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衰禮義不明한대 而小人奮身以犯上으로 相夸以爲賢하니 공자孔子疾之하시다
하고 채蔡공손편公孫以
대부大夫로 한대 춘추春秋皆以
도盜書而不名
하니 니라
태사공太史公傳刺客凡五人은 皆제표豹공손편翩之類耳어늘 而其稱之不容口하니 失춘추春秋之意矣니라
獨예양豫讓爲舊君報조양자趙襄子하니 有古復讐之義니라
如형가荊軻刺진秦시황始皇은 雖시황始皇以彊暴失天下心하여 聞者快之나 要以盜賊으로 乘人主不意니 法不可長也니라
自是노魯未嘗敗하고 十三年에 而會제후齊侯于가읍柯하니 安得所謂三戰三敗리오
하니 其後戰國游士
가 多稱
조말沫以爲口實
이나 而實非也
니라
이라하니 조말沫蓋知義者也
어늘 而肯以其身爲刺客之用乎
아
춘추春秋 송宋초楚盟于城下
와 제齊노魯盟于
협곡夾谷을 皆以要盟不書
하고 니라
주周나라가 쇠퇴기에 접어들어 예의禮義가 밝지 못하자, 소인小人들이 분기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윗사람을 침범하는 것으로써 서로 뽐내며 현명하다고 여기니, 공자孔子께서 그것을 미워하셨다.
제표齊豹가 위衛나라 사구司冦로서 위후衛侯의 형兄 집縶을 죽이고 채蔡나라 공손편公孫翩이 대부大夫로서 그 임금 신申을 죽였거늘, 《춘추春秋》에서 모두 ‘도盜’로 적고 이름을 적지 않았으니, 이른바 “〈용맹하다는〉 명성을 구했지만 얻지 못하였다.[求名而不得]”란 것이다.
태사공太史公이 입전立傳한 자객刺客 다섯 사람은 모두가 제표齊豹와 공손편公孫翩 따위였을 뿐인데, 그들을 몹시 칭찬하였으니, 《춘추春秋》의 뜻을 잃은 것이다.
예양豫讓만은 옛 임금(智伯)을 위하여 조양자趙襄子에 대해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니, 옛날에 복수復讐하는 의의가 있었다.
형가荊軻가 진秦 시황始皇을 찌른 것과 같은 일은 비록 시황始皇이 강포强暴로 천하의 인심을 잃어서,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지만, 결과적으로 도적盜賊(刺客)들에게 임금(始皇)이 유의치 못한 것을 틈타게 한 것이니, 그러한 법法은 조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조말曹沫의 일로 말하면 내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가지고 상고하건대, 노魯 장공莊公 10년에 조말曹沫이 처음 모책謀策을 가지고 장공莊公을 찾아뵈니, 장공莊公이 그 모책謀策을 써서 제齊나라를 장작長勺에서 패배시켰다.
이로부터 노魯나라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고, 13년에 제후齊侯(齊 환공桓公)와 〈제齊나라〉 가읍柯邑에서 회맹會盟하였으니, 어떻게 이른바 ‘세 번 싸워 세 번 패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조말曹沫이 어찌 비수匕首를 가지고 제齊 환공桓公을 위협하여 제나라에 빼앗긴 땅을 요구한 사람이었겠는가?
처음에 공양고公羊高가 이설異說을 채취하여 조말曹沫의 일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기재하니, 그 뒤에 전국戰國의 유사游士(遊說客)들이 대부분 조말曹沫을 칭찬하는 것으로 구실口實을 삼았으나 실은 사실이 아니었다.
장공莊公이 〈침입한〉 제齊나라의 군대를 막을 때에 조말曹沫이 〈장공莊公에게〉 싸울 방법을 묻고 “작은 은혜와 신의는 믿을 것이 못 되며, 〈백성을 위하는〉 충忠에 해당된 일이면 한번 싸워볼 만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조말曹沫은 아마 의리義理를 안 사람이었을 것인데, 자신이 자객刺客이 되려고 했겠는가?
《춘추春秋》에서는 송宋나라와 초楚나라가 성하城下에서 회맹會盟한 것과 제齊나라와 노魯나라가 협곡夾谷에서 회맹會盟한 것을 모두 ‘요맹要盟(맹약을 요구한 것)’으로 적지 않고 ‘평平(화평)’과 ‘회會(회합)’로 적었을 뿐이다.
가사 조말曹沫이 참으로 비수匕首를 가지고 환공桓公을 위협하였다면 어찌 ‘맹약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런데 《춘추春秋》에서 “장공莊公이 제齊나라 임금을 가읍柯邑에서 만나 동맹을 맺었다.”고 적었으니, 그것이 ‘맹약을 요구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조말曹沫을 삭제하고 그중 네 사람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또한 〈조말曹沫이〉 이른바 ‘어진 사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