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轍(2)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9. 부견苻堅에 대한
有深識이나 而行文處 非蘇氏本旨니라
깊은 식견은 가졌지만 작문作文소씨蘇氏의 본의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것 같다.
부견苻堅왕맹王猛군신君臣이 서로 의기투합하여 패공霸功을 이루었으니, 비록 환공桓公관중管仲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뛰어날 수는 없었다.
猛之將死也 堅問以後事한대 猛曰 晉雖僻處吳越이나이나 하고 親仁善隣하니 國之寶也니이다
왕맹王猛이 임종할 때에 부견苻堅후사後事를 물으니, 왕맹王猛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궁벽하게 옛날 나라와 나라가 할거하던 지역에 처해 있지만, 정삭正朔을 서로 이어가며 인자仁者와 친근하고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가지니 나라의 보배입니다.
臣沒之後 願勿以晉爲圖하소서
이 죽은 뒤에 원컨대 나라를 도모하지 마소서.
鮮卑羌 我之仇讐 終爲人患이니 宜漸除之하여 以寧社稷이니이다 言終而死하니라
선비鮮卑강로羌虜는 우리의 구수仇讐로 끝내 우환거리가 되니, 점점 제거하여 사직社稷을 편안케 해야 합니다.”라고 하고 말을 마치자 죽었다.
堅不能用하고 卒大擧伐晉이라가 敗于淝上하여 歸未及國하고 하니 니라
그러나 부견苻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끝내 군사를 크게 일으켜 나라를 치다가 비수淝水가에서 패하여 귀환하는데 미처 국내에 이르기 전에는 모용수慕容垂가 배반하였고, 이미 국내에 돌아옴에 요장姚萇이 배반하였으니, 땅은 나누어지고 몸은 죽는 등 끝내 두 사람의 손에 죽었다.
後世皆多猛之賢하고 而咎堅之不明이니라
그러므로 후세後世에서 모두 왕맹王猛의 어짊은 훌륭하게 여기고 부견苻堅의 밝지 못함은 나무랐다.
吾嘗論之컨대 堅雖有霸者之略이나 而懷無厭之心하여 以天下不一 爲深恥하니라
나는 일찍이 논하건대, 부견苻堅은 비록 패자霸者지략智略을 가졌으나 불만스런 마음을 품어 천하天下가 통일되지 못한 것을 큰 수치로 여겼다.
이나 而其貪未已하며 兵革歲克이나 而不知懼也니라
비록 나라를 멸하고 나라를 평정하고 진주秦州양주涼州를 아우르고 서역西域을 항복시켰지만 그 탐욕은 끝이 없었으며, 전쟁으로 매년 민중을 잔살殘殺하였지만 두려워할 줄 몰랐다.
晉雖微弱이나 謝安桓沖 爲之將相이니 君臣相安하고 民未忘晉이어늘 而欲以力取之하니 稽之天道하고 論之人情컨대 雖內無垂萇之釁이라도 而堅之敗 必不免矣니라
나라는 비록 미약微弱하지만 사안謝安환충桓沖장상將相이 되었으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편안하고 백성들이 나라를 잊지 못하는데도 힘으로 취하려고 하였으니, 천도天道로 상고하고 인정人情으로 논하건대, 비록 안에 모용수慕容垂요장姚萇화환禍患이 없었더라도 부견苻堅의 패망은 반드시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견苻堅이적夷狄의 후예로 제왕帝王의 도량을 가져, 모용씨慕容氏요씨姚氏를 멸해야 할 때에 두 성씨의 자제子弟를 거두어서 그들의 재능才能녹용錄用하여 벼슬을 주어 중앙과 지방에 가득하게 하였으니, 구신舊臣 중에는 의심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若以世俗言之 則以漸除之 如猛之計得矣 若以帝王之事言之 則堅之意 未必過也니라
만약 세속世俗으로 말한다면 점점 제거하기를 왕맹王猛의 계략과 같이 해야 옳고, 만약 제왕帝王의 일로 말한다면 부견苻堅의 뜻이 반드시 과도한 것은 아니다.
大雅之稱文王曰 之孫子 其麗不億이언만 上帝旣命이라 侯于周服이로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문왕文王〉에서 문왕文王을 일컫기를 “(商)나라의 자손들이 그 수가 뿐만이 아니었건만 상제上帝가 이미 한지라 나라에 복종하였도다.
侯服于周하니 天命靡常이로다
나라에 복종하니 천명天命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로다.
殷士膚敏 祼將于京하니 厥作祼將이여
나라의 선비 중에 아름답고 민첩한 자들이 나라 서울에서 제사를 도왔으니, 제사를 돕는 자가 됨이여!
常服黼冔로다하니라
항상 불상黻裳은관殷冠을 썼도다.”라고 하였다.
文王用人 其廣如此어늘 而堅何尤焉
문왕文王이 사람을 씀이 이처럼 광범하였거늘, 부견苻堅을 어찌 나무라겠는가?
