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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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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文不著意 而篇中以緩得之四字 誠名言也니라
이면 有志之士 將欲正之하되 常患不克이니라
言雖直이나 不見省이니라
陵幸而不死하고 亦廢不用이니라
무후武后여릉왕廬陵王하고예왕豫王하니라
何者 位尊權重하니 臣下無所奈何 勢必至此也니라
之亡也 진평陳平장벽강張辟彊하여 封王諸여후하니 여후呂后安之니라
하고 後復聽육가陸賈하여 交歡주발周勃하니 將相之權不分이라
예왕豫王旣立 무후武后革命稱帝하고 追尊祖考하고예왕子弟하고 戕殺天下豪俊하며 志得氣滿하여 以爲무씨武氏有泰山之安矣니라
무후欲以爲太子하여 訪之大 적인걸仁傑乃曰 觀天人未厭이니이다
흉노匈奴犯邊 陛下使삼사三思募士하니 逾月不及千人이요 及使여릉왕廬陵王 不浹旬得五萬人이니이다
今欲立嗣인댄여릉왕廬陵不可니이다하니 무후하니라
久之 復召問曰 數夢不勝 何也 對曰 雙陸不勝 無子也니이다
意者컨대 天以此儆陛下耶
문황제文皇帝身蹈鋒刃하고 百戰以有天下하여 傳之子孫이니이다
先帝寢疾 詔陛下監國하시니 陛下掩而取之 十餘年矣 又欲以삼사三思爲後니이다
且母子與姑姪孰親잇가
陛下立여릉왕廬陵王이면 則千秋萬歲 血食於太廟어니와 삼사三思立廟 無祔姑之禮니이다하니
무후感悟하여 卽日遣서언백徐彦伯여릉왕廬陵王방주房州而立之하니라
蓋王陵배염裴炎 迎禍亂之鋒하여 欲以一言折之
不廢則死니라
진평陳平적인걸狄仁傑 待其已衰而徐正之
身與國俱全이니라
여후呂后無子하고 親止於姪이라
沒身而後變이니라
무후武后有子하니 母子之愛 人情之所同이라
老而이니라
由此觀之컨대 진평적인걸之所以成功者 皆以緩得之也니라
이나 여릉왕廬陵旣立未去니라
적인걸仁傑猶置장간지不問하고 復授장간지하여 俟其惡稔而後取니라
豈以禍亂之根 生於母子之間이니 不如是 則必至於毁傷故耶
노씨老氏有言하되 將欲歙之 必固張之하고 將欲弱之 必固彊之하고 將欲廢之 必固興之하고 將欲奪之 必固與之하니
是謂微明이니라
柔勝剛하고 弱勝强이니라


07. 적인걸狄仁傑에 대한
글에 마음을 쏟지는 않았지만, 편중篇中의 ‘이완득지以緩得之’란 네 글자는 참으로 명언名言이다.
모후母后임조臨朝함에 임금의 지위를 차지하여 그 친족을 편애하면, 뜻있는 선비들이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만 항상 이길 수 없음을 걱정한다.
나라 여후呂后가 여러 여씨呂氏으로 삼으려고 하자, 왕릉王陵고제高帝가 옛날 〈신하들과 선서한〉 맹약을 가지고 간쟁諫諍하기를 “ ‘유씨劉氏가 아니면서 을 하거든 천하天下가 다함께 공격하라.’고 하셨으니, 그 맹약을 위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비록 곧았지만 납득시키지는 못하였다.
왕릉王陵은 다행히 죽지 않았고 또한 파직되어 쓰이지 않았다.
나라 무후武后여릉왕廬陵王(中宗)을 폐하고 예왕豫王(睿宗)을 세웠다.
예왕豫王은 비록 왕위에 있었으나 천하의 일을 관리하지 못하였다.
서경업徐敬業은 〈무측천武則天임조臨朝를 반대하기〉 위하여 밖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배염裴炎은 안에서 간쟁을 벌이다가 모두 단시일에 살육殺戮되었다.
왜냐하면, 지위가 존귀하고 권한이 막중하니 신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지라, 형세가 반드시 이에 이른 것이다.
혜제惠帝가 죽음에 진평陳平장벽강張辟彊의 계략을 받아들여 여러 여씨呂氏를 왕으로 봉하니 여후呂后는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평陳平주발周勃과 함께 장수와 정승의 권한을 장악하여 〈여씨呂氏를 멸망시킬〉 시기를 엿볼 수가 있었고, 뒤에 다시 육가陸賈의 말을 들어 주발周勃과 우호를 맺으니 장수와 정승의 권한이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발周勃북군北軍에 들어가서 좌단左袒하라고 한 번 외치자 여씨呂氏가 망하였다.
