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유僧孺는 外托鎭靜이나 而於持危濟變處엔 非其所能이요 이덕유德裕는 內持果敢이나 而藏器待時處는 亦其所闇이니 要之컨대 均不知大臣之道者니라
당唐自헌종憲宗以來로 士大夫黨附牛李하여 好惡不本於義하고 而從人以喜慍하니 雖一時公卿將相이라도 未有傑然自立者也니라
우승유牛黨出於우승유僧孺하고 이덕유李黨出於이덕유德裕니라
蓋우승유僧孺以이덕유德量高하고 而이덕유德裕以才氣勝하니라
使二人各任其所長하고 而不爲黨이면 則당唐末之賢相也니라
에 유주幽州양지성楊志誠이 逐其將
이재의李載義어늘 帝召問計策
하니 우승유僧孺曰 是不足爲朝廷憂也
니이다
前日
유총劉에 朝廷麋費且百萬
이나 終不能得斗粟尺布以實天府
하고 俄復失之
니이다
이덕유德裕以爲河朔命帥 失在太速하여 使姦臣得計라하고 遷延久之에 擢用장중무張仲武하니 而장강絳自斃니라
우승유僧孺以無事爲安
하고 而
이덕유德裕以制勝爲
하니 此固二人之所以異
니라
이덕유德裕검남서천절도사節度검남서천절도사劒南西川에 토번吐蕃將실달모悉怛謀가 以유주維州降하니 유주維州는 검남서천절도사西검남서천절도사南要地也니라
是時에 方與토번吐蕃和親이라 우승유僧孺不可曰 토번吐蕃綿地萬里니 失一유주維州라도 不害其强이니이다
彼若來責失信
하고 울여천蔚울여천川하여 東襲
견롱汧隴이면 不三日至
함양교咸陽하리니 雖得百
유주維州라도 何益
이리오하니라
황제帝從之하여 使이덕유德裕反降者하니 토번吐蕃族誅之하니라
이덕유德裕深以爲恨하고 雖議者나 亦不直우승유僧孺니라
然이나 토번吐蕃自是不爲邊患하여 幾終당唐世하니 則우승유僧孺之言은 非爲私也니라
何道致之
오 우승유僧孺曰
신臣재상宰相하되 不能康濟天下
니이다
今四夷不內侵하고 百姓安生業하고 私室無强家하고 上不壅蔽하고 下不怨讟하니 雖未及全盛이나 亦足爲治矣니이다
更求太平이면 非신臣所及也니이다하고 退謂諸宰相하되 上責成如此하니 吾可久處此邪아하니라
帝初欲以이훈訓爲간관諫官하니 이덕유德裕固爭하여 言이훈訓小人이라 咎惡已著하니 決不可用이라하니라
二人所趣不同이나 及其臨이훈訓정주注事엔 所守若出於一人하니 吾以是知其皆偉人也니라
及在
주애朱崖에 하여 論
하되 言
우승유僧孺有僭逆意
하고 悻然小丈夫之心
이 老而不衰也
라하니라
09.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에 대한 논論
우승유牛僧孺는 밖으로 진정鎭靜을 표방하나 위기를 관리하고 변란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는 능숙한 솜씨가 아니고, 이덕유李德裕는 안으로 과감果敢을 가지나 재기才器를 간직하고 때를 기다리는 데 있어서는 역시 어두우니, 결과적으로 모두 대신大臣의 도리를 알지 못한 자들이다.
당唐나라는 헌종憲宗 이후로 사대부士大夫들이 우당牛黨과 이당李黨에 붙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대의大義에 근본을 두지 않고, 같은 당黨이 기뻐하면 따라서 기뻐하고 같은 당黨이 노하면 따라서 노하였으니, 비록 일시의 공경公卿, 장상將相이라 하더라도 붕당朋黨 밖에 초연하여 독립한 사람이 없었다.
우당牛黨은 우승유牛僧孺에게서 출발하였고, 이당李黨은 이덕유李德裕에게서 출발하였다.
두 사람은 비록 당인黨人의 영수領首였으나 기실은 당세當世의 위대한 사람이었다.
대개 우승유牛僧孺는 덕량德量이 남보다 높고 이덕유李德裕는 재기才氣가 남보다 나았다.
덕德과 재才는 같지 않은 것이니, 비록 옛날 사람이라 하더라도 덕량德量과 재기才氣를 겸한 자가 적었다.
가사 두 사람이 각각 잘하는 분야를 맡고 당黨을 짓지 않았다면 당唐나라 말기의 어진 재상이었을 것이다.
우승유牛僧孺가 문종조文宗朝에 재상으로 있을 때 유주幽州 양지성楊志誠이 그 장수 이재의李載義를 쫓아냈거늘, 황제皇帝(文宗)가 우승유牛僧孺를 불러서 그것에 대한 계책計策을 물으니, 우승유牛僧孺는 대답하기를 “이는 족히 조정朝廷의 걱정거리가 못 됩니다.
범양范陽은 안사安史의 난亂이 있은 이후로 다시는 국가國家의 휴척休戚에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전일前日 유총劉總이 토지를 헌납할 때에 조정朝廷에서 소비한 돈은 백만 금이나 되었지만, 결국은 두속斗粟, 척포尺布를 얻어 천부天府에 넣어보지도 못하였고, 얼마 안 가서 다시 범양范陽을 잃었습니다.
