其於爲善
엔 如水之必寒
하고 如火之必熱
하며 其於不爲不善
엔 如
하고 如
이니라
공씨孔氏之유서遺書曰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自三代之衰
로 聖人不作
하니 世不知
하여 而馳騁於喜怒哀樂之餘
니라
故로 其發於事業이 日以鄙陋하여 不足以睎聖人之萬一이니라
雖春秋之際나 王澤未竭하니 士生其間하여 習於禮義而審於利病이니라
如
관중管仲안자晏子자산子産숙향叔向之流
는 皆不足以知之
하고 이요 맹자孟子知其一二
하여 時以告人
이나 而天下亦莫能信也
니라
陵遲及於秦漢하여는 士益以功利爲急하고 言聖人者는 皆以其所知臆之니라
儒者流於度數하고 而智者溺於權利하여 皆不知其非也니라
태사공太史公이 始易編年之法
하여 爲本紀世家
열전列傳하여 記
以來
하니 後世莫能易之
니라
한漢경제景무제武之間
에 皆不列於
하니 世能讀之者少
니라
戰國之際
엔 各自著書
하되 或增損古事
하여 以自信一時之說
이어늘 사마천遷一切信之
하고 甚者
는 或採世俗相傳之語
하여 以易古文舊說
이니라
故로 其記戰國有數年에 不書一事者하니 余竊悲之니라
故로 因사마천遷之舊하여 上觀시경詩서경書하고 下考춘추春秋及진秦漢雜錄하여 시황제始복희伏羲신농神農하고 訖진秦시황제始皇帝하여 爲七本紀 十六世家 三十七열전列傳하고 謂之고사古史라하니라
追錄聖賢之遺意하여 以明示来世하고 至於得失成敗之際에도 亦備論其故니라
由數千歲之後로 言數千歲之前하니 其詳不可得矣요 幸其猶有存者도 而或又失之니라
당형천唐荊川曰 前一段은 敍고사古史所載之意요 後一段은 敍作고사古史之由니라
그 사려思慮가 깊었기 때문에 그 뜻이 원대하였다.
도道는 ‘무위無爲’로 종지宗旨를 삼으니, 만물萬物이 거기에 매여 순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선善을 함에 있어서는 마치 물이 반드시 차가운 것과 같고, 불이 반드시 뜨거운 것과 같았으며, 그 불선不善을 하지 않음에 있어서는 마치 추우騶虞가 생물生物을 죽이지 않은 것과 같고, 절지竊脂가 곡식을 먹지 않는 것과 같았다.
전문적으로 학습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고, 특별히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졌다.
속에 쌓인 것이 넉넉하므로 그것을 미루어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함이 있었다.
공씨孔氏의 유서遺書에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발현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현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中’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和’라는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道이다.
중中과 화和를 미루어 극도로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안착되고, 만물이 잘 생육生育된다.”고 하였다.
천지와 만물도 오히려 그를 힘입어 존재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삼대三代가 쇠락衰落한 이래로 성인聖人이 흥기興起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은 그 근본을 알지 못하여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에 방종하고 절제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업상에 발현된 것이 날로 비루鄙陋해져서 족히 성인聖人의 작위作爲를 만분의 일에 도달됨을 바랄 수 없었다.
춘추春秋의 시기에도 선왕先王의 예교禮敎 영향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으니, 선비가 그 시기에 태어나서 선왕이 제정한 예의제도禮義制度를 학습하여 이해관계를 밝게 살폈다.
그런데 관중管仲‧안자晏子‧자산子産‧숙향叔向의 무리 같은 이는 모두 족히 선왕의 예법제도를 알지 못하였고, 공자孔子에 이르러 선왕의 도道를 아는 정도가 지극하였지만 말씀하지 않았으며, 맹자孟子는 한두 가지를 알고 때로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으나 천하 사람들은 또한 잘 믿지 않았다.
쇠퇴衰頹하여 진한시대秦漢時代에 미쳐서는 선비들이 더욱 공명功名과 이록利祿을 추구하는 것을 급한 일로 여기고, 성인聖人의 도道를 말할 경우는 모두 자기가 아는 도道를 가지고 억측하였다.
유자儒者는 법도法度와 규구規矩에 치중하고 지자智者는 권력과 이익에 빠져서 모두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였다.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이 비로소 편년체編年體를 바꾸어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으로 편성하는 기전체紀傳體를 만들어 오제五帝‧삼왕三王 이래의 사적을 기재하였으니, 후세에서 〈그 기전체를〉 바꾸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됨이 천근淺近하여 학습을 하지 않고, 소략疎略하여 경솔하게 믿었다.
한漢나라 경제景帝와 무제武帝 연간에 고문古文의 《상서尙書》와 모장毛萇이 전傳한 《시경詩經》 및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 관학官學에 열입列入되어 교본敎本으로 정해지지 않으니, 세상에서 그 책들을 읽은 자가 적었다.
그러므로 요순堯舜‧삼대三代의 사적을 기재한 것은 모두 진정한 성인聖人의 뜻을 얻지 못하였다.
전국시대에는 제자諸子와 변사辨士들이 각각 스스로 책을 저술하되 혹은 고대 사실을 첨가하기도 하고 산삭하기도 하여 스스로 한때의 설說을 펼쳐놓았는데, 사마천司馬遷은 그 설說을 일체 믿었고, 심한 경우는 더러 세속에서 서로 전하는 말을 채록하여 고문구설古文舊說을 바꾸었다.
그러나 진秦 시황始皇이 서적을 불태운 뒤에는 전국시대의 사료가 이미 민간에 유전된 것이 없었다.
진秦 시황始皇이 자기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미워하여 〈선비들이 읽는 서적을〉 불태워 없앴기 때문이다.
다행히 한두 권 남아 있는 야사野史도 사마천司馬遷이 또한 상세하게 읽어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국시대를 수년간 기재하면서 야사野史에 있는 사건은 하나도 적지 않았으니, 나는 그것을 슬퍼한다.
그러므로 사마천司馬遷의 옛 《사기史記》의 체례體例를 인습하여 위로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보고, 아래로는 《춘추春秋》 및 진한시대秦漢時代의 잡록雜錄을 상고하여 〈편사기간을〉 복희伏羲와 신농神農에서 시작하고 진秦 시황제始皇帝에서 끝마쳐서 7개의 본기本紀, 16개의 세가世家, 37개의 열전列傳을 만들고 이것을 《고사古史》라 했다.
성현聖賢의 유의遺意를 추록追錄하여 후세에 밝게 보였고, 득실得失과 성패成敗의 사이에 이르러서도 그 원인을 상세하게 분석하였다.
수천 년 후에 수천 년 전의 일을 말하려니, 그 상세함을 얻을 수 없거니와 다행히 아직 존재한 것마저 혹시 또 잃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고사古史》를 저작하게 된 동기이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앞의 1단段에서는 《고사古史》에 기재된 뜻을 서술하고, 뒤의 1단段에서는 《고사古史》를 저작하게 된 동기를 서술했다.”라고 하였다.