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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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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制二니라
絶世之才 其爲文雄偉니라
天下有二病하니 好戰則財竭而民貧하고 畏戰則多辱而無威니이다
欲民之無貧이면 則無疾夫無威하고 欲君之無辱이면 則無望乎財之不竭이니이다
此二患者 天下未嘗兼有也니이다
古之人君 各從其所安而處其偏이니이다
是以 不獲全享其利하고 而亦未嘗兼受其病者 리니이다
然而흉노匈奴 傲慢侵侮하여 至甚不遜이니이다
洗除先帝之宿恥하고 而夸大중국中國之氣하니 得志滿意 無以加矣어니와하니 중국民之家 大抵皆破하여 無復千金之戶니이다
皆有所就其成功이니 是以 有所忍而不顧어니와 而智者之論 已謂非중국中國之長筭矣라하나이다
今者 중국中國之弊 在於畏戰이니 畏戰固多辱矣니이다
而民又不免於貧하여 無所就其利하고 而偏被其害어늘 重賦厚斂하여 以爲二邊之賂하니 國辱而民困이니이다
蓋今世之病 已極矣어늘
賢人君子 竭其智慮하여 以求安其民이나 而民常爲之所擾하고
天子欲使其澤下布四海 而海內常爲之所困하니
此其弊蓋有原矣니이다
之賂不絶이니 是以 天下之賦斂 雖知其甚重而不可輕이요 天下之賦斂 甚重而不可輕이니 是以 天下之民 雖知其甚困이나 而不可得而安也니이다
臣於민정책民政之終 而特備論其要云이리니이다
蓋方今天下之議 莫不以爲二邊之賂不可去也라하나 獨其勇者則曰 寧戰而無賂니라
戰未必敗 而賂必至於乏困이라하나이다
臣竊以爲 此古之무제武帝 堅忍而不顧者 足以行之이나 亦有所犯天下之至危니이다
何者잇가 吾民之不戰久矣어늘 用不戰之民하여 而待必戰之敵하면 竊恐世俗之難之也니이다
夫古者 霸王之臣 因敗而成功하고 轉禍而爲福之間耳니이다
方今二之賂 雖有所不得已而然者이나 其勢偶有似夫니이다
是故 臣欲因而成之하여 以潛破二之國이니이다
古語有之曰 라하나이다
昔者 하고 하고 하고 하니 此四者 皆其予之之力也니이다
夫隣國之患 惟其相忌而相伺하고 以不敢相易하니 是以 其慮詳密而難圖니이다
今夫중국中國之不競 亦已久矣 彼其相視以爲無能爲者 非一日也이나 猶未肯釋然而無疑 夫惟釋然而無疑而後중국可取니이다
今吾猶有所齟齬於其間이라 彼以吾爲猶有不服之心이니 是以 君臣相視而未敢懈니이다
蓋古之英雄 能忍一朝之恥而全百世之利니이다
臣以爲當今之計 禮之當加恭하고 待之當加厚하며 使者之往 無求以言勝之하고 而其使之來者 亦無求以言犯之니이다
凡皆務以無逆其心而陰墮其志하고 使之深樂於吾之賄賂而意不在我니이다
而吾亦自治於內하여 蒐士揀馬하고 擇其精銳而損其數하여 以外見至弱之形하고 而內收至强之實이니이다
하고 凡皆務以自損吾强大之勢하여 而見吾衰弱之狀하고 使之安然하여 無所顧忌而益以怠傲 不過數年 彼日以無備하고 而吾日以充實이니이다
彼猶將以吾爲不足與也하고 而有無厭之求리니이다
彼怠而吾奮하고 彼驕而吾怒하니 及此而與之戰이면 此所謂敗中之勝이요 而弱中之强者也리니이다
嗟夫
方今之事 其勢亦有二而已矣니이다
能奮一朝之勞而盡力以攻之 則其後可以大安이나 而其始也不免有歲月之勤이요 能忍一朝之辱而自損以驕之 則其後可以驟勝이나 而其始也不免有歲月之恥니이다
此二策者 皆足以謀人之國이요 敗人之兵而有勝矣리니이다
而臣竊謂今世之所安者 必其予之而驕之者也니이다
嗟夫
智能攻之 則以洗天下之大慙이요 不能攻之 則驕之而圖其後니이다
未有不能攻之하고 又不能驕之하고 而拱手以望其成功者니이다
方今每歲委百萬之資以予人하고 而不能使人無疑其有不服之心하니 罄竭四海而其終不能以成事 特幸其一時之安이니이다
而欲得其間隙之際하여 以治天下 天下安可得而治哉잇가
당형천唐荊川曰 諸篇用故事하여 化腐爲新 全在交互形容이요 交互形容 全在提綱一兩語有力이니라
此篇파공坡公정군제定軍制 可見大略이니라


04. 백성을 위하는 정치에 대한 책문策文 9
노적虜賊을 제어할 것에 대한 논술이다.
