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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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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9. 우승유牛僧孺이덕유李德裕에 대한
僧孺 外托鎭靜이나 而於持危濟變處 非其所能이요 德裕 內持果敢이나 而藏器待時處 亦其所闇이니 要之컨대 均不知大臣之道者니라
우승유牛僧孺는 밖으로 진정鎭靜을 표방하나 위기를 관리하고 변란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는 능숙한 솜씨가 아니고, 이덕유李德裕는 안으로 과감果敢을 가지나 재기才器를 간직하고 때를 기다리는 데 있어서는 역시 어두우니, 결과적으로 모두 대신大臣의 도리를 알지 못한 자들이다.
唐自憲宗以來 士大夫黨附牛李하여 好惡不本於義하고 而從人以喜慍하니 雖一時公卿將相이라도 未有傑然自立者也니라
나라는 헌종憲宗 이후로 사대부士大夫들이 우당牛黨이당李黨에 붙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대의大義에 근본을 두지 않고, 같은 이 기뻐하면 따라서 기뻐하고 같은 이 노하면 따라서 노하였으니, 비록 일시의 공경公卿, 장상將相이라 하더라도 붕당朋黨 밖에 초연하여 독립한 사람이 없었다.
牛黨出於僧孺하고 李黨出於德裕니라
우당牛黨우승유牛僧孺에게서 출발하였고, 이당李黨이덕유李德裕에게서 출발하였다.
二人雖黨人之首이나 其實則當世之偉人也니라
두 사람은 비록 당인黨人영수領首였으나 기실은 당세當世의 위대한 사람이었다.
蓋僧孺以德量高하고 而德裕以才氣勝하니라
대개 우승유牛僧孺덕량德量이 남보다 높고 이덕유李德裕재기才氣가 남보다 나았다.
德與才不同하니 雖古人鮮能兼之者니라
는 같지 않은 것이니, 비록 옛날 사람이라 하더라도 덕량德量재기才氣를 겸한 자가 적었다.
使二人各任其所長하고 而不爲黨이면 則唐末之賢相也니라
가사 두 사람이 각각 잘하는 분야를 맡고 을 짓지 않았다면 나라 말기의 어진 재상이었을 것이다.
幽州楊志誠 逐其將李載義어늘 帝召問計策하니 僧孺曰 是不足爲朝廷憂也니이다
우승유牛僧孺문종조文宗朝에 재상으로 있을 때 유주幽州 양지성楊志誠이 그 장수 이재의李載義를 쫓아냈거늘, 황제皇帝(文宗)가 우승유牛僧孺를 불러서 그것에 대한 계책計策을 물으니, 우승유牛僧孺는 대답하기를 “이는 족히 조정朝廷의 걱정거리가 못 됩니다.
不復係國家休戚이니이다
범양范陽안사安史이 있은 이후로 다시는 국가國家휴척休戚에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前日劉 朝廷麋費且百萬이나 終不能得斗粟尺布以實天府하고 俄復失之니이다
전일前日 유총劉總이 토지를 헌납할 때에 조정朝廷에서 소비한 돈은 백만 금이나 되었지만, 결국은 두속斗粟, 척포尺布를 얻어 천부天府에 넣어보지도 못하였고, 얼마 안 가서 다시 범양范陽을 잃었습니다.
지금 양지성楊志誠도 이전의 이재의李載義와 같습니다.
다만 그에게 절모節旄를 부여하여 거란契丹을 막게 하면 그 또한 스스로 역량을 다하여 족히 순하게 다스리는 것을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황제皇帝가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이것을 생각지 못하였는데, 의 말이 옳다.”라고 하고 이내 사신을 보내서 위무慰撫하였다.
무종武宗 대에 와서 진행태陳行泰사원충史元忠을 죽였으며, 장강張絳이 다시 진행태陳行泰를 죽이고 군사를 거느릴 장수가 되기를 요구하였다.
