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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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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亦有據
智者爲國 知所去就하여 大義旣定이면 雖有得失이나 不爲害也니라
이나 성공聖公왕망王莽之敗하여 擁衆入관중한대 君臣貪暴하여 不改盜賊之舊하니 敗亡之勢 皆知之矣니라
하되 하고방망方望之言하여 䧟諸父於死地하고 僅以身免이니라
광무제光武하북河北낙양 政修民附하고 賢士滿朝하며 十去六七이니라
외효懲旣往之禍 方擁兵自固하여 爲六國之計하니 謀臣去之하고 義士笑之하니라
始從성공聖公而不하고 終背광무제光武而不悔하여 去就之計 無一得者하니 至於 蓋不足怪也니라
조공曹公원소袁紹 相拒於관도官渡 二人皆求助於유표하니 유표方晏然自守하고 一無所與니라
한숭韓嵩유표曰 兩雄相持하니 天下之重 在於장군將軍이니이다
果欲有爲인댄 起乘其弊可也니이다
如其不然이면 則將擇所宜從이니이다
豈可擁甲十萬하고 坐觀成敗하며 求援而不能救하고 見賢而不肯歸니잇가
외효隗囂유표劉表雍容風議 皆得長者之譽이나 其敗也 皆以去就不明失之하니 니라
손자병법兵法有之하니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라하니라
夫惟知彼知己而後 知所去就哉인저


08. 외효隗囂에 대한
또한 근거가 있는 것이다.
지자智者가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서 취사선택할 바를 알아 대의大義가 이미 정해졌으면 비록 득실得失이 있더라도 해 될 것이 없다.
외효隗囂가 처음 농서隴西의 땅을 할거했을 때에는 겸허謙虛하고 공경恭敬하여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었으므로 호걸豪傑들이 귀부歸附하였으며, 형정刑政수행修行되고 병갑兵甲부성富盛하였으니 한때 절거竊據한 인물 중에 어진 장수의 풍도가 있었다.
그러나 성공聖公(劉玄의 )은 왕망王莽이 패멸한 기회를 틈타서 군중을 거느리고 관중關中에 들어갔는데, 임금과 신하가 탐포貪暴하여 도적盜賊의 구습을 고치지 않았으니, 패망敗亡할 줄을 필부匹夫필부匹婦 같은 일반인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외효隗囂는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서도 〈패권霸權에 대해〉 전연 노력하지 않고 남의 신하 노릇이나 하였으며, 방망方望의 말을 어기어 제부諸父들을 사지死地에 빠뜨리고 겨우 자기 몸만 죽음을 면하였다.
광무제光武帝하북河北으로부터 낙양洛陽에 들어감에 정교政敎수명修明하고 백성이 귀부歸附하고 현사賢士가 조정에 가득하며, 군도群盜가 10에 6, 7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외효隗囂는 이전의 에 징계되어 바야흐로 군사를 가지고 자신의 신변을 튼튼하게 해서 육국六國처럼 각각 한 방면을 지킬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모신謀臣은 떠나고 의사義士는 비웃었다.
그런데 외효隗囂왕원王元왕첩王捷 한두 사람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지켰다.
처음에는 성공聖公을 따르되 인색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광무제光武帝를 배반하되 후회하지 않았으므로 취사선택하는 일에 한 가지도 얻은 것이 없었으니, 몸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유표劉表형주荊州전제專制할 때 땅은 넓고 백성은 많아서 세력이 천하天下에 중요해졌다.
조공曹公(曹操)과 원소袁紹가 서로 관도官渡에서 항거하고 있을 때에 두 사람이 모두 유표劉表에게 도움을 구하였는데, 유표劉表는 태연스레 스스로 지키고 어느 한 곳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자 한숭韓嵩유표劉表를 설득하기를 “두 영웅이 서로 버티고 있으니, 천하天下의 중요한 것이 장군將軍에게 있습니다.
과연 무슨 일을 해보려고 하신다면 이 틈을 타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따라야 할 사람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10만 대군을 가지고서도 가만히 앉아서 성패成敗나 살피며 지원을 구해도 능히 구원하지 않고 어진 이를 보고도 귀부歸附하려 하지 않습니까?
