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罪왕연王衍甚確하고 而其論동진東晉以來 迄于당唐이 似猶影響이니라
聖人之所以御物者三이니 道一也요 禮二也요 刑三也니라
주역易曰 形而上者를 謂之道요 形而下者를 謂之器라하니 禮與刑 皆器也니라
공자孔子生於주周末하여 內與門弟공자子言하고 外與諸侯대부大夫言하되 言及於道者 蓋寡也니라
惟其非形器也라 故로 目不可以視而見이요 耳不可以聽而知니라
惟君子得之於心
하여 以之御物
하고 應變無方
하여 而不失其政
이니 則所謂
也
니라
하여 與物相遇
에 輒捐理而徇欲
이니 則所謂無忌憚也
니라
故로 공자孔子不以道語人이요 其所以語人者는 必以禮니라
蓋曰
은 君子由禮以達其道
하고 而小人由禮以達其器
니라
由禮以達道면 則自得而不眩하고 由禮以達器면 則有守而不狂이니라
三代已遠하니 한漢之儒者 雖不聞道나 而猶能守禮라
故로 在朝廷則危言하고 在鄕黨則危行하여 皆不失其正이니라
至
위魏무제武始好法術
하니 而天下貴
하고 위魏문제文始慕
하니 而天下賤守節
이니라
하안何晏등양鄧颺은 導其源
하고 는 漲其流
하고 而
는 卒以亂天下
니라
要其終皆以濟邪佞하고 成淫慾하여 惡禮法之繩其姦也라
故로 蔑棄禮法하고 而以道自命하니 天下小人便之니라
君臣奢縱於上하고 男女淫泆於下하니 風俗大壞하여 至於中原爲墟而不悟니라
왕도王導사안謝安은 강동江東之賢臣也
로되 하고 하니 則廢禮慕道之俗 然矣
니라
至당唐始以義疏通南北之異하니 雖未聞聖人之大道나 而形器之說備矣니라
上
郊廟朝廷之儀
로 下至冠婚喪祭之法
히 何所不取於
리오
於是에 捨之而求道나 冥冥而不可得也니 則至於禮樂度數之間과 字書形聲之際하여는 無不指以爲道之極이니라
然이나 反而察其所以施於世者면 內則讒諛以求進이요 外則聚斂以求售니라
廢端良하고 聚苟合하여 杜忠言之門하고 闢邪說之路하되 而皆以詩書文飾其僞하니 要之컨대 與왕연王衍無異니라
世無孔孟하여 使양주楊묵적墨塞路而莫之闢하니 吾則罪人爾矣로다
왕연王衍을 죄준 것이 매우 정확하고, 동진東晉 이래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논한 것이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다.
성인聖人이 만물을 통어統御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도道(道德)가 첫 번째이고, 예禮(禮制)가 두 번째이고, 형刑(刑法‧법도法度)이 세 번째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형체 이상의 것을 도道(진리‧정신‧추상)라 이르고, 형체 이하의 것을 기器(사물‧물질‧물체)라 이른다.”고 하였으니, 예禮와 형刑은 다 기器이다.
공자孔子께서는 주周나라 말기에 태어나서 안으로는 문인 제자들과 말을 나누고, 밖으로는 제후諸侯나 대부大夫들과 말을 나누었으되, 도道에 대한 언급은 대개 적었던 것이다.
말씀을 할 줄 모른 것이 아니라 도道는 가볍게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자께서 일찍이 도道에 대해 언급하신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경우였으니, “삼參(曾子)아, 우리 도道는 하나의 이치로 관철되어 있느니라.” 하셨다.
무릇 도道는 무형無形을 본체本體로 삼아 각종 실재적인 사물 중에 분산되어 있는 것이다.
인仁에 있으나 인仁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의義에 있으나 의義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예禮에 있으나 예禮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지智에 있으나 지智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道)은 형기形器가 아니기 때문에 눈으로 보아도 볼 수가 없고, 귀로 들어도 알 수가 없다.
오직 군자君子만이 도道를 마음에 터득하여 도道로써 만물을 통어統御하고 어디에서든 변화에 순응하여 그 올바름을 잃지 않으니, 이른바 ‘시중時中’이란 것이다.
소인小人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이름만을 도용하여 사물과 서로 만남에 문득 이치를 버리고 욕심을 따르니, 이른바 ‘기탄忌憚이 없다.’란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도道로써 사람들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반드시 예禮로써 하셨다.