德裕以爲河朔命帥 失在太速하여 使姦臣得計라하고 遷延久之 擢用張仲武하니 而絳自斃니라
이덕유李德裕는 ‘하삭河朔의 장수를 임명하는 일은 그 잘못이 너무 빨리 임명하여 간신姦臣의 마음을 맞추어주는 데에 있다.’고 여기고, 시일을 오래 끌어서 장중무張仲武를 발탁해 임용하였더니, 장강張絳이 스스로 폐사하였다.
僧孺以無事爲安하고 而德裕以制勝爲하니 此固二人之所以異니라
우승유牛僧孺는 변고가 없는 것을 안정으로 삼고, 이덕유李德裕는 제압하여 승리하는 것을 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본래 두 사람의 차이점이다.
較之德裕則優矣니라
우승유牛僧孺이덕유李德裕에 비교하면 약간 우월하였다.
德裕節度劒南西川 吐蕃將悉怛謀 以維州降하니 維州 西南要地也니라
이덕유李德裕검남서천절도사劒南西川節度使로 있을 때에 토번吐蕃의 장수 실달모悉怛謀유주維州를 가지고 투항하였으니, 유주維州서남西南요해지要害地이다.
是時 方與吐蕃和親이라 僧孺不可曰 吐蕃綿地萬里 失一維州라도 不害其强이니이다
이때는 막 토번吐蕃화친和親 중이라, 우승유牛僧孺가 동의하지 않으면서 “토번吐蕃은 토지가 만 리나 이어져 있으니 유주維州 하나를 잃는다 하더라도 강국强國이 되는 데에는 손상이 없습니다.
方今議和好하고 而自違之니이다
그리고 방금 화호和好를 맺고 스스로 어기는 꼴이 되었습니다.
中國禦戎 守信爲上이요 應變次之니이다
중국中國융적戎狄을 방어하는 데에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고, 변고에 잘 대응하는 것이 그 다음의 방법입니다.
彼若來責失信하고 하여 東襲汧隴이면 不三日至咸陽하리니 雖得百維州라도 何益이리오하니라
저들이 만일 와서 신의를 잃은 것을 책망하고, 찬보贊普마필馬匹울여천蔚茹川에 방목하여 동쪽으로 견롱汧隴을 엄습한다면 사흘이 채 안 되어서 함양교咸陽橋에 이를 것이니, 비록 백 개의 유주維州를 얻는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帝從之하여 使德裕反降者하니 吐蕃族誅之하니라
황제皇帝가 그 말에 따라 이덕유李德裕로 하여금 투항한 자를 돌려보내게 하였더니, 토번吐蕃이 투항자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다.
德裕深以爲恨하고 雖議者 亦不直僧孺니라
그러자 이덕유李德裕는 몹시 한스러워하였고, 비록 〈이덕유李德裕를〉 비판하는 자라 하더라도 우승유牛僧孺를 옳게 여기지 않았다.
이나 吐蕃自是不爲邊患하여 幾終唐世하니 則僧孺之言 非爲私也니라
그러나 토번吐蕃은 이로부터 거의 나라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변방의 화환禍患거리가 되지 않았으니, 우승유牛僧孺의 말은 사심私心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帝方用하여 欲求하니라
황제皇帝는 바야흐로 이훈李訓정주鄭注를 등용하여 특이한 공훈을 구하려고 하였다.
一日 延英謂宰相하되 公等亦有意於太平乎
어느 날 〈문종文宗이〉 연영전延英殿에서 재상宰相들에게 이르기를 “들도 태평太平에 관심을 두는가?
何道致之 僧孺曰 臣宰相하되 不能康濟天下니이다
어떻게 해야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우승유牛僧孺가 아뢰기를 “은 죄스럽게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천하天下를 태평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나 太平亦無象이니이다
그러나 태평太平 또한 구체적인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今四夷不內侵하고 百姓安生業하고 私室無强家하고 上不壅蔽하고 下不怨讟하니 雖未及全盛이나 亦足爲治矣니이다
현재 사방의 오랑캐들이 내침內侵을 하지 않고 백성百姓들이 생업生業에 안정을 누리고 개인 집에는 세력이 강성한 집이 없으며, 위에서는 격절隔絶하지 않고 아래에서는 원망하지 않으니, 전성시대全盛時代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또한 치세治世가 되기에는 족합니다.