德雖不若文王이나 而竊慕焉하니 顧其所以處之如何耳니라
은 비록 문왕文王만 못하더라도 은근히 문왕文王을 사모하였으니, 그의 처신이 어떠했는지를 고려할 뿐이다.
文武旣沒하고 周公成王之際
猶與管蔡間周之隙하여 曰 予復이라하고 反鄙我周邦이라하니라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이미 죽고 주공周公성왕成王을 보필할 때에 나라의 후예後裔가 오히려 관숙管叔채숙蔡叔과 함께 나라의 틈새를 타서 말하기를 “내 기업基業을 회복하겠노라.”라고 하고는 도리어 나라를 비읍鄙邑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周公克殷하여 改封微子于宋하고 而遷其頑民于洛邑하여 保釐東郊하고而撫寧之하니 所以慮其變者至矣니라
그러므로 주공周公나라를 정복하여 미자微子나라에 개봉改封하였으며, 〈나라의〉 완악한 백성들을 낙읍洛邑으로 옮겨 동교東郊를 잘 다스리고 〈다사多士〉를 지어서 안무安撫하고 평정平定하였으니, 그 을 염려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다.
至若君陳畢公 皆迭居成周而董帥之
군진君陳필공畢公 같은 어진 신하들도 모두 뒤를 이어 성주成周에 살면서 〈나라 백성이 사는〉 낙읍洛邑을 유심히 살폈다.
康王之命畢公曰
그러므로 강왕康王필공畢公에게 명하기를
毖殷頑民하여 遷于洛邑하여 密邇王室하시니
“〈주공周公선왕先王을 보필하여 나라를 안정시키시고〉 나라 완악한 백성들의 후환을 염려하여 낙읍洛邑으로 옮겨 왕실王室에 가깝게 하시니,
式化厥訓하여 旣歷三紀하여 世變風移하여 四方無虞하니 予一人以寧이라하니라
그 가르침에 교화되어 이미 3가 지나 세상이 변하고 풍속이 바뀌어 사방에 근심이 없으니, 나 한 사람이 편안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나라의 안위는 이 나라 선비들에게 달려 있다.”고 하였다.
由此觀之컨대 文王之用殷人 豈苟然而已哉
이것으로 보건대, 문왕文王나라 사람을 쓴 것이 어찌 무의미한 일이었겠는가?
今堅畜養豺虎于其하여 而貪心負勝하고 不顧其後하니 宜其斃于垂萇也哉인저
그런데 지금 부견苻堅은 승냥이와 범을 복심腹心에 길러서 탐심을 부려 승리를 자부하고 뒤를 고려하지 않았으니, 모용수慕容垂요장姚萇의 손에 죽게 된 것은 마땅한 일이었도다.
使堅信猛之策하여 南結隣好하고 戢兵保境하여 與民休息이면 雖有垂萇百人이라도 安能動之리오
가사 부견苻堅왕맹王猛의 계책을 믿어 남쪽으로 이웃 나라와 우호를 맺음과 동시에 전쟁을 중지하고 변경을 안보하여 백성들과 휴식을 취했더라면, 비록 모용수慕容垂요장姚萇이 백 명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文王雖未可覬이나 亦非王猛之所及矣리라
문왕文王은 비록 바랄 수 없지만, 또한 왕맹王猛에게도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역주
역주1 苻堅論 : 苻堅(338~385)은 晉나라 때 前秦의 君主로, 자는 永固 또는 文玉이다. 前秦 苻健이 ‘帝’라 칭하고 아들 苻生이 帝位를 이었으나 凶暴했기 때문에 從弟 苻堅이 苻生을 죽이고 스스로 帝位에 섰다.
苻堅은 전후로 前燕을 멸하여 仇池를 취하였으며, 漢中을 점령하고 成都를 취하였다. 그는 또한 晉나라를 멸하고 역내를 통일할 뜻을 가지고 晉나라 太元 8년(383)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晉나라를 공격하여 謝玄 등과 淝水에서 싸우다가 대패해서 돌아왔다. 鮮卑와 羌氐의 頭領이 離叛하니 國勢가 날로 약해졌고, 苻堅은 뒤에 姚萇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2 苻堅王猛……不能過也 : 대의는 王猛이 前秦의 苻堅을 보좌하여 東晉 16列國 중의 최강자가 되게 한 功業은 管仲이 齊 桓公을 보좌하여 건립한 霸業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역주3 正朔相承 : 진정으로 天命을 받아 대대로 서로 이어간다는 뜻이다. 正朔은 帝王이 새로 반포한 曆法이니, 곧 고대 제왕이 易姓革命하면 반드시 正朔을 고쳤다.
역주4 : 四庫全書의 《唐宋八大家文鈔》에는 ‘氐’로 되어 있다.
역주5 慕容垂叛之 : 慕容垂(326~396)는 慕容評에게 꺼림을 받아 苻堅에게 歸附하니 苻堅이 冠軍將軍으로 삼았는데, 慕容垂가 前秦을 배반한 뒤에 中山에서 ‘帝’라 칭하고 後燕을 세웠다.