예왕豫王이 이미 즉위함에 무후武后혁명革命하여 라 칭한 다음, 조고祖考를 추존하고 자제子弟를 왕으로 봉하고 천하天下호준豪俊들을 살해하는 등 지기志氣가 충만하여 무씨武氏에게 태산반석泰山盤石 같은 안정이 있다고 여겼다.
적인걸狄仁傑은 비록 재상宰相이 되었으나 〈정권을 돌려주는 일에 대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무후武后무삼사武三思태자太子로 삼으려고 하여 대신大臣을 방문할 때에 가서는 적인걸狄仁傑이 곧 말하기를 “이 보건대 하늘과 사람이 나라의 을 싫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근래에 흉노匈奴가 변경을 침범함에 폐하陛下께서 삼사三思로 하여금 군사를 모집하게 하니 1개월이 넘어도 1천 명이 차지 못했고, 여릉왕廬陵王(中宗 이현李顯)을 시킴에 가서는 열흘이 채 못 되어서 5만 명을 모집하였습니다.
지금 후사後嗣를 세우고자 하신다면 여릉왕廬陵王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무후武后하여 논의를 정지시켰다.
오랜 시일이 흐른 뒤에 무후武后가 다시 적인걸狄仁傑을 불러서 “쌍륙雙陸을 이기지 못하는 꿈을 자주 꾸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쌍륙雙陸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하늘이 이것으로써 폐하陛下에게 경고한 모양입니다.
문황제文皇帝(唐 태종太宗)께서는 몸소 봉인鋒刃을 무릅쓰고 여러 번 싸워 천하天下를 차지하여 이것을 자손子孫에게 전하였습니다.
선제先帝(高宗)께서 와병 중에 폐하陛下께 국사를 관리하게 하셨으니, 폐하陛下께서 문득 신기神器를 보유하신 지 10여 년이 되었고, 또 삼사三思를 후사로 삼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자母子의 관계와 고질姑姪의 관계는 누가 친근하겠습니까?
폐하陛下께서 여릉왕廬陵王을 세우면 천추만세千秋萬歲토록 태묘太廟에서 혈식血食을 받으시겠지만, 삼사三思태묘太廟를 세우면 고모姑母부묘祔廟하는 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무후武后감오感悟하여 그날로 서언백徐彦伯을 보내서 여릉왕廬陵王방주房州에서 맞아다가 세웠다.
대개 왕릉王陵배염裴炎화란禍亂의 칼끝을 맞이하여 한마디 말로 꺾으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파직되지 않으면 죽었다.
진평陳平적인걸狄仁傑은 시기가 쇠해지기를 기다려서 서서히 바로잡았다.
그러므로 몸과 나라가 다 온전하였다.
여후呂后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친족이 조카에게서 끝났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뒤에 변하였다.
무후武后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니, 모자母子의 애정은 인정人情의 동일한 것이다.
그러므로 늙어서 다시 회복하였다.
이것으로 보건대 진평陳平적인걸狄仁傑이 성공한 까닭은 모두 느슨함으로써 얻었다.
그러나 여릉왕廬陵王이 이미 즉위함에 장역지張易之장창종張昌宗 형제는 떠나지 않았다.
적인걸狄仁傑은 오히려 그들을 불문不問에 붙이고 다시 장간지張柬之에게 넘겨주어 그들의 악이 쌓이기를 기다린 뒤에 취하였다.
화란禍亂의 뿌리가 모자母子의 사이에서 생겼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훼상毁傷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노씨老氏(老子)가 말하기를 “움츠리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약하게 만들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고, 폐절廢絶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흥성하게 해주고, 탈취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자에게 준다.
이러한 도리를 곧 미명微明(미묘한 총명)이라 한다.
유약柔弱이 반드시 억세고 강한 것을 이긴다.
물고기는 깊은 못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그처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도리를 함부로 사람에게 내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진평陳平적인걸狄仁傑은 이런 이치를 터득하였던 것이다.


역주
역주1 狄仁傑論 : 狄仁傑(607~700)은 唐나라 幷州 太原 사람으로 高宗 초년에 大理丞이 되고, 뒤에 豫州刺史, 洛州司馬로 나갔다가 武則天 天授 2년(691)에 내직으로 들어와 地官侍郞 同鳳閣蘭臺平章事가 되었으며, 酷吏 來俊臣의 무고를 받아 彭澤令으로 폄직되었다가 神功 2년(697)에 다시 정승이 되어 武后에게 권하여 唐나라의 後嗣를 세우게 했다.
《欒城集》에는 이 글의 標題를 〈狄仁傑〉이라고 하였다.
역주2 母后臨朝 : 太皇太后, 皇太后, 皇后 등이 조정에 임어하여 정사를 처리하는 일을 가리킨다.