更求太平이면 非臣所及也니이다하고 退謂諸宰相하되 上責成如此하니 吾可久處此邪아하니라
더 이상 태평을 구하신다면 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와 여러 재상들에게 말하기를 “황상皇上께서 이처럼 성과를 독책하시니 내가 이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우승유牛僧孺가 파직되고 오래지 않아, 이훈李訓감로甘露의 일을 하여 거의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帝初欲以訓爲諫官하니 德裕固爭하여 言訓小人이라 咎惡已著하니 決不可用이라하니라
황제皇帝가 처음에 이훈李訓간관諫官으로 삼으려고 하니, 이덕유李德裕가 강력히 간쟁諫諍하여 “이훈李訓소인小人이라 구악咎惡이 이미 드러났으니 결코 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덕유李德裕 또한 이 일로 인하여 파직되어 갔다.
二人所趣不同이나 及其臨訓注事 所守若出於一人하니 吾以是知其皆偉人也니라
두 사람은 지취志趣가 같지는 않았으나 이훈李訓정주鄭注의 일에 있어서는 고수하는 것이 마치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 같았으니, 나는 이것을 가지고 그들이 다 위대한 사람이었음을 알았다.
그러나 이덕유李德裕우승유牛僧孺를 대신하여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로 나갔을 때에 “〈우승유牛僧孺가〉 부고전府庫錢 40만 을 착복했다.”고 헐뜯었지만 대질한 결과 사실이 아니었고,
及在朱崖 하여하되 言僧孺有僭逆意하고 悻然小丈夫之心 老而不衰也라하니라
주애朱崖에 있을 때에 《궁수지窮愁志》를 지어 《주진행기周秦行紀》를 논하되 “우승유牛僧孺참역僭逆할 뜻을 가졌고, 발끈 성내는 소장부小丈夫의 마음이 늙을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처음에 우승유牛僧孺는 남쪽으로 순주循州폄적貶謫되었다가 늙어서 돌아오게 되었고, 두 아들 는 뒤에 다 명경名卿이 되었다.
하니 後世深悲其窮이니라
이덕유李德裕주애朱崖에서 죽고 자손子孫성명聲名이 알려지지 않았으니, 후세에 그의 궁함을 매우 슬퍼한다.
豈德不足而才有餘하여 固天之所不予邪
아마 덕은 부족하고 재주는 남아돌아서 진실로 하늘이 복을 주지 않은 것이리라.
역주
역주1 牛李論 : 牛僧孺(779~847)는 唐나라의 憲宗‧穆宗‧敬宗‧文宗‧武宗의 조정에서 내리 벼슬하면서 李宗閔‧楊嗣復과 朋黨을 결성하여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였으니, 그 권세가 천하를 진동하였다. 李德裕(787~849)는 宰相 李吉甫의 아들로 李黨의 領袖가 되었다.
《欒城集》에는 이 글의 標題를 〈牛李〉라고 하였다.
역주2 僧孺相文宗 : 《新唐書》 〈牛僧孺傳〉에 의하면, 이때 牛僧孺는 文宗朝에서 兵部尙書 平章事로 있었고, 楊志誠은 盧龍節度使 李載義의 牙將이었는데 部下들과 함께 李載義를 쫓아내니, 唐朝에서 그를 留後(唐代 중엽 이후 節度使나 觀察使가 유고할 때에 그 後嗣나 혹은 部下로 하여금 그 군중을 통솔하게 하였으니, 이를 留後라 명명하였음)로 삼았다.