이러다가는 두 사람의 원망이 반드시 장군將軍께 집중될 것이니, 중립中立할 수 없을 듯 싶습니다.”라고 하니, 유표劉表는 망설이고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가 결국 조공曹公에게 병탄倂呑되었다.
외효隗囂유표劉表의 화평하고 조용한 풍모風貌의론議論은 모두 장자長者의 칭찬을 받았으나, 그들이 패함에 있어서는 모두 거취가 분명하지 못함으로써 잃었으니, 장로張魯 같은 용렬한 위인이 패망敗亡한 나머지 돌아갈 바를 알아서 오히려 그 후사後嗣를 잘 보전시킨 것만 못하였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상대방의 사정도 알고 자기의 사정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상대방의 사정은 알지 못하고 자기의 사정만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며, 상대방의 사정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사정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오직 상대방의 사정도 알고 자기의 사정도 안 연후에야 거취를 할 바를 알게 될 것이다.


역주
역주1 隗囂論 : 隗囂(외효, ?~33)는 東漢 사람으로 字는 季孟이다. 王莽 말기에 隴西를 기반으로 군사를 일으켜 처음에는 劉玄에게 붙었다가 얼마 후에 光武帝 劉秀에게 가서 西州大將軍에 봉해졌고, 또 公孫述에게 臣服하여 朔寧王이 되었다. 光武帝가 西征하자 隗囂는 西域으로 도망가서 울분에 못 이겨 죽었다고 한다.
역주2 隗囂……有賢將之風矣 : 《後漢書》 〈隗囂列傳〉에 의하면 “東漢 말기에 王莽이 연달아 패하자, 隗囂의 叔父인 隗崔와 隗義가 군사를 일으키고 隗囂를 추대하여 上將軍으로 삼았다. 隗囂는 이에 方望을 맞아 軍師로 삼고 군사 10만을 정돈하여 雍州‧安定‧隴西‧武都 등지를 함락시켰다. 또한 隗囂는 평소에 겸허하고 공손하여 선비를 사랑하여 范逡을 師友로 삼고, 趙秉‧蘇衡을 祭酒로 삼고, 申屠剛‧杜林을 持書로 삼고, 楊廣‧王遵‧周宗‧行巡‧王捷‧王元을 大將軍으로 삼고, 杜陵‧金丹의 무리를 賓客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이름이 西州에 떨치고 山東에 알려졌다.”고 한다.
역주3 竊據 : 정당하지 못한 수단으로 占據하는 일을 이르며, 여기서는 한 방면의 반정부 군대를 割據한 것을 가리킨다.
역주4 聖公乘王莽之敗……僅以身免 : 《後漢書》 〈隗囂列傳〉, 〈劉玄列傳〉에 의하면 “劉玄(?~25)은 字가 聖公인데, 王莽 만년에 綠林에서 군사를 일으켜 王莽을 패멸시켰는데, 聖公을 更始將軍이라 불렀다. 부하들이 그를 맞아 세워 帝로 삼았는데, 그는 도적의 구습을 버리지 못하여 부하들의 擄獲이 많고 적음을 따졌다. 方望은 更始의 정치가 문란하므로 반드시 패할 줄 알고 있었다.
更始 2년에 聖公이 隗囂 및 그의 季父인 隗崔와 隗義 등을 부르자 隗囂가 가려고 하니, 方望은 ‘更始는 알 수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며 가지 못하게 말렸다. 隗囂가 듣지 않고 長安에 이르니, 隗崔와 隗義가 모반하였다가 주살당했다. 뒤에 여러 장수들이 更始를 잡아서 光武帝에게 귀순하려고 도모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자, 隗囂는 水天으로 도망갔다. 劉玄은 바로 光武帝 劉秀의 族兄인데, 帝라 칭하며 洛陽에 도읍을 세우고 원년을 更始로 고쳤으며, 뒤에 도읍을 長安으로 옮겼으나 赤眉軍에게 패멸되었다.”고 한다.
