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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轍(3)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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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情興心思 俱入佳處니라
자첨子瞻遷於제안齊安 廬於江上하니라
제안齊安無名서산이요장강之南 무창武昌서산 陂陁蔓延하고 澗谷深密하며 中有浮圖精舍하고 서산西서산西山이요 東曰한계寒谿니라
依山臨壑하고 隱蔽松櫪하여 蕭然絶俗하니 車馬之迹不至니라
每風止日出하고 江水伏息하면 자첨子瞻杖策載酒하고 乘漁舟亂流而南하니라
山中有二三자첨 好客而喜游러니자첨子瞻하고 幅巾迎笑하여 相攜徜徉而上하니라
窮山之深이라가 力極而息하고 埽葉席草하여 酌酒相勞하며 意適忘反하고 往往留宿於山上이니라
以此居제안齊安三年 不知其久也니라
이나 將適서산西山할새 行於松栢之間이라가 而獲少平하니 遊者至此必息이니라
倚怪石하고 蔭茂木하여 俯視大江하고 仰瞻陵阜하고 旁矚溪谷하면 風雲變化 林麓向背 皆效於左右니라
有廢亭焉하니 其遺址甚狹하여 不足以席衆客이니라
其旁古木數十 其大皆이니 不可加以斤斧니라
자첨子瞻每至其下하면 輒睥睨終日이니라
一旦 大風雷雨 拔去其一하여 斥其所據하니 亭得以廣이니라
자첨子瞻與客入山視之하고 笑曰 玆欲以成吾亭耶인저하고 遂相與營之니라
亭成而서산西山之勝始具하니 자첨子瞻於是最樂이러라
昔余少年자첨子瞻하니라
有山可登이요 有水可浮 자첨子瞻未始不褰裳先之니라
有不得至 爲之悵然移日이니라
至其翩然獨往하여 逍遙泉石之上 擷林卉하고 拾澗實하여 酌水而飮之하니 見者以爲僊也니라
蓋天下之樂無窮이니 而以適意爲悅이니라
方其得意 萬物無以易之하고 及其旣厭 未有不洒然自笑者也니라
譬之飮食 雜陳於前 要之一飽 而同委於臭腐 夫孰知得失之所在리오
惟其無愧於中하고 無責於外하고 而姑寓焉이리니자첨子瞻之所以有樂於是也니라


03. 무창武昌구곡정九曲亭에 대한 기문
정흥情興심사心思가 모두 아름다운 곳에 들어가 있다.
자첨子瞻(蘇軾)이 제안齊安폄적貶謫되었을 때 강변에 초옥草屋을 지었다.
제안齊安에는 그다지 이름난 은 없고, 장강長江의 남쪽에 무창武昌의 많은 산들이 경사를 이루면서 길게 뻗고 간수가 흐르는 골짝이 깊고 아늑하며, 그 가운데 부도浮圖정사精舍가 있고, 서쪽은 ‘서산西山’이란 산이 솟았고, 동쪽은 ‘한계寒谿’란 시내가 흐른다.
산을 의지하고 계학谿壑에 임하고 소나무와 가죽나무에 가려져서 소쇄瀟灑하게 세속世俗과 단절하였으니, 거마車馬의 자취가 이르지 않는다.
매번 바람이 그치고 해가 솟고 강물이 잔잔하면 자첨子瞻이 지팡이를 짚고 술을 싣고 고기잡이배를 타고 물을 가로질러 건너서 남쪽으로 간다.
그 산속에는 빈객을 좋아하고 놀기를 즐기는 두세 사람이 있었는데, 자첨子瞻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복건幅巾 차림으로 자첨子瞻을 웃음으로 맞이하여 서로 이끌고 배회하며 올라간다.
깊은 산을 끝까지 가다가 힘이 다하면 쉬고 낙엽을 쓸고 풀 위에 앉아 술을 따라 서로 위로하며, 그곳이 뜻에 맞아 돌아오기를 잊고 이따금 산 위에서 유숙한다.
이와 같이 3년 동안 제안齊安에 살면서 지루한 줄을 몰랐다.
그러나 장차 서산西山으로 가려고 할 때 소나무와 잣나무 사이를 가다가 양장구곡羊腸九曲처럼 생긴 험한 곳에서 조금 평탄한 곳을 만나는데, 노니는 자들이 여기에 이르면 반드시 쉬게 된다.