역주3 范陽自安史後 : 范陽은 天寶 원년(742)에 幽州를 개명한 지명이다. 安史는 安史의 亂으로, 곧 安祿山과 史思明이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唐 玄宗 天寶 14년에 平盧‧范陽‧河東 三鎭節度使 安祿山이 楊國忠을 誅斬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范陽에서 군사를 일으켜 선후로 洛陽과 長安을 攻破하였다. 이 반란은 8년이란 세월을 끌었고, 唐 王室이 이로 말미암아 쇠락해져 藩鎭이 割據하는 국면을 형성하였다.
역주4 : 저본에는 ‘聰’으로 되어 있는데, 《舊唐書》 〈牛僧孺傳〉에 의하여 ‘總’으로 바꾸었다.
역주5 納土 : 토지를 헌납하는 일, 곧 歸附를 이른다.
역주6 今志誠猶向載義也 : 현재의 楊志誠도 당년의 李載義와 같다는 뜻인데, 李載義가 일찍이 그 장수 朱延嗣를 죽이고 敬宗으로부터 盧龍節度使를 제수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7 幽州楊志誠……因遣使慰撫之 : 《舊唐書》 〈牛僧孺傳〉에 “太和 5년(831) 정월에 幽州에서 軍亂이 일어나 그 장수 李載義를 쫓아냈거늘, 文宗은 李載義가 唐나라에 충성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긴 터였는데, 갑자기 장수를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급히 宰臣을 불러 이르기를 ‘范陽의 變을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牛僧孺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족히 聖慮를 번거롭게 할 것이 못 됩니다. 또한 范陽의 得失은 國家의 休戚에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安史의 亂이 있은 이래로 이처럼 번복을 합니다. 전에 劉總이 土地를 가지고 歸國했을 때 朝廷에서는 백만 냥 가량 소비했지만, 결국은 范陽의 尺帛, 斗粟을 얻어 天府에 들여놓지 못하였고, 얼마 안 가서 다시 경색되었습니다. 지금 楊志誠 또한 전의 李載義와 같습니다. 다만 그대로 慰撫하여 奚와 契丹을 막게 하고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면 朝廷에서 힘입을 바입니다. 節旄를 빌려주면 반드시 스스로 역량을 다하고 족히 順治를 거역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皇帝는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자세히 생각지 못했는데, 卿의 말이 옳다.’고 하고는 즉일로 中使에게 명하여 宣慰했다.”라고 하였다.
역주8 及武宗世……張絳復殺行泰以求帥 : 《新唐書》의 〈藩鎭盧龍 李載義傳〉에 의하면 “楊志誠은 李載義를 섬겨 牙將이 되었다. 李載義가 天子의 使者를 위해 鞠場(毬場)에서 연회를 베풀 때에 楊志誠이 그 무리들과 함께 떠들고 일어나니, 李載義가 달아났다. 楊志誠이 스스로 都知兵馬使가 되었는데, 文宗이 다시 嘉王을 節度使로, 楊志誠을 留後로 삼았다.……
太和 8년에 楊志誠이 部下에게 쫓겨나니, 그 部將 史元忠을 추대하여 總留後로 삼았다. 楊志誠이 鎭에 있으면서 몰래 天子의 袞冕을 제작하여 그 被服을 모두 乘輿에 견주었으므로 史元忠이 表文을 올려 朝廷에 폭로하니, 御史에게 명하여 楊志誠의 죄를 다스려 嶺南으로 내쳐 그가 商州에 이르렀을 때에 베어 죽이고 通王을 節度使로, 史元忠을 留後로 삼았다.……
會昌(唐 武宗의 연호) 초년에 史元忠은 그 偏將 陳行泰에게 피살되었다. 陳行泰가 節度使를 요청하였으나 임명하지 않았다. 그 次將 張絳이 陳行泰를 살해하고 군사를 거느리기를 요구하였으나 武宗은 張仲武를 임명하여 그를 대신하였다.”고 하였다.
