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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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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篇 議亦未的確이나 但論반초班超一着甚是니라
古者 이라 紛紛籍籍하여 不相統制니라
之種 常爲大國하여 以抗中夏니라
이나 蠻夷之俗 種姓分別하여 千人爲部하고 百家爲黨하며 見利則聚하고 輕合易散하며 族類不一이니 其心終莫相愛니라
其兵利於疾戰이요 而不利於遲久니라
之人 綿地千里 控弦百萬이며 侯王君長 通爲一家 人畜富盛하여 蔓延山谷之間이니 其心常有所愛重하여 而不忍去
其兵利於持久 而不利於疾戰이니라
此二者 其大小之勢 各有所便이니 宜乎中國之所以待之者 各有道也니라
今夫之人 伏於之下하여 養兵休士하고 久居而不戰이나 此其志 豈嘗須臾忘中國也
이나 其心以爲戰而勝人 猶不若不戰而屈人之兵이니라
戰而不勝이면 民之死者 未可知也
常大言虛喝而不進하여 以謀弊中國이니라
蓋其所愛者愈大 其謀之愈深하고 而發之愈緩하여 以求其不失也니라
若夫서남이西남만南蠻서남이西南夷之民 悉其衆庶라도 尙不能當之半이요 而其酋長 每每爲亂 不能自禁하니 此誠無愛於其心이요 而僥倖於一戰 以用其烏合之衆而已니라
夫蠻夷之人 擾邊求利 其中非有大志者 其類皆可以謀來也니라
愚嘗觀於西南徼外하여 以臨蠻夷之衆하여 求其所以爲變之始하고 而遂至於攻城郭하고 殺人民하며 縱橫放肆하여 而不可救者하니 其積之莫不有漸也니라
夫蠻夷之民 寧絶而不이어늘 今邊鄙之 利其貨財而納之於市하여 使邊民凌侮欺謾而奪其利하고 長吏又以爲擾民而不之禁하니 窮恚無聊 莫可告訴
其勢必至於解仇結盟하고 攻剽蹂踐하여 殘之於鋒鏑之間而後 其志得伸也니라
嗟夫
爲吏如此하니 亦見其不知本矣니라
通關市하고 戢吏民하여 待之如中國之民이면 彼尙誰所激怒而爲此哉
이나 事不患乎不知 而患乎人之不能用이니라
西破구자龜玆하고 北伏흉노匈奴하니라
及將東歸 或以爲必有奇謀하여 乃就問其計니라
이나 其言止曰 이니라하니 當是時 莫不皆笑하여 以爲不足用이니라
이나 及西域之亂 終亦以此故 夫謀非必奇而後可用이요 而在乎當否而已니라
古者 四夷皆置교위校尉니라
익주益州만이기도위蠻夷騎都尉하여 以治其事하되 使其彊者不能內侵하고 而弱者不爲중국中國之所侮하니 蓋爲是也니라
자유子由之論西戎 大略竝按宋情事本末하여 而爲之者니라
以騎射爲業하여 逐水草하고 食肉酪하며서강西羌 則各塹山谷하여 分部落하며남이南夷 則戀巢穴하고니라
其勇悍聚散不同하고 而所以制御之者 亦不同이니라
西戎남만南蠻 撫勦兼施 可以懷柔 則惟戰守二策耳니라


08. 서남이西南夷에 대한
이 편은 의론이 또한 정확한 것이 못 되지만, 단 반초班超를 논한 한 곳만은 매우 옳다.
옛적에 구이九夷팔만八蠻대군장大君長이 없어서 여러 사람이 멋대로 떠들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서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오직 북적北狄의 종족만이 항상 대국大國을 이루어 중하中夏(中國)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만이蠻夷의 풍속은 종족이 엄격히 구분되어 1천 인을 로, 1백 으로 조직하며, 자기에게 유리한 일을 보면 모이고 쉽게 모였다가 쉽게 흩어지며, 족류族類가 다양하니 그들은 심리적으로 끝내 서로 친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군대는 속전속결하는 것이 이롭고 지구전을 펼치는 것은 불리하다.
북적北狄의 인민은 국토가 천 리나 뻗쳐 있고 활 쏘는 군사가 백만이나 되며, 후왕侯王군장君長이 한 집안처럼 친하고 사람과 가축이 부성富盛하여 산곡山谷 사이에 꽉 차 있으니, 그들의 마음에 항상 애지중지하는 바가 있어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군대는 지구전을 펼치는 것이 이롭고 속전속결하는 것은 불리하다.
이 두 종족은 그 크고 작은 형세에 각각 편리한 바가 있으니, 중국은 그들을 대하는 것에 각각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북적北狄의 인민은 음산陰山 아래에 엎드려 군사를 양성하고 휴식하며, 오랫동안 조용히 살며 싸움을 하지 않으나 그들의 뜻은 어찌 일각인들 중국을 잊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싸움을 해서 남을 이기는 것이 오히려 싸움을 하지 않고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만 못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인민이 어느 정도 죽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항상 과장된 언사를 써서 허세만 부리고 진격하지는 않음으로써 중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술을 도모한다.