세상에 드문 기재奇才인지라, 그러므로 그 문장이 웅위雄偉한 것이다.
천하에 두 가지 병폐가 있으니, 전쟁을 좋아하면 재물이 고갈되어 백성들이 가난하게 되고, 전쟁을 두려워하면 욕을 많이 받아서 위엄이 없게 됩니다.
백성들이 가난하지 않게 하려고 하면 위엄이 없는 것을 싫어하지 말아야 하고, 임금이 욕을 받지 않게 하려고 하면 재물이 고갈되지 않기를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걱정거리는 천하에 일찍이 겸해 갖는 자가 없었습니다.
옛날 임금들은 각각 편안히 여기는 바를 따라서 그 한쪽에만 처하였습니다.
이러므로 그 이익을 온전히 누리는 것을 얻지 못하고, 또한 일찍이 그 병폐를 겸해 받는 자도 없었으니, 옛날 한조漢朝에 대한 흉노匈奴의 경우에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라〉 문제文帝경제景帝의 시대에는 천하가 치안이 되었으니, 백성들이 늙어죽는 날까지 정역征役의 노고를 알지 못하였고, 부고府庫에 쌓인 전곡錢穀 등이 가득 차 넘쳤기 때문에 백성에게 부과한 조세租稅는 30분의 1을 취하였으니, 지극히 융성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흉노匈奴오만傲慢하고 침모侵侮하여 몹시 불손하였습니다.
금증金繒금수錦繡를 실어다 바치는 것은 천자天子의 지극히 모욕적인 일이었건만, 문제文帝경제景帝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백성들을 안전하게 하는 일만을 강구하였습니다.
무제武帝에 와서는 몇 세대가 겪은 분한 일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천하의 예병銳兵을 총동원하여 천 리의 땅을 개척하고 백만의 적을 베었으니, 흉노匈奴의 백성이 죽은 자가 태반이었습니다.
선제先帝의 묵은 수치를 씻고 중국中國의 기세를 과시하였으니 상쾌한 뜻을 충족시킨 것은 더 이상 없겠지만, 안으로는 스스로 피폐疲弊하였으니 중산층 백성의 집들이 대부분 파탄하여 천금千金가호家戶를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모두 추진해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이러므로 꾹 참으면서 앞뒤를 돌아보지 않고 감행하였지만, 지혜로운 자의 논평은 중국中國을 위하는 장원한 계책이 아니라고 이미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 중국中國의 폐단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데에 있으니, 전쟁을 두려워하면 본시 모욕을 많이 받는 법입니다.
백성들은 또한 가난을 면치 못하여 이익을 보는 일은 없고 치우치게 그 해만 입거늘, 부렴賦斂을 무겁게 하여 두 변경에 보낼 물자를 마련하므로 나라는 모욕을 받고 백성은 곤궁을 겪습니다.
대개 지금 세상의 병폐가 이미 극에 달하였거늘,
현인賢人군자君子가 그 지려智慮를 짜내어 백성이 편안히 살게 할 방법을 강구하나 백성들은 항상 이적夷狄에게 소란을 당하고,
천자天子는 그 혜택이 내려가 사해四海에 입혀지게 하려고 하나 해내海內는 항상 이적夷狄에게 곤혹을 당하니,
그 폐단이 생기는 데에는 아마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두 변경에 재물을 보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으니, 이 때문에 천하의 부렴賦斂이 매우 무거운 줄 비록 알지만 가볍게 할 수 없고, 천하의 부렴賦斂이 매우 무거우나 가볍게 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천하의 백성들이 몹시 곤혹스러움을 알지만 편안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 〈민정책民政策〉의 끄트머리에서 특별히 그 요점을 갖추 논할 것입니다.
지금 천하의 여론은 ‘두 변경에 재물을 보내는 일은 제거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용감한 자만은 말하기를 ‘차라리 싸울지언정 재물을 보내지 말아야 한다.
싸우면 꼭 패하라는 법은 없지만, 재물을 보내면 반드시 핍곤乏困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 생각에는, 이것은 옛날 무제武帝 태종太宗처럼 꾹 참으면서 앞뒤를 돌아보지 않는 이는 족히 행할 수 있겠지만, 또한 천하에 없는 지극한 위험을 범하는 일이라 여깁니다.
왜냐하면 우리 백성은 싸워보지 않은 지 오래거늘, 싸워보지 않은 백성을 이용하여 꼭 싸워야 하겠다는 을 상대한다면 세속世俗에서 비난할까 은근히 두렵습니다.
옛날에 패왕霸王의 신하가 실패를 인하여 공을 이루고, 를 돌려 을 만든 것은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하였습니다.
환공桓公조말曹沫에게 위협을 당하고 나서 그 맹약盟約을 위반하려고 하였는데, 관중管仲은 그것을 계기로 믿음을 주어서 스스로 제후諸侯들을 결속하였습니다.