역주5 匹夫匹婦 : 평민의 남자와 여자를 가리킨다.
역주6 大衆 : 麾下의 모든 군사를 가리킨다.
역주7 束手稱臣 :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臣服함을 가리킨다.
역주8 及光武自河北入洛……以死守之 : 《後漢書》 〈光武帝紀〉, 〈隗囂列傳〉에 의하면 “光武帝는 南陽에서 군사를 일으켜 黃河 이북으로 轉戰하였다. 更始 연간에 更始帝인 劉玄이 光武帝를 불렀으나 光武帝는 ‘河北이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고 핑계하고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光武帝는 更始 3년(25)에 帝位에 올라 洛陽에 도읍을 정하였다. 隗囂는 馬援‧來歙과 친한 사이이므로 光武帝가 馬援‧來歙을 보내어 여러 차례 隗囂에게 入朝를 권했으나 隗囂는 응하지 않았다. 光武帝가 다시 來歙을 보내 隗囂를 설득시켜 아들을 보내 入侍하도록 하니, 隗囂는 맏아들 恂을 보냈다. 隗囂는 비록 아들을 인질로 보냈지만, 오히려 險地에 의거하여 한 방면을 專制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遊士와 長者가 점점 떠나갔다. 鄭興과 馬援도 恂을 따라 洛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隗囂의 장수 王元과 王捷은 끝까지 漢軍과 抗戰하다가 漢軍이 西城을 포위하자, 王捷은 자살함으로써 死守의 뜻을 밝혔고, 王元은 사력을 다해 싸움으로써 隗囂를 호위하였으며, 隗囂가 죽은 뒤에는 다시 隗囂의 少子 純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고 한다.
역주9 群盜 : 여기서는 光武帝가 평정한 更始帝 劉玄, 公孫述 등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역주10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疑’로 되어 있다.
역주11 殺身亡國 : 漢軍이 西城‧上邽를 포위하니 隗囂가 크게 패하였다. 王元이 사력을 다해 구원한 힘을 입어 冀 땅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안 가서 병들어 굶어죽었고, 少子 純이 즉위한 뒤에 오래지 않아 光武帝에게 항복하였다.
역주12 劉表專制荊州……勢重於天下 : 劉表(142~208)는 初平 연간에 荊州刺史를 맡아 지금의 湖南‧湖北의 대부분 지역을 영유하였다.
역주13 曹公與袁紹……卒爲曹公所幷 : 《三國志》 〈魏志 劉表傳〉에 의하면 “曹操와 袁紹가 官渡에서 싸우지 않고 서로 버티고 있을 때 袁紹가 사람을 보내 劉表에게 도움을 청하였으나 劉表는 도와주지 않았다. 劉表는 또한 曹操도 도와주지 않고 長江과 漢水의 유역을 보존하면서 天下가 변해가는 것을 관망하려고 하였다. 從事中郞 韓嵩, 別駕 劉先, 大將 蒯越이 劉表에게 이 틈을 타서 패권을 잡든가 아니면 曹操에게 歸附하도록 권하였으나 劉表는 망설이고 결단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에 아들 劉琮이 曹操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역주14 不如張魯之庸……猶能保其後嗣 : 張魯는 長陵의 후손인데, 대대로 天師道 敎主가 되어 漢中을 割據하고 자칭 ‘師君’이라 하였다. 建安 20년(215) 曹操가 친히 張魯를 정벌하자 張魯가 항복하였으므로 그를 閬中侯에 봉하고 그의 아들 5명을 다 列侯로 삼았다.
역주15 知彼知己……每戰必敗 : ‘必敗’가 저본에는 ‘輒殆’로 되어 있는데, 《孫子兵法》에 의하여 ‘必敗’로 바꾸었다. 이 말은 《孫子兵法》 〈謀攻〉에 보인다.
역주16 不知彼而知己 : 저본에는 ‘知彼而不知己’로 되어 있는데, 《孫子兵法》에 의하여 ‘不知彼而知己’로 바꾸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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