역주3 據人君之地 而私其親 : 皇后 등이 帝王의 지위를 차지하여 공평무사하지 못하고 親家의 族屬을 偏愛함을 이른다.
역주4 漢呂后 : 漢 高祖 劉邦의 妃인 呂雉로, 惠帝가 죽은 뒤에 조정에 임어하여 천자의 권한을 대행하였고, 政柄을 주관한 지 8년 만에 劉邦의 옛 신하들을 배척하고 여러 呂氏를 왕으로 삼았으며, 그 조카인 呂産과 呂祿이 南軍과 北軍을 나누어 장악하였다.
역주5 王陵以高帝舊約爭之曰……背之不可 : 《史記》 〈呂太后本紀〉에 “太后가 천자의 권한을 대행하면서 여러 呂氏를 王으로 삼고 싶어서 右丞相 王陵에게 물으니, 王陵이 말하기를 ‘高帝께서 犧牲의 白馬를 죽여 여러 신하들과 맹서하기를 「劉氏가 아니면서 王을 하거든 天下가 다함께 그를 공격하라.」고 하셨고, 지금 呂氏를 王으로 세우는 것은 맹약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니, 太后는 좋아하지 않았다.……11월에 太后는 王陵을 파직시키고 싶어서 이에 帝太傅에 임명하여 정승의 권한을 빼앗으니, 王陵은 결국 병으로 면직하고 돌아갔다.[太后稱制 議欲立諸呂爲王 問右丞相王陵 王陵曰 高帝刑白馬盟曰 非劉氏而王 天下共擊之 今王呂氏 非約也 太后不說……十一月 太后欲廢王陵 乃拜爲帝太傅 奪之相權 王陵遂病免歸]”고 하였다.
역주6 唐武后……未嘗省天下事 : 武后(624~705)는 高宗 李治의 皇后인 武曌이다. 그는 高宗 때부터 이미 高宗을 대신해서 정사를 처결하였고, 高宗이 죽은 뒤 嗣聖 원년(684)에 皇帝인 中宗(李顯)을 폐하여 廬陵王으로 삼아 別所에 유폐시킨 다음, 豫王(睿宗 李旦)을 皇帝로 삼아 또한 別殿에 거처하게 하고 자기는 그대로 臨朝하여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였다. 睿宗은 武后의 아들이자 玄宗(李隆基)의 아버지이다.
역주7 徐敬業爲之起兵於外……皆不旋踵爲戮 : 徐敬業(?~684)은 곧 李敬業으로, 李勣(本姓은 徐)의 손자이다. 太僕少卿, 眉州刺史를 역임하였고, 武則天 光宅 원년(684)에 貪贓에 연루되어 柳州司馬로 폄직되었다. 唐奇之‧駱賓王 등과 楊州에서 군사를 일으켜 武則天의 臨朝를 반대하였다. 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가서 武則天이 파견한 大將 李孝逸에게 격파되어 潤州로 도망갔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裴炎(?~684)은 遺詔를 받고 太子(中宗)를 보필하였다. 中宗이 즉위하여 韋后의 아버지 韋玄貞을 侍中으로 삼으려고 하자 裴炎이 따르지 않으니 中宗이 노하였다. 裴炎은 결국 武后와 모의하여 中宗을 폐하고 豫王을 세웠다. 武后가 臨朝할 때 裴炎은 여러 번 武后의 뜻을 거역하였다. 徐敬業이 군사를 일으키자, 裴炎이 武后에게 정권을 돌려주기를 간청하니, 武后는 謀反罪로 裴炎을 都亭驛에서 참수하였다고 한다.
역주8 惠帝之亡也……呂后安之 : 《史記》 〈呂太后本紀〉에 “孝惠帝가 서거하여 發喪할 때에 太后가 哭을 하나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留侯(張良)의 아들 張辟彊이 侍中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 15세였다. 丞相(陳平)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太后에겐 오직 孝惠帝만이 있어 지금 서거했는데도 哭소리가 슬프지 않으니 당신은 느슨하게 곡하는 이유를 압니까?’ 丞相이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왜 느슨한가?’ 張辟彊이 말하기를 ‘孝惠帝에게 장성한 아들이 없으니, 太后는 당신들을 두려워합니다. 당신들은 지금 呂台‧呂産‧呂祿을 장수로 임명하여 南軍과 北軍을 거느리게 하고, 모든 呂氏가 다 궁중으로 들어와서 用事하게 하자고 청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太后의 마음이 편안하고, 당신들도 요행히 화를 벗나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丞相이 이에 張辟彊의 계략대로 하니, 太后가 기뻐하였고, 그 哭소리도 슬펐다.”고 하였다.