환공桓公나라를 습격한 것은 본래 소진少姫의 죄를 베기 위함이었는데, 관중管仲은 그것을 계기로 나라를 치되 (苞)茅를 제공하지 않은 것을 견책하였는데 제후諸侯들이 크게 복종하였으니, 은 은근히 그를 위대하게 여깁니다.
지금 두 노적虜敵에게 재물을 보내는 일은 비록 부득이한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만, 그 형세에는 우연히도 전국시대에 모계謀計로써 서로 전복시키고 몰래 서로 파괴하는 경우와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은 그대로 진행하여 몰래 두 노적虜敵의 나라를 파괴하고 싶습니다.
고어古語에 “장차 탈취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자에게 준다.”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나라는 나라를 취하고, 나라는 나라를 취하고, 묵특冒頓동호東胡를 취하고, 석륵石勒왕준王俊을 취하였으니, 이 네 가지의 경우는 모두 먼저 준 힘을 본 것입니다.
이웃 나라에 대한 걱정은 서로 꺼리고 서로 엿보며, 감히 서로 경시하지 않으니, 이러므로 그 생각이 상세하고 치밀하여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중국中國이 이웃 나라와 겨루지 않은 지 또한 이미 오래라, 저들은 이것을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라고 여긴 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아직도 중국에 대한 의구심을 확 털어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의구심을 확 털어버린 뒤에야 그 나라를 취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직도 저들에게 못마땅한 점을 보인지라, 저들은 우리가 아직도 복종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니, 이러므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주시하고 감히 해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의 영웅英雄들은 하루아침의 수치를 인내하여 백세의 이익을 온전히 확보하였습니다.
의 생각에, 오늘날의 적당한 계책으로는 저들을 더욱 공손하게 예우하고 더욱 후하게 대우하며, 우리 사신이 저들 나라에 갈 적에는 우겨대는 말을 하지 말고 공순한 태도를 보이며, 저들 사신이 우리나라에 올 적에도 거슬리는 말을 하지 말고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모두들 힘써서 그들의 마음을 거스르지 말고 몰래 그들의 뜻을 해이하게 만들며,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뇌물을 깊이 탐하고 우리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내정內政을 잘 다스려 군사를 모아들이고 마필을 가려 뽑은 다음 그중에서 정예精銳한 것을 고르고 그 수효를 줄여서 겉으로는 지극히 약한 모습을 보이고, 안으로는 지극히 강한 실효를 거두어야 합니다.
행정구역을 설정하여 군령軍令을 부여하고, 모두들 힘써서 우리의 강대强大한 형세를 줄여 쇠약衰弱한 상태를 보이고, 그들로 하여금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꺼리는 바가 없어 더욱 태만怠慢하게 한다면, 몇 해 안 가서 저들은 날로 방비할 마음이 해이해지고, 우리는 날로 군사준비가 충실해집니다.
그러나 저들은 오히려 우리를 보잘것없는 나라로 여기고 한없는 요구를 할 것입니다.
저들이 태만하면 우리는 분발하고, 저들이 교만하면 우리는 분노하기 마련이니, 이럴 때에 저들과 교전을 하게 된다면 이는 이른바 ‘패자 중의 승자요, 약자 중의 강자’라는 것일 것입니다.
아!
지금 당면한 문제는 그 형세에 또한 해결 방법이 두 가지가 있을 뿐입니다.
하루아침의 수고로운 일을 결행하고 힘을 다해 공격하면 그 뒤에 편안함을 누릴 수 있지만, 이에 앞서 오랜 세월 피나는 노력을 하는 것을 면할 수 없고, 하루아침의 모욕을 참고 스스로 교만을 덜면 그 뒤에 갑자기 승리할 수 있지만, 이에 앞서 오랜 세월 온갖 치욕을 감수하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책모策謀는 모두 족히 남의 나라를 도모하고 남의 군사를 패배시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지금 세상에 편안할 수 있는 방법은 반드시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서 교만하게 만드는 바로 그것입니다.
아!
지혜롭게 공격할 능력이 있으면 천하의 큰 부끄러움을 씻어야 하고, 공격할 능력이 없으면 그들을 교만하게 만들어서 그 후일을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공격도 하지 않고 또한 교만하게 만들지도 않고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서 그 성공을 바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매년 백만 냥가량 되는 많은 물자를 가져다 저들에게 주면서도, 저들로 하여금 우리가 복종하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떨쳐버리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해의 물자를 다 가져다 주어도 결국은 성사할 수 없고, 다만 한때의 편안함만 요행으로 여겨야 할 뿐입니다.
그 틈을 얻어서 천하를 다스리려고 한다면 천하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당형천唐荊川은 말하기를 “제편諸篇에서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진부한 내용을 새로운 소재로 변화시킴은 모두 상호간 형용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고, 상호간 형용함은 모두 한두 마디 유력한 말을 요령 있게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파공坡公(蘇軾)의 〈정군제定軍制〉와 같이 보면 그 대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民政策 九 : 《欒城應詔集》에는 篇首에 ‘臣聞’ 2字가 있다.