대개 아끼는 것이 더욱 방대하기 때문에 꾀를 쓰는 것이 더욱 깊고 발현하는 것이 더욱 느려서 실패하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다.
서융西戎, 남만南蠻, 서남이西南夷의 인민 같은 경우는 그 민중을 다 동원하더라도 오히려 북적北狄 인민의 절반도 당해낼 수 없고, 그들의 추장酋長은 매번 을 일으키는 일을 자제하지 못하니, 이는 참으로 그 마음에 인민을 아끼는 애정이 없고 요행히 한 번 싸움에 그 오합지졸烏合之卒을 이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만이蠻夷의 인민은 변경을 침요侵擾하여 사리私利만 취할 뿐, 그중에 큰 야심을 가진 자가 있는 것은 아니니, 그러한 부류는 모두 지모智謀로써 귀부歸附하게 할 수 있다.
내가 일찍이 서남西南 변경에서 관찰하기 시작하여 만이蠻夷의 민중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들이 최초로 도발한 사변의 원인을 찾고, 더 나아가 성곽城郭을 공격하고 인민을 살해하는 등 횡포橫暴하고 광망狂妄하여 구제할 수 없는 과정에 이르기까지를 〈살폈더니,〉 그들의 쌓인 위세威勢에는 점차적으로 발전된 과정이 있었던 것이다.
만이蠻夷의 민중은 차라리 왕래를 끊어 통상通商하지 않아야 옳거늘, 지금 변경 지방에서는 그들의 화재貨財에 대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그들이 시장에 와서〉 교역하는 것을 수용하여 변방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을 능모凌侮하고 기만欺謾하여 그 이익을 빼앗게 하고 지방 장관 또한 백성을 소요騷擾한다고 하여 금하지 아니하니, 그들은 한없이 억울하지만 호소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형세는 반드시 〈심중의〉 원한을 해소하기 위하여 맹약을 맺고 〈들고일어나〉 공격하고 짓밟으며 전쟁을 하고 나서야 그 억울한 뜻을 펼 수 있을 것이다.
아!
관리 됨됨이 이와 같으니, 〈관리로서 지켜야 할〉 기본자세를 알지 못함을 또한 볼 수 있다.
관시關市의 무역을 공정하게 소통시키고 관리와 백성들의 〈불법을〉 금지하여 그들을 중국의 백성처럼 대한다면 저들 중에 그 누가 격노激怒하여 이와 같은 나쁜 일을 하겠는가?
그러나 사정은 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람들이 〈도리를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옛날 반초班超서역西域에 수십 년 있으면서 서쪽으로는 구자龜玆를 격파하고 북쪽으로는 흉노匈奴를 항복시켰다.
그가 장차 동쪽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에 어떤 사람이 그는 반드시 기이한 모책謀策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여겨 그에게 가서 그 계책을 물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단지 “연못 속의 고기를 살피면 이롭지 못하고, 둔수屯戍하는 군사들은 모두 충신忠臣, 효자孝子가 아니니 모조리 법으로 다스려서는 아니된다.”라고만 했을 뿐이니, 그 당시에는 모두 비웃으며 “족히 쓸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역西域이 미친 것은 결국 또한 이 일 때문이었으니, 모책은 반드시 기이한 뒤에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타당함과 그렇지 않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옛날에는 사이四夷에 모두 교위校尉를 설치하였다.
익주益州에는 만이기도위蠻夷騎都尉를 두어 그 일을 다스리되 강자强者내지內地를 침략하지 못하게 하고 약자弱者중국中國에게 멸시를 받지 않게 하였으니, 대개 이 때문이었다.
자유子由서융西戎북적北狄을 논한 것은 대략 송대宋代 사정의 본말을 아울러 살펴서 논한 것이다.
북로北虜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으로 삼아 물과 풀을 찾아다니고 고기와 우유를 먹었으며, 서강西羌은 각각 산곡山谷에 구덩이를 파서 부락部落을 나누었으며, 남이南夷소혈巢穴에서 살고 전토田土를 대대로 경작하였다.
그러므로 그 용한勇悍취산聚散이 같지 않고, 제어하는 것도 같지 않았다.
서융西戎남만南蠻무위撫慰초토勦討를 겸해서 실시하면 회유懷柔할 수 있지만, 북적北狄의 경우는 오직 전쟁과 수비 두 가지 계책밖에 없다.


역주
역주1 西南夷論 : 〈西南夷論〉은 四庫全書의 《欒城應詔集》 권5에는 〈防邊論 三〉으로 되어 있다. 西南夷는 漢代에는 지금의 甘肅 南部, 四川 西部, 雲南, 貴州 일대의 소수민족을 총칭하였는데, 10여 종족이 정착해 살았다. 경제발전이 고르지 못하여 夜郞族‧靡莫族‧滇族‧邛都族은 주로 農耕에 종사하였고, 寯族과 昆明族은 遊牧에 종사하였고, 그 밖의 종족은 혹은 농경, 혹은 목축에 종사하였다.
