是時에 왕도王導爲재상相하여 達於爲國之體하고 性本寬厚容衆하니 衆人安之니라
然이나 生於왕연衍왕징澄之間하여 不能免習俗之累하여 喜通而疾介하며 能彌縫一時之闕이나 而無百年長久之計也니라
원제元帝之世
에 왕돈王敦擁兵
하여 有無君之心
이니라
유외劉隗조협刁協은 剛介狷淺하되 見信於원제帝하여 專以法繩公卿하고 而深疾왕씨王氏恣橫이니라
원제元명제明旣沒
에 하니 하며 소준蘇峻擅兵
역양歷陽하여 多納亡命
하고 專用威刑
이니라
此二釁者는 皆왕도導之所不欲이나 而유외隗유량亮不忍하여 以速其變하니 以유외隗유량亮爲是耶아
在禮
엔 家施不及國
하고 民不遷
하고 農不移
하고 工賈不變
하고 士不濫
하고 官不
하고 대부大夫不收公利
니이다
蓋
이 爲患於其國
은 常若心腹之疾
이 必與人命相持爲一
이라 攻之以毒藥
하고 劫之以鍼石
하여 病若不去
면 命輒隨盡
이니 非良醫賢臣
이면 未易處也
니라
자산子産爲정鄭에 國小而偪하고 族大多寵하니 자산子産患之니라
有事백석伯石하여 賂以其邑한대 자태숙子太叔曰 國은 皆其國也어늘 奚獨賂焉고하니 자산子産曰 無欲實難이니라
皆得其欲하여 以從其事하여 而要其成하니 非我有成이오 其在人乎아
자태숙子太叔曰 若四國何오하니 자산子産曰 非相違也요 而相從也니 四國何尤焉고
如왕도導所爲는 知賂백석伯石하여 以全其始矣요 未知予忠儉하고 斃泰侈하여 以成其終也니라
以爲賢於유외隗유량亮則可나 以論안자晏子자산子産則遠矣니라
서진西晉의 선비들이 ‘통달通達’을 빌어 음욕淫慾을 충족시키니 풍속風俗이 이미 패퇴敗頹하였고, 이적夷狄이 이 기회를 타서 드디어 중국中國을 멸망시켰다.
서로 잇따라 장강長江을 건너 〈동진東晉에 이르니〉 이 풍속이 고쳐지지 않았다.
어진 이는 그것을 알고 싫어했지만 대중을 이기지 못하였다.
풍속은 아래에서 어지럽고, 정치는 위에서 무너졌으나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동진東晉이 떨치지 못함은 그 까닭에 연유한 것이다.
이때에 왕도王導가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달통하고 성품이 본래 관후寬厚하여 대중을 포용하니, 뭇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그러나 왕도王導는 왕연王衍과 왕징王澄의 사이에 태어나서 능히 〈노장老莊의 현언玄言을 숭상하는〉 습속習俗의 얽매임을 면하지 못하여 통달通達한 행동을 좋아하고 경개耿介한 지조를 싫어하며, 일시적인 과오는 임시변통으로 잘 꾸며대어 모면하였지만 장기적인 계책은 수립하지 못하였다.
두 차례 큰 변고를 겪으니 거의 나라가 멸망될 지경에 이르렀다.
원제元帝의 세대에 왕돈王敦이 군대를 장악하고 〈장강長江의〉 상류上流에 처하여 군주君主를 무시하는 마음을 가졌다.
유외劉隗와 조협刁協은 강경 정직하고 기량이 좁았는데, 원제元帝의 신임을 받아 전적으로 법률을 가지고 고관들을 구속하고 왕씨王氏가 방자하게 구는 것을 몹시 미워하였다.
왕돈王敦은 끝내 군사를 일으켜 군주君主의 측근을 벤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재차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입했을 때에 다행히도 왕돈王敦이 죽었다.
원제元帝와 명제明帝는 이미 죽고 성제成帝가 아직 유약幼弱하므로 유량庾亮은 정사를 보필하되 오직 법률대로만 사물을 재결하니 다시 인심을 잃게 되었고, 소준蘇峻은 역양歷陽에서 병권을 쥐고서 도망한 사람을 많이 받아들이고 오로지 엄한 형법만을 사용하였다.