역주2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寇’로 되어 있다.
역주3 昔匈奴之於漢 可以見矣 : 匈奴는 고대 북방의 유목민족인데, 중원 왕조와 더불어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화친하기도 하였으며, 남북조시대에는 서쪽으로 옮겨갔다.
역주4 文景之世……可謂至盛矣 : 文景은 西漢의 文帝 劉恒과 景帝 劉啓인데, 이들의 재위기간에 출현한 ‘大治’ 국면을 가리킨다. 당시 農耕을 본업으로 삼아, 徭役과 賦稅를 경감하고 法制와 禁令을 간소화하는 정책을 써서, 농업생산 등을 점차 회복시키고 발전시켰으므로 역사에서 ‘文景之治’라고 칭하였다.
역주5 然而匈奴……以求全其民 : 漢나라 초기에는 비록 匈奴에 대하여 ‘和親’ 정책을 취하였으나 그들의 침략을 막을 수 없었다.
文帝 14년(B.C. 166)에 匈奴가 朝那塞를 공격하여 北地都尉 孫卬을 죽이고(老上單于가 騎兵 14만을 이끌고 朝那‧蕭關으로부터 침입하여 北地都尉를 죽임), 漢朝의 回中宮을 불태우는 등 침략이 계속되었으므로, 漢朝에서는 병정 10만을 징발하여 長安을 보위하였다. 景帝 때에 이르러서도 匈奴의 침입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漢朝에서는 宗室의 딸을 匈奴王에게 시집보내기도 하고 그 밖에도 해마다 絮繒 및 穀物과 酒類 등을 대량으로 보냈다고 한다.
《史記》 〈匈奴列傳〉에 “冒頓이 늘 왕래하며 代 지방을 침범하였다. 그래서 漢朝는 그것을 걱정하였는데, 高帝가 劉敬으로 하여금 宗室女公主를 받들고 가서 單于閼氏(閼氏는 匈奴王 單于皇后의 號)로 삼아주고, 해마다 匈奴에게 絮繒, 酒米, 食物 등을 보내고, 형제를 맺어 和親할 것을 약속하니, 冒頓이 조금 중지하였다.……老上稽粥單于(冒頓의 아들로 이름은 稽粥이며, 漢 文帝가 宗人의 딸을 보내 아내로 삼아주었음)가 처음 즉위하니, 孝文皇帝는 다시 宗室女公主를 보내 單于閼氏로 삼고, 患者 燕人 中行說로 하여금 公主를 시종하게 하니, 說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漢朝에서 강제로 가게 하였더니, 說이 말하기를 ‘반드시 내가 가면 漢朝의 우환거리가 될 것이다.’고 하였다. 說이 匈奴國에 이른 뒤 이내 單于에게 항복하니, 單于가 매우 총애하였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6 斬馘 : 적을 베어 죽이고 그 시신의 왼쪽 귀를 수거하여 전공을 계산할 때 이용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역주7 至於武帝……匈奴之民死者大半 : 武帝는 漢 武帝 劉徹을 가리킨다. 그의 재위기간에는 여러 차례 匈奴에 대해 用兵한 일이 있었다. 元光 2년(B.C. 133)에서 元狩 4년(B.C. 119)에 이르기까지 漢나라에서는 10여 차례 군사를 발동하여 匈奴를 토벌하였는데, 비교적 드러난 토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元朔 2년(B.C. 127)에 漢나라 車騎將軍 衛靑과 將軍 李息의 군사가 雲中으로 나아가 隴西로 돌아서 河套 및 그 이남에 있는 匈奴의 군사를 포위하니, 匈奴의 白羊王이 무너져 도주하였으므로 漢나라는 黃河 이남 지구를 수복하였다.
둘째, 元狩 2년(B.C. 121)에 名將 霍去病의 군사가 隴西로 나아가 焉支山을 넘어 서쪽으로 전진하여 匈奴의 경내 1천여 리를 들어가서 匈奴의 渾邪王의 아들 및 相國과 都尉 등을 사로잡고, 같은 해 여름에 霍去病이 居延澤을 넘어 공격해 가 祁連山에 이르러서 匈奴 3만여 명을 사로잡았다.
셋째, 元狩 4년(B.C. 119)에 大將軍 衛靑과 驃騎將軍 霍去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東‧西 두 길로 나누어 匈奴의 원정에 나섰다. 衛靑은 西路軍을 이끌고 定襄으로부터 沙漠을 넘어서 1천여 리를 북진하여 匈奴의 主力을 섬멸하고 아울러 匈奴單于를 추적하여 趙信城에 이르렀다. 霍去病의 東路軍兵은 代郡으로 나아가 匈奴의 경내 2천여 리를 들어가 大沙漠을 넘어서 匈奴의 左賢王을 크게 깨뜨렸다. 이후로는 匈奴가 다시 남침할 힘이 없었다.