예禮라는 것은 형기形器이니, 공자孔子께서는 반드시 예禮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되 인색하시지 않았다.
대개 “군자君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小人은 아래로 통달한다.”고 한 것은, 군자君子는 예禮로 말미암아 그 도道를 통달하고 소인小人은 예禮로 말미암아 그 기器를 통달한다는 것이다.
예禮로 말미암아 도道를 통달하면 자득自得한 바가 있어서 미혹되지 않고, 예禮로 말미암아 기器를 통달하면 지키는 바가 있어서 함부로 진취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공자孔子께서 도道에 대한 말씀을 적게 하고 그 대신 예禮에 대한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이다.
아랫사람과 같은 경우는 그들에게 예禮로써 보이고 바르게 되지 않는 연후에 형벌로써 다스릴 것이다.
세 가지가 갖추어지면 성인聖人이 만물을 통어하는 것이 완벽할 것이다.
삼대三代(夏‧은殷‧주周)가 이미 멀어졌는데, 한漢나라 유자儒者들은 비록 도道는 듣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예禮를 잘 지켰다.
그러므로 조정朝廷에 있어서는 말을 곧게 하고 향당鄕黨에 있어서는 행동을 곧게 하여 모두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
위魏 무제武帝(曹操) 때에 와서 비로소 법술法術을 좋아하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형명刑名을 귀하게 여겼고, 위魏 문제文帝(曹丕)가 비로소 통달通達을 사모하니 온 천하가 모두 절조를 지키는 행위를 경시하였다.
이와 같은 풍조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허무방탕虛無放蕩한 이론理論이 조정과 민간에 가득하였다.
하안何晏과 등양鄧颺은 그 근원을 창도倡導하였고, 완적阮籍 부자父子는 그 흐름을 조장하였으며, 왕연王衍 형제兄弟는 마침내 천하天下를 어지럽혔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사녕邪佞을 증가시키고 음욕淫慾을 이루어 예법禮法이 그 간사함을 구속하는 것을 미워하였다.
그러므로 예법禮法은 폐기하고 도道로써 스스로 할 만한 일이라 여기니, 천하天下의 소인小人들이 이를 편리하게 여겼다.
군신君臣은 위에서 사치를 부리며 방종하고, 남녀男女는 아래에서 음탕하며 방자하게 굴었으니, 풍속風俗이 크게 무너져 중원中原 지대가 폐허가 됨에 이르렀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
왕도王導와 사안謝安은 강동江東의 현신賢臣이었으나 왕도王導는 성제成帝에게 무례하게 굴며 두려워할 줄을 몰랐고, 사안謝安은 기상期喪에 음악을 연주하며 가르침을 받지 않았으니, 예禮를 폐기하고 도道를 흠모하는 풍속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동진東晉 이래로 천하天下의 학자學者들이 남방南方의 학學과 북방北方의 학學으로 나뉘었는데, 남방의 학은 간략해서 그 정화精華를 얻었고, 북방의 학은 거칠어서 그 지엽枝葉을 궁구하였다.
당唐나라에 와서 비로소 대의大義로써 남방과 북방의 학문 차이를 소통시켰으니, 비록 성인聖人의 대도大道는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형기形器의 설說은 갖추어졌다.
위로 교묘郊廟‧조정朝廷의 예의禮儀에서부터 아래로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의식儀式에 이르기까지 어찌 여기에서 취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도道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학자學者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그것을 놓아두고 도道를 구하나 멍해서 얻을 수가 없으니, 예악禮樂‧도수度數와 자서字書‧형성形聲 같은 것에 이르러서 그것을 가리켜 도道의 정점으로 삼지 않은 이가 없다.
그러나 돌이켜 그들의 처세 방법을 살펴보면, 안으로는 아첨으로써 진취를 구하고 밖으로는 재물을 마구 거둬 내다 팔기를 힘쓴다.
단아하고 현량한 사람을 폐출하고 구차하게 영합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충언忠言이 들어오는 문을 틀어막고, 사설邪說이 행하는 길을 열어놓고도 모두 시서詩書로써 그 거짓을 문식하니, 결과적으로는 왕연王衍과 다를 것이 없다.
세상에 공자와 맹자가 없어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길을 막게 놓아두고 물리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는 죄인일 따름이로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식견識見이 있고 논論한 곳 역시 투철하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