괴상한 돌에 의지하고 무성한 나무 밑에 서서 큰 강을 굽어보고 언덕을 우러러보고 계곡溪谷을 곁눈질하면, 풍운風雲변화變化임록林麓향배向背가 모두 좌우左右에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곳에 폐정廢亭이 있는데 유지遺址가 너무도 좁아서 여러 빈객의 자리를 만들기에 부족하다.
그 곁에 고목古木 수십 그루가 있고, 그 크기는 모두 둘레가 백 아름이나 되고 높이가 천 자나 되는데 자귀나 도끼를 댈 수가 없다.
자첨子瞻이 매번 그 나무 아래에 이를 때마다 종일 흘겨보았다.
그런데 어느 하루아침에 대풍뢰우大風雷雨가 그중 한 나무를 뽑아버려 그 나무가 차지하고 있던 땅을 환하게 틔어놓았으니, 정자를 넓힐 수가 있었다.
자첨子瞻이 빈객과 산에 들어가서 보고 웃으면서 “여기에 나의 정자를 짓고 싶구먼.”이라고 말하고는 드디어 서로 더불어 계획해서 정자를 지었다.
정자가 이루어져 서산西山의 승경이 비로소 갖추어지자, 자첨子瞻이 이에 최고로 즐거워하였다.
옛날 내가 젊을 적에 자첨子瞻을 따라다니며 놀았었다.
산이 있으면 올라갔고, 물이 있으면 헤엄을 쳤는데, 자첨子瞻은 언제든지 하의를 걷고 앞서지 않는 적이 없었다.
가보지 못한 데가 있으면 장시간 서운해하였다.
훌쩍 혼자 가서 천석泉石의 위에서 소요逍遙할 적에는 풀잎을 따고 돌조각을 주워서 물을 떠서 마셨으니,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은 자첨子瞻을 신선이라고 생각하였다.
대개 천하의 즐거움은 무궁한 것이니, 뜻에 맞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것이다.
뜻대로 될 때에는 만물로 바꿀 것이 없고, 이미 만족을 느끼고 나면 스스로 웃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앞에 잡다하게 차려놓는 것은 요컨대 한번 배부르고 나면 모두 썩히는 것과 같으니, 득실의 소재를 누가 알겠는가?
오직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고 외물에 나무람이 없고 우선 그대로 붙여둘 것이니, 자첨子瞻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역주
역주1 武昌九曲亭記 : 武昌의 九曲亭은 지금의 湖北 鄂城 西山의 九曲嶺 위에 있다. 蘇軾이 宋 神宗 元豐 3년(1080) 봄에 黃州에 貶謫되었는데, 黃州는 武昌과 江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西山에 가서 游賞하였고, 따라서 九曲亭을 중건하였다. 元豐 5년(1082)에 蘇轍이 齊安에 이르러 蘇軾을 찾아보았으며, 이들 형제는 武昌 西山을 함께 游賞하였고, 따라서 이 서문을 짓게 된 것이다.
〈武昌九曲亭記〉의 主意는 蘇軾이 山水를 즐기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樂’자가 안목이다.
역주2 羊腸九曲 : 九折羊腸과 같다. 곧 양의 창자처럼 심하게 구부러진 것을 표현한 말이다.
역주3 百圍千尺 : 나무의 크기를 과장 표현한 말로 莊子의 기풍이 있다. 《莊子》 〈人間世〉에 “사당 앞에 서 있는 상수리나무를 보니, 그 나무의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만하고, 재어보니 백 아름이나 되며, 그 높이는 산을 굽어볼 정도이고, 열 길이나 올라가야 가지가 있다.[見櫟社樹 其大蔽牛 絜之百圍 其高臨山 十仞而後有枝]”란 말이 보인다.
역주4 <주석명/> : 孫琮은 《山曉閣選宋大家蘇潁濱全集》에서 “옛날 사람의 유람기를 읽을 때에는 반드시 눈에는 그 승경을 직접 본 것처럼 삼삼하게 나타나야 하고, 몸에는 그 승경을 직접 다녀본 것처럼 뿌듯함을 느껴야 하고, 의중에는 그 勝味를 맛본 것처럼 실감이 나게 돼야만 글을 잘 읽은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유람을 잘한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글은 바로 九曲亭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정자는 산속에 있고 산은 강의 남쪽에 있고 강은 또 齊安의 근처에 있다는 것을 차례로 적었다.