〈藩鎭盧龍 張仲武傳〉에 의하면 “陳行泰가 史元忠을 살해하자, 宰相 李德裕가 계략을 내놓기를 ‘河朔에서 장수의 임명을 청해오면 모두 빨리 서둘러 임명장을 내려보냈기 때문에 군사가 안정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조금 시간을 늦춰서 임명한다면 또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라고 하자, 皇帝가 李德裕의 계략을 인정하고 임명장을 내려보내지 않았더니, 과연 張絳에게 살해되었다. 다시 그 군사를 회유하여 장수의 임명을 청하게 하고서 또한 방치하고 임명장을 보내지 않았다.……
張仲武가 그 部下인 吳仲舒를 入朝시켜 本軍으로 回鶻을 칠 것을 청하였다. 李德裕가 이내 北方의 일에 대해 물으니, 吳仲舒가 말하기를 ‘陳行泰와 張絳은 모두 遊客이므로 人心이 붙따르지 않습니다. 張仲武는 옛 장수 張光朝의 아들로 나이 50여 세인데, 글을 통하고 군사의 일을 익혔으며, 성품이 忠義하여 조정에 성심을 바치기를 원한 지 오래입니다.’라고 하자, 李德裕가 ‘장수로 삼으면 군사가 다시 난을 일으키는 일이 없겠느냐?’라고 물으니, 답하기를 ‘張仲武는 군사의 인심을 얻었으니, 임명을 받으면 반드시 張絳을 쫓아낼 자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李德裕가 대궐에 들어가 皇帝에게 아뢰기를 ‘陳行泰 등이 節制를 요구하는 일은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張仲武는 스스로 성심을 바치기를 요구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張仲武를 兵馬留後로 발탁하고 撫王에게 명하여 節度使를 맡게 하였다. 이에 대한 詔書가 내리니, 張絳이 과연 軍中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곧 張仲武에게 副大使 檢校工部尙書 蘭陵郡公을 제수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9 : 저본에는 ‘德’으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得‘으로 바꾸었다.
역주10 贊普 : 吐蕃 君長의 칭호이다.
역주11 牧馬 : 馬匹을 방목한다는 것은 胡馬의 南侵을 뜻한다.
역주12 : 저본에는 ‘茄’로 되어 있는데, 《欒城集》에 의하여 ‘茹’로 바꾸었다.
역주13 李訓鄭注 : 李訓(?~835)은 鄭注과 함께 文宗에게 宦官을 誅殺할 것을 건의하였고, 吐蕃의 귀족이 점거한 河湟 지구를 수복하였으며, 河北 藩鎭 세력을 제거할 것을 청하는 등 唐 王朝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졌다. 鄭注(?~835)는 李訓과 함께 모사하여 鳳翔節度使를 맡아 안팎에서 합력하여 일거에 宦官을 소멸하려고 하였다가 도리어 宦官에게 피살되었다.
역주14 奇功 : 특이한 공훈을 뜻한다. 여기서는 宦官을 소멸하는 일을 가리킨다.
역주15 待罪 :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겸사로 이르는 말로, 직무를 감당하지 못해 죄를 얻게 된다는 뜻이다.
역주16 旣罷未久……幾至亡國 : 《新唐書》 〈牛僧孺傳〉에 의하면 “牛僧孺가 宰相에서 파직된 지 오래지 않아서 李訓 등이 밤이면 左金吾衛의 石榴나무 위에 甘露가 맺힌다고 핑계를 대고 권력을 휘두르는 宦官 仇士良 등을 꾀어 가서 보게 하고는 그 틈을 타서 誅殺하려고 도모하였는데, 매복한 甲兵이 그 일을 폭로함으로써 실패하였다. 그러자 仇士良 등은 文宗을 끼고 宮으로 돌아와서 끝까지 治罪하니, 연루된 자가 천여 명이나 되어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역주17 德裕亦以此罷去 : 《新唐書》 〈李德裕傳〉에 의하면, 李德裕는 李訓의 일로 인하여 鎭海軍節度使로 옮겨갔다고 한다.
