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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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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왕도王導에 대한
之士以濟淫慾하니 風俗旣敗하고 이니라
서진西晉의 선비들이 ‘통달通達’을 빌어 음욕淫慾을 충족시키니 풍속風俗이 이미 패퇴敗頹하였고, 이적夷狄이 이 기회를 타서 드디어 중국中國을 멸망시켰다.
相隨渡江하니 而此風不改니라
서로 잇따라 장강長江을 건너 〈동진東晉에 이르니〉 이 풍속이 고쳐지지 않았다.
어진 이는 그것을 알고 싫어했지만 대중을 이기지 못하였다.
俗亂於下하고 政弊於上이나 而莫能正也니라
풍속은 아래에서 어지럽고, 정치는 위에서 무너졌으나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東晉之不競 由此故耳니라
동진東晉이 떨치지 못함은 그 까닭에 연유한 것이다.
是時 王導爲相하여 達於爲國之體하고 性本寬厚容衆하니 衆人安之니라
이때에 왕도王導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을 달통하고 성품이 본래 관후寬厚하여 대중을 포용하니, 뭇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이나 生於衍澄之間하여 不能免習俗之累하여 喜通而疾介하며 能彌縫一時之闕이나 而無百年長久之計也니라
그러나 왕도王導왕연王衍왕징王澄의 사이에 태어나서 능히 〈노장老莊현언玄言을 숭상하는〉 습속習俗의 얽매임을 면하지 못하여 통달通達한 행동을 좋아하고 경개耿介한 지조를 싫어하며, 일시적인 과오는 임시변통으로 잘 꾸며대어 모면하였지만 장기적인 계책은 수립하지 못하였다.
幾至亡國이니라
두 차례 큰 변고를 겪으니 거의 나라가 멸망될 지경에 이르렀다.
元帝之世 王敦擁兵하여 有無君之心이니라
원제元帝의 세대에 왕돈王敦이 군대를 장악하고 〈장강長江의〉 상류上流에 처하여 군주君主를 무시하는 마음을 가졌다.
劉隗刁協 剛介狷淺하되 見信於帝하여 專以法繩公卿하고 而深疾王氏恣橫이니라
유외劉隗조협刁協은 강경 정직하고 기량이 좁았는데, 원제元帝의 신임을 받아 전적으로 법률을 가지고 고관들을 구속하고 왕씨王氏가 방자하게 구는 것을 몹시 미워하였다.
敦遂起兵하여 以誅君側爲詞하니라
왕돈王敦은 끝내 군사를 일으켜 군주君主의 측근을 벤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재차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입했을 때에 다행히도 왕돈王敦이 죽었다.
元明旣沒 하니 하며 蘇峻擅兵歷陽하여 多納亡命하고 專用威刑이니라
원제元帝명제明帝는 이미 죽고 성제成帝가 아직 유약幼弱하므로 유량庾亮은 정사를 보필하되 오직 법률대로만 사물을 재결하니 다시 인심을 잃게 되었고, 소준蘇峻역양歷陽에서 병권을 쥐고서 도망한 사람을 많이 받아들이고 오로지 엄한 형법만을 사용하였다.
유량庾亮소준蘇峻이 틀림없이 을 일으킬 줄 알고 대사농大司農을 시키기 위하여 그를 부르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이 불가한 것임을 알렸으나 유량庾亮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소준蘇峻은 결국 조약祖約과 함께 군사를 연합해서 내지로 향하여 경읍京邑을 유린하였다.
此二釁者 皆導之所不欲이나 而隗亮不忍하여 以速其變하니 以隗亮爲是耶
이 두 가지 화란禍亂은 모두 왕도王導가 원한 바가 아니었으나, 유외劉隗유량庾亮은 참지 못하여 그 을 불렀으니, 유외劉隗유량庾亮을 옳다고 하겠는가?
敦峻之禍 發不旋踵하니 以導爲是耶
왕돈王敦소준蘇峻는 단시일에 끝났으니, 왕도王導를 옳다고 하겠는가?
使人主終身含垢하니 何以爲國
군주君主로 하여금 종신토록 치욕을 가지게 하였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나라는 선공宣公 때부터 정권이 계씨季氏에게 있었으니, 3를 거쳐 소공昭公에 이르러서 능히 참지 못하고 장차 계씨季氏를 치려고 하니, 자가기子家羈가 간하기를 “백성들을 내버려둔 지 몇 대나 되었는데,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는데, 소공昭公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출정하였으니,
隗亮之敗 則昭公之擧也니라
유외劉隗유량庾亮의 패배는 바로 소공昭公이 거행한 전철을 밟은 것이었다.