역주8 內自疲弊 : 漢 武帝 말년에 민생이 피폐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9 二者 : 文帝와 景帝가 백성과 함께 휴식을 취한 일과, 武帝가 匈奴를 征討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10 夷狄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邊陲’로 되어 있고, 明代 賀復徵이 편찬한 《文章辨體彙選》에는 ‘追呼’로 되어 있다.
역주11 夷狄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邊陲’로 되어 있고, 明代 賀復徵이 편찬한 《文章辨體彙選》에는 ‘轉輸’로 되어 있다.
역주12 二邊 : 北宋 때 北部의 변두리와 西北의 西夏를 가리킨다.
역주13 唐太宗 : 初唐의 皇帝 李世民인데, 일찍이 군사를 이끌고 사방을 征戰하여 천하를 평정하였다.
역주14 反覆手 : 손바닥을 뒤집는 것이니, 곧 일이 쉽게 되는 것을 비유한다.
역주15 桓公見脅於曹沫……以自結於諸侯 : 《史記》 〈刺客列傳〉에 “曹沫이 魯나라 장수가 되어 齊나라와 싸워 세 번 패배하자, 魯 莊公은 두려워서 遂邑 땅을 〈齊 桓公에게〉 바치고 講和했다.……
桓公이 莊公과 함께 壇上에서 盟約을 하고 있을 때 曹沫이 匕首를 가지고 〈단상으로 올라가서〉 齊 桓公을 위협하니, 桓公의 부하들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는데, 〈管仲이 나와서〉 묻기를 ‘당신은 무엇을 원하오?’라고 하니, 曹沫이 말하기를 ‘齊나라는 강하고 魯나라는 약한데, 大國이 魯나라를 침범한 것은 또한 심한 일이오…….’라고 하자……桓公은 침탈한 魯나라의 땅을 다 돌려줄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뒤에〉 桓公이 화가 나서 그 약속을 위반하려고 하자, 管仲이 말하기를 ‘그것은 불가한 일입니다. 사소한 이익을 탐하여 스스로 쾌락을 느끼고 諸侯들에게 신의를 저버리면 천하의 지원을 잃게 되니, 〈약속대로〉 돌려주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桓公은 결국 魯나라에서 침탈한 땅(曹沫이 세 번 싸우다가 잃은 땅)을 모두 魯나라에 돌려주었다.”고 한 내용과, 《史記》 〈齊太公世家〉에 “諸侯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齊나라를 믿고 붙으려고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16 桓公襲蔡……而諸侯大服 : 《春秋左氏傳》 僖公 3년에 “齊나라 임금(齊 桓公)이 蔡나라로부터 시집온 부인과 함께 정원에 있는 연못 안에서 뱃놀이를 할 때에 그 부인이 齊나라 임금이 타고 있는 배를 흔들었다. 齊나라 임금은 두려워서 안색이 변하고 그런 장난을 금지시켰으나 듣지 않았다. 그래서 齊나라 임금은 화를 내고 그녀를 蔡나라로 돌려보냈으나 부부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그러나 蔡나라 사람은 그 부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냈다.”란 내용이 보이고, 齊 桓公은 그 부인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낸 데 대한 보복으로 다음 해에 蔡나라를 쳤다.
《春秋左氏傳》 僖公 4년에 “齊나라 임금(桓公)이 諸侯들의 군대를 거느리고 蔡나라를 침략했다. 蔡나라가 무너지자, 그 길로 楚나라를 정벌하니, 楚나라 임금이 사신을 시켜 諸侯들의 군대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북해에 있고 나는 남해에 있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암수 서로 짝을 지어 서로 유혹하는 마소도 서로 영토를 달리면서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당신네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管仲이 대답하기를 ‘옛날에 召康公이 우리 先君인 太公에게 명하기를 「5등급의 諸侯나 九州의 伯이라도 혹 周나라 왕실을 배반하는 자가 있으면, 너는 이를 정벌하여 周나라 왕실을 도우라.」고 하여 우리 先君에게 영토를 하사하니, 동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북으로는 無棣에 이르렀다. 너희 楚나라가 바칠 苞茅(띠풀의 일종으로, 술을 거르는 데 씀)를 헌상하지 않아 천자가 제사를 지낼 때에 바치지를 못하여 술을 거르지를 못하고 있다. 우리 임금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옛날 周 昭王이 남쪽으로 순수했다가 돌아오지 못했는데, 우리 임금은 또한 그 이유를 묻는 바이다.’라고 했다.
楚나라 사자는 대답하기를 ‘공물을 바치지 않은 것은 우리 임금님의 죄라, 감히 바치지 않겠습니까마는, 昭王이 돌아가지 못한 것은 우리나라와는 관계가 없으니, 그 이유를 漢水가에다 물어보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諸侯들의 군대는 진격하여 楚나라 陘 땅에 주둔했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17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敵’으로 되어 있다.
역주18 戰國之際 以謀相傾而陰相潰者 : 전국시대에 縱橫家들이 어느 나라에 가서 도와주는 체하면서 실은 瓦解시킨 일을 가리킨다.
