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무후武后 廢여릉왕廬陵王하고 立예왕豫王하니라
何者오 位尊權重하니 臣下無所奈何라 勢必至此也니라
之亡也
에 진평陳平聽
장벽강張辟彊計
하여 封王諸
여후呂하니 여후呂后安之
니라
故
로 하고 後復聽
육가陸賈하여 交歡
주발周勃하니 將相之權不分
이라
예왕豫王旣立에 무후武后革命稱帝하고 追尊祖考하고 封예왕王子弟하고 戕殺天下豪俊하며 志得氣滿하여 以爲무씨武氏有泰山之安矣니라
及
무후后欲以
爲太子
하여 訪之大
신臣엔 적인걸仁傑乃曰
신臣觀天人未厭
당唐德
이니이다
頃흉노匈奴犯邊에 陛下使삼사三思募士하니 逾月不及千人이요 及使여릉왕廬陵王엔 不浹旬得五萬人이니이다
今欲立嗣
인댄 非
여릉왕廬陵不可
니이다하니 무후后怒
하니라
久之
에 復召問曰
짐朕數夢
不勝
은 何也
오 對曰 雙陸不勝
은 無子也
니이다
문황제文皇帝身蹈鋒刃하고 百戰以有天下하여 傳之子孫이니이다
先帝寢疾
에 詔陛下監國
하시니 陛下掩
而取之 十餘年矣
요 又欲以
삼사三思爲後
니이다
陛下立여릉왕廬陵王이면 則千秋萬歲에 血食於太廟어니와 삼사三思立廟면 無祔姑之禮니이다하니
무후后感悟하여 卽日遣서언백徐彦伯迎여릉왕廬陵王於방주房州而立之하니라
由此觀之컨대 진평陳적인걸狄之所以成功者는 皆以緩得之也니라
적인걸仁傑猶置
장간지之不問
하고 復授
장간지之하여 俟其惡稔而後取
니라
豈以禍亂之根이 生於母子之間이니 不如是면 則必至於毁傷故耶아
노씨老氏有言하되 將欲歙之면 必固張之하고 將欲弱之면 必固彊之하고 將欲廢之면 必固興之하고 將欲奪之면 必固與之하니
글에 마음을 쏟지는 않았지만, 편중篇中의 ‘이완득지以緩得之’란 네 글자는 참으로 명언名言이다.
모후母后가 임조臨朝함에 임금의 지위를 차지하여 그 친족을 편애하면, 뜻있는 선비들이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만 항상 이길 수 없음을 걱정한다.
한漢나라 여후呂后가 여러 여씨呂氏를 왕王으로 삼으려고 하자, 왕릉王陵이 고제高帝가 옛날 〈신하들과 선서한〉 맹약을 가지고 간쟁諫諍하기를 “ ‘유씨劉氏가 아니면서 왕王을 하거든 천하天下가 다함께 공격하라.’고 하셨으니, 그 맹약을 위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비록 곧았지만 납득시키지는 못하였다.
왕릉王陵은 다행히 죽지 않았고 또한 파직되어 쓰이지 않았다.
당唐나라 무후武后는 여릉왕廬陵王(中宗)을 폐하고 예왕豫王(睿宗)을 세웠다.
예왕豫王은 비록 왕위에 있었으나 천하의 일을 관리하지 못하였다.
서경업徐敬業은 〈무측천武則天의 임조臨朝를 반대하기〉 위하여 밖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배염裴炎은 안에서 간쟁을 벌이다가 모두 단시일에 살육殺戮되었다.
왜냐하면, 지위가 존귀하고 권한이 막중하니 신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지라, 형세가 반드시 이에 이른 것이다.
혜제惠帝가 죽음에 진평陳平이 장벽강張辟彊의 계략을 받아들여 여러 여씨呂氏를 왕으로 봉하니 여후呂后는 안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진평陳平은 주발周勃과 함께 장수와 정승의 권한을 장악하여 〈여씨呂氏를 멸망시킬〉 시기를 엿볼 수가 있었고, 뒤에 다시 육가陸賈의 말을 들어 주발周勃과 우호를 맺으니 장수와 정승의 권한이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주발周勃이 북군北軍에 들어가서 좌단左袒하라고 한 번 외치자 여씨呂氏가 망하였다.