陳平은 처음에 項羽를 따르다가 뒤에 劉邦에게 돌아와서 공을 쌓아 曲逆侯에 봉해졌다. 孝惠帝 때에는 右丞相이 되었다가 呂后가 左丞相으로 발탁하였다. 呂后가 여러 呂氏들을 많이 王으로 삼았으나 陳平은 일부러 순종하였기 때문에 呂后는 陳平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역주9 惠帝 : 漢나라 孝惠帝 劉盈으로, 呂后의 아들이다. 사람 됨됨이가 인자하고 유약한데, 呂后가 과도하게 殘忍함을 알고 재위기간에는 술과 음악이나 즐기고 정무는 보지 않았다고 한다.
역주10 平與周勃……以伺其間 : 《史記》 〈呂太后本紀〉에 의하면 “呂太后가 여러 呂氏를 王으로 삼고 싶어 그것을 王陵에게 물어본 뒤에 또 丞相 陳平과 絳侯 周勃에게 물어보자, 周勃 등이 대답하기를 ‘高帝께서 천하를 평정했을 때에도 자제들을 왕으로 봉했으니, 지금 太后께서 천자의 권한을 대행하시는데, 兄弟인 여러 呂氏를 왕으로 삼는 것은 불가할 바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태후는 무척 기뻐했다.”고 하며, 그래서 呂太后는 呂氏를 많이 왕으로 봉했으며, 따라서 陳平은 右丞相으로 옮기고 周勃은 太尉로 삼았다고 한다.
역주11 後復聽陸賈……而呂氏以亡 : 《漢書》 〈陸賈傳〉에 의하면 “陸賈가 말하기를 ‘천하가 안정되면 정승에 유의하고 천하가 위태로우면 장수에 유의합니다. 장수와 정승이 화합하면 천하에 변란이 있어도 권한이 분리되지 않으니, 社稷을 위하는 계책은 두 분에게 매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太尉(周勃)와 깊은 우호를 맺지 않습니까?’라고 하므로, 陳平은 그 계략을 써서 周勃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또 《史記》 〈呂太后本紀〉에 의하면 “呂后가 죽은 뒤에 여러 呂氏들이 亂을 일으키려고 하자, 太尉 周勃이 詔書를 꾸며 가지고 軍門에 들어가서 軍中에게 명령하기를 ‘呂氏를 편들거든 오른쪽 웃통을 벗고[右袒], 劉氏를 편들거든 왼쪽 웃통을 벗어라.[左袒]’고 하니, 군중이 모두 왼쪽 웃통을 벗어 劉氏를 편들었다. 뒤에 陳平이 朱虛侯를 파견해서 太尉를 도와 呂産을 죽이고 南軍을 거두었으며, 여러 呂氏의 남녀를 체포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베어 죽였다.”고 한다.
역주12 狄仁傑雖爲宰相 而未嘗一言 : 《舊唐書》 〈狄仁傑傳〉에 의하면 “狄仁傑은 天授 2년(691)에 丞相이 되었다가 天授 3년에 來俊臣의 무함으로 폄직되었고, 神功 원년(697)에 재차 정승이 되었으나 武后에게 唐나라의 정권을 돌려주도록 권유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역주13 三思 : 곧 武三思로, 武則天의 조카이다. 武則天이 臨朝할 때에 夏官尙書 등 많은 관직을 맡았고, 梁王에 봉해져서는 威福을 마음대로 하였으며, 中宗이 復位한 뒤에는 司空이 되었더니 中宗의 太子인 重俊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역주14 罷議 : 논의를 정지하는 일을 뜻한다. 옛날 帝王이 신하에 대한 불만을 표시할 때 이따금 논의를 정지하였다.
역주15 雙陸 : 雙鹿이라고도 칭하는데, 일종의 博戱이다.
역주16 神器 : 玉璽를 이르며, 九鼎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는 곧 황제의 권한을 가리킨다.
역주17 自復 : 자연히 母性愛가 회복된 것을 이른다. 곧 中宗을 세워 後嗣로 삼은 것을 가리킨다.
역주18 張易之昌宗 : 張易之와 張昌宗 형제는 武后에게 같이 벼슬하여 武后의 寵臣이 되었다. 이때 武則天이 연로하였으므로 정사를 대부분 두 사람에게 위임하였다.
역주19 張柬之 : 狄仁傑 등의 추천에 의하여 鳳閣蘭臺平章事에 제수되고 오래지 않아 鳳閣侍郞으로 옮겼으나 그대로 정사를 주관하였다. 神龍 원년(705)에 武后의 병이 위중하자, 張柬之가 맨 처음 모의하여 武后를 협박해서 정권을 돌려주게 하였으며, 張易之 형제를 죽이고 中宗의 帝位를 회복시켰다.
역주20 將欲歙之……不可以示人 : 이 말은 《老子》 제36장에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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