역주19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敵’으로 되어 있다.
역주20 將欲取之 必固與之 : 이 말은 《老子》 제36장에 보인다. 四庫全書의 《老子》에는 “將欲奪之 必固與之”로 되어 있다.
역주21 晉之取虞 : 《春秋左氏傳》 僖公 2년에 “晉나라 荀息이 屈 지방에서 생산되는 좋은 말 네 필과 垂棘에서 나는 아름다운 구슬을 뇌물로 써서 虞나라에 길을 빌어 虢나라를 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晉 獻公에게 요청하자, 獻公이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보배이므로 줄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荀息이 대답하기를 ‘만약에 虞나라에 길을 빌어 〈虢나라를 공격하면 곧이어 虞나라를 멸해서 영토를 얻게 되므로〉 국외의 창고에다 그 구슬을 두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했다.
獻公은 말하기를 ‘虞나라에는 宮之奇라는 충신이 존재한다.’라고 하니, 荀息이 대답하기를 ‘宮之奇의 사람됨은 성격이 나약하여 임금에게 강하게 간하지 못하고 어려서부터 임금 곁에서 성장했으므로 虞나라 임금은 宮之奇를 매우 총애합니다. 그러니 비록 宮之奇가 간한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獻公은 荀息으로 하여금 虞나라에 길을 빌게 하였는데,……虞나라 임금은 그 청을 허락하였다.……이때 宮之奇가 간하였으나 虞나라 임금은 듣지 않았다.……荀息이 군대를 거느리고 虞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虢나라를 쳐서 下陽 땅을 멸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春秋左氏傳》 僖公 5년에 “晉나라 임금이 다시 虞나라에게 길을 빌어 虢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니, 宮之奇가 虞나라 임금에게 간하기를 ‘虢나라는 우리 虞나라의 방패입니다. 虢나라가 망하면 虞나라도 반드시 망하게 됩니다. 晉나라의 욕심을 열어주어서는 안 되고, 침략자에게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전에 한 번 길을 빌려준 것만 해도 심한데, 또다시 빌려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虞나라 임금은 그 말을 듣지 않고 晉나라 사신에게 길을 빌려줄 것을 허락하였다.……晉나라가 虢나라를 멸망시키니 虢나라 임금 醜는 周나라의 서울로 달아났다. 晉나라 군대가 돌아올 때에 잠시 虞나라에 머물렀다가 재빨리 虞나라를 멸망시켰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22 越之取吳 : 《史記》 〈越王句踐世家〉에 “允常이 죽자 그 아들 句踐이 즉위하였으니, 그가 바로 越王이 되었다.
元年에 吳王 闔廬가 允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 군사를 일으켜 越나라를 쳤다. 〈吳나라 군대가 整然한 것을 본〉 越王 句踐이 결사대로 하여금 도전하게 하였으나 〈吳나라 군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句踐은 또〉 죄인 3열이 吳나라 진영 앞에 가서 〈‘저희들은 군령을 어겼으므로 형벌을 피할 수 없어 이렇게 죽습니다.’ 하고〉 자살하게 했다. 吳나라 군대가 모두 이 광경을 보려고 〈움직일 때〉 越王은 이 기회를 타서 吳나라 군사를 습격하여 吳나라 군사가 欈李 지역에서 패하였다. 〈그래서 句踐은〉 吳王 闔廬를 쏘아 상해를 입혔다. 闔廬가 죽을 때에 그 아들 夫差에게 ‘반드시 보복할 할 것을 잊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3년 후에 句踐이 吳王 夫差가 밤낮없이 군대를 정비하여 越나라에 보복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吳나라가 군대를 발동하기 전에 越나라가 먼저 가서 치려고 하니, 范蠡가 ‘옳지 못한 일입니다. 군대란 것은 凶器이고, 싸움이란 것은 逆德입니다…….’라고 간하였으나 越王은 ‘내 이미 결정한 일이다.’라고 하고는 결국 군사를 일으켰다.
吳王이 이 소식을 듣고는 精兵을 모두 발동하여 越나라를 쳐서 夫椒山에서 대패시켰다. 越王은 곧 남은 兵丁 5천 명을 데리고 會稽山에 들어가 깃들어 있었는데, 吳王은 추적해 가서 포위하였다.……句踐은 곧 大夫 文種을 시켜 吳나라에 가서 강화를 하게 하였다. 文種은 무릎으로 기어 〈吳王의 앞으로 가서〉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고 말하기를 ‘君王의 亡臣 句踐이 陪臣 種을 시켜서 감히 下執事에게 고하니, 句踐은 妻를 妾으로 삼아드리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吳王이 허락하려고 하였으나 子胥가 吳王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越나라를 吳나라에게 준 것이니, 허락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文種이 돌아와서 句踐에게 보고하였더니, 句踐은 妻子를 죽이고 寶器를 불태우고 나서 한바탕 싸우다가 죽으려고 하였다. 文種은 句踐을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吳나라 太宰 嚭는 탐욕이 있는 사람이니 뇌물로 유인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샛길로 가서 말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句踐이 美女와 寶器를 文種에게 주어 샛길로 가서 吳나라 太宰 嚭에게 바치도록 하였더니, 嚭는 그 뇌물을 받고 곧 大夫 種에게 吳王을 만나보게 주선하였다.