예왕豫王이 이미 즉위함에 무후武后가 혁명革命하여 제帝라 칭한 다음, 조고祖考를 추존하고 자제子弟를 왕으로 봉하고 천하天下의 호준豪俊들을 살해하는 등 지기志氣가 충만하여 무씨武氏에게 태산반석泰山盤石 같은 안정이 있다고 여겼다.
적인걸狄仁傑은 비록 재상宰相이 되었으나 〈정권을 돌려주는 일에 대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무후武后가 무삼사武三思를 태자太子로 삼으려고 하여 대신大臣을 방문할 때에 가서는 적인걸狄仁傑이 곧 말하기를 “신臣이 보건대 하늘과 사람이 당唐나라의 덕德을 싫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근래에 흉노匈奴가 변경을 침범함에 폐하陛下께서 삼사三思로 하여금 군사를 모집하게 하니 1개월이 넘어도 1천 명이 차지 못했고, 여릉왕廬陵王(中宗 이현李顯)을 시킴에 가서는 열흘이 채 못 되어서 5만 명을 모집하였습니다.
지금 후사後嗣를 세우고자 하신다면 여릉왕廬陵王이 아니면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무후武后는 노怒하여 논의를 정지시켰다.
오랜 시일이 흐른 뒤에 무후武后가 다시 적인걸狄仁傑을 불러서 “짐朕이 쌍륙雙陸을 이기지 못하는 꿈을 자주 꾸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쌍륙雙陸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건대 하늘이 이것으로써 폐하陛下에게 경고한 모양입니다.
문황제文皇帝(唐 태종太宗)께서는 몸소 봉인鋒刃을 무릅쓰고 여러 번 싸워 천하天下를 차지하여 이것을 자손子孫에게 전하였습니다.
선제先帝(高宗)께서 와병 중에 폐하陛下께 국사를 관리하게 하셨으니, 폐하陛下께서 문득 신기神器를 보유하신 지 10여 년이 되었고, 또 삼사三思를 후사로 삼으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모자母子의 관계와 고질姑姪의 관계는 누가 친근하겠습니까?
폐하陛下께서 여릉왕廬陵王을 세우면 천추만세千秋萬歲토록 태묘太廟에서 혈식血食을 받으시겠지만, 삼사三思가 태묘太廟를 세우면 고모姑母를 부묘祔廟하는 예禮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무후武后가 감오感悟하여 그날로 서언백徐彦伯을 보내서 여릉왕廬陵王을 방주房州에서 맞아다가 세웠다.
대개 왕릉王陵과 배염裴炎은 화란禍亂의 칼끝을 맞이하여 한마디 말로 꺾으려고 하였다.
진평陳平과 적인걸狄仁傑은 시기가 쇠해지기를 기다려서 서서히 바로잡았다.
여후呂后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친족이 조카에게서 끝났다.
무후武后에게는 아들이 있었으니, 모자母子의 애정은 인정人情의 동일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건대 진평陳平과 적인걸狄仁傑이 성공한 까닭은 모두 느슨함으로써 얻었다.
그러나 여릉왕廬陵王이 이미 즉위함에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 형제는 떠나지 않았다.
적인걸狄仁傑은 오히려 그들을 불문不問에 붙이고 다시 장간지張柬之에게 넘겨주어 그들의 악이 쌓이기를 기다린 뒤에 취하였다.
그 화란禍亂의 뿌리가 모자母子의 사이에서 생겼으니,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훼상毁傷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었으리라.
노씨老氏(老子)가 말하기를 “움츠리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약하게 만들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강하게 해주고, 폐절廢絶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흥성하게 해주고, 탈취하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자에게 준다.
이러한 도리를 곧 미명微明(미묘한 총명)이라 한다.
물고기는 깊은 못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니, 그처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도리를 함부로 사람에게 내보여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진평陳平과 적인걸狄仁傑 두 공公은 이런 이치를 터득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