경공景公탐포貪暴로써 백성을 잃고, 전씨田氏관혜寬惠로써 대중을 얻었다.
公問於晏嬰하여
경공景公안영晏嬰에게 물었다.
求所以救之하니
“어떻게 해야 구제할 수 있겠느냐?”
嬰曰
안영晏嬰이 대답했다.
惟禮可以已之니이다
“오직 만이 그런 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在禮 家施不及國하고 民不遷하고 農不移하고 工賈不變하고 士不濫하고 官不하고 大夫不收公利니이다
에 있어서 대부大夫시혜施惠국인國人에게 미치지 않고, 백성은 사는 곳을 변경하지 않고, 농민農民은 고장을 떠나지 않고, 공인工人상인商人은 직업을 변경하지 않고, 선비는 직책을 잃지 않고, 관리는 태만하지 않고, 대부大夫는 나라의 이익을 제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
公歎曰
경공景公이 탄식하며 말했다.
善哉
“참으로 그렇겠구나.
吾今而後 知禮之可以爲國이니라
나는 지금에야 비로소 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嬰曰
안영晏嬰이 말했다.
禮之可以爲國也久矣
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옛날부터 그러했습니다.
이니이다하니라
란 천지와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晏子知之 而景公不能用이라
안자晏子는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지만, 경공景公은 그 방법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
전씨田氏는 결국 여씨呂氏를 대신하였다.
爲患於其國 常若心腹之疾 必與人命相持爲一이라 攻之以毒藥하고 劫之以鍼石하여 病若不去 命輒隨盡이니 非良醫賢臣이면 未易處也니라
대개 대가세족大家世族이 나라에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언제나 마치 심복心腹질환疾患이 반드시 사람의 목숨과 서로 견지하며 일체一體를 이루기 때문에 독약毒藥으로 공격하고 석침石鍼으로 위협하여 이 만일 제거되지 않으면 목숨이 문득 따라서 다하는 것과 같으니, 양의良醫현신賢臣이 아니면 쉽게 처리하지 못한다.
子産爲鄭 國小而偪하고 族大多寵하니 子産患之니라
자산子産나라를 다스릴 때에 나라는 작고 강대국에 핍박당하며 공족公族은 세력이 크고 총애받는 사람이 많으니 자산子産은 이를 걱정하였다.
有事伯石하여 賂以其邑한대 子太叔曰 國 皆其國也어늘 奚獨賂焉고하니 子産曰 無欲實難이니라
자산子産이〉 백석伯石(公孫段)에게 시킬 일이 있어 그에게 봉읍封邑을 주자, 자태숙子太叔이 말하기를 “나라 대부大夫는 다같이 나라의 일을 걱정하는데 어째서 백석伯石에게만 봉읍을 준단 말이오.”라고 하자, 자산子産은 말하기를 “욕망이 없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皆得其欲하여 以從其事하여 而要其成하니 非我有成이오 其在人乎
사람들은 모두 욕망을 얻으려고 각자 일을 하여 성공하기를 바라니 그 성공이 나에게 있지 않고 어찌 다른 사람에게 있겠습니까?
何愛於邑
그러니 어찌 봉읍을 아끼리까?
邑將焉往가하니라
봉읍이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했다.
子太叔曰 若四國何오하니 子産曰 非相違也 而相從也 四國何尤焉
자태숙子太叔이 말하기를 “사방 이웃 나라에 웃음거리가 되면 어떻게 하오?”라고 하자, 자산子産은 말하기를 “서로 어긋나고자 함이 아니고, 서로 따르기 위해서니, 사방의 이웃 나라가 어찌 허물하오리까?
鄭書 有之曰 安定國家 必大焉先이라하니
나라 역사책에 말하기를 ‘국가를 안정시키려면 반드시 대족大族을 앞세우라.’고 했습니다.
姑先安大하여 以待其所歸라하니라
잠시 먼저 대족大族들을 안정시키고서 그 귀추를 기다리고자 함이오.”라고 했다.