유량庾亮은 소준蘇峻이 틀림없이 난亂을 일으킬 줄 알고 대사농大司農을 시키기 위하여 그를 부르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이 불가한 것임을 알렸으나 유량庾亮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소준蘇峻은 결국 조약祖約과 함께 군사를 연합해서 내지로 향하여 경읍京邑을 유린하였다.
이 두 가지 화란禍亂은 모두 왕도王導가 원한 바가 아니었으나, 유외劉隗와 유량庾亮은 참지 못하여 그 변變을 불렀으니, 유외劉隗와 유량庾亮을 옳다고 하겠는가?
왕돈王敦과 소준蘇峻의 화禍는 단시일에 끝났으니, 왕도王導를 옳다고 하겠는가?
군주君主로 하여금 종신토록 치욕을 가지게 하였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노魯나라는 선공宣公 때부터 정권이 계씨季氏에게 있었으니, 3세世를 거쳐 소공昭公에 이르러서 능히 참지 못하고 장차 계씨季氏를 치려고 하니, 자가기子家羈가 간하기를 “백성들을 내버려둔 지 몇 대나 되었는데,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 소공昭公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출정하였으니,
유외劉隗와 유량庾亮의 패배는 바로 소공昭公이 거행한 전철을 밟은 것이었다.
제齊 경공景公은 탐포貪暴로써 백성을 잃고, 전씨田氏는 관혜寬惠로써 대중을 얻었다.
“오직 예禮만이 그런 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예禮에 있어서 대부大夫의 시혜施惠는 국인國人에게 미치지 않고, 백성은 사는 곳을 변경하지 않고, 농민農民은 고장을 떠나지 않고, 공인工人과 상인商人은 직업을 변경하지 않고, 선비는 직책을 잃지 않고, 관리는 태만하지 않고, 대부大夫는 나라의 이익을 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예禮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禮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습니다.
안자晏子는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경공景公은 그 방법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대개 대가세족大家世族이 나라에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언제나 마치 심복心腹의 질환疾患이 반드시 사람의 목숨과 서로 견지하며 일체一體를 이루기 때문에 독약毒藥으로 공격하고 석침石鍼으로 위협하여 병病이 만일 제거되지 않으면 목숨이 문득 따라서 다하는 것과 같으니, 양의良醫와 현신賢臣이 아니면 쉽게 처리하지 못한다.
자산子産이 정鄭나라를 다스릴 때에 나라는 작고 강대국에 핍박당하며 공족公族은 세력이 크고 총애받는 사람이 많으니 자산子産은 이를 걱정하였다.
〈자산子産이〉 백석伯石(公孫段)에게 시킬 일이 있어 그에게 봉읍封邑을 주자, 자태숙子太叔이 말하기를 “정鄭나라 대부大夫는 다같이 정鄭나라의 일을 걱정하는데 어째서 백석伯石에게만 봉읍을 준단 말이오.”라고 하자, 자산子産은 말하기를 “욕망이 없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욕망을 얻으려고 각자 일을 하여 성공하기를 바라니 그 성공이 나에게 있지 않고 어찌 다른 사람에게 있겠습니까?
자태숙子太叔이 말하기를 “사방 이웃 나라에 웃음거리가 되면 어떻게 하오?”라고 하자, 자산子産은 말하기를 “서로 어긋나고자 함이 아니고, 서로 따르기 위해서니, 사방의 이웃 나라가 어찌 허물하오리까?
정鄭나라 역사책에 말하기를 ‘국가를 안정시키려면 반드시 대족大族을 앞세우라.’고 했습니다.
잠시 먼저 대족大族들을 안정시키고서 그 귀추를 기다리고자 함이오.”라고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백석伯石은 두려워하여 봉읍封邑을 돌려보냈으나 〈자산子産은〉 끝내 그것을 백석伯石에게 주어버렸다.
또 그를 경卿으로 삼아 자기의 다음 자리에 앉혔다.
정鄭나라가 조금 안정되었고, 오랜 후에는 정치가 잘 이루어졌다.
경卿으로서 충직하고 검소한 자들은 공功에 따라 상賞을 주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자들은 죄에 따라 벌을 내렸다.
풍권豐卷을 쫓아내고 자절子晢을 죽이니 정鄭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왕도王導가 한 일로 말하면 백석伯石게 봉읍을 주어 그 시초를 온전하게 한 것은 알고, 충직하고 검소한 자들은 상賞을 주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자들은 처벌하여 그 종말을 완성시킨 것은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유외劉隗와 유량庾亮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안자晏子와 자산子産으로 논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