역주2 九夷八蠻 : 九夷는 옛날 東夷에 9種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그 9種은 책에 따라 각각 다르다. 이를테면 《東夷傳》에는 ‘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라 하였고, 《論語注疏》 〈子罕〉의 ‘子欲居九夷’의 疏에는 ‘玄菟, 樂浪, 高驪,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 天鄙’라 하였다. 八蠻은 《爾雅》 〈釋地〉에 ‘天竺, 咳首, 僬僥, 跛踵, 穿胸, 儋耳, 狗軹, 旁脊’이라 하였다.
역주3 大君長 : 天子와 같은 지위를 가리킨다. 君長은 酋長이나 將帥 같은 것이다. 《史記》 〈西南夷列傳〉에 “西南夷의 君長은 10으로 헤아릴 수 있는데, 그중에서 夜郞이 가장 크다.”란 말이 보인다.
역주4 北狄 : 四庫全書의 《欒城應詔集》에는 ‘北方’으로, 《唐宋八大家文鈔》에는 ‘匈奴’로 되어 있다.
역주5 北狄 : 四庫全書의 《欒城應詔集》에는 ‘北方’으로, 《唐宋八大家文鈔》에는 ‘匈奴’로 되어 있다.
역주6 北狄 : 四庫全書의 《欒城應詔集》에는 ‘北方’으로, 《唐宋八大家文鈔》에는 ‘匈奴’로 되어 있다.
역주7 陰山 : 內蒙古의 자치구역 내에 있는데, 예부터 남북교통의 要道가 되었다.
역주8 狄人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匈奴’로 되어 있다.
역주9 : 四庫全書의 《欒城應詔集》에는 ‘之’로 되어 있다.
역주10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와 《圖書編》 등에는 ‘士’로 되어 있다.
역주11 昔班超 處西域數十年 : 班超(32~102)는 東漢의 名將이다. 班彪의 次子이자 班固의 아우인 그는 明帝 때 西域에 사신으로 가서 鄯善에 이르러 于闐을 항복시키고 疏勒을 소통시키고 莎車를 항복시키고 龜玆를 내쫓고 焉耆王廣을 베어 죽이니, 이에 西域 50여 개의 나라들이 모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오고 따라서 ‘臣子’라고 칭하였으며, 왕명으로 班超를 西域都護로 삼고 定遠侯에 봉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班定遠’이라고도 칭하였다. 班超는 西域에서 31년을 살다가 늙어서 본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역주12 察見淵中魚不祥……不可盡繩以法 : 《後漢書》 〈班超傳〉에 “〈西域都護로서 夷狄의 인심을 얻고 있던〉 班超가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게 되자, 戊巳校尉 任尙을 都護로 삼았다. 班超와 교대할 때에 任尙이 班超에게 ‘君侯께서는 외국에 30여 년이나 계셨는데, 소인이 외람되이 君侯의 뒤를 이었으므로 책임은 무겁고 사려는 얕으니, 마땅히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班超는 ‘要塞 밖의 관리와 군사들은 본래 孝子와 順孫이 아닌데, 모두 罪過로써 옮겨져 邊屯에 補任되었고, 蠻夷는 鳥獸의 마음을 품어서 기르기는 어렵고 실패하기는 쉽거늘, 지금 그대의 성품은 엄격하고 조급하군요. 물이 지극히 맑으면 큰 고기가 없고, 정사를 지극히 살피면 화합을 얻지 못하니, 대충 처리하여 작은 과실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큰 강령만 총괄하면 될 뿐이오.’라고 하였다.
班超가 떠난 뒤에 任尙이 사적으로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班君에게 기이한 謀策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지금 그가 말한 것은 평범할 뿐이었네.’라고 하였다. 任尙이 그곳에 이른 지 몇 해 만에 西域이 반란을 일으켜서 그 죄로 부름을 받게 된 것이 班超의 경계한 바와 같았다.”란 내용이 보인데, 蘇轍은 그 대의만을 취한 것이다.
蘇轍이 인용한 “연못 속의 고기를 살펴보면 이롭지 못하다.[察見淵中魚不祥]”란 말은 본래 《韓非子》와 《文子》에서 周代의 속담을 인용한 것인데, 《列子》 및 《史記》 〈吳王濞傳〉 등 여러 책에서 ‘남의 허물을 너무 지나치게 살피는 것은 좋지 못하다.’란 뜻에 빗대어 많이 인용하고 있다.
역주13 北狄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北邊’으로 되어 있다.
역주14 北虜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北邊’으로 되어 있다.
역주15 田土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俗土’로 되어 있다.
역주16 北虜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北邊’으로 되어 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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