文種은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고 말하기를 ‘원컨대 大王께서는 句踐의 죄를 사면하고 이 寶器를 모두 받아들이소서. 불행하게도 사면하지 않으시어, 句踐이 장차 그 妻子를 모두 죽이고 그 寶器를 모두 불태우고 나서 5천 명의 군사를 모두 동원하여 한바탕 싸운다면 반드시 吳나라 군사를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嚭도 따라서 吳王에게 ‘越나라가 복종하여 신하가 되었으니, 만일 사면한다면 이 나라의 이익입니다.’라고 설득시켰다.
吳王이 허락하려고 하자, 子胥가 앞으로 나아가 諫하기를 ‘지금 越나라를 멸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후회하실 것입니다. 句踐은 賢君이고 文種과 范蠡는 良臣입니다. 만일 본국으로 돌아가면 장차 亂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吳王은 듣지 않고 결국 越나라를 사면하고 군대를 철수해 돌아왔다.
句踐이 會稽山에서 곤욕을 겪을 때에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나는 여기서 끝장이구나.’라고 하자, 文種이 말하기를 ‘湯王은 夏臺에 구금되었고, 文王은 羑里에 갇혔고, 晉나라 重耳는 翟 땅으로 도망갔고 齊나라 小白은 莒 땅으로 도망갔으나, 그들은 결국 帝王과 霸主가 되었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어찌 福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吳나라가 이미 越나라를 사면하자, 越王 句踐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곧 勞身焦思하였고, 따라서 동물 쓸개를 좌석에 놓아두고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그 쓸개를 우러러보고, 음식을 먹을 때에도 그 쓸개를 맛보면서 ‘너는 會稽山에서 당한 수치를 잊었느냐?’라고 각오를 다졌으며, 몸소 경작을 하고 부인은 스스로 길쌈을 하였다.……越나라가 다시 呉나라를 정벌하였는데, 이때는 吳나라 士民들이 지쳐 있었고, 輕銳한 군대는 齊나라와 晉나라와의 싸움에서 모두 죽었으므로 越나라는 吳나라를 크게 격파하였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23 冒頓之取東胡 : 《史記》 〈匈奴列傳〉에 “冒頓이 이미 즉위하였다. 이때에 東胡가 强盛하였는데, 冒頓이 그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시켜서 冒頓에게 〈그의 아버지〉 頭曼을 얻고 싶다고 말하였다.
이때에 千里馬가 있었는데, 冒頓이 신하들에게 〈‘千里馬를 東胡에게 대신 주면 어떻겠는가?’라고〉 물었더니, 신하들은 모두 ‘천리마는 匈奴의 寶馬입니다. 주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冒頓이 말하기를 ‘어떻게 사람을 이웃 나라에 주고 한 필의 말을 아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천리마를 주었다.
얼마 후에 東胡는 冒頓이 겁쟁이라 생각하고 사신을 시켜서 冒頓에게 單于의 閼氏(부인)를 얻고 싶다고 말하였다. 冒頓이 다시 左右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좌우 사람들은 모두 화를 내면서 ‘東胡가 無道하여 閼氏를 요구하니, 청컨대 공격하소서.’라고 하였다. 冒頓이 말하기를 ‘어떻게 사람을 이웃 나라에 주고 한 여자를 아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드디어 사랑하는 閼氏를 東胡에게 주었다.
東胡王은 더욱 교만하여 서쪽을 침범하였다. 匈奴와 접경한 중간에 살 수 없는 천여 리의 버려진 땅이 있어 각각 그 가에 살면서 甌脫(界上의 屯守하는 곳)로 삼고 있었는데, 東胡가 사신을 시켜서 冒頓에게 말하기를 ‘匈奴의 지경이 우리 地界와 접한 甌脫 밖의 버려진 땅은 匈奴가 이를 수 없는 곳이니, 우리가 갖고 싶다.’고 하였다.
冒頓이 신하들에게 물으니, 신하들은 더러 ‘그것은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고 안 주어도 좋다.’고 하였다. 이에 冒頓이 크게 화를 내면서 ‘땅은 나라의 근본이다. 어떻게 줄 수 있겠는가? 주자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베어 죽이겠다.’라고 하였다. 冒頓이 말에 오르면서 國中에 영을 내려 ‘뒤쳐진 자가 있으면 베어 죽인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東胡를 습격하였다. 東胡는 당초부터 冒頓을 경시하고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冒頓이 군대를 이끌고 이르러 공격하여 대파하고 東胡王을 멸하고 그 인민과 畜産을 노획하였다.”란 내용이 보인다.