旣伯石懼而歸邑하니 卒以予之니라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백석伯石은 두려워하여 봉읍封邑을 돌려보냈으나 〈자산子産은〉 끝내 그것을 백석伯石에게 주어버렸다.
又使爲卿하여 以次己位니라
또 그를 으로 삼아 자기의 다음 자리에 앉혔다.
鄭乃少安하고 及其久而政成矣니라
나라가 조금 안정되었고, 오랜 후에는 정치가 잘 이루어졌다.
之忠儉者 從而予之하고 泰侈者 因而斃之니라
으로서 충직하고 검소한 자들은 에 따라 을 주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자들은 죄에 따라 벌을 내렸다.
풍권豐卷을 쫓아내고 자절子晢을 죽이니 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如導所爲 知賂伯石하여 以全其始矣 未知予忠儉하고 斃泰侈하여 以成其終也니라
왕도王導가 한 일로 말하면 백석伯石게 봉읍을 주어 그 시초를 온전하게 한 것은 알고, 충직하고 검소한 자들은 을 주고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자들은 처벌하여 그 종말을 완성시킨 것은 알지 못한 것이다.
以爲賢於隗亮則可 以論晏子子産則遠矣니라
그러니 유외劉隗유량庾亮보다 낫다고 하는 것은 가하거니와 안자晏子자산子産으로 논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
역주
역주1 王導論 : 王導(276~339)는 晉나라 때 사람으로 元帝, 明帝, 成帝 등 세 조정을 거치면 出將入相하였고, 뒤에 벼슬이 太傅에 이르렀다.
《欒城集》에는 이 글의 標題를 〈王導〉라고 하였다.
역주2 西晉 : 司馬炎이 魏나라를 대신하여 帝라 칭하고 국호를 ‘晉’이라 하였으니, 史家가 이를 ‘西晉’이라 하였다.
역주3 通達 : 본서 권10 〈王衍論〉 제2단 註 2) 참조.
역주4 夷狄乘之 遂喪中國 : 西晉은 前趙의 君主인 劉淵의 大將 劉聰과 石勒 등에게 멸망되었다. 劉氏는 匈奴族이고, 石勒은 羯族에 속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5 賢者知厭之矣 而不勝其衆 : 어진 이가 당시 玄言을 숭상하는 풍습을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음을 가리킨다.
역주6 二大變 : 王敦과 蘇峻의 군사가 京師를 逼迫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7 上流 : 여기서는 長江의 상류인 荊州와 益州를 가리킨다.
역주8 敦遂起兵……幸而敦死 : 《晉書》 〈王導列傳〉에 의하면 “王敦이 永昌 원년(322)에 元帝의 親信인 劉隗를 誅斬할 일을 명분으로 내세워 상소해서 劉隗의 죄를 지적하였고, 또 表文을 올려 刁協의 죄상을 밝혔으며, 반란군을 일으켜 石頭城을 쳐서 함락하고 조정에 들어가 丞相이 되었으며, 明帝 太寧 2년(324)에 재차 반란을 일으켜 部將 등으로 하여금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京師를 향하게 하여 군대가 江寧에 들어갔을 때 도중에서 病死하였다.”고 한다.
역주9 成帝幼弱 : 成帝는 明帝의 長子로 이때에 5세였다.
역주10 庾亮輔政……復失人心 : 庾亮은 元帝의 舅氏로서 王導와 함께 遺詔를 받아 幼主인 成帝를 보필하였는데, 《晉書》 〈庾亮列傳〉에 “王導는 정권을 장악하여 명석하고 화평함으로써 대중의 인심을 얻고, 庾亮은 법을 맡아 사물을 재결함으로써 꽤 인심을 잃었다.”고 하였다.
역주11 蘇峻擅兵歷陽……而亮不聽 : 成帝 때에 王敦은 討平한 공으로 歷陽內史에 임명되었는데, 《晉書》 〈庾亮列傳〉에 “蘇峻은 또 도망한 사람을 많이 받아들이고 오로지 엄한 형법을 사용하였는데, 庾亮은 蘇峻이 틀림없이 禍亂을 일으킬 줄 알고 그를 불러 大司農으로 삼으려고 하니, 온 조정이 모두 불가한 일이라고 하고, 平南將軍 溫嶠 또한 누차 서신으로 만류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았다.”고 하였다.