지금 양지성楊志誠도 이전의 이재의李載義와 같습니다.
다만 그에게 절모節旄를 부여하여 해奚와 거란契丹을 막게 하면 그 또한 스스로 역량을 다하여 족히 순하게 다스리는 것을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황제皇帝가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이것을 생각지 못하였는데, 공公의 말이 옳다.”라고 하고 이내 사신을 보내서 위무慰撫하였다.
무종武宗 대에 와서 진행태陳行泰가 사원충史元忠을 죽였으며, 장강張絳이 다시 진행태陳行泰를 죽이고 군사를 거느릴 장수가 되기를 요구하였다.
이덕유李德裕는 ‘하삭河朔의 장수를 임명하는 일은 그 잘못이 너무 빨리 임명하여 간신姦臣의 마음을 맞추어주는 데에 있다.’고 여기고, 시일을 오래 끌어서 장중무張仲武를 발탁해 임용하였더니, 장강張絳이 스스로 폐사하였다.
우승유牛僧孺는 변고가 없는 것을 안정으로 삼고, 이덕유李德裕는 제압하여 승리하는 것을 득得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본래 두 사람의 차이점이다.
우승유牛僧孺는 이덕유李德裕에 비교하면 약간 우월하였다.
이덕유李德裕가 검남서천절도사劒南西川節度使로 있을 때에 토번吐蕃의 장수 실달모悉怛謀가 유주維州를 가지고 투항하였으니, 유주維州는 서남西南의 요해지要害地이다.
이때는 막 토번吐蕃과 화친和親 중이라, 우승유牛僧孺가 동의하지 않으면서 “토번吐蕃은 토지가 만 리나 이어져 있으니 유주維州 하나를 잃는다 하더라도 강국强國이 되는 데에는 손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방금 화호和好를 맺고 스스로 어기는 꼴이 되었습니다.
중국中國이 융적戎狄을 방어하는 데에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고, 변고에 잘 대응하는 것이 그 다음의 방법입니다.
저들이 만일 와서 신의를 잃은 것을 책망하고, 찬보贊普가 마필馬匹을 울여천蔚茹川에 방목하여 동쪽으로 견롱汧隴을 엄습한다면 사흘이 채 안 되어서 함양교咸陽橋에 이를 것이니, 비록 백 개의 유주維州를 얻는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황제皇帝가 그 말에 따라 이덕유李德裕로 하여금 투항한 자를 돌려보내게 하였더니, 토번吐蕃이 투항자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
그러자 이덕유李德裕는 몹시 한스러워하였고, 비록 〈이덕유李德裕를〉 비판하는 자라 하더라도 우승유牛僧孺를 옳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토번吐蕃은 이로부터 거의 당唐나라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변방의 화환禍患거리가 되지 않았으니, 우승유牛僧孺의 말은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황제皇帝는 바야흐로 이훈李訓과 정주鄭注를 등용하여 특이한 공훈을 구하려고 하였다.
어느 날 〈문종文宗이〉 연영전延英殿에서 재상宰相들에게 이르기를 “공公들도 태평太平에 관심을 두는가?
어떻게 해야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우승유牛僧孺가 아뢰기를 “신臣은 죄스럽게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천하天下를 태평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태평太平 또한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현재 사방의 오랑캐들이 내침內侵을 하지 않고 백성百姓들이 생업生業에 안정을 누리고 개인 집에는 세력이 강성한 집이 없으며, 위에서는 격절隔絶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원망하지 않으니, 전성시대全盛時代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또한 치세治世가 되기에는 족합니다.
더 이상 태평을 구하신다면 신臣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와 여러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황상皇上께서 이처럼 성과를 독책하시니 내가 이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우승유牛僧孺가 파직되고 오래지 않아, 이훈李訓이 감로甘露의 일을 하여 거의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제皇帝가 처음에 이훈李訓을 간관諫官으로 삼으려고 하니, 이덕유李德裕가 강력히 간쟁諫諍하여 “이훈李訓은 소인小人이라 구악咎惡이 이미 드러났으니 결코 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덕유李德裕 또한 이 일로 인하여 파직되어 갔다.
두 사람은 지취志趣가 같지는 않았으나 이훈李訓과 정주鄭注의 일에 있어서는 고수하는 것이 마치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 같았으니, 나는 이것을 가지고 그들이 다 위대한 사람이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덕유李德裕는 우승유牛僧孺를 대신하여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로 나갔을 때에 “〈우승유牛僧孺가〉 부고전府庫錢 40만 민緡을 착복했다.”고 헐뜯었지만 대질한 결과 사실이 아니었고,
주애朱崖에 있을 때에 《궁수지窮愁志》를 지어 《주진행기周秦行紀》를 논하되 “우승유牛僧孺는 참역僭逆할 뜻을 가졌고, 발끈 성내는 소장부小丈夫의 마음이 늙을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처음에 우승유牛僧孺는 남쪽으로 순주循州에 폄적貶謫되었다가 늙어서 돌아오게 되었고, 두 아들 울蔚와 총藂는 뒤에 다 명경名卿이 되었다.
이덕유李德裕는 주애朱崖에서 죽고 자손子孫은 성명聲名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후세에 그의 궁함을 매우 슬퍼한다.
아마 덕은 부족하고 재주는 남아돌아서 진실로 하늘이 복을 주지 않은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