역주6 旣反國 而姚萇叛之 : 苻堅이 長安으로 돌아온 뒤에 아들 苻睿에게 명하여 中外 軍事를 都督하게 하고, 姚萇을 司馬로 삼아 慕容泓 등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苻睿가 패전했기 때문에 피살되니, 姚萇은 誅殺될까 두려워서 결국 苻堅을 배반하였다. 姚萇은 처음에 苻堅을 섬겨 龍驤將軍이 되고, 前秦을 배반한 뒤에는 자칭 ‘秦王’이라고 하였으니, 史書에서 ‘後秦’이라 칭하였다.
역주7 地分身死 終斃於二人之手 : 《晉書》 〈苻堅載記〉에 의하면 “苻堅은 당시에 천하의 3분 2와 九州의 7을 차지하였다. 苻堅이 淝水에서 패한 뒤에 慕容氏와 姚氏가 지역을 할거하여 ‘帝’라고 칭하였다. 苻堅이 姚萇을 토벌하니 姚萇은 동쪽으로 慕容泓을 이끌어 구원하게 하였다. 苻堅이 五將山에 이르러 姚萇의 장수 吳忠에게 사로잡혔는데, 姚萇이 苻堅을 목매어 죽였다.”고 한다.
역주8 雖滅燕定蜀……下西域 : 太和 5년(370)에 苻堅이 王猛에게 군대를 거느려 보내 燕나라를 멸하고 慕容偉와 慕容評 등을 잡았으며, 楊育은 자칭 ‘蜀王’이라고 하였는데 苻堅의 部將 鄧羌에게 멸망당했고, 苻堅의 장수 苻雅가 仇池를 치니 仇池公 楊纂이 항복하였으며, 苻堅이 姚萇에게 명하여 涼州 張天錫을 치게 하니 張天錫이 姚萇에게 항복하였으며, 苻堅의 장수 呂光이 西域 36國을 討平하였다.
역주9 夷狄之餘 : 苻堅이 氐族이기 때문에 ‘夷狄’이라 한 것이다.
역주10 其滅慕容姚也……凡其舊臣無不疑者 : 《晉書》 〈苻堅載記〉에 의하면 “길이가 10여 발 되는 彗星이 尾箕에서 나와 이름을 ‘蚩尤旗’라고 하는데 太微를 거쳐 東井으로 향하되, 여름부터 겨울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太史令 張孟이 苻堅에게 말하기를 ‘彗星이 尾箕에서 일어나 東井으로 향하니, 이것은 燕나라가 秦나라를 멸할 징상입니다.’라 하고, 따라서 苻堅에게 권하여 慕容暐와 그 子弟를 誅斬하도록 권하였지만, 苻堅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다시 慕容暐는 尙書로, 慕容垂는 京兆尹으로, 慕容沖은 平陽太守로, 姚萇은 龍驤將軍으로 삼아 慕容氏와 姚氏의 부자, 형제의 官位가 조정에 가득하게 하니, 苻融은 이 소식을 듣고 苻堅에게 상소하기를 ‘臣은 듣건대 東胡가 燕나라에서 南面하여 帝라 칭하니, 陛下께서는 이에 六師에게 명하여 크게 군사를 동원해서 燕나라를 征討하소서.’라 했다.”고 한다.
역주11 : 《詩經》에는 ‘商’으로 되어 있다.
역주12 殷之遺孽……反鄙我周邦 : 《書經》 〈周書 大誥〉에 “조금 厚한 殷나라가 크게 감히 그 전통을 세워서 하늘이 위엄을 내렸으나 우리나라에 병이 있어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함을 알고는 말하기를 ‘내 基業을 회복하겠다.’ 하고 도리어 우리 周나라를 鄙邑으로 삼으려고 하는구나.[殷小腆 誕敢紀其敍 天降威 知我國有疵 民不康 曰予復 反鄙我周邦]”라고 보이는데, 곧 조금 커다란 나라를 가지고 감히 이미 망한 전통을 크게 세워 비록 하늘이 殷나라에 위엄을 내렸으나 또한 武庚이 우리나라에 三叔(管叔‧蔡叔‧霍叔)의 疵隙이 있어 민심이 불안함을 알았기 때문에 감히 말하기를 ‘내 장차 殷나라의 基業을 회복하겠다.’ 하고 도리어 우리 周나라를 鄙邑으로 삼고자 한 것이란 뜻이다.
역주13 殷之遺孽 : 殷나라의 後裔. 여기서는 紂의 아들 武庚을 가리킨다.
역주14 多士 : 《書經》 〈周書 多士〉를 이른다.
역주15 康王之命畢公曰……惟玆殷士 : 《書經》 〈周書 畢命〉에 보인다.
역주16 腹心 : 여기서는 조정의 주요한 부문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철(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