역주12 遂與祖約連兵內向 塗炭京邑 : 《晉書》 〈蘇峻列傳〉에 의하면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蘇峻을 大司農으로 삼으니, 蘇峻이 명에 응하지 않고 使者를 祖約에게 보내 交誼를 체결하였으므로 祖約이 장수를 보내 蘇峻을 도우니, 蘇峻은 宣城을 쳐서 승리하고 그 승세를 몰아 京師에 이르렀다. 庾亮은 군사를 이끌고 蘇峻과 建陽門 밖에서 싸웠는데, 군사들이 미처 陣을 이루기도 전에 무기를 버리고 도망하였다.”고 한다.
祖約(?~330)은 晉나라 祖逖의 아우로서 祖逖이 죽은 뒤에 平西將軍과 豫州刺史를 물려받았고, 咸和 3년(328)에 蘇峻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建康으로 진격하였으며, 이번에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陶侃과 溫嶠 등에게 격파당하여 蘇峻은 피살되고 祖約은 後趙로 도망하였다가 石勒에게 피살되었다.
역주13 魯自宣公……公不從而出 : 《春秋左氏傳》 昭公 25년에 의하면 “춘추시대 魯 桓公의 아들인 季友의 후손을 ‘季孫氏’라고 칭하는데, 魯 文公 이후 宣公, 成公, 襄公의 세 조정에서 季孫行父와 季孫宿 등이 대대로 大夫가 되어 國政을 전담하니, 그들의 권세는 날로 높아지고 公室은 날로 낮아졌다.
그래서 昭公이 군사를 일으켜 季氏를 치려고 하니, 子家懿伯이 간하기를 ‘고자질을 하기 좋아하는 자가 공에게 만일의 기회를 노리고 말한 것이지만, 절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백성들을 내버려둔 지 몇 대나 되었는데, 이러한 일을 하려고 하시면 되지 않습니다. 더구나 지금 정권은 季氏에게 있기 때문에 해치우기가 어렵습니다.’라고 했는데, 昭公은 그 말을 듣지 않고 季孫氏를 치다가 결국 그를 대적하지 못하여 齊나라로 달아났다.”고 한다.
‘子家羈’를 《史記》에서는 ‘子家駒’로 적고 있는데, 司馬貞의 《索隱》에 “子家駒는 魯나라 大夫 仲孫氏의 족속인데, 이름은 駒, 시호는 懿伯이다.”라고 하였다.
역주14 齊景公 以貪暴失民 : 景公은 齊나라 大夫인 崔杼가 莊公을 죽이고 세운 임금인데, 재위기간에 백성의 생산물에서 3분의 1을 박탈하고, 상업을 농단하여 重稅를 거두는 등 포악한 정치를 자행하였다고 한다.
역주15 田氏 以寬惠得衆 : 齊 景公 때에 田桓子(陳無宇)는 백성들에게 대출할 때에는 大斗를 사용하고 거두어들일 때에는 小斗를 사용함으로써 민심을 얻었다고 한다.
역주16 : 저본에는 ‘謟’로 되어 있는데, 《春秋左氏傳》 昭公 26년에 의하여 ‘滔’로 바꾸었다.
역주17 公問於晏嬰……與天地竝 : 《春秋左氏傳》 昭公 26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비슷한 내용이 《晏子春秋》 〈外篇 上〉에도 나온다.
역주18 田氏遂代呂氏 : 周 文王이 비로소 太公望 呂尙을 齊나라에 봉하여 齊나라의 始祖가 되었으니, 齊나라 임금은 呂氏의 후예가 된 것이다. 齊 簡公 때에 田乞開가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고, 周 安王이 정식으로 田氏를 諸侯에 봉하였다. 그러므로 呂氏를 대신하였다는 것은 바로 齊나라를 대신하였다는 말이다.
역주19 大家世族 : 大家는 巨室과 같으니, 옛날에 卿‧大夫의 집을 가리켰다. 世族은 원래는 先世에 공이 있는 官族을 가리켰으나 뒤에 와서는 범연하게 世家大族을 가리킨다.
역주20 大人 : 저본에는 ‘人’으로 되어 있는데, 《春秋左氏傳》 襄公 30년에 의하여 ‘大人’으로 바꾸었다.
역주21 子産爲鄭……鄭乃大治 : 《春秋左氏傳》 襄公 30년에 나오는 내용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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