 承乾이 말하기를 ‘臣은 귀하게 太子가 되었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다만 泰의 도모하는 바를 막기 위하여 朝臣들과 더불어 방어책을 강구했을 뿐이었는데, 불순한 사람이 결국 臣으로 하여금 不軌(謀反)의 일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지금 만일 泰를 太子로 삼는다면 그들의 술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太宗이 이내 侍臣에게 말하기를 ‘承乾의 말이 또한 옳다. 내가 만일 泰를 세운다면 금방 구할 수 있다. 그러나 泰가 皇太子로 서면 承乾과 晉王이 다 존재하지 못하고, 晉王이 서면 泰와 承乾이 무사할 수 있다.’고 하고는 이에 泰를 將作監에 유폐시켰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니, 蘇轍의 이 부분은 正史와 약간 출입이 있는 것 같다.
晉王은 뒷날 唐 高宗이 되는 李治를 이른다.
역주19 帝嘗得秘讖……帝用其言而止 : 《新唐書》 〈李淳風列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역주20 猶以疑似殺李君羨 : 《舊唐書》 〈李君羨傳〉에 “貞觀 초년에 太白星이 자주 낮에 나타나자, 太史가 점을 치니 ‘女主가 창성한다.’라고 하였고, 또 ‘응당 女武가 왕이 되리라.’는 童謠가 유행하였다. 太宗은 그것이 몹시 싫었다.
그때 李君羨이 左武衛將軍이 되어 玄武門에 있었다. 太宗이 武官內宴을 인하여 酒令을 지어 각각 小名을 말하게 하였더니, 君羨이 자칭 小名을 ‘五娘子’라고 하였다. 太宗이 깜짝 놀랐고, 따라서 크게 웃으면서 ‘무슨 놈의 여자가 이처럼 勇猛한가?’라고 하였다.
또 君羨의 封邑과 屬縣에 모두 ‘武’字가 들어 있었으므로 몹시 싫어하였다. 때마침 御史가 ‘君羨이 妖人 員道信과 더불어 몰래 결탁하여 장차 모반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奏達하자, 드디어 詔書를 내려 그를 誅殺하였다.[貞觀初 太白頻晝見 太史占曰 女主昌 又有謠言當有女武王者 太宗惡之 時君羨爲左武衛將軍 在玄武門 太宗因武官內宴 作酒令 各言小名 君羨自稱小名五娘子 太宗愕然 因大笑曰 何物女子 如此勇猛 又以君羨封邑及屬縣 皆有武字 深惡之 會御史奏君羨 與妖人員道信 潛相謀結 將爲不軌 遂下詔誅之]”라는 말이 보인다. 李君羨은 洛州 武安 사람으로 武連郡公에 봉해졌다.
역주21 嘗事李密……使與俱死 : 李密(582~618)은 隋 煬帝의 大業 9년(613) 楊玄感이 黎明에서 군사를 일으킬 때 謀主가 되었고, 뒤에 瓦崗寨 義兵에 참가하여 主將으로 추대되었다가 王世忠에게 패배당하였으며, 唐나라에 투항하였다가 뒤에 唐나라를 배반하고 재차 군사를 일으켰다가 패전하여 피살된 사람이다. 일찍이 李密이 王世忠과 작전할 때에 李勣이 李密의 부하가 되었기 때문에 李密을 섬겼다고 한 것이다. 單雄信은 먼저 翟讓을 따랐다가 뒤에 王世忠에게 항복하였으며, 李世民이 東都를 포위했을 때 패전하여 참살을 당하였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舊唐書》 〈李勣列傳〉에 “唐 高祖 때 王世忠을 평정하고 李勣의 친구 單雄信을 사로잡으니, 李勣이 表文을 올려 그의 武藝가 출중함을 칭하면서 ‘그를 사면하면 반드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니, 원컨대 官爵으로써 贖罪시키소서.’라고 하였는데, 高祖는 허락하지 않았다. 單雄信이 사형될 때에 李勣은 그를 마주하여 통곡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이면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영원히 결별하니, 이 살이 함께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의 아들을 거두어 길렀다.”고 하였다.
또 “唐 太宗 武德 2년(619)에 李密이 王世忠에게 패하여 唐나라로 돌아가니, 옛 토지는 이미 李勣의 차지가 되었는데, 李勣은 ‘만일 表를 올려 토지를 헌납하면 이는 주인의 패함을 이롭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 모두 李密에게 양보하여 스스로 헌납해서 공을 삼게 하였으며, 뒤에 李密이 모반하여 주살되자, 李勣은 表文을 올려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낼 것을 청하니 詔命으로 허락하였다. 李勣은 衰絰 차림으로 옛 僚吏‧將士와 함께 李密을 장사 지내니, 朝野가 모두 李勣을 義人으로 여겼다.”라고 하였다.
역주22 楚昭王……雖失國而必復 : 《春秋左氏傳》 哀公 6년에 의하면 “楚 昭王은 陳나라를 구하기 위해 吳나라를 치다가 城父에서 죽었지만, 大臣들이 公子 章을 세웠으므로 자손들이 나라를 누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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