그리하여 먼저 齊安이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일단 적어나가 武昌의 여러 산, 그리고 浮屠와 精舍가 은은히 바라보이는 속에 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고 나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간 과정을 적고, 강을 건넌 다음에는 산에 오르는 과정을 적고, 산을 오른 다음에는 山徑의 왼쪽으로 간 과정을 적고, 山徑의 왼쪽으로 간 다음에는 山徑의 오른쪽에 정자가 있다는 것을 적었다. 그리고 나서는 정자를 짓게 된 동기와 정자가 이루어진 까닭을 기술하였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다시 一筆을 휘둘러서 자기의 뜻을 붙여서 그 유람의 즐거움을 얻은 것을 적었다.
그러므로 세세히 읽어보면 참으로 몸이 西山 九曲의 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讀古人遊記 便如目中親覽其勝槪 身中親履其勝境 意中親領略其勝味 方是善讀書人 亦卽是善游人 如此文 是記九曲亭 却因亭在山之中 山在江之南 而江又在齊安之滸 於是先從齊安隔江一寫 便見武昌諸山 浮屠精舍隱隱在望 然後次寫渡江而南 由渡江而次寫登山 由登山而次寫行山徑之左 由行山徑之左 而次寫見山徑之右 有亭在焉 於是述其作亭之由與亭成之故 然後推開一筆 寓以己意 寫其得游之樂 細細讀之 眞如身在西山九曲之中也]”라고 비평하였다.
乾隆의 《御選唐宋文醇》에서는 “孟子는 君子의 三樂을 말하면서 ‘우러러볼 때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볼 때 사람에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라고 하였다. 三樂 가운데 오직 이것만이 얻어서 스스로 주장할 수 있고, 그 나머지는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않을 수도 있는 불확실한 것이다. 비록 그러나 즐거움을 갖기란 대개 어려운 것이다.
무릇 사람이 조행이 올바르지 못하여 무뚝뚝하고 괴팍하고 사납고 거만하면 우러러봄에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고, 굽어봄에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으니, 조급하고 동요함이 더욱 심하여 결국은 반드시 그 즐거움을 얻지 못한다.
만일 땅을 택하여 밟아가면서 法行이 아니면 감히 행하지 않고 法言이 아니면 감히 말하지 않는다면, 또한 우러러봄에 내게 있는 天命이 매우 무거워서 내가 감내할 수 없고, 굽어봄에 구제를 기다리는 사람이 매우 많으므로 내가 널리 응하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니 부끄러움이 가시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즐길 수 있겠는가?
반드시 하늘이 나에게 책임지운 것이 작아서 그 직책을 쉽게 다할 수 있고, 사람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가벼워서 그 일을 하기 쉬운 연후에야 굽어볼 때나 우러러볼 때나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또한 만남이 있을 것이다.
蘇軾의 遷謫을 사람들은 불우라고 말하는데, 중심에 부끄러움이 없고 밖에 책망함이 없으면서 회포를 山水의 사이에 붙인 자가 도리어 하늘의 幸民이 된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孟子語君子三樂而曰 仰不愧于天 俯不怍于人 二樂也 三樂之中 惟此爲可得 而自主者 餘則關乎遇不遇焉 雖然樂之也 蓋難 夫人操行不軌 堅愎狠傲 未嘗不仰焉無所愧 俯焉無所怍 而躁擾彌甚 要必不能自得其樂 若擇地而蹈之 非法行不敢行 非法言不敢道 則又仰焉 而知天命之在我者甚重 而我負擾荷之未勝 俯焉而覺斯人待濟之甚殷 而我泛應之未當 方且愧怍之不釋 而又奚其樂也 必也天之所責於我者小 其職易以盡 人之所望於我者輕 其事易以爲 然後俯焉仰焉 得不愧而不怍 然則其間 亦有遇耶 軾之遷謫 人謂其不遇 抑知無愧於中 無責於外 而得寓懷山水之間者 轉爲天之幸民也哉]”라고 비평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3)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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