역주18 德裕代僧孺於淮南……質之非實 : 《新唐書》 〈李德裕傳〉에 의하면 “李德裕가 牛僧孺를 대신하여 淮南節度使를 맡았는데, 淮南府庫錢이 원래 80만 緡이던 것이 40만 緡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李德裕가 ‘40만 緡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라고 아뢰니, 文宗은 李德裕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사실을 조사한 결과 절반은 취하여 水旱에 대비하였다. 그러자 李德裕가 자신을 탄핵하여 待罪하니, 詔書를 내려 그 죄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역주19 作窮愁志……老而不衰也 : 〈周秦行紀論〉의 내용은 대략 “내가 일찍이 듣건대 ‘太牢氏(牛僧孺를 가리킴)는 그 姓(牛)을 國家가 天命을 받는 圖讖에 부합시키기를 「머리와 꼬리에 비늘 세 개 난 것이 60년 만에 두 뿔 난 송아지로 변하여 방자하게 미친 짓을 하고, 용과 뱀이 서로 싸워 피가 내를 이룬다.」 했다.’고 한다. 그가 지은 《玄怪錄》을 보았더니, 대부분 隱語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다.……
내가 太牢의 《周秦行紀》를 구득하여 ‘太牢가 몸소 帝王의 后妃들과 冥府에서 만난 일을 가지고 그 몸이 人臣의 관상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한 것’을 반복해서 살펴보았더니, 장차 방자하게 굴 생각을 가졌다. 심지어 德宗을 沈婆의 아이라고 희롱하고 代宗의 皇后를 沈婆라고까지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소름이 끼치게 하였으니, 임금에게 무례함이 너무 심했고, 圖讖에 다른 뜻을 품었음이 명백하다.……
아! 남의 신하가 되어 몰래 역적질할 마음을 품으면 사람만이 誅殺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도 誅殺하게 되는 것이다.……
禍胎를 나라에 남기면 또한 나의 큰 죄다. 혹 나와 뜻을 같이하여 계속 정치를 하려고 한다면 마땅히 임금을 위하여 禍患을 제거해야 한다.……
만일 그 禍患이 당대에 있지 않으면 반드시 자손 대에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太牢의 족속을 모두 법에 적용하면 刑罰이 적중되고 社稷이 안정되어 240년 후에 禍患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舊唐書》 〈牛僧孺傳〉에는 “李德裕가 남쪽 지방에 貶謫해 있을 때 지은 《窮愁志》에서 里俗에 떠도는 犢子讖을 인용하여 牛僧孺를 배척하고, 또 太牢公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서로 미워함이 이와 같았다.”고 하였다.
宋代 曾慥의 《類說》에는 “牛奇章(牛僧孺)이 처음 李衛公(李德裕)과 함께 술 마실 때에 牛僧孺가 ‘부귀한 집의 자제가 어떻게 이런 집에 참여했을까?’라고 하자, 衛公은 앙심을 품었다. 세상에서 전하는 《周秦行紀》는 牛僧孺가 지은 것이 아니고 바로 衛公의 門人 章瓘(韋瓘으로 된 데도 있음)이 撰한 것이다.”고도 하였다.
宋代 朱翌의 《猗覺寮襍記》에는 “李德裕가 지은 《窮愁志》의 〈周秦行紀論〉에서 ‘牛僧孺는 몸소 帝王의 妃后들과 冥府에서 만나 그 몸이 人臣의 관상이 아님을 증명하고 圖讖에 다른 뜻을 품었다.……’고 하였다. 그의 원한은 멸족시키기에 급급하였으므로 ‘만일 당대에 있지 않으면 반드시 자손 대에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太牢의 족속을 모두 법으로 처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牛李의 黨에서 李宗閔과 같은 무리는 小人이었다. 牛僧孺에게 큰 過惡이 없었는데 李德裕의 원한이 이처럼 깊은 것은 또한 지나친 일이다. 그 족속을 멸살시키려고까지 하였으니, 李德裕는 바로 잔인한 사람이었다. 牛僧孺가 어찌 능히 簒逆을 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에 子孫 중에 어찌 반역을 한 자가 있었는가?