역주24 石勒之取王浚 : 王浚은 散騎常侍 沈의 아들로 자는 彭祖이다. 아버지의 관작을 계승하여 河內太守로 補任되었고, 賈后에게 붙어서 黃門 孫慮와 함께 愍懷太子를 해쳤으며, 얼마 후에는 幽州都督이 되었는데, 이때에 국정이 혼란하므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鮮卑와 유대관계를 맺었고, 成都王 穎이 군사를 일으켜 국내로 쳐들어오자 그를 쳐서 이겼으며, 驃騎大將軍으로 옮겨가 威令을 크게 세우고 征伐을 전담하였는데, 뒤에 石勒의 유인으로 잡혀 참수되었는데, 石勒의 유인에 대해 《晉書》 〈戴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石勒이 珍寶를 많이 보내고 表文을 지어서 그 舍人 王子春과 董肇 등에게 들려 보내어 王浚을 추대하여 天子로 삼으며 말하기를 ‘勒은 본래 小胡로 戎裔에서 태어났는데, 晉나라의 기강이 해이하여 海內가 飢亂에 시달리는 시기를 만났습니다.……中原에 주인이 없어 蒼生이 매일 곳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明公 殿下께서는 州鄕의 귀하신 명망으로 四海의 宗仰 대상이시니, 帝王으로 삼을 분은 公이 나이고 누구이겠습니까?
그래서 勒은 목숨을 바쳐 義兵을 일으켜 暴亂者를 베는 일을 책임지고 반드시 明公을 위해 제거하겠습니다. 殿下께서는 천명에 응하고 시류에 따라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기를 삼가 원하옵니다. 勒은 明公을 天地父母처럼 받들겠으니, 明公께서는 응당 勒의 은미한 마음을 살펴 자식처럼 예쁘게 보아주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子春 등이 王浚의 사신과 본국에 당도하자, 勒은 ‘勁卒과 精甲을 숨기고서 창고를 비우고 군사를 수척하게 꾸며서 보이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는 북쪽으로 얼굴을 두르고 王浚의 사신에게 절하고서 王浚의 서신을 받았으며, 浚이 勒에게 麈尾를 보냈는데, 勒은 거짓으로 감히 잡을 수 없는 양 하고서 벽에 걸어놓고 조석으로 절을 하면서 ‘나는 王公을 뵐 수 없는데, 王公께서 주신 麈尾를 보니 마치 公을 뵙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董肇를 보내 浚에게 表文을 올려서 직접 幽州에 가서 尊號를 받들어 올릴 것을 기약하였다.……
浚의 사신이 幽州로 돌아와서 勒이 形勢가 寡弱하고 欵誠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은 것을 갖추 진술하니, 浚은 크게 기뻐하며 勒을 믿을 사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勒은 군대를 조직하여 장차 浚을 습격할 것을 기약하였다.……이에 勒이 경쾌한 騎兵으로 幽州를 습격하였다.……浚의 將佐들이 모두 나가서 勒을 칠 것을 청하니, 浚은 화를 내며 말하기를 ‘石公이 온 것은 분명 나를 추대하려고 한 것이다. 감히 치자고 말하는 자는 벨 것이다.’라고 하고는 곧 향연을 베풀어 기다리도록 명하였다.
勒이 새벽에 薊 땅에 이르러서 문지기를 꾸짖어 문을 열게 하고는 伏兵이 있을까 의심하여 먼저 牛羊 수천 마리를 몰아넣었다. 그리고 ‘贈呈할 예물을 街巷에 늘어놓기 위하여 군대를 발동할 수 없게 하였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浚은 두려워서 안절부절못하였다.
勒은 대청으로 올라가서 甲士에 명하여 浚을 잡아 앞에 세우게 하고는, 徐光을 시켜 浚에게 ‘그대는 지위는 元台에 으뜸이고, 官爵은 上公에 배열되었는데, 幽都의 驍悍한 나라에 웅거하고 全燕의 突騎한 고을에 걸터앉아 손에 强兵을 쥐고 가만히 앉아서 京師의 傾覆을 지켜만 보면서 天子를 구제하지는 않고 자신만이 존대하려고 하였으며, 또 姦暴한 사람에게 전임시키고 忠良한 사람을 살해하였으며, 情欲을 멋대로 하여 그 毒이 燕壤 전체에 덮였다…….’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그 장수 王洛生으로 하여금 驛馬로 浚을 襄國市에 보내어 베어 죽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25 作內政以寓軍令 : 《管子》 〈小匡〉에 “행정구역을 편성하여 軍令을 부여한다. 高子里, 國子里, 公里를 설정하여 齊나라를 3등분해서 三軍을 만들고 그중에서 어진 백성을 골라 里君으로 삼게 한다.……5家를 軌로 편성하고 軌에 長을 두며, 10軌를 里로 편성하고 里에 司를 두며, 4里를 連으로 편성하고 連에 長을 두며, 10連을 鄕으로 편성하고 鄕에 良人을 두어 軍令을 맡게 한다.”란 내용이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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