圖讖을 믿고 망령되이 남에게 멸족시킬 죄를 가하였으니, 天地가 용납하지 않고 鬼神이 용서하지 않았을 듯싶다. 李德裕는 마침내 朱崖에서 죽었으니, 반드시 應報가 없지 않은 것이다. 開元 연간에 御史 周子諒은 ‘牛仙客 또한 姓을 가지고 圖讖에 부합시켰다.’고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周子諒이 朝堂에서 杖殺된 것은 또한 應報였다.……圖讖에 ‘머리와 꼬리에……피가 내를 이룬다.’고 한 것은 스스로 미친 것을 이름이니, 성사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唐나라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牛姓을 가진 자가 도적이 된 일이 없었으니, 도참을 또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역주20 窮愁志 : 《舊唐書》 〈李德裕傳〉에 의하면, 李德裕가 宰相職을 내놓고 남쪽 지방에 貶謫해 있을 때 《窮愁志》를 지었다고 한다.
역주21 周秦行紀 : 내용은 대략 “내가 貞元 연간에 進士試에 응시했다가 낙제하고 돌아가는 길에 밤늦게 어느 집 앞에 이르렀는데, 그 집은 부잣집 같았다. 노란 옷 입은 사람이 있어 ‘郎君은 뉘신데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묻기에 내가 ‘이름은 僧孺이고 성은 牛인데 진사시에 응시했다가 낙제하고 大安民舎로 가다가 길을 잘못 들어 여기에 왔소이다.’라고 답하였더니, 노란 옷 입은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서 고하고 조금 후에 나와서 말하기를 ‘청컨대 郎君은 전각 아래로 들어가서 절하시오.’라고 하였다.
珠簾 속에서 말하기를 ‘나는 漢 文帝의 어미 薄太后이고 여기는 바로 나의 사당이다.’라고 하였다. 太后가 ‘현재 天子는 누구냐?’고 묻기에 내가 ‘현재 皇帝는 이름이 适이고 代宗의 長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太后는 ‘沈婆의 아이가 天子가 되었구먼.’이라고 하면서 크게 기특하게 여겼다. 太后가 말하기를 ‘秀才가 멀리서 왔는데 오늘 누가 짝을 해주겠는가?’라고 하니, 戚夫人은 먼저 일어나서 사피하기를 ‘如意(戚夫人의 아들 이름)가 成長해서 곤란합니다.’라고 하였고, 潘妃(南齊 蕭寶卷의 寵妃)는 말하기를 ‘東昏侯(蕭寶卷을 가리킴)와 다른 마음을 먹지 않기로 맹세했으니 안 됩니다.’라고 하였고, 緑珠(晉 石崇의 愛妾)는 말하기를 ‘石衛尉(石崇을 가리킴)가 엄하니 곤란합니다.’라고 하였다.
太后가 王昭君을 지목하니 昭君은 대답하지 않고 머리를 숙이며 수줍어하였다. 그래서 결국 昭君院에 들어갔다. 다음날 太后‧戚夫人‧昭君 등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붉은 옷 입은 사람을 시켜서 大安民里에 보내주었다. 내 옷에 묻은 향기는 10여 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역주22 始僧孺南遷於循……後皆爲名卿 : 《新唐書》 〈牛僧孺傳〉에 의하면, 牛僧孺는 武宗朝에 여러 번 貶職되어 循州長史로 있다가 宣宗이 즉위하자 京師로 돌아와 太子少師가 되었고, 자녀 중에는 蔚와 藂가 가장 유명하여 蔚는 戶部侍郞, 藂는 吏部尙書를 지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23 德裕沒於朱崖 子孫無聞 : 《新唐書》 〈李德裕傳〉에 의하면, 李德裕는 大中 3년(849) 12월에 崖州에서 죽었으며, 아들 李曄은 彬州 彬縣尉로 있다가 桂陽에서 죽고, 나머지 아들은 다 崖州에서 